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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3)



고명길 목사.jpg 

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업,사회복지석사), 사)소망호스피스연합회(회장), 소망의집(원장), 천상소망요양병원(대표)




<부록 1>

1.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은 누구인가?  

1) 전영창 선생의 약력

00-전영창선생.jpg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여원리에서 출생하여, 1932년 전주 신흥고등 보통과에 진학

  (16세)하였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21세)하여 신호 중앙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

  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7년 대한민국 정부 1호 유학 여권으로 미국에 건너가 웨스트민스트 신학대학에서 수학(31세)
  하고 웨스턴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6.25의 전쟁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1951년 1월 15일 부산영도에 천막 2개를 치고, 경남구제위원회를 설립(34세)하여 차순덕, 황영갑, 장기려, 전종휘 박사등과 함께 피난민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설치한 것이 오늘의 고신대학 복음병원이다. 

    1953년 9월경 혼신을 다해 피난민들을 구호하며 치료해 준 경남구제위원회와 복음의원에서 강제 사임당한 후 재차 도미하여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1956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마산 인애원 조수옥전도사를 만나는 중 거창고등학교 설립자인 주경중(주남선 목사의 장남)의 권유로 폐교 직전의 거창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오늘의 명문 거창고등학교를 일구어 내었다. 

    1958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후원회의 도움으로 구 샛별 초등학교 건물과 부속 농장을 구입하는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7년 10월 18일 전영창의 투철한 교육관과 희생적인 봉사정신이 전국에 알려져 경향신문사에서 주관하는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을 수상하였으며, 1970년 6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한 주동 학생들의 처벌을 거부함으로써 교장 승인 취소를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교육적 판단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어 대법원에서 승소하여 다시 복직하였다. 

    1971년 10월 21일 학교 시설 확장을 위하여, 다시 도미하여 그의 신학교 동창인 미국인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는 가든 그로브 교회를 통해 기금을 모금하여 지금의 거창고 본관 건물 750평과 강당 120평을 1973년 1월 23일 준공하였다. 

    1976년 5월 23일 지금의 남학생 생활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 시설을 지원해 준 네덜란드 기독교 협의회 시찰단의 방문을 앞두고 그 준비 때문에 권유받은 담석증 수술을 미루다가 폐혈증으로 악화되어 1976년 5월 20일 오후 2시에 수술 한번 하지도 못하고 5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개략적인 전영창의 약력이다.

2) 전영창의 신앙과 신사참배 반대, 그리고 미국 유학

    전영창의 할아버지 전치선은 일제치하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그의 아버지 전일봉도 할아버지의 독립정신과 신앙심을 이어받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읍내 장터에서 열변을 토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 전영창 나이 세 살 때였다.

    미국장로교 선교사 보이어가 해마다 두 차례 그의 동네로 와서 성찬식을 베풀곤 했는데 이때 전영창은 성구 암송책에 있는 성경구절을 전부 암송하고 소요리 문답까지 막힘없이 다 외우자 선교사는 전영창에게 학비전액을 지원해 주며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케 해 주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을 휩쓸 때 끝까지 이를 반대한 전영창을 눈여겨보았던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턴은 전영창이 졸업하자마자 그를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지원해 주었다. 1941년 12월 1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신사참배 반대자 일제 단속에 걸려 전영창은 후꾸오까 감옥에 수감되고 투옥 1년 만에 5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이곳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투옥될 때부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영어공부에 혼신을 다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 합격한 후 미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벧종드를 소개해 주었다. 벧종드는 자신의 모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 기특한 청년을 포옹하며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고 개인경비까지 다 부담을 해 주었다.
    당시 미군정청 산하 외교업무 담당처는 첫 한국유학생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해 줌으로 1947년 4월 건국 이후 최초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 2년 뒤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3) 전영창의 귀국과 복음진료소 설립

    통상 전쟁이 나면 사람들은 살길을 떠나 안전한 외국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그런데 전영창은 오히려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향해 귀국을 결심한다. 워싱턴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지만 ‘사태를 관망하고 기라리라’면서 귀국 수속을 해 주지 않았다.
    1951. 1. 3일 전영창은 중공군의 참전과 맥아더의 철수 소문을 접하고 학장 존 뮬더박사를 찾아가 귀국허락을 요청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 일을 시키려고 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약 조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까지 배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점령하기 전에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6. 23-24쪽)

    이야기를 들은 뮬더박사는 귀국을 허락하고 수속도 책임질 테니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라, 그리고 두주일후의 졸업시험은 치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학장의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학장은 이사장과 협의하여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여 1951. 1. 8일 저녁 학장실에서 뮬더박사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경비는 학장의 친구 게리드윗 목사의 도움으로 해결하였고  게리드윗 목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전란중의 조국을 도우려는 전영창을 위해서 미화 5,000불을 별도로 모금을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에 구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서둘러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고 전영창을 경남지역 총무직에 임명하였다. (김은식, ‘장기려-우리 곁을 살다간 성자’ 봄나무 2006, 60쪽)
    1951. 1. 9일 미국 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귀국한 전영창은 모금한 5천불을 기금으로 차봉덕 원장을 초빙하여 1951. 1. 15일 복음진료소를 설립하여 전재민들을 치료해 주었고 3년간 영도에서 자신이 설립한 경남구제회와 복음의원을 섬기다가 타의에 의해 고신과 복음의원을 떠났던 것이다. 



<부록 2>
2. 복음병원 초대원장 차봉덕은 누구인가?

1) 차봉덕의 출생과 교육, 그리고 부산으로의 이거 

    차봉덕은 1921. 7. 25일 평남 평원군 서갑면 상석리 일제치하에서 차순기(부)와 박영기(모)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를 믿은 부모들의 도움으로 평양 정의여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며 신앙과 학문을 공부했다. 평양 정의여학교는 1896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매티 노블(Mattie W. Noble)을 통해 설립한 기독교계 여자사립학교였다. 
    그 당시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외동 손녀딸 차봉덕에게 “너는 예수를 믿고 결혼치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어라” 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1943년 차봉덕은 할머니의 말씀을 따라 서울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을 하며 어렵게 공부를 계속하여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을 졸업(6회) 하고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인턴을 거친 후 1948년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을 했다. 

2) 차봉덕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게 된 이유

    이때 차봉덕이 부산으로 내려 온 것은 그의 친구 이화주(박윤선목사의 사모)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이화주는 1920년 7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7세때 절친했던 친구 차봉덕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이름도 花珠에서 和主(주님과 화목함)로 바꾼,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사이였다. 
    화주는 21세에 평양 기홀 기독병원과 연계된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기홀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때 장기려 박사를 만나 그에게서 배웠다. 그녀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출석하면서 옥중 순교하신 주기철목사의 사모 오정모 여사를 수 년여 동안 가까이 모셨고, 해방이 되자 후임으로 오신 한상동 목사님의 신앙지도를 잠깐 받은 것이 부산으로 오는 계기가 되었다. 
    1949-51년에 고려신학교 예과과정(2년, 성문과)을, 1951-54년에 고려신학교 연구과(3년, 현 M.div 과정)를 졸업하였다. 그녀가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지인들의 권유로 1954년에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셨던 박윤선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은 박윤선이 네덜란드 자유대학 대학원 유학 중, 한국에 남아계셨던 김애련 사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주변에서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서둘러 박윤선에게 이화주를 중매 하자 평소 존경하던 박윤선을 남편 겸 교수로 평생을 지근거리에서 섬기며 내조하였고 아이들을 양육해서 결혼까지 다 시키고 자신은 2014. 8. 25, 94세로 주님 품에 안기셨다.

    이런 이화주가 6.25발발 직전 신사참배 반대신앙을 가진 한상동 목사 등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고 친구 차봉덕에게 신사참배 반대신앙이 있는 부산으로 올 것을 권유하여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즉 차봉덕이 부산으로 내려온 것은 이런 이화주의 권유와 신사참배 반대신앙을 찾아 기꺼이 오게 되었고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1948년)으로 취업을 했던 것이다

3) 부산에서의 개인병원 개원과 가정, 교회생활

    1948년 부산으로 온 차봉덕은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잠깐 근무하다가 1950년 초에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였다. 
    그런데 몇 달 안 되어 6. 25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에는 무수한 피난민들이 밀어 닥치고 있었다. 1.4후퇴 때 동두천에 살던 최찬영 목사 모친이 왔다가 가시기에 배웅 차 부산 역에 가는데 웬 아이가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목에 수건을 달아 메고서 “아지매 아니야?”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해서 보니 조카 응서였다. “야 너 누구야 응서 아니니? 너 혼자 왔니?” 고함을 치며 따라가 보니 12살짜리 조카 응서 외에 16살, 9살, 8살짜리 4명의 조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영락없는 거지꼴들이었다. 
    이 4명의 조카들 중 제일 큰 조카가 바로 당시 16살의 차진실이었다. 차진실은 고모의 도움으로 남성여고를 졸업하고, 대구 동산간호학교(23회)에 입학해서 간호사가 되어 부산으로 와서 고모의 병원에 취직하여 돕고 있는데 어느 날 박윤선 박사의 사모(이화주-차봉덕 친구)가 삼일교회 전도사를 중매해서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했는데 그가 바로 박희천 전도사(내수동교회 원로목사)였다. 고모는 조카 4명을 다 공부시켜 결혼까지 시키느라 자신은 정작 38세까지 결혼을 못했다. 
    차봉덕은 조카 4명에게 매일 성경읽기와 성경암송을 시켰다. 심지어 조카들이 새벽기도를 나가지 않으면 아침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신앙훈련을 시켰다. 또한 철저한 주일성수로 주일은 어떤 경우에도 병원 문을 닫았고, 진료 중에 삼일교회 고아들이나 집안이 어려운 환자들은 무료진료를 해 주었다.
    특이했던 것은 차산부인과에는 십일조 함이 수납대 옆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어서 매 수입마다 십일조를 구분해서 넣었고 토요일 퇴근 시에는 십일조 함을 개봉하여 정리해서 주일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즐거워 하셨다(차진실의 증언).

4) 차봉덕의 늦은 결혼

    피난 온 4명의 조카를 거두어 양육과 교육, 그리고 전영창과의 복음진료소 개원과 차산부인과 개원 등으로 정작 자신은 결혼도 못하고 지내다가 같은 외과의사인 황영갑과 1958년 늦은 결혼을 했다. 
    남편 황영갑은 중국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하얼빈의대 졸업(재학 시 120명중 4~10등 유지), 신의주 방직공장 병원장, 6.25때 인민군 후방 군의관으로 참전, 북한의 후퇴 때 탈영을 하여 미 8군 의무관,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6.25때 북한에 징집될 때(1950. 9월) 6세, 3세. 1세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부인을 포함 전 가족이 사망하자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하였다. 
    복음의원 초창기 시절 농어촌 무료진료 전담의사로 지원해서 차봉덕, 장기려와 함께 무의촌 진료를 나갔고 이때 차봉덕을 만나 익히 아는 사이였지만 결혼으로 중매한 자는 그의 중, 고, 대학 시 선배이자 절친이었던 신영희 의사였다. 1958년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어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차봉덕의 나이 38세때이다. 이듬해 큰딸 황은경(59년생), 은성(61년생), 은희(64년생) 세 딸을 낳았다.

5) 차봉덕의 동두천 이거와 진주로의 복귀

    차봉덕이 1948년 부산으로 와서 10여년을 살다가 황영갑과 결혼 후 부산을 떠나 동두천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남편 황영갑의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가 결혼했을 때에 나는 빈털터리요, 집사람도 개업할 돈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두 사람이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이때 큰 조카 차진실은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과 막 결혼(1957.1.17)하여 독립한 이듬해였다.
    그때 마침 동두천에 살던 황근옥 선생이 아무 차용증서도 받지 않고 50만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어 병원개업을 해 보라해서 동두천에서 개업을 했는데 병원이 크게 번성하여 주변에 땅도 많이 사게 되고 일 년 만에 황근옥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 드리고 이자도 넉넉히 계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진주에서 부름이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원했던 진주 배돈 병원 후신으로 1955년 8월 15일에 설립된 진주복음병원의 초대원장 한규상(부산 복음병원 내과과장 출신)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자 제2대 원장으로 황영갑을 초빙했고 1959. 9.10일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황영갑은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부인 차봉덕은 진주 우체국 근처에 ‘차봉덕 의원’을 개원하여 진주 최초 부부의사로 병원 일에 힘쓰며 진주교회(전 봉래동교회, 옥봉교회)장로(1961년 장로 취임)로, 차봉덕은 여전도회 회장 직을 맡아 14년 동안 교회를 지사충성하였다. 
    1973년 차봉덕은 남편을 따라 진주로 온지 14년 만에 경영하던 두 병원을 폐원 정리하고 진주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이는 남편 황영갑이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서울 논현동에서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영갑은 복음의원 무료진료 책임자가 되기 전에 이미 1950년대 고려신학교를 졸업했었고 때가 되매 두 사람 다 의사직과 장로직, 여전도회장직을 그만 두고 평생 복음을 위한 목회자로 결단하였다. 차봉덕이 남편의 목회를 위해 진주에서 서울로 떠날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6) 차봉덕과 황영갑의 목회와 미국 이민

    황영갑은 서울 논현동에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여 섬겼지만 두 분의 서울에서의 목회기간은 길지 못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갑자기 1976년 12월 세 아이를 데리고 미국 이민 길을 떠나 세탁소 등을 하며 가정과 교회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다가 세 딸을 훌륭하게 키워 자립시키고 2009. 2.17 미국 글렌데일 안식병원에서 88세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슬하에는 황은경(59년생), 황은성(61년생), 황은희(64년생) 3명의 딸을 두었는데 모두 미국시민권자로서 남편의 성을 따라 장녀 송은경(황은경) 사위 송기태, 차녀 박은성(황은성) 사위 박해영, 삼녀 여은희(황은희) 사위 여홍평으로 손자녀 송다정(Cass), 박지은(Oliva), 박지혜(Pauline), 박지헌(Teddy), 여수정(Crystal), 여평화(Richard)를 두고 미국서 살고 있다. 

    필자가 차봉덕 관련 자료를 찾던 중 그의 조카 차진실 사모를 서울에서 만나 딸들의 연락처를 받아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세 딸과 통화를 하여 위 사실들을 모두 확인하였다. 이 분들은 어머님이 부산 피난시절에 전영창선생의 초빙으로 복음병원을 설립했다는 것과 진주에서의 아름다운 믿음과 신앙을 언젠가는 어머님 일대기를 정리해서 남기고 싶다고 하였다. 

    사실 필자가 그동안 수집한 차봉덕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일제치하, 그리고 6.25와 해방이후 격동기에 전영창의 요청에 아무 조건 없이, 월급도 없이 복음진료소를 설립하여 피난민들과 환자들을 돌보았고, 차진실 등 조카 4명을 거두어 결혼하고 자립시킬 때까지 양육하며 교육시키느라 자신은 정작 결혼도 못했던 아름다운 가족애, 철저한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 부산삼일교회에서 한상동 목사의 지도와 결혼이야기, 진주에서의 14년간의 진주복음병원 인수와 진주교회에서의 여전도회 회장으로서의 모범적인 신앙생활 등 그녀의 주옥같은 신앙생활은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한 믿음의 의사였다.

    필자가 차봉덕과 황영갑의 출생과 삶을 이렇게 자세히 남기는 것은 차봉덕 의사가 복음병원 초대원장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믿음과 희생, 헌신의 아름다운 의사였음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 및 자료들>

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도서출판 한걸음, 2000.
전성은,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전집 2>, 미루 그래픽스, 2013.
황영갑, <작은 불꽃>, 류신각, 1982.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김재도, <고신의료원 50년사>, 현대출판인쇄사, 2001.
박노원, <문창교회 100년사>,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맹호원, <경남노회 회의록 1. 2, 3권>, 角丸인쇄소, 1929.
김기현, <경남노회의 역사>, 쿰란출판사, 2006.
이관호, <경남(법통)노회 상황보고>, 디자인 신창, 2013.
한정건, 이상규편집 <장로교회와 역사>, 고신역사연구소, 2009.
류윤욱,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쿰란출판사, 2011.
조헌국, <진주에 뿌려진 복음>, 디자인모토, 2015.
와따나베 노부오,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엘멘출판사, 2002.

조성철, <봄을 찾아나선 별>, 쏠 커무니케이션, 2010.
이상규,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위에> SFC출판사, 2013.
장성철, <제일진해교회 40년사>, 진해예문사, 1985.
한영선, <새벽이슬처럼, 한정교목사 추모전기>, 도서출판 광야, 2003.
이효재, <아버지 이약신목사>, 한림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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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공적 금식과 공적 기도를 선포하자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