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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

 

 

[74회 고신총회 소식 8] 동물 장례, 교회의 사역이 아니다

 

 

   고신총회는 동물 장례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절하지 않으며,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를 그대로 받았다.

   지난 73회(2023년) 총회는 경남김해노회가 질의한 2가지 질문, (1) 반려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 입장이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2) 목회현장에서 동물에 대한 장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에 대해 두번째 질문은 “기독교 장례식은 예배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므로 목회현장에서 동물에 대한 장례 예식은 할 수 없다.”고 보고했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반려 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은 신학위원회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서 1년간 연구하여 보고키로” 했다. 

   이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74회 총회는 유안건으로 보고서를 받아 그대로 채택했다. 보고서 전문은 아래에 있다.

 

 

관련기사: http://reformedjr.com/1677066 (73회 총회 결정)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1. 총회 질의

 

경남김해노회장 이수재 목사가 청원한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는 다음의 두 가지 내용에 대한 것이다.

 

첫째, 반려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 입장이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둘째, 목회현장에서 동물에 대한 장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2. 반려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은 어떤 입장이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2.1. 인간과 반려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과 동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고유한 가치를 부여받았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반려동물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알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찬송하는 것을 돕는 것에 있다.[1] 이 관계성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반려동물을 학대하지 않고 청지기로서 돌본다.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동물 장례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절하지 않으나 목회적 관점에서 상실을 겪은 성도에 대한 돌봄은 유익하다.

 

2.2.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

우선 7일 창조 기사(창1:2-2:3)를 보면, 땅의 동물과 사람은 제6일에 창조된다. 사람과 동물은 모두 생명체(네페쉬 하야)로 지어졌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창1:26-28).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로 세움 받았음을 의미한다.[2] 인간은 왕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을 돌보고 다스리는 왕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는 동물을 포함한 피조물들이 인간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다스림은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창2:19).

사람과 동물의 이런 구별은 창세기 2장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2장 19절에서 ‘동물’은 하나님이 단순히 흙으로 지으셨다고 기술하지만, 2장 7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생명의 숨])를 코에 불어 넣으셔서 생령(네페쉬 하야[생명체])이 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숨을 사람에게 전수”하신 것으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부여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3] 동물에게는 이 부분, 즉 하나님의 생기가 결여되어 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된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세운 왕적 존재인 인간에게, 땅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뿐만 아니라(창1:29) 대홍수 심판 이후에는 산 동물을 양식으로 주신다(창9:2-3). 반면, 사람의 피는 흘려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시는데, 그 이유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라 명시한다(창9:6). 형상은 “그 소유자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기에, 인간의 피 흘림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죄를 짓는 심각한 범죄가 된다.[4]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비록 하나님이 산 동물을 양식으로 허용하셨지만 우리가 짐승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점이다. 동물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짐승의 피를 먹지 않음으로 짐승의 생명을 존중”하라고 명하신다(창9:4).[5] 또 대리 통치자로서 인간은 동물을 포함한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과 태도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닮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을 학대하거나 괴롭혀선 안 되며, 하나님이 피조물을 기뻐하시고 아끼시는 것처럼 우리도 동물들을 그렇게 대할 의무가 있다(참고. 욥38:39-39장, 시104장, 욘4:11). 피조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생명을 잘 보존하고, 혹 식용을 위해 이용할 때도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된 인간은 동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과 확연히 다른, 특별한 창조 목적을 부여받는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고전6:19),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도록 초청받는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말씀(율법)을 주시며, 명령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신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징계하기도 하신다(히12:10). 동물에게는 그런 특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특히 피조 세계의 왕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며 타락했을 때, 인간의 다스림 아래 있는 온 피조물이 함께 고통받는다(창3:17-19; 롬8:19-22). 예를 들어, 창세기 6-9장은 인간의 반역 때문에 동물을 포함한 피조물들이 대홍수 심판 때 함께 심판받음을 묘사한다(참고. 렘7:20, 21:6; 겔14:12-13, 17). 역으로 인간의 구속이 완성되는 종말에는 피조 세계가 함께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롬8:18-25, 계21:5).[6]

   구속사의 관점에서도 그 초점이 사람에게 있다. 성자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또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를 “믿는 자”는 구원받아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에 이르게 된다(요3:16-18). 또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첫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시고, 인간이 본래 가졌던 통치권을 회복하게 하신다(단7장, 롬5장 등). 나아가 하나님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이끄시고, 그리스도께서 ‘맏아들’로서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회복되게 하신다(롬8:29, 고후3:18, 골3:9-10).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도를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롬8:29-30).

요컨대, 사람과 동물은 모두 생명체로 지어졌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왕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구속은 일차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구속과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부활을 강조한다. 인간은 죽음 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영원한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계20:12-21장). 반면, 성경은 동물의 사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죽음 후 사라지는 것으로 기술한다(시49:12).

 

2.3.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 대한 교의학적 근거: 공교회 전통과 칼빈의 이해

1) 공교회 전통

(1)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y of Nyssa, c.335–c.395)

4세기 교부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교부시대의 인간 창조에 대한 첫 단행본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창조에 관하여』(De opificio hominis)[7]에서 창조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모세가 기록한 창조 순서를 중요하게 다룬다. 이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설명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신 이유는 인간이 세상의 놀라운 것들을 ‘지켜보는 자’와 ‘다스리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을 즐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능력을 찾고 즐기도록 하시기 위함이다.[8]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찾고 즐기기 위해 인간은 몸(σῶμα)과 영혼(ψυχή)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즐기기 위해 감각적 몸이 필요하며, 세계를 통해 지성적 실재인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영혼이 필요하다.[9]

셋째,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생장적 능력, 감각적 능력, 그리고 지성적 능력을 모두 지니고 있다. 생장적 능력은 식물의 것으로 감각적 능력은 결여한다.[10] 감각적 능력은 동물적이다. 동물은 식물처럼 생육할 뿐만 아니라 감각할 수 있다.[11] 이 두 가지 능력에 더하여 인간 영혼은 지성적 능력을 갖춘다.[12]

다섯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1:26) 이것은 형상인 인간이 원형인 하나님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치 거울이 사물을 반영하는 것과 유사하게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13]

여섯째,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인간은 영혼과 몸의 신비한 결합체인 전인이다. 먼저 인간은 다른 무엇에 의존하거나 지배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덕을 갖춘 지성적 영혼이다.[14]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을 실현한다. 영혼과 신비로운 결합을 이루고 있는 몸은 지성적 영혼에 의해 다스려질 때, 형상의 형상으로서 아름답다.[15]

 

인간 창조에 대한 그레고리우스의 이해로부터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그의 생각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만이 지성적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영혼과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하나님 형상의 형상으로 아름답게 되는 몸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성적 영혼과 이에 결합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닮아가고 거울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피조물에게 드러내는 것에 있다. 

셋째, 인간이 동물을 포함한 만물을 지켜보고 다스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능력을 찾고 즐기기 위함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특권이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과 위대함을 찬송하도록 돕는다.

 

(2) 어거스틴 (Augustine of Hippo, 354-430)

어거스틴도 인간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그레고리우스와 유사한 의견을 피력한다. 어거스틴에게 인간 지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인간 지성이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닌다는 것이다.[16] 지성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지성, 지성의 자기 이해, 그리고 자기 사랑이라는 삼중성(trinitas)이 나타난다. 지성의 삼중성이 원형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imago)이다. 둘째, 인간 지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역동적 측면이 있다. 지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수용할(capax) 수 있고 하나님께 참여(participatio)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17] 이 두 측면 중 어거스틴은 두 번째 측면이야말로 지성이 하나님의 모상으로서 위대함을 드러낸다고 강조하였다.[18]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지성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다.[19] 지성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신을 비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모상이 되는 것을 그치지 않고 쇄신되며 불행에서 행복으로 옮긴다고 말한다.[20]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로 확장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율법과 성경의 완성이 사랑임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은[21] 사랑의 질서(ordo amoris) 혹은 사랑의 규칙(regula dilectionis)에 따라 하나님과 창조물을 구분하면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22] 사랑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23] 하나는 향유(frui)이다. 향유는 어떤 사물 그 자체 때문에 그 사물에 애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두 번째의 사랑은 사용(uti)으로서의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향유해야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 외의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사용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내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은 모두 행복 자체인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24] 사용이 있다면 남용 혹은 오용이 있다. 하나님만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고 모든 피조물을 사용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만, 이 사랑의 질서를 지키지 않고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향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사랑은 남용이고 오용이다.[25]

약술한 어거스틴의 인간과 창조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해로부터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첫째, 그레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은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존재론적으로 구분된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지성의 삼중성과 같은 구조적 측면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닮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은 타인과 여타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은 하나님만을 ‘향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랑이다. 인간은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기 위해 동물을 ‘사용’하며 사랑한다. 하나님을 향유해야 한다는 사랑의 질서에서 동물뿐만이 아니라 이웃도 하나님과 동등한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다. 

 

(3) 보나벤투라 (Bonaventura, 1221~1274)

현대 동물신학자들은 중세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226~1230)의 생태적 영성을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으로 전용하고자 한다. 총회 질의서 ‘질의 배경 6’에서도 천주교의 반려동물 축복예식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의 신학을 언급하고 있다.[26]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대변한 보나벤투라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동물의 창조론적 차이는 앞서 살펴본 두 교부와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보나벤투라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영원하신 지혜(로고스인 성자 하나님)로 만드셨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피조물이 영원하신 지혜의 모상임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우주 속에 조금이라도 그분을 닮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27]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음에 동등한 것은 아니다. 보나벤투라는 만물이 하나님의 모상이지만, 피조물을 그 안에 있는 흔적(vestitium), 형상(imago), 그리고 유사상(similitudo)의 등급으로 구분한다. 하나님 흔적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다 발견되고, 하나님 형상은 영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들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유사상은 오직 하나님과의 닮음을 온전하게 갖춘 존재들에서만 발견된다.[28] 따라서 인간과 동물 모두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의 모상이지만, 동물 안에는 하나님의 흔적만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은 없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은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 유사상이 되어야 한다. 프란시스코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보나벤투라는 인간과 동물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한다.

보나벤투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어거스틴을 따라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첫째, 인간이 지닌 구조적 측면이다. 인간에게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29] 둘째, 하나님 형상의 역동적 측면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과의 유사상을 지닌 존재가 되어간다.[30] 구조적 측면은 역동적 측면을 위해 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 형상의 역동적 측면을 상실하여 하나님을 닮아가지 않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동물이나 다른 피조물들처럼 하나님의 흔적만 있는 존재가 된다.[31]

더욱이 보나벤투라는 우주에서의 인간 중심성(medietas)을 강조하였다.[32]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지성 안에서 우주를 집약적으로 인식하고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우주를 압축해 가진다. 또한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은 인간의 지성을 통해 질서 있게 되고, 이로써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께로 인간을 통해 향하게 된다. 이를 위해 피조물은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종속돼 있다.

약술한 보나벤투라의 인간론과 창조론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그레고리우스와 어거스틴의 견해와 유사하다.

첫째,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지혜로 창조하신 인간과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흔적이 발견되는 하나님의 ‘모상’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닮아가도록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imago)임에 반해, 동물은 흔적(vestitium)이다. 인간과 동물은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기억과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구조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되어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을 닮지 않을 때, 인간은 동물과 같이 형상이 아니라 흔적이 된다. 

셋째, 인간은 동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동물은 인간에게 종속되었다.

 

2) 존 칼빈 (John Calvin, 1509~1564)

인간과 창조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지금까지 서술한 공교회의 정통적인 이해를 계승하면서 인간의 독특한 가치와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성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 계시의 영역이다. 칼빈에게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계시의 두 번째 책에 포함되는 가치를 지닌다.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가장 영광스러운 극장”이다.[33] 이 극장에서 하늘에서부터 땅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있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 모든 피조물이 각각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34] 하나님의 창조는 섭리로 확장된다. 동물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한순간의 창조주가 아니라, 계속하여 창조주로서 창조 세계에 개입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참새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신다.[35]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보살피심 아래에 있다.[36]

칼빈은 하나님의 계시 방편으로 동물을 포함한 자연의 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창조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도 강조한다. 칼빈에게도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영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특히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지성과 선을 선택하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영혼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37] 인간은 하나님 작품 중 가장 탁월한 작품이며, 온 우주는 무엇보다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38] 하나님은 인간의 음식으로서 새와 동물들을 주셨다. 

그렇다고 칼빈의 인간 중심적 창조론이 동물에 대한 인간의 학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간의 필요를 위해 동물을 주셨고 인간이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셨지만,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이 동물을 돌볼 것을 명령하셨다.[39] 더욱이,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극장으로서의 창조 세계를 강조하면서 칼빈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새들과 하나님을 향해 떠들어대는 동물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놀라운 행적들을 지켜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40]

약술한 칼빈의 창조론과 인간론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자연이 하나님의 계시의 두 번째 책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극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자연 안에 있는 인간과 동물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창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영혼(지성과 의지)과 몸을 가진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필요를 위해 동물을 주셨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

셋째, 인간 중심적인 창조 이해가 동물을 학대하며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동물을 보살피기를 원하시며, 무엇보다 동물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놀라운 능력을 찬송하기를 원하신다.

 

3) 공교회의 전통과 칼빈의 이해 요약

지금까지 살펴본 인간과 동물에 대한 공교회의 전통과 이를 계승하는 칼빈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공교회의 전통과 칼빈은 인간과 동물의 존재론적 차이를 철저하게 견지하고 있다. 영혼과 몸의 결합으로 구성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동물에게도 하나님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한 프란치스코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보나벤투라도 동물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분명히 구분한다.[41] 

둘째, 공교회의 전통과 칼빈의 창조론은 인간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새와 동물을 인간의 필요를 위해 주셨고, 인간이 음식을 위해 사용할 권리가 있음을 말하였다.

셋째, 인간 중심적 창조론이 동물을 학대하는 지배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과 다른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즐기며 찬송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는 방편으로서의 인간 중심적 창조론이다. 

넷째, 동물의 가치는 사용으로서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어거스틴에게 동물은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나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으로서 사랑의 대상이다. 이웃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듯이,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계시 방편으로서 새와 동물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게 한다는 칼빈의 생각은 어거스틴의 견해와 동일하다.

 

2.4. 현대의 동물신학의 기여와 문제점

상술한 공교회의 전통과 칼빈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동물장례와 관련하여 반려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이해를 재차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현대의 동물신학의 발전이 인간과 동물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본 보고서는 아래에서 현대 동물신학의 주장, 기여, 그리고 신학적 문제점을 총회 질의서의 질의 배경에 언급된 학자들과 글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1) 앤드류 린지의 동물신학: 인간중심중의적 서방 기독교 신학 비판

영국국교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앤드류 린지는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동물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그의 저서들 중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Creatures of the Same God, 대장간, 2014)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인 장윤재에 의해 국문으로 번역되었다.[42]

린지의 동물신학은 근대 이후 인간중심주의로 발전한 서방 기독교 신학에 대한 비판이다. 린지의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을 종적으로 구분하고, 그 차이를 이성적 능력의 유무에 기초하여 이성적 능력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중심주의적 신학은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인간중심주의적 창조 이해는 동물을 학대(cruelty)하는 인간의 지배권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학대(cruelty)는 ‘지각이 있는 생명체에 의도적으로 가한 고통’을 의미한다.

 

(1) 창조론

동물 학대로 이어지는 인간중심주의적, 혹은 인간 우월적 창조 이해에 대해 린지는 창조론적 관점과 기독론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먼저 창조론의 관점에서 린지는 동물을 지배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며 인간의 동료 존재로 보아야 함을 주장한다. 린지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창조 세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생명에 대한 경탄을 강조한다.[43] 이런 경탄은 동물이 인간의 동료 생명 혹은 동료 존재임을 보여준다.[44] 이때, 인간은 ‘다스리는 종’이 아니라 ‘섬기는 종’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땅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은 유일한 종이기 때문이다.[45]

린지에게 죄는 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료 피조물을 버리고 자기 안으로 퇴각하여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지는 것이 죄다.[46] 이런 자기중심성은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 섭리하시고, 그 섭리의 틀 안에서 동물은 오직 인간이라는 종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창조론을 만든다. 이것을 린지는 동물의 존재론적 목적이 인간의 존재론적 ‘필요’와 일치한다는 ‘위(胃) 중심주의적’ 신념이라고 비판한다.[47]

인간중심주의적 창조론에 반대하면서 린지는 하나님께서 동물에게 주신 권리(theos-rights)를 주장한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으며, 동물 권리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동물의 권리는 하나님이 동물에게 주신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48]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존재들을 살리시고 붙드시며 그들의 고유한 창조 본성을 존중하시고 고양하신다. 린지에게 동물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린지는 동물이 인간에게 어떤 효용과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인간 중심적이고 공리주의적(utilitarian) 견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49] 인간과 동물을 이성적 능력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종차별주의도 무의미하다.[50] 인간적 이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그 고유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대상으로서 권리를 가진다.

 

(2) 하나님의 형상과 기독론

인간중심주의적 창조론에 반대하며 동물의 신적 권리를 강조한 린지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기독론적으로 확장하여 윤리적 의미를 전환시키고자 시도한다. 린지는 창세기 1장 26~28절이 동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 지배권의 정당화에 이바지해 왔음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창세기 전체 문맥에서 지배권의 정당화를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봉사자 역할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닮아가며 창조 세계 속에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51] 이때, 인간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힘은 ‘카타바시스’(katabsis), 즉 겸손과 희생적 사랑이며,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고통 안에서 표현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주권이 의미하는 것은 섬김이다.”[52]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고통에 동참하고 섬기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 인간종의 특별한 가치라는 것이 린지의 주장이다.[53]

 

(3) 국내 신학계의 동물신학 수용

 

A. 장윤재의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 (신학사상, 171 [2015]: 67~104)[54]

 

앤드류 린지의 저서를 번역한 장윤재는 린지의 동물신학을 소개하고 신학적 타당성을 개진하는 논문인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를 발표하였다. 장윤재는 생물학과 철학, 예술, 그리고 한국의 전통 사상으로부터 린지의 비판과 주장을 옹호한다. 그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물학은 동물에게 자의식(self-consciousness)과 지각(sentiency)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임을 증명하였다.[55]

둘째,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인간과 동물의 차별성을 동물의 ‘인간적 능력 결핍’에서 찾고자 한 서구 철학에 대해 반대하면서, 인간이 인간 중심적으로 자신과 동물을 구별하면서 스스로를 규정해 온 것(auto-biography)을 넘어 ‘얼굴’을 가진 인간 타자의 시선에서뿐만 아니라(레비나스), 동물 타자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해야 함을 주장하였다.[56]

셋째,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인간의 몸 중 특히 얼굴을 자신의 회화에서 지움으로써 얼굴로 상징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성을 제거하였다. 대신, 감각, 특히 촉각을 회화의 주제로 삼으면서 인간과 동물이 다를 게 없음을 보여주었다.[57]

넷째, 성 프란치스코의 생태적 영성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도, 만물의 폭군도 아님을 보여준다. 만물 평등주의의 생태적 영성은 고려 중기 문인인 이규보의 ‘만물인류’ (萬物一類) 사상, 조선 전기의 김시습의 ‘여물’(與物) 사상, 그리고 실학자 홍대용의 ‘인물균’(人物均) 사상과 맥이 같다.[58]

 

B. 이창호의 “린지의 동물신학 탐구와 비평적 대화 모색 몰트만, 마우, 스택하우스를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윤리 55 [2023]:37-75)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인 이창호는 자신의 논문에서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 생태 신학, 리차드 마우의 신칼빈주의적 창조와 구원 이해, 그리고 스택하우스의 하나님 형상 이해를 연구하며 린지의 동물신학과 비판적 대화를 전개하였다. 연구의 결과로써 이창호는 동물 신학과 윤리 담론의 성숙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를 제안하였다.

첫째, 인간과 동물을 포괄하는 신중심적 관점을 중시해야 한다. 동물의 존재론적 지위와 의미를 인간과의 관계성에서 목적과 수단, 지배와 피지배, 중심과 주변부 등 위계적 이분법적 틀로 접근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구원의 우주적 지평 가운데 이해해야 한다.

둘째, 창조와 섭리의 틀 안에서 동물의 신학적 의미를 심화해야 한다. 시편 104편과 119편은 인간 중심적 창조신학과 거리가 멀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 형상의 관계론적 해석을 강화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은 ‘닮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온전한 사귐을 현실화하는 것을 생태적으로 확장하여 온전한 사귐을 닮는 것이 동물과의 사귐을 포함함을 강조해야 한다.

 

C.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신학의 영토들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서울: 비아, 2023], 738-752)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인 김진혁은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미국 루터교신학교 실천신학 교수인 앤드류 루트(Andrew Root)의 저서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59]를 다룬다. 이 서평은 린지의 저작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회 질의서 질의 배경에 이 서평이 언급되어져 있으며,[60] 앤드류 루트의 반려견에 대한 신학적 주장이 린지의 동물신학과 일맥상통하기에 본 보고서는 서평에서 드러나는 반려견에 대한 동물신학의 주장을 다음의 다섯 가지 주장으로 정리한다.[61]

첫째, 인간 중심적 기준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개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혹은 ‘개는 원죄가 없기에 구원의 은혜를 받을 대상이 아니다’ 식의 주장은 인간중심주의에 오염된 신학이다.[62]

둘째, 반려견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다른 동물에 대한 일반적인 신학적 연구를 넘어 인간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개만의 특성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63]

셋째,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개만의 특성은 인간과 영적인 친밀감 혹은 영적 교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신학에서 인간을 설명할 때 ‘영혼’이라는 추상적인 명사보다 “심오한 관계성의 자각 또는 만남”을 의미하는 ‘영적’이라는 형용사가 더욱 중요하다.[64] 영적 교감은 “다른 것,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배우자든, 친구든 그들과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깊은 의식”이다.[65] 개는 인간과 영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동물이다.

넷째, 인간과 영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동물인 개는 인간에 대한 애교와 상냥함으로 창조자가 부여한 인간의 가치를 증언한다.[66]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지만, 견공은 인간과 교감하며 상냥함, 단순함, 활기참을 보임으로써 인간됨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이바지한다.[67]

다섯째,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사랑하시고, 또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분이시기에, 확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천국에서도 영적인 존재인 개를 볼 수 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68]

 

(3) 린지의 동물신학과 그 수용 요약

상술한 앤드류 린지의 동물신학과 이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국내외 신학자들의 주장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근대 이후 강화된 창조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적, 인간 우월적 이해를 비판한다.

둘째, 이성적 능력의 결핍에 근거한 인간과 동물에 대한 근대 철학적 구별을 비판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의식과 지각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동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고유성을 선물 받았기에 신적인 권리(theos-rights)를 지닌다. 동물의 가치를 인간의 필요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넷째,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다스리고 지배하는 종이 아니라 동물과 다른 피조물에 봉사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섬김의 주권을 본받는 것이다.

다섯째, 동물, 특히 반려견은 인간과 영적 교감을 할 수 있다. 이로써 반려견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타인에 의해 상실되었으나 창조주가 부여한 인간의 가치를 증언하고, 인간이 더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돕는다.

 

2) 동물신학의 기여와 문제점

 

A. 동물신학의 기여

앤드류 린지의 동물신학과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국내외 신학자들의 견해는 네 가지 신학적 기여를 하고 있다.

첫째, 근대 이후 강화된 인간중심주의적(인간 우월적) 창조 이해가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 동물학대의 근거가 될 만큼 왜곡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둥물신학의 기여이다.

둘째, 인간에 대한 이성 중심적 사고에 대한 재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동물신학은 오직 이성적 능력의 결핍으로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창조 이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이성 중심적 이해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에도 유해함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단지 이성적 능력만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전인격적 이해의 중요성을 동물신학은 지지한다. 

셋째, 동물신학은 공리주의적 윤리를 탈피하게 돕는다. 동물신학은 동물을 인간의 필요, 특히 단지 ‘위(胃)’를 위한 필요에 귀속시키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이를 통해 동물신학은 현대 사회가 심지어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도 공리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지 않는지 문제를 제기한다.

넷째, 동물신학은 인간됨 자체의 가치를 증언하고자 한다. 동물신학은 반려견이 인간과 영적 교감을 함으로써 인간을 다른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고, 창조자가 부여하신 인간의 가치를 그대로 증언할 수 있음을 중요하게 다룬다.

 

B. 동물신학의 교의적 문제

요약한 동물신학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창조에 대한 교회의 전통과 칼빈의 이해를 살펴볼 때, 동물신학은 다음과 같은 교의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동물신학은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칼빈이 강조하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무시한다. 동물신학은 전통적인 창조론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유무를 기준으로 인간과 동물의 종차별을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교회의 전통과 칼빈은 단지 이성적 능력의 유무의 기준으로 인간과 동물의 종차별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준은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만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과 동물은 충분히 구분되어야 한다.

둘째, 인간과 동물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성급한 비판으로부터 동물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전통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관점의 풍성함을 잃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단지 이성적 능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역동적이다.

셋째, 동물신학은 근대 철학의 인간중심주의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성급하게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하나님 형상의 전통적 이해는 근대 철학과 달리 인간의 청지기로서의 직분을 항상 강조해 왔다.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마치 거울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반사해야 하는 인간은 창조 세계 안에서 청지기로서의 탁월한 가치와 중차대한 책임을 지닌다. 섬기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한 린지의 강조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넷째, 동물신학은 인간과 동물 간의 상호 관계성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퇴색시킨다. 동물신학이 인간은 동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종임을 강조하지만, 섬김의 신학적 목적에 대한 숙고가 없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외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반려견이 인간의 가치를 증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물신학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섬김의 목적이 도리어 인간 중심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과 칼빈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포악한 지배를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물과 피조물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방편임을 강조한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인간이 동물을 ‘사용’의 방식으로 사랑하여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다.

다섯째, 반려견과 인간의 영적 교감을 말하는 동물신학은 마치 개와 같은 동물이 인간과 동일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69]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며, 공교회의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도 아니다. 비록 교의사에서는 동물에게 생장과 감각을 주관하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면서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이 능력 혹은 영혼이 인간의 영혼과 동일하다고 이해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영혼에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피조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찬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여섯째, 동물신학은 육식을 동물 학대와 동일시 한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육식을 명하신 것과 동물 학대를 동일시 하지 않는다.[70]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먹거리를 위해 동물을 허락하신 것과 동물 학대를 구분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칼빈의 이해이기도 하다.

 

 

3. 목회현장에서 동물에 대한 장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3.1. “개혁주의 신학에서 장례란 오직 사람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장례라 함은 동물과 구별된 사람을 위한 예식이다. 성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1645)은 사람의 장례식과 죽은 사람의 친구나 친척을 위한 위로를 말하고 있을 뿐 동물의 장례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장례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생기 곧 영을 부여받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물론 죽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과 타락에서 비롯되었고, 같은 피조물인 동물 역시 함께 죽음의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은 죽음 후 심판과 부활을 경험하며 사후 세계를 맞이하지만, 동물의 사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생을 얻지만 동물이 천국에 간다는 말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장차 동물의 본성이 메시야의 강림과 더불어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야수성과 독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은 있지만(사11:6-8) 동물의 영생은 약속된 것이 없다.

장례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심판이든 생명이든 영생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성경과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기독교의 장례는 오직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장례는 죽은 자의 공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족의 위로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유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말씀을 상고하고 위로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장례는 원래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 가정과 국가의 일이었으며, 장례의 주도권 역시 가족이 결정한다. 교회는 그런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장례를 돕는 역할을 해왔다.[71] 그러나 만일 “목사가 참석하였으면, 그런 경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자주 찾아 그들의 상처를 씻고 그들이 맡겨진 의무를 잘 이행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요청되었다(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 

비록 죽는다는 사실 자체는 인간과 짐승 사이에 차이가 없으나(전3:18-19), 믿음을 가진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사후 인간의 영혼은 죽음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전3:21). 더욱이 경건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신다(시116:15). 그러므로 성도가 인간을 위한 장례식 외에 반려동물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동물을 위한 장례예식을 교회가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교회 사역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3.2. “동물의 죽음이 일으키는 슬픔은 가식이 아니다

생활과 문화의 변천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가정 안에서 동물을 기르면서 보호하고 위로를 받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다. 나단 선지자도 다윗왕에게 말한 책망의 비유에서 가난한 사람이 기른 암양 새끼 한 마리가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다”고 말했다(삼하12:3). 인간이 동물을 가족과 같이 여기는 습관은 이미 다윗왕의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그런 사람의 동물을 약탈하여 빼앗는 것은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는 중대한 범법행위였다(삼하12:6).

잃은 양을 찾은 목자도 양을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을 모아 함께 기뻐하였다(눅15:5-6).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성경 시대에도 사람의 일상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나님 역시 범죄한 니느웨를 아끼셨는데, 그 이유 가운데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 십이 만여 명(의 사람과 많은) 가축”때문이다(욘4:11). 동물들 역시 창조 때부터 “보시기에 좋았”던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창1:21), 아담을 통해 이름을 지어 부르기를 기뻐하셨던(창2:19) 대상이다.

특히 극도로 개인화된 오늘날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우울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안내견이 되며, 공공의 장소에서는 위험을 감지하는 예보장치가 되어 주는 동물의 존재는 인간에게 매우 유익하며 요긴하다. 동물이 이제 단순한 생물 이상으로 한 가족 혹은 한 개인의 동반자로 사랑과 애정을 독차지하기도 하고, 또 사람의 개인적 생활공간인 가정과 주택, 때로 침실까지 들어옴으로써 접촉과 교감의 시간이 많아졌다. 그 결과 동물이 마치 평생의 동반자처럼 여겨져서 ‘반려동물,’ ‘반려견,’ ‘반려묘’라는 이름이 대중화되었다. 동물들은 산책이나 대화를 비롯한 일상생활의 동반자가 되었다. 때로 동물은 외로운 독거인, 가족과 가족, 가족과 이웃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기에 그 긍정적인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현장에서 성도들의 동물과의 동반생활이나 깊은 유대관계는 더는 조롱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외로운 삶의 친구가 되고 대화의 상대가 되며 주인의 정서에 교감하듯 반응하는 ‘가족 같은’ 동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소통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

수년에 걸쳐 서로를 함께해 온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주관적으로 특별한 반면 동물의 죽음과 함께 자칫 정서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슬픔을 안겨다 줄 수도 있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해 온 동물에 대한 추억은 생각보다 깊고, 그 슬픔은 다른 어떤 상실 못지않은 고통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라 하더라도 돌보던 동물이 죽었을 때 감정적으로 사람의 사별과 비슷한 슬픔의 증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물의 죽음 역시 격정과 격통을 일으킬 수 있으며, 정서적 관계의 깊이에 따라 슬픔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고작 한 마리의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 아들(딸)같은 존재의 상실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동료 성도들은 그들이 겪는 정서적 슬픔에 대해 “별 것 아닌 것으로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권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주관적으로 그들의 애정과 정서적 애착이 오랜 시간 강하게 이어져 온 결과라면 죽음에 의한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개인에 따라 이전 대상을 잊거나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얻기까지 동물과의 이별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비록 성도가 동물을 위한 장례식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에 위로를 요청한다면 심방이나 목양적 차원에서 성도를 돌아보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어떤 경우의 상실이든 그것은 성도의 마음에 충격과 슬픔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잃은 양 비유에서 잃은 양을 다시 찾은 것은 그 벗과 이웃이 함께 즐거워할 만한 일이었던 것처럼(눅15:6), 가족처럼 여긴 동물의 죽음을 경험하는 성도의 마음과 영혼 역시 이웃의 참여와 위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평소 함께 사는 동물에 대한 관심은 성도와의 우호적인 관계와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상실을 겪는 성도의 마음과 형편을 살펴 심방하는 것은 교회 출석과 믿음을 격려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장례식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듯 위로 역시 죽은 동물을 위한 어떤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을 고양해야 할 성도들의 상실의 슬픔을 같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상실을 겪고 있는 성도 가족들의 마음을 묻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은 상실을 받아들이고 상실의 감정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삶을 재정비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목양적 행위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동물 사후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으나, 혹 심방이 필요할 정도로 낙심한 사람이 있다면 목회자는 성도의 정서적 형편을 살펴 묻고, 사체가 잘 처리되었는지, 반려동물과의 기억과 상실 이후의 어떤 것을 경험하고 있는지 말하도록 격려하고 적절하게 경청해야 한다.

 

3.3. “동물의 사체는 합법적으로 처리하며 죽은 동물에 대한 기억은 함께 나눌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은 가벼이 취급되지 않고 예법에 따라 처리한다. 그에 비해 동물의 사체는 사회적으로 폐기물로 여겨지며, 동물병원에서는 의료폐기물로 취급된다. 동물의 사체는 함부로 매장되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화장 처리해야 하고, 폐기물관리법 제2조에 따라 동물병원, 동물장묘업체에 의해 수거, 처리될 수 있다.

동물 사체의 처리는 가족의 선택이며 책임이다. 반드시 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되 동반 가족들이 있다면 가족이 동의하여 결정하고 처리해야 한다. 거기에 동물을 위한 불필요한 신앙 의식이 포함되어서는 안 되며, 다만 상실의 상황을 힘들어하는 가족을 돌보고 위로하는 것은 필요하다. 슬픔의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개인마다 정도가 다를 수 있으나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의 지지와 정서적 후원이 있다면 빠르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죽음과 달리 동물의 경우에는 비슷한 다른 동물에 의해 다시 위로받고 슬픔을 잘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개인과 가족이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결정할 문제이므로 가족에게 맡기되 줄어들지 않는 비탄의 감정이나 지속적인 슬픔이 있다면 전문 기독교 상담자에게 의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동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도 자신의 연관된 정서적 어려움을 말해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하지 않고서도 동물의 죽음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 죽은 동물에 대한 기억을 가족들이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죽음 이후 가족들을 돌보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각자의 기억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히 죽은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들의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고, 상실 이후 가족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다. 그 과정에 깊은 상실의 슬픔도 완화될 수 있고 불안한 마음도 위로될 수 있다. 애착하였던 동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가족들이 서로를 위로함으로써 동물의 상실을 계기로 성도들은 오히려 가족관계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3.4. “동물을 아끼고 보호할 수 있으나 동물 자체에 대한 지나친 권리 요구는 비성경적이다

오늘날 동물의 가치나 권리에 대한 과도한 요구는 성경의 원리에 위배된다. 동물신학의 창시자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는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동물의 의미를 반대하며 동물권(animal rights)이란 용어 대신 ‘신적 권리’(theos-right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어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동물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을 먹이시는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이지만(마6:26), 동물에 대한 다스림의 의무와(창1:28)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다(창9:3).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동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셨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린지는 또한 동물이 인간에 대하여 도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런 권리가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의 가치인 사랑과 희생을 증진하지는 못하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취약한 동물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실천을 통해 관대함의 원칙(the principle of generosity)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신학의 원칙 즉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맞닿아 있는 사상으로서, 동물을 물건이나 사물이 아닌 인간의 ‘동료 피조물’(companion)이라 주장하며, 동물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식습관조차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다른 종교에서처럼 동물을 종교적으로 축복하고, 동물에게 성례를 집전하며, 동물이 죽었을 때 장례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을 떠난 해방을 추구하는 해방신학적 시도이므로 신학적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배려하기보다 자기의 동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아울러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필요하나 동물과의 지나친 애착과 정서적 교류로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이웃을 돌보기보다 동물에 더 집중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동물 우상화이다. 거꾸로, 때로 보도되는 동물과의 성적 교합은 동물의 학대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가치 자체를 흔드는 가증스러운 행위이므로 성경도 엄격히 이를 금한다(신27:21).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동물에게 똑같이 적용될 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데, 동물의 장례 역시 같은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동물에게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충성심과 같은 본능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약한 것에 대한 온정주의나 동물을 인간과 동등한 반려자로 여기려는 세상 풍조나 동물신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동물을 다스리며 보호하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책임 있게 돌보도록 격려해야 할 것이다.

 

 

 


[1] 고신대학교 신학과 이신열 교수는 동물에게 사용되는 ‘반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부부를 가리켜 단지 ‘반쪽’이 아닌 ‘더 나은 반쪽’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시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17. 그러나 이신열은 ‘반려’의 개념이 “동물이 존재적으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 대해 우려한다.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18.

[2] 기동연, 『창세기 1-11장 주석: 창조부터 바벨까지』 (서울: 생명의 양식, 2009), 70-75. 고려신학대학원 한정건 은퇴 교수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인간이 하나님을 닮고 교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차원에서 설명한다. 참고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것은 “지, 의, 거룩”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과 더불어(골3:9, 엡4:24) “전 인격”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한정건, 『창세기』,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서울: 고신 총회출판국, 2016), 56-57. 

[3] 한정건, 『창세기』, 70-72. 참고. Paul Gesting, “Breath of Life: A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 Human–Animal Distinction and a Critique of Contemporary Theological Anthropology” (Ph.D. Diss.,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22).

[4] 기동연, 『창세기 1-11장 주석: 창조부터 바벨까지』, 295.

[5] 기동연, 『창세기 1-11장 주석: 창조부터 바벨까지』, 292.

[6] 물론 로마서 8:21의 ‘피조물’에 관한 해석에서 칼빈은 살아있거나 죽은 물질세계를 지칭했으나,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루터를 비롯한 주석가들은 보편적 인류를 지칭한다고 보았다. https://biblehub.com/commentaries/calvin/romans/8.htm.

[7] De opificio hominis (= Op hom; PG 44, 133D).

[8] Op hom (PG 44, 133A).

[9] In canticum canticorum (= Cant) 11 (PG 44, 1009A).

[10] Op hom (PG 44, 144D).

[11] Op hom (PG 44, 145A).

[12] Op hom (PG 44, 145A).

[13] Op hom (PG 44, 161C).

[14] Op hom (PG 44, 136B-C).

[15] Op hom (PG 44, 164A-B).

[16] De trinitate (= trin.) 15.11.

[17] trin. 14.6, 11 (CCSL 50A, 429, 436).

[18] trin. 14.11 (CCSL 50A, 436).

[19] trin. 14.15 (CCSL 50A, 442).

[20] trin. 14.18 (CCSL 50A, 446).

[21] De doctrina christiana (= Doctr. chr.) 1.35.39-36.40.

[22] Doctr. chr. 1.22.21.

[23] Doctr. chr. 1.3.3.

[24] Doctr. chr. 1.4.4, 33.36-37.

[25] Doctr. chr. 1.4.4.

[26] 총회 보고서의 ‘질의 배경 6.’: “6. 천주교는 반려동물 축복예식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2년-1226.10.3.)는 인간에게는 자연과 동물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말에 의거하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동물축복예식 지침’ 712항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대로 많은 동물들은 인간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것은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인간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기회에, 예컨대 어떤 성인 축일에 동물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다면 이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표명합니다.”

[27] Itinerarium mentis in Deum 2.12.

[28] Breviloquium 2.12.

[29] Commentaria in II Sententiarum d.16, a.1, q.1.

[30] Commentaria in II Sententiarum d.16, a.1, q.1.

[31] Commentaria in I Sententiarum d.3, pars 2, a.1, q.2.

[32] Commentaria in II Sententiarum d.16, a.1, q.1-2.

[33] Institutio (= Inst.) 1.6.2.

[34] Inst. 1.5.10.

[35] Inst. 1.16.1.

[36] Joseph Haroutunian, trans. and ed., Calvin: Commentaries, Librarry of Christian Classics (Philadelphia: Westminster, 1958) 266.

[37] Inst. 1.15.3.

[38] Inst. 1.14.20, 1.16.6.

[39] Haroutunian, Calvin: Commentaries, 329.

[40] Haroutunian, Calvin: Commentaries, 59-60.

[41] 이신열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준으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각종 동물과 새도 흙으로 지음 받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언급이나 설명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생명력을 지니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지만 새를 포함한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과 교제할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간과 차별화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03.

[42] 이신열은 동물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서 앤드류 린지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의 영국 작가 헬리 솔트(Henry Salt, 1851-1939), 호주 출신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 1926 - )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00-202.

[43] Andrew Linzey and Dan Cohn-Sherbok, After Noah: Animanls and the Liberaton of Theology (London: Mowbray, 1997), 12; Andrew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51.

[44]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51.

[45]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52-53.

[46] Jonathan Edwards, Charity and Its Fruit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69), 157-158; Andrew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53.

[47]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63.

[48]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64-65; Andrew Linzey, “The Theological Basis of Animal Rights,” The Christian Century (1991): 908-909.

[49]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68.

[50]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64.

[51]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72-73.

[52] Linzey,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 73.

[53] Andrew Linzey, Animal Gospel (Louisville: Westerminster John Knox Press, 1998), 39; Andrew Linzey, Animal Theology (London: SCM Press; Chich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4), 45-61.

[54] 총회 보고서 ‘질의 배경 5.’: “5. 현대 생태신학계, 여성신학계를 중심으로 동물의 권리를 강조하는 주장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며 동물신학이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특별히 성공회를 중심으로 이같은 신학적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화여대 조직신학 교수 장윤재는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2022년 10월 15일 성공회대학교 주최로 반려동물과 드리는 예배에 반려동물 축복식이 있었습니다. 이는 동물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음을 반증합니다.”

[55] 장윤재,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 신학사상 171 (2015): 72-76.

[56] 장윤재,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 신학사상 171 (2015): 76-77.

[57] 장윤재,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 신학사상 171 (2015): 90-97.

[58] 장윤재,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 신학사상 171 (2015): 97-99.

[59] Andrew Root, The Grace of Dogs: A Boy, a Black Lab and a Fathers Search for the Canine Soul (New York: Convergent Books, 2017). 이 책은 정의원 역,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서울: 코헨, 2020)으로 국내에 출판되었다. 김진혁의 서평,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는 김진혁이 현대 신학사의 중요한 저작들에 대한 자신의 서평을 모아 출판한 책『신학의 영토들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 (서울: 비아, 2023), 738-572에 실려 있다.

[60] 총회 보고서는 ‘질의 배경 7’: “7. 미국 루터교신학교 실천신학 교수인 앤드류 루트(Andrew Root, 1974- )가 쓴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김진혁 교수의 다소 긍정적인 서평으로 인해 개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61] 서평에 나타난 동물신학이 김진혁의 신학적 입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서평의 화자가 김진혁이 아니라 앤드류 루트의 주장을 재진술하는 ‘개’이기 때문이다.

[62]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3.

[63]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3-744.

[64] 루트,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 51;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6.

[65] 루트,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 45;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6.

[66]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9.

[67]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9-750.

[68] 루트,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 127; 김진혁,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51.

[69] 이신열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부여한 그 이름을 부르는 과정을 통해서 동물과 교감할 수” 있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간의 상호 의존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04. 그러나 이신열은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기에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03.

[70]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 (서울: 담북, 2023), 207-208.

[71] 안재경 편, 『장례매뉴얼』 (서울: 교회건설연구소, 2024), 22-23.

 


 

손재익 객원기자 (reformedj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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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박광영 목사, 벧엘 캐나다 개혁교회의 선교목사로 취임하다

    박광영 목사, 벧엘 캐나다 개혁교회의 선교목사로 취임하다 2024년 4월 14일 (주) 오전 9시 30분에 캐나다 토론토 북쪽 리치몬드 힐(Richmond Hill)에 위치한 벧엘 캐나다 개혁교회(Bethel Canadian Reformed Church)에서 박광영 목사의 선교목사(Minister of...
    Date2024.04.18 Views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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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회 고신총회 총대 명단

    74회 고신총회 총대 명단 2024년 4월 15일 정기노회를 통해 선출된 총대 명단이 다음과 같이 집계되었다. 1) 강원노회(6명) 목사 : 권중신 김동현 송인구 장로 : 홍종국 한장섭 장임순 2) 경기동부노회(20명) 목사 : 김석홍 이하식 배상식 강인영 문용만 채경...
    Date2024.04.17 Views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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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서울남부노회 2024년 봄 정기노회

    서울남부노회 2024년 봄 정기노회 고신 총회 산하 35개 노회 정기노회가 2024년 4월 15일(월)부터 각 노회별로 정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제14회를 맞은 서울남부노회(노회장 노은환 목사)는 4월 15일(월) 오후 2시 서울성산교회당(장태영 목사 시무)에서 개...
    Date2024.04.16 Views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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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부산남부노회 2024년 봄 정기노회

    부산남부노회 2024년 봄 정기노회 고신 총회 산하 35개 노회 정기노회가 2024년 4월 15일(월)부터 각 노회별로 정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제72회를 맞은 부산남부노회(노회장 이상곤 목사)는 4월 15일(월) 오전 10시 30분 월내교회당(신수복 목사 시무)에서 ...
    Date2024.04.16 Views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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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신대학교에 대한 서울포럼의 제안

    고신대학교에 대한 서울포럼의 제안 2024년 2월 6일 있었던 제13회 서울포럼에서 발제하고 토론한 결과에 근거한 제안이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Date2024.04.12 Views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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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성찬상을 모독하지 마라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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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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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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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제74회 고신총회를 결산한다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1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1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