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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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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업,사회복지석사), 사)소망호스피스연합회(회장), 소망의집(원장), 천상소망요양병원(대표)




1. 문제 제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고신의료원)은 고려신학대학원과 함께 우리 고신교단의 가장 중요한 의료기관이다. 이 복음병원(1961.8.7)의 전신은 복음의원(1951.12.23)이었고 그 복음의원의 전신은 복음진료소(1951.1.15)였다. 

    중요한 것은 이 복음병원, 복음의원, 복음진료소가 동일한 비영리단체인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는 1951. 1. 9일 미국에서 5,000불의 구호금을 가지고 귀국한 전영창 선생(전 거창고등학교 교장)에 의해서 1951. 1. 15일 설립되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병원 설립자도 당연히 전영창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설립일도 1951. 1. 15일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기록되어야 하지 않는가?


    현재 복음병원 홈페이지에 기록된 설립초기 병원연혁을 보자


        1951. 01.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조직 (대표 : 전영창)

        1951. 06. 21. 복음진료소 개설(부산시 남항동 2가 46 제3영도교회 내, 직원 3명)

        1951. 07. 02. 복음의원 초대원장 장기려 박사 취임

        1951. 07. 13.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정관 제정

        1951. 12. 20. 천막병원으로 이전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2가 180번지)

        1951. 12. 23. 복음의원 개설 허가

        1957. 05. 28. 복음병원 신축 이전 (부산서 서구 암남동 34번지, 건평 240평)

        1958. 03. 31. 본관에 간호원 기숙사, 식당 증축

        1961. 08. 07. 비영리 의료기관 복음병원 개설 허가

                              (개설자 :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대표 박손혁, 직원 39명)

        1965. 09. 06.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병원재산 편입

                                                                                        - 복음병원 연혁에서 인용 -


    그런데 지금 복음병원 연혁(2015. 5월 현재)에는 틀리거나 불분명한 기록들이 여럿 있다.


    1. 1951. 01.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조직(대표 : 전영창)

                           1) 누가 설립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2) 설립일자가 누락되어 있다. 

                           3)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이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4) ‘경남구제회’ 대표 전영창과 복음병원과의 관련성도 언급이 전혀 없다.


    2. 1951. 06. 21 ‘복음진료소’ 개설(부산시 남항동 2가46. 제3영도교회 내, 직원 3명)

                          1) ‘복음진료소’ 설립자가 빠져 있다. 설립자가 없는 병원은 없다.

                          2) 설립일자도 틀린다. 이날은 전영창과 장기려가 처음 만난 날 일뿐이다.

               

    3. 1951. 07. 02. 복음의원 초대원장 장기려 박사 취임 

                          1) 이때는 아직 ‘복음의원’ 이 아니라 ‘복음진료소’였다. 

                          2) 초대원장도 장기려박사가 아니라 차봉덕 원장이었다.


    이상의 오류들과 잘못된 내용들을 하나씩 살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를 복음병원 설립자로, 그리고 초대원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발굴 확인된 자료들과 장기려 박사의 전기들을 살펴보면 장기려 박사는 설립자도 초대원장도 아니었다. 장기려 박사가 복음진료소의 원장으로 오기 전에 복음진료소는 전영창에 의해서 이미 설립이 되었고, 차봉덕 원장이 초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1. 1월 복음진료소를 개소하여 진료를 시작했던 전영창은 1953년 여름 불의의 탄핵을 받고 복음의원에서 떠나게 된다. 

    그 당시 전영창과 그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부산을 떠나야 했고, 그를 따르던 간호사들과 직원들도 함께 사직하고 병원을 떠났었다. 지금도 전영창 가족들과 그 당시 복음병원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은 가슴에 억울함과 한을 품고 60여년을 살아왔다. 

    전영창이 떠난 이후 복음병원의 역사에서 전영창의 업적을 축소하거나 또는 지우려다보니 장기려 박사중심으로 병원역사를 재편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복음병원의 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관련 역사가 왜곡 변조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 소고는 복음병원 초창기에 도대체 전영창과 복음병원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전영창 한 사람의 업적을 축소, 또는 배제하기 위해서 꼭 복음병원의 역사를 애매하게 변조 또는 왜곡할 필요가 있었을까?

     혹 그것이 과거에 잘못된 일이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지금이라도 바르게 밝히고 전영창과 차봉덕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와 복권을 해 드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닐까? 


    그동안 왜곡되어 지금까지 내려 온 복음병원의 설립자, 초대원장, 설립일자 문제를 정확히 밝히기 위해 자료들을 찾고 관련 인사들을 만난 결과로 본 소고를 쓰게 되었다.




2. 복음병원이 설립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


    1) 국가적인 상황

     복음병원이 설립될 당시인 1951년 1월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1950. 6.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때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1950. 11월경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 4 후퇴라는 참담한 비극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남쪽을 향해 내려왔고 그 최종 집결지가 부산이었다. 부산은 마지막 보루였고 더 이상 갈 수 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수백만에 이르는 피난민들은 길거리나 산언덕, 심지어는 남의 집 마당에까지 천막을 치기도 하고 또는 판자로 움막을 지어 생활을 했다. 비참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형성된 부산의 초량과 좌천동, 감천동, 영도 산자락에는 대규모 판자촌, 천막촌이 형성되어 당시 부산 인구(30만 명)가 갑자기 100만 명이 넘었었다고 한다. 

    당시에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산이 6.25 전쟁 시 미군의 군수품들이 도착, 분배되는 항구도시였고 각종 물자와 먹을거리,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산의 고지대인 초량과 좌천동, 감천동, 영도 등의 산자락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얼기설기 판자와 천막으로 집을 지어 고단한 피난생활을 했다.

    “당시 부산의 거리는 피난민 무리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공포와 죽음과 혼란이 뒤섞여 춤추고… UN군들의 왕래와 전선으로 나아가는 힘찬 청년들의 모습! 피난 살림에 갈증을 만난 민간인! 총, 칼, 싸움, 죽음, 상이군인, 학원, 친구, 도적, 살인, 강도…. 정말 혼란의 파도 그것뿐이었다. 정말 사망의 행렬이었다.”(‘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위에’, 학생신앙운동사, 2013)

    전영창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인 1951. 1월에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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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시절 부산 영도 전경                     ▲ 부산 피난민들 천막촌



    2) 고신 교단적인 상황

    1950년대 초반은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고신교단 태동기였다. 고신교단은 신사참배 반대와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1946. 6. 23일 진해 하기신학강좌 개최에 이어 1946. 9. 20일 부산(금성중학교)에서의 고려신학교 개교로 기틀을 잡고 1952. 9. 11. 진주 성남교회에서 총노회로 개최되면서 고신교단이 출범케 된다. 


    전영창이 미국서 귀국한 1951년 1월은 신사참배자와 출옥성도들 간의 신사참배 문제와 고려신학교 인가 문제로 첨예한 대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6. 25피난시절인 1951. 5.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36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도 계속 고려신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장로교 총회에서도, 그리고 각 노회에서도 출옥성도들은 배척을 당하고 있었다. 

    결국 1952.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가 열려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고신이 공식적인 출범을 하게 된 것이다. 

    전영창은 아직 고신이라는 교단이 형성되기도 전에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서 무엇이든 자신의 할 일을 찾기 위해서 유학을 서둘러 마치고 급거 귀국을 했던 것이다. 




3. 전영창의 귀국과 복음진료소 설립 동기


    전영창은 1947년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1년 수학 후 웨스튼 신학대학교에서 졸업)로 건국이후 유학생 1호로 출국하여 신학을 공부하다가 1950. 6. 25 전쟁소식을 듣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려 귀국을 결심한다. 

    이에 교수들과 학우들이 전영창의 귀국을 극구 만류하다가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했다. 계속 귀국을 애원하는 전영창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자 학교는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1월 초에 전영창을 위한 졸업식을 거행해 주고 교수들과 지인들이 모금해 준 5,000불을 가지고 1951.1.9일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서 귀국을 하였다. 


    전영창이 병원을 설립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동기가 전해지고 있다. 


    (1) 하나는 전영창이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목격한 후에 시작했다는 견해다.

    전영창은 미국서 모금해 온 5,000불로 무엇을 할까 기도하던 중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을 설립해서 피난민들을 치료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박영훈 장로의 전영창 추모사(기독교보 2007. 6. 29)에서 “전영창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일영도교회(실제는 제3영도교회임)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설립을 결심하고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두 번째 동기는 전영창이 노르웨이 의사 넬슨의 권유로 병원을 설립했다는 견해다.  

    1951. 1. 9일 전영창이 귀국 시 가져온 구호기금 5,000불로 항생제를 구입하여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부산에 상주하고 있던 노르웨이 출신 의료지원단장인 넬슨을 만났다. 당시 노르웨이는 전투병 대신 의료지원단을 파견하였는데 이 부대에 전영창의 외삼촌이 통역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전영창이 쉽게 넬슨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넬슨이 “그 돈으로 약을 사서 피난민에게 나누어주면 얼마 안가서 재정이 바닥이 날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그 돈으로 의원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겠다.”라고 제안하자 전영창은 즉시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대로라면 의사가 아닌 전영창이 복음병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부둣가에서 만난 환자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노르웨이 의사 넬슨의 조언을 듣고 결심한 시대적 요청이었다.




4. 전영창의 경남구제회 및 복음진료소 설립


    전영창이 1951. 1. 9일 부산 수영 비행장에 내려 제일 먼저 한 일이 ‘경남구제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거 미국에서 귀국할 때 게리드윗 목사 외 주변 지인들이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구호금 5천불을 모금해 주면서 서둘러 ‘기독교구제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는 전쟁 중인 한국에 필요한 구호물자를 지속적으로 모금하고 또 지원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미국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한국 경남지역 총무로 전영창을 임명해서 보냈다. 말이 경남지역 총무이지 실질적인 한국 대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전쟁 중인 조국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하려했던 일은 5천불로 구호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미국 기독교구제위원회의 한국대표부를 조직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를 비롯하여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 목사 등과 함께 ‘경남구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전영창은 대표가 되었다. 

    이 점에서 볼 때에 ‘경남구제위원회’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독자적인 구호단체가 아니라 이미 미국에서 조직된 ‘기독교구제위원회’의 한국 지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경남구제위원회는 미국의 구호금을 받아 한국 내에서 적절하고 유효하게 배분 구호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동시에 전영창의 ‘복음진료소’ 설립은 경남구제위원회를 조직했던 그 시점에서 그가 노르웨이 구호지원단 의사 넬슨을 만나 병원설립 권유를 받고 거의 동시에 병원도 설립했다. 그만큼 당시 전란 중 구호단체와 의료기관 설립이 시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영창이 조직한 ‘경남구제회’는 일종의 구호사업을 추진하는 주관단체(지금의 의료법인 또는 사회복지법인 격)였고 ‘복음진료소’는 법인의 구호사업을 수행하는 의료기관(병원)이었던 셈이다. 당시의 복음진료소는 수익기관이 아니라 철저한 구호기관이었다.


    ‘경남구제회’를 세운 전영창은 그가 미국에서 가지고 온 5천불의 헌금으로 항생제를 사서 부상과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전쟁이재민 곧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려했다. 그래서 항생제를 구하기 위해 당시 외삼촌이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UNCAC)를 찾아갔다. 어떤 의도로 항생제를 구하고 있는 지 전영창의 이야기를 들은 노르웨이 출신의 구호담당 책임자 의사 넬슨은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조그마한 의원이라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며 대형 군용 천막도 3개나 지원해 주었다. 병원설립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전영창은 넬슨의 제안을 듣고 이를 좋게 여겨 즉시 의사를 찾게 되었다. 

    마침 초량교회(한상동 목사 시무)에 출석하며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해서 진료하던 여의사 차봉덕을 만나 복음진료소 설립의 긴급성을 설명하고 초빙하자 차봉덕 선생은 자신의 병원을 정리하고 제3영도교회 창고로 와서 1951. 1. 15일 진료를 시작한 것이 ‘복음진료소’였고 이것이 복음병원의 첫 출발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영창이 복음병원을 설립한 4대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복음 전하는 병원(동포에게)   

    ② 무료 구호 진료하는 병원(극빈자에게)

    ③ 정직, 정확한 진료로 신용 얻는 병원(외국인에게)

    ④ 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병원(영 육 간에)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설립할 때 제시한 설립 목적을 보면 그가 왜 병원의 이름을 ‘복음진료소, 복음의원’으로 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복음병원은 복음을 전하는 병원으로서 구제하고 신뢰를 얻고, 의술을 가르치는 병원으로서 먼 훗날 고신의대가 설립될 것을 마치 알기라도 한 것 같이 그의 병원설립은 복음적이고 무료진료라는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는 병원으로서, 더 나아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원대한 꿈을 초기 설립목적에 담아내었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6.25 피난시절 헐벗고 병든 자들을 바라보며 그때 그 시대의 필요와 요청에 기꺼이 순종한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오늘날 부산 굴지의 복음병원과 고신대 의과대학으로 세워 주셨던 것이다.



2-1. 초창기 복음진료소 천막병원.jpg 2-2 복음진료소 초기 전영창.jpg 2-3 초창기 복음의원 천막병원.jpg

▲ 초창기 복음진료소 천막병원         복음진료소 초기 전영창            초창기 복음의원천막병원




5. 복음진료소 초대원장 차봉덕 여의사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설립할 때 초빙했던 차봉덕 여의사는 어떤 분일까?

    차봉덕은 1921. 7. 25일 평남 평원군 서갑면 상석리에서 일본 식민지배시대에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차봉덕은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를 믿은 부모들의 도움으로 평양 정의여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며 신앙과 학문을 공부했다. 평양 정의여학교는 1896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매티 노블(Mattie W. Noble)을 통해 설립한 기독교계 여자사립학교였다. 

    그 당시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외동 손녀딸 차봉덕에게 “너는 예수를 믿고 결혼치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차봉덕은 할머니의 말씀을 따라 의사가 되고자 1943년 서울여자의과전문학교 입학,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을 졸업(6회)하고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인턴을 거친 후 1948년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을 했다. 

    이때 차봉덕이 부산으로 내려 온 것은 그의 친구 이화주(박윤선 목사의 사모)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화주는 1920년 7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7세 때 차봉덕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이름도 花珠에서 和主(주님과 화목함)로 바꾼, 차봉덕과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이런 이화주가 6.25발발 직전 신사참배 반대신앙을 가진 한상동 목사 등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고 친구 차봉덕에게 신사참배 반대신앙이 있는 부산으로 올 것을 권유하여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1948년 부산으로 온 차봉덕은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잠깐 근무하다가 1950년 초에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였다. 그런데 몇 달 안 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다음 해 1월이 되자 1. 4후퇴로 엄청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어 닥치고 있었다. 마침 1951. 1. 9일 미국 유학 중 신학교를 졸업한 전영창이 귀국하여 자신을 찾아와서 전재민을 위한 병원설립에 초대원장을 맡아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전영창이 미국서 구호금 5천 달러를 가져왔고 이것으로 약을 구입하여 병자들을 치료해 줄려면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차봉덕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생각하고 초량의 산부인과를 폐원하고 전영창을 따라 가서 진료를 시작했던 곳이 부산 제3영도교회 창고였고 이것이 복음병원의 첫 출발이 된 복음진료소였다. 이 날이 바로 1951. 1. 15일이었다. 


    차봉덕은 전영창과 함께 밀려드는 환자들 진료와 피난민들 구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섬겼다. 전영창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유엔군과 미군을 찾아 의약품 조달과 각종 의료용품들과 기구를 구해왔다. 그리고 옥수수와 밀가루, 우유 등의 구호품을 얻어 와서 텐트 밖에 솥을 걸고 끓여서 전재민들을 열심히 구호했다. 나누어 주는 구호음식을 받기 위해서 늘어선 줄이 200미터가 더 넘을 때도 있었다. 

    UNCAC(유엔 민사원호처)에 노르웨이 의사 넬슨이 무료 지원해 주는 하루 50인분의 약도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밀려드는 환자들 진료에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산부인과 의사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1951년 6월경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를 찾아가 의논을 했고 마침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함께 신앙생활 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해 주었다. 

    1951. 6. 21 전영창은 한상동, 김상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장기려 박사를 만나 전재민을 위한 ‘복음진료소’ 원장을 청원했고, 장박사도 평소 불우한 자들을 위한 의사가 되려고 하나님께 서약한대로 흔쾌히 허락을 하고 1951. 7. 2일 복음진료소 제2대 원장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3-1 차봉덕-황영갑결혼(주례 한상동).jpg 3-2 진주교회 시절 차봉덕원장, 황영갑원장(앞줄우측 2,3번째).jpg 3-3 차봉덕(좌측3번째), 이근삼박사와 함께.jpg

▲차봉덕-황영갑결혼(주례한상동)▲진주교회시절 차봉덕,황영갑원장(앞줄우측2,3번째)▲차봉덕(좌측3번째),이근삼박사와 함께



    고신의료원 50년사에 보면 “장박사 일행이 물려받은 진료소는 당시 삼일교회에 출석하던 서울 의전 출신이며 미혼인 차봉덕 의사가 3개월간 환자들을 돌보던 장소로 제 3영도교회의 창고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수정해야할 내용들이 있다. 

    (1) 장박사가 부임한 1951. 7. 2일은 아직 삼일교회가 설립(1951. 10월)되기 전임으로 차봉덕은 삼일교회가 아니라 초량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2) 이곳에서 차봉덕 의사가 3개월간 환자들을 돌본 것이 아니고 5개월간이었다. 

    (3) “장박사 일행이 물려받은 진료소는” 이란 표현은 장기려 박사를 설립자로, 초대원장으로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려 박사가 설립자가 될 수는 없다. 혹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설립자와 초대 원장은 전영창과 차봉덕으로 수정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1951. 7. 2일에 장기려 박사가 부임한 때에는 이미 복음진료소가 전영창에 의해서 세워졌고 초대 원장인 차봉덕 의사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병원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초대원장을 차봉덕 원장으로 인정해 버리면 복음병원 역사는 간단히 바로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증거들을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2)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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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3)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3) 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
    Date2015.05.20 By개혁정론 Views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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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2)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2) 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
    Date2015.05.16 By개혁정론 Views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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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1)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1) 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
    Date2015.05.09 By개혁정론 Views2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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