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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말하고 삶으로 진리를 살아내어야 한다”(강영안 교수 인터뷰)  

 

 

개혁정론이 강영안 교수(미국 칼빈신학교)와의 대담을 진행했다. 방학을 이용하여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베리타스 포럼에 강연하기 위해 입국한 강영안 교수와 대담했는데, 2018년 6월 24일 온생명교회 목양실에서 편집장 안재경 목사가 진행했다. 그 대담내용을 풀어서 전한다.

 

 

 

안재경 목사(이하 안): 교수님, 저희 개혁정론과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잠시 방문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강영안 교수(이하 강):  지난 5월 23일과 24일 고려대학교에서 베리타스 포럼(Veritas Forum)이 있었어요. 베리타스 포럼은 1986년에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전역 200여개 대학으로 퍼졌어요. 기독교 신앙을 지성의 언어로 변증하는 모임이지요. 한국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하버드의 베리타스 포럼 본부와 협조 아래 고려대학교에서 열렸어요. 이번에 다룬 주제는 존재하는 것들의 이유와 의미,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였어요. 진리가 더 이상 얘기되지 않는 이 시대 대학에서 진리가 왜 중요한지, 어떻게 진리를 따라 살 것인지가 관심사였지요. 첫날은 <소명>이란 책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오스 기네스(Os Guinness) 박사가 강의를 하고, 둘째 날에는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와 제가 협동 강의를 했어요. 우 교수는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의했고, 저는 ‘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안: 철학과 과학의 대화인 셈이었군요.


강: 네, 철학자와 과학자의 대화라는 말을 붙이기는 했는데요. 우종학 교수는 우주의 존재와 우주에 관한 진리를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더구나 무신론으로는 우주를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어요. 과학의 한계와 유신론의 정당성을 변호하였지요. 저는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것들, 인간을 포함해서 살아 있는 것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을 다루었지요.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이 많이 있지만 이 가운데 저는 세 가지를 다루었어요.  

   첫째는 ‘자연주의’(Naturalism)이죠. 자연주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가운데 제가 말하는 자연주의는 ‘철학적 자연주의’ 또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뜻해요. 오직 자연만 존재한다고 믿는 철학이고 세계관이지요. 이 세계에는 어떤 의도나 기획이나 설계, 어떤 목적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방식이죠. 자연주의는 사실은 강한 무신론이지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영적 차원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존재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하지요. 오직 물리적 현실만이 존재하고 과학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 설명 가능하다고 믿는 태도이지요. 그러므로 자연주의는 필연적으로 물리주의(Physicalism)와 과학주의(Scientism)의 세계관과 통하지요.     
   두 번째 설명방식은 반실재론(Antirealism, 反實在論)이지요. 반실재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의 산물’이라고 보는 입장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구성주의’(Constructivism)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더 넓게는 ‘인간중심주의’(Humanism)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 입장을 따르면 세계는 인간의 산물이고 인간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세계이지요. 인간의 상상력과 지성,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떠나 따로 실재하는 세계는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세계의 실재는 결국 인간의 창조로 보는 입장입니다. 자연주의는 자연을 신격화시키는 사상이라면 반실재론은 인간을 신격화 시킨다고 할 수 있어요.  
   세 번째 입장은 ‘유신론’(Theism) 입니다. 유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지요.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지적, 도덕적, 영적, 사회적, 문화적 능력을 주셔서 인간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능력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유신론으로 보게 되면 죄로 인해 왜곡된 창조세계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지요. 저는 기독교 유신론이 존재하는 것들을 더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고 현실에 부합하며 지적으로 만족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인간의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비록 부분에 그치지만) 실재하는 진리를 찾고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으며, 이렇게 능력을 부여 받은 인간과 실재하는 세계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를 강의를 통하여 하였습니다.

 

 

안: 유신론은 결국 믿는 이들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부합하고, 실재적이라고 보는 것이 아닙니까?


강: 물론 믿는 이가 유신론자가 되지요. 그러나 유신론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반드시 기독교 신앙을 전제할 필요는 없어요. 믿음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실재하는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다 보면, 자연주의 관점에서 부딪히는 한계가 있지요. 반실재론적 관점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자연주의 방식을 주장한다면 “그렇게 설명하는 우리의 의식, 우리의 인식 기능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라는 물음에 봉착합니다. 반실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인간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실은 실재하는 세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인간 정신의 산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지더라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지요. 의식의 존재나 물질의 창조나 인간의 앎의 능력 같은 것들을 설계하고 만든 창조주를 통해서 설명하지 않고서는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이것들을 확연히 알 수 있지만 적어도 솔직하게 존재 물음을 물어간다면 창조주 없이 이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보다 창조주를 통하여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울 뿐 아니라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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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로마서에서 나와 있듯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문제죠.

 

강: 그렇죠. 죄의 영향이지요. 죄의 영향을 우리는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개혁신학 전통에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첫 번째 영향은 지적 영향(noetic effect)이에요.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지만 죄로 인해서 알 수 있는 능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거죠. 두 번째는, 설사 이 세계를 설계하고 창조한 분의 존재를 안다고 해도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죠. 죄의 ‘정서적 영향’(affective effect)이지요. 죄는 지적으로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능력이 주어졌다 해도 죄의 영향으로 인간이 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죠.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두를 보십시오. 칼빈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주셨다고 해요. 이 능력을 칼빈은 라틴어로 ‘센수스 디비니따티스’(sensus divinitatis)(영어로는 sense of divinity)라고 불렀지요(<기독교강요>, 1권 3장 1절). ‘하나님 의식’, ‘신의식’, 좀 더 풀어 번역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 능력’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죄의 영향으로 훼손되고 파괴되어 작동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아울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이지요.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만이 사실은 이 기능을 제대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단지 유신론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의 유신론으로 나아가야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성령의 회복 사역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말씀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쳐 주심으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속에 ‘믿음’을 심어 주시지요. 칼빈은 그래서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여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 쳐진 것”이라 정의하지요(<기독교강요>, 3권 2장 7절).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을 변화시켜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게 하는 선물이지요. 

 

 

안: 베리타스 포럼의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그런 방식으로 변증을 하신 것이군요.

 

강: 교회나 기업체와 달리 대학에서 쓰는 언어가 있거든요. 베리타스 포럼은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지성적으로 말이 되고 합리적이며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임을 변호하는 자리이지요. 베리타스 포럼이라고 할 때 ‘베리타스’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진리’란 뜻입니다. 우리나라 몇몇 대학들이 학교를 상징하는 말로 라틴어 ‘베리타스’를 쓰는 곳들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학교 배지에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라고 새겨두고 있고 이번에 베리타스 포럼이 열렸던 고려대학교가 ‘리베르타스, 유스티치아, 베리타스’(Libertas, Justitia, Veritas, 자유, 정의, 진리)를 학교의 표지로 사용하고 제가 오랫동안 몸담아 가르쳤던 서강대학교가 ‘오베디레 베리타티’(Obedire Veritati, 진리에 순종하라)란 말을 교훈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진리’란 말이 대학 안에서 사라진지가 꽤 되었어요. 대신 ‘지식’이란 말은 많이 쓰지요. 지식 생산, 지식 경제, 지식 융합 등 지식과 관련된 말은 유행하지만 지식이 막상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진리’에 대한 관심은 없어졌어요. 그래서 대학에 다시 진리에 관한 담론을 부활시키고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진리에 관심을 가지게 하느라 베리타스 포럼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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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미국에서 시작된 베리타스 포럼의 목적이 바로 그러했다면, 그 포럼이 미국 사회에, 미국 지성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강: 이런 저런 보고서들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미국의 주류 문화는 세속주의거든요. 아까 말한 자연주의 입장이나 반실재론, 또는 자연주의와 반실재론이 결합된 형태가 오늘 미국의 대학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이런 대학 문화 속에서 기독교신앙을 다시 이야기하게 된 것이지요. 젊은 학자들 가운데 베리타스 포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는 일도 많이 생기고 이 사람들이 오늘에는 베리타스 포럼 강사로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학문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이번에 하버드에서 온 책임자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안: 불신자들이 그 포럼을 통해서 신자가 된 것이군요.

 

강: 포럼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60% 정도가 신자, 40% 정도가 불신자인데, 불신자들 중에서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말을 이번에 들었습니다.    

 


안: 베리타스 포럼의 의의가 크네요.

 

강: 베리타스 포럼이 처음에 집중한 것은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것이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학생들보다는 교수들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말을 들어요. 신앙을 가진 학생들도 어떻게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살아가야 할지 역할모델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교수 한 사람이 변화 받아 삼위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보고 학문을 통해 진리를 말하고 몸으로, 삶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게 중요하지요.  

 


안: 이번에 고려대학교에서 주최를 했다면 그 주최가 대학 당국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기관입니까?

 

강: 대학 당국이 아니라 기독 교수회가 맡아 했습니다. 사실 지금 한국 대학 안에 있는 기독교수회는 일종의 신우회를 벗어나지 못해요.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예배하고, 서로 친목 하는 일을 했는데요, 이번에 고대 교수들은 이러한 관례의 한계를 많이 느끼고 현대 문화와 사회가 던지는 여러 가지 지적 문제들,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서 자기 학문과 관련해서 신앙인의 입장으로 토론하고 답변하고 좀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게 기독교학문연구회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오던 운동인데, 그 필요성을 이제 대학에서 젊은 교수들이 더 많이 느끼게 된 것이죠. 교수들이 자기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지적 탐구와 노력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경주해야겠다는 것을 이번 포럼을 통해서 더욱더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감사할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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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교수님이 기독교인으로서, 또 기독교 철학자로서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하신 것이 세상을 보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 부합성이 있다고 가르치신 적이 있는지요? 아니면, 불신자 대상의 일반 강연에서 청중들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는지요?

 
강: 수업 시간에 직접 전도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요. 처음부터 저는 그리스도인 학자로 가르치려고 애써 왔으나 좀 더 의식적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가르치고 과목 개설을 그런 방향으로 시도했던 것은 아마 2000년대 들어서가 아닐까 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2003년에 미국 칼빈 칼리지 철학과에서 가르치고 돌아온 뒤니까, 15년 전부터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요. 칼빈 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칠 때 처음부터 기독교 관점을 드러내 놓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학교의 기대이기도 했구요. 그 이전에는 예를 들어 데카르트를 가르치든지, 칸트를 가르치든지, 하이데거를 가르치든지 서양 철학의 틀 속에서 가르쳤죠. 서강대학교가 가톨릭 대학이지만 철학 훈련 방식은 세속 대학이나 크게 차이 없이 공부해야 될 내용을 가지고 익혀나가는 것이었지요. 기독교적인 관점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 놓기 시작한 것은 칼빈 칼리지에서 돌아온 뒤부터가 아니었던가 생각해요. 철학 전공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교양과목의 경우 제 과목을 듣던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기독교인들이고 나머지 절반이 비기독교인들이었죠. 교양 과목으로 서강대에서 오래 가르친 과목이 ‘동서고전세미나’와 ‘철학과 현실’이라는 과목이 있었어요. ‘철학과 현실’은 우리의 삶의 문제들, 예를 들어서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일하는 것 등을 다루었어요. 마지막에는 삶의 가치라든지, 고통의 문제 등을 다루었지요. 다른 과목보다 아마 이 과목에 제 신앙이나 세계관이 좀 강하게 깔려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수강생 중에 선교단체 대표가 있었어요. 그 학생이 마지막 페이퍼를 내면서 편지를 하나 썼어요.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제가 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 성경책을 펴놓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철학 수업시간에는 성경을 펴놓고 할 수 없다보니 제 어휘의 부족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어휘의 부족’이라는 말이 중요하죠. 고통의 문제든 죽음의 문제든 비기독교인들과 토론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죠. 제 수업의 첫 주, 둘째 주, 셋째 주를 지나가면 전선이 형성되어요. 기독교 신앙이 있는 학생들과 신앙이 없는 학생들, 다른 신앙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나지요. 저는 충돌을 조장하죠. 계속 싸우게 만들죠. 어떤 게 정말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고, 현실에 부합하고,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미래를 보여주는가를 토론하게 만들죠. 신앙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더라도 그 관점은 뒤에 깔려있지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돼요. 철학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죠. 보편 언어로 이야기하게 만듭니다. 세상 공통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죠. 교회 언어나 신학 언어가 아닌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토론을 진행하지요. 앞에서 말한 학생은 신앙의 언어를 철학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어휘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저는 그 경험을 하고 나서 “아, 우리 기독교인 학생들이 이중 언어를 쓸 수 있도록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덮어 두더라도 얼마든지 이 세상의 언어로, 곧 학문의 언어로 또는 철학의 언어로 자기의 믿음, 신념, 세계관을 남들에게 충분히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토론할 수 있는 이중 언어가 필요한 것이죠. 사실, 이것은 신학교에서는 훈련 받기 힘든 부분이거든요. 교회에서도 훈련 받기 힘들지요. 왜냐하면 교회 언어와 성경 언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워낙 익숙한 방식이지만 그 언어로 세상 사람들한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 그리고 죄의 의미와 삶의 희망과 절망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런 노력들을 계속했죠.

   지금은 다시 미국 칼빈 세미너리에서 가르치게 되니까 오히려 성경과 신학 언어를 더 많이 쓰게 되었지요. 성경 책 펼쳐놓고 철학 강의하고 철학 토론하는 재미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아요. 그렇지만 세상의 공통언어로 신앙을 이야기하려는 노력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강대에서 마지막 한 강의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 175명을 앉혀두고 한 학기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전체를 다루는 강의였어요. 이 책은 물론 처음부터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진행되고 기도로 끝나는 책이에요. 그러나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잖아요. 비록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우리 인생의 보편 경험을 말씀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이 책을 읽고 책에 관한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는 신앙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학생들이 있었어요.

 


안: 서강대가 가톨릭대학이라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까? 일반대학에서라면 불가능했을 텐데요.

 

강: 네,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은퇴 전에는 아예 철학신학과 기독교철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과목 개설을 했지요. 과목도 중요하지만 가르치는 방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수업 시간에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교수가 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교수는 그렇게 하면 안돼요. 수업시간에 다루는 내용을 가지고 아주 깊이, 열심히 생각하게 만들고, 토론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유도하는 것이 저는 철학교수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안: 교수님의 접근이 목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든요. 교인들이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반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요. 요즘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듣고 보고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방송설교를 듣게 되면 참 민망할 때가 많거든요. 전혀 엉뚱한 세계에서 사는 것 같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의 언어도 세상의 언어로, 공통의 언어로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강: 공감해요. 사실 CTS나 CBS TV를 볼 틈이 별로 없어요. 언제 좀 봤냐 하면요, 2007년, 2008년에 건강을 회복 하느라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 머물 때였어요. 설교를 들으면 정말 민망할 때가 많아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교회를 뭐라고 볼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지요. 거기서 하는 말, 사용하는 단어,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최근 금요 기도회 장면을 어느 TV를 통해 본 적이 있어요. 꽤 알려진 목사인데, 저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 목사님 얼굴에 여러 얼굴이 겹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무당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일종의 조폭의 모습도 드러나고, 연예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도 해요. 더 놀라운 것은 교인들의 얼굴을 보니까 굉장히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몰입해 있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70년대, 80년대 초의 저런 설교가 아직도 통하는구나.” 그러나 지금은 문화와 사고가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이 변화 속에서 말씀을 들고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살아보려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는 것이 감사하지요.

   제가 이번에 잠시 귀국해서 지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주 언급한 문제는 한국 교회의 게토화예요. 교회가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면서 주위의 문화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현상이지요. 보편언어나 공통언어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해요. 교회 안에 갇히게 된 것이죠.

   저는 두 가지 면이 여기에 하나로 겹쳐있다고 봐요. 하나는, 교회가 세상보다 훨씬 더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면이 있어요. 물질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자녀들의 잘됨이라든지 등등 말이에요. 그것이 어디서 분명하게 드러나느냐 하면 기도 제목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왕권이 회복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자는 제안은 거의 없어요. 자녀 문제, 가정 문제, 아이들의 입시, 회사 승진이 대부분이죠. 가정과 직장과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남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 이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기도제목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게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해요. 권력과 부, 쾌락, 이런 것들을 물론 말하지는 않지요. 말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추구하죠. 그런데 다른 하나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그와 관련해서 ‘축복’이니 ‘은혜’니 하는 방식으로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실은 교회 안에서 보면 모두 안정되어 있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해요. 그러면서 문화와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지요. 오히려 변화의 요구에 반항하지요. 교회 지도자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었지만 지금은 더욱더 보수화 되어가는 듯해요.   

   이 시대 변화에 대해서 교회가 뭘 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고 믿어요. 그런데도 고신 안에서도 촛불시위에 나간 학생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교수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요. 이번 선거를 통해서 변화에 대한 열망이 드러났잖아요. 사실, 그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부터거든요. 세월호 사건이 한국 사회의 전과 그 이후를 가르는 상당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듯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 지금 큰 숙제이고, 도전이죠.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라고 설교하는 교회도 있고, 태극기 집회에 열렬히 참여하고, 가짜뉴스 카톡 문자를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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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 달라야 하지요. 달라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없어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삶, 하나님 백성의 삶인데 이런 삶이 드러나지 않으면 세상을 선도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게토화 되지 않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적하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백성들은 뛰어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도 결국은 하나님 것이니까요. 제가 늘 말하지만 성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에요. 교회는, 그럼 뭔가요? 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통하여 함께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주님을 알아가고,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 받고, 교육받고, 양육 받고, 훈련받는 곳이죠. 그런데 교회가 이런 기능을 제대로 못하니 세상에 나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거든요. 판판히 쓰러지잖아요. 교회에서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 나가면 불신자와 차이가 없잖아요. 군대용어로 말하면 교회에서는 모두 장군들 같지만 세상에 나가면 거저 세상 명령 따라 사는 졸병 같아요. 그러면서 세상에서도 마치 장군인 것처럼 착각하거든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살려고 할 때 쓰려지고 다치고 상처 날 수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쓰러지지만 그럼에도 다시 교회로 와서 상처를 싸맴 받고 치유 받고 세상에 다시 나가 성도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어야지요. 저는 목회자와 교회 장로와 지도자의 역할이 여기 있다고 봐요. 

 


안: 목회의 성공을 보는 잣대도 너무나 세속화되었는데요.


강: 목회의 성공은 교인들이 얼마나 모이느냐,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느냐, 교회 건물이 몇 평이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지요. 세상에서 참 성도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수가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일을 통해 성도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며 사는가가 중요해요. 세상에서 정말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진실하고 인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사는 성도를 키워내는가, 키워내지 못하는가가 목회 성공의 잣대라고 봐요. 저는 이런 목회가 게토화된 교회, 게토화된 신앙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봐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 다른 삶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안돼요. 신자가 다르게 살면, 기독교인답게 살면 세상은 놀랄 수밖에 없어요.

   아리스티데스라는 고대 철학자가 있어요. 짐 월리스가 쓴 <회심>이라는 책에 나오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조언자 역할을 한 월리스가 아리스티데스라는 철학자를 언급해요. 아리스티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해요.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과부들을 반드시 돕습니다. 고아들을 해치려는 사람들로부터 건져냅니다. 가진 것이 뭐라도 있으면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줍니다. 외국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마치 친 형제처럼 행복해 합니다. 그들은 통상적인 형제 자매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이방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으로는 사는 삶이 너무나 이상했어요. 나그네를 돌보고 임자 없는 시체를 대신 장사지내주는 일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했어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도 하죠. “내가 헐벗을 때, 목마를 때, 옥에 갇혔을 때 네가 돌아보았다”고 하는 말씀을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실천했거든요. 말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 당시에 이방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었거든요. 그게 복음이 확산되는 터전과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지금 시끄럽게 떠드는데 세상에서 드러나는 실제 삶은 없고 세상 기준과 상식으로 보아도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을 교회 지도자란 사람들이 옹호하는 것 때문에 불신의 대상이 되었지요. 불신에 그치지 않아요. 이제는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상황에 와 있어요. 선을 행하다가 멸시당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는 삶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봐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안: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 출국하시는데 가셔서 미국에서 잘 가르치시고 다음에 뵙기를 기대합니다.

 

강: 네, 다음에 뵙죠.  

 

<강영안 교수는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미국 칼빈 세미너리 철학신학 Philosophical Theology 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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