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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교회가 흔히 묵상하는 시편이 시편 22편입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내내 묵상하셨던 시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시작하는 시편이 바로 22편인데 예수님이 바로 그 구절을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이 구절만이 아니라 시편 22편 전체를 읖조리고 묵상하므로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내셨습니다. 신자가 끔찍한 고난 가운데 있다면 시편 22편을 읖조리면서 그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22편과 짝을 이루고 있는 시편이 시편 69편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몇 주 동안 시편 69편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 두 시편을 옆에 놓고 같이 읽어보면 그 유사성이 곧 바로 드러납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마도 다윗이 지었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노래로 삼아 불렀을 이 시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끔찍한 고난 가운데서 부르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서 노래한 시편들을 자신의 노래로 삼으셨습니다. 이 연결고리를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사 그들의 고난에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를 교제케 하시는 영일 뿐만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영이십니다. 

오늘은 미움받은 한 신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의 깊이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본문에는 미움받고 버림받는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죽기 직전의 자리에까지 내몰린 시인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둘째로, 자기 가족에게마저 낯선 존재가 된 시인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셋째로,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는 시인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1. 죽기 직전의 자리에까지 내몰린 시인

오늘 시편은 시작부터 긴급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급박합니다. 얼마나 급박합니까? 1절에 보니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자기 목에까지 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자기 코에까지 들이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이 서서히 차서 목을 지나 코에까지 들어찼다는 뜻입니다. 코에까지 물이 차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수영을 해 보면 알지만 입에까지 물이 차는 것은 괜찮습니다. 코에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코에까지 물이 들어왔습니다. 코에 물이 들어오면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그 사람은 곧 이어 물 속에 빠져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자신의 온 몸을 향해 물이 차고 들어온 상황이 더 진전됩니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이제 깊은 물에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허우적대지만 힘이 빠져 이제는 물 속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그 물이 얼마나 깊은지 바닥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상황은 물 속에 빠져들어가는 모습과 더불어 수렁, 즉 진흙밭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빠져 나오려고 움직일수록 더 깊이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경우 말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조금 벌어준다는 것 뿐이지 서서히 수렁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이렇게 물속에 빠져들어가는 모습, 수렁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외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 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나이다.” 이렇게 물에 빠져들어간다는 것은 고난의 가장 극심한 경험을 표현하는 길이었습니다. 죽음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인이 왜 이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을까요? 4절에 보니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아니, 이유가 없는 것이 이유입니다.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칼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머리카락보다 많다고 합니다. 과장된 표현일까요? 아니면 사실일까요? 성경에서 머리카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할 때에 사용됩니다. 자기를 끊어버리려고 하는 원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너무 강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처음에 다윗이 지어 불렀다면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끔찍한 일을 겪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내에 발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이방 땅을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나중에 왕이 되었지만 그의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또 다시 발 붙일 곳이 없이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빼앗지 않은 것도 물어주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은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강도취급 당하고 있습니다. 장물업자취급 당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의를 행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것이 오히려 사회에 피해를 끼친 것이라고 매도 당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에서는 같이 불의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같이 불의하게 행동하지 않고 혼자 의로운척하면 그것이 곧 불의한 것이요, 사람들이나 사회에 피해를 끼치는 것으로 낙인 찍힙니다. 내부고발자는 혼자만 정의로운 체하는 밥맛 없는 사람이기에 항상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놀랍게도 시인은 그렇게 대적들에 의해 수장되는 그 아득한 순간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계속되는 고난 가운데서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자신의 목이 쉴 정도로 부르짖었습니다. 구원해 달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다급하면 부르짖습니다. 목이 쉴 정도로 부르짖습니다. 시인도 마찬가지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부르짖었습니다. 시인은 목이 쉰 것 뿐만 아니라 눈도 쇠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오실 것을 목 빼고 바라보았기 때문에 시력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뭔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눈이 아픕니다. 눈이 침침해집니다. 시인은 그의 몸 전체에, 그의 영혼에까지 물이 차고 들어왔는데 그의 목은, 그의 눈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고난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2. 가족에게서도 낯선 존재가 된 시인

이제 시인이 겪은 더 끔찍한 고통, 그의 마음에 새겨졌을 법한 트라우마를 살펴 보겠습니다. 시인은 내적으로 더 큰 상처를 입었는데 그것은 그의 가족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선 5절을 건너뛰고 6절부터 보겠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았던 것은 자기 혼자 구원받겠다는 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구원이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성도들이 신약의 우리보다 훨씬 더 경건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받음이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받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낭패를 보면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이 낙심하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끝내 받지 못하고 그의 결백이 하나님에 의해 확증되지 않으면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수치를 당하면 다른 성도들도 수치를 당합니다. 여러분이 욕을 당하면 다른 성도들도 욕을 당합니다. 교회도 욕을 당합니다. 부담됩니까? 나는 그냥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인데 왜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냐고 말입니다. 부담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의 이 고백이 직분자의 고백이라고 하더라도 신자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인해 다른 신자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 저의 의를 확증해 주십시오. 제가 구원받지 못하면 다른 성도들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구출되지 못하면 교회가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담대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고백하듯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군대를 부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기 백성을 위해 모든 군대까지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자신이 수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대적들을 수장시키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원경험이었던 출애굽 사건을 회상함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고, 애굽의 군대는 그 홍해에 수장된 것을 본 경험 말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을 담대히 구하고 있지만 고난은 계속됩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때문에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깔아 뭉갭니다. 참으로 환하고 밝았던 그의 얼굴에는 이제 수치가 가득 덮였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인의 형제들조차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이 자기를 향해 이방인 취급합니다. 자기를 보고 ‘너 되게 낯설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바라는 자들은 한 배에서 난 형제들에게도 왕따를 당하고, 낯선 존재 취급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가 너희 집안 식구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렇게 가족에게마저 낯선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소위 말해서 출가를 하고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닙니다. 자신이 위대한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떠돌아 다니니까 가족들이 대책회의를 엽니다. 친척들까지 동원됩니다. 저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고 말입니다. 집에 데려와야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몰려 왔습니다. 집에 데려가려고요. 자기 형제들이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냐? 여기 있는 너희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3.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는 시인

이제 시인이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는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다 원수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그것을 나 몰라라 하는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부르짖습니까? 도와달라는 것이지요. 건져달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시인은 자신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고 있고, 부당하게 수장 당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자신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자신은 참으로 죄가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5절은 성경을 묵상하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사람 앞에서는 잘못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4절을 이어받아 자신의 결백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일까요? “제가 진정으로 어리석음을 범하고 죄를 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라는 주장일까요? 아무래도 시인은 자신이 단지 인생일 뿐임을 고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처한 시인은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신은 인생일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친 적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는 무지한 인생일 따름이요, 범죄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다윗이 바로 이 기도를 드렸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 주셔서 영원한 왕권의 언약을 맺자고 하실 때에 자기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이렇게 생각해 주시냐고 황송해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리석다고 고백하셨을까요? 자신은 죄인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을 사시면서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우리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정죄를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예수님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가장 은혜로운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도 예수님의 기도였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말립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자신이 세례를 주겠느냐고요. 예수님은 굳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밀어내시고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잘 살펴보면 주님 자신을 그 병자들, 그 죄인들과 동일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병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쳐주실 때 그들의 몸에 손을 댄 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면 손을 댄 그 사람이 같이 부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둥병자와 같이 부정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의 모든 치유사역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은 죄인들의 자리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없지도 않으면서 죄인의 친구가 되는 것을 극구 피합니다. 사람이라면 어쨌든 자신이 다른 극악한 죄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싶어합니다. 죄인들도 서열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려지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면서 의사가 누구 때문에 필요하냐고 물으십니다. 의사는 병자 때문에 필요하지 않냐고 하셨습니다. 병자가 없으면 주님 자신도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미움받고 버림받은 한 신자가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소리 소문없이 수장될 판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미워하는 모든 자들에게 둘러싸여 공개적으로 가장 큰 수치와 조롱가운데 죽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는 그를 도와주어야 할 동료와 가족들에게마저 외면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신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를 확증해 주지 않으시면 모든 신자들이 같이 낙망하고 욕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단지 인생일 뿐임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무지함과 자신의 죄악을 솔직히 하나님께 아룁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 고백이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공격을 받아 사지로 내몰렸으며, 가족들에게마저 낯선 존재가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시인이 자신은 까닭없이 미워하는 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그렇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민중들의 인기를 반짝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헤롯과 로마당국에게는 제거의 대상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제자들도 동일한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순절에는 고난도 고난이려니와 미움에 관해, 버림에 관해 깊이 묵상해야 할 절기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미워합니까? 누가 여러분을 버렸습니까? 버림받은 느낌,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은 느낌만큼 치유하기 힘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미움받고 버림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시편 22편 1절이 바로 그 처절한 버림받음의 외침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을 가장 깊이 느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사무치도록 느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신자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버림받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 미움받고 버림받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3번 문장처럼 ‘예수님이 (버림)받았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만큼 복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미움과 버림이 난무하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수 같은 이들에게서 당하는 것도 고통스럽겠거니와 사랑하던 이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는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모든 미움과 버림을 대신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미움받고, 버림받는 자리를 기꺼이 처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저희들은 주님이 미움당하고, 주님이 버림받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고난을 참으라고 하면 반발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들은 주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된 것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처럼 의연하게 참을 수 있다고 억지로 흉내내어 보지만 고통과 불만을 더 키우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미움받고 버림받으셨기에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미움받고 버림받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시인이 물 속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을 그려봅시다.
2. 시인이 죽음에 내몰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시인이 자신을 건져달라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4. 시인의 가족이 시인을 어떻게 대합니까?
5. 예수님도 자신이 어리석고 죄 많다고 고백하셨을까요?
6. 예수님의 기적이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셨다는 관점에서 말해봅시다. 
7. 예수님의 미움받음과 버림받음이 나의 구원이 되었음을 묵상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예수님은 가족에게도 버림받았다, 맞습니까?
2. 예수님도 자신의 죄 때문에 기도하셨다, 맞습니까?
3. 예수님이 (    )받았기에 우리가 (    )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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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슬픈 자에게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

    ※ 본 설교는 세월호 참사 관련, 2014년 4월 27일 명덕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 편집자 장희종 목사 대구 명덕교회 담임목사 개혁정론 자문위원 본문: 눅 24:17-20, 31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11번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
    Date2014.05.28 By개혁정론 Views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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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밥상을 위한 기도(시 69:19-29)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본 설교는 금년 4월 13일에 온생명교회에서 수행되었습니다 - 편집자 주) 우리가 사는 삶에 있어서 먹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건강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도 잘 먹는 것입니다. 잘 먹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
    Date2014.05.04 By개혁정론 Views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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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주를 위해 받은 욕(시 69:7-18)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명예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비방이 큰 문제가 됩니다. 십계명에 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잘못된 풍문...
    Date2014.04.30 By개혁정론 Views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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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버림받은 자의 기도(시 69:1-12)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교회가 흔히 묵상하는 시편이 시편 22편입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내내 묵상하셨던 시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
    Date2014.04.29 By개혁정론 Views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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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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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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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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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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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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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