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2)
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업,사회복지석사), 사)소망호스피스연합회(회장), 소망의집(원장), 천상소망요양병원(대표)
6. 복음병원의 설립일, 설립자, 초대원장 문제
1) 우선 현 복음병원의 설립일이 1951. 6. 21일이 아니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1951. 6. 21일은 어떤 날인가? 이 날은 전영창이 한상동,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장기려를 찾아가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청원하고 장기려 박사가 이를 수락 한 날이다.전영창과 함께 복음진료소를 1951. 1. 15일 개원했던 차봉덕 원장은 산부인과 의사였기 때문에 전쟁 후 외상환자의 수술 등 외과적 치료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병원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 장기려 박사는 흔쾌히 이를 수락하고 그 달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사직 하고 1951. 7. 2일 복음진료소로 부임을 했다.그러므로 1951. 6. 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여전히 제3육군병원에 근무할 때임으로 당연히 복음진료소 설립일자가 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6월 21일은 장기려가 복음병원에 합류할 것을 수락한 날이다.장기려도 1951. 7. 2일 제3영도교회 창고로 갔을 때 이미 그곳에는 복음진료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차봉덕 원장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 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 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p.269)즉 장기려박사가 제3영도교회에 왔을때는 이미 차봉덕이라는 의사가 복음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복음진료소는 당연히 전영창이 설립했던 그 병원이었다.지강유철씨가 장기려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하다 보니 위와 같이 애매한 내용으로 기술하면서 장기려가 마치 복음진료소를 시작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게 된다.그래도 차봉덕 의사가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 주었기에 전영창을 설립자로, 차봉덕을 초대원장으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주요 근거를 제시해 준 셈이다.2) 전영창 선생이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밝히고 있다.현재의 복음병원 연혁에서는 경남구제회의 설립일은 1951년 1월까지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영창 선생은 평소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말했고 그의 장례식 때 연혁보고에서도 복음병원의 설립일을 1951. 1. 15(월)로 밝혔다.(전성은 저, 전영창 전집2, 미루그래픽스, 2013년)복음병원 설립일은 설립자가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경남구제회 설립일과 복음진료소 설립일이 같은 날 동시에 설립이 되었는지 아니면 몇 일간, 또는 몇 달간의 시차를 두고 설립이 되었는지는 전영창선생의 관련 문헌 외에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전영창선생의 인격과 삶으로 볼 때 그 분의 말씀과 장례식 때의 연혁에 근거해서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3) 제54회 경남노회(1951. 3.6~8일)에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가 승인되었다.1951. 3. 6일 개최된 제54회 경남노회 촬요에 의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승인하고 각 교회는 연보하여 구제회(부산시 광복동 고려신학교 내)로 보내 주시되 연보는 4월 29일 주일 일제히 하여 주기로 함”이라고 결의되어 있다.이 경남노회 촬요를 볼 때 경남구제회의 설립일은 1951년 3월 노회 이전임은 확실하다
▲ 경남노회록 사진4)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의 증언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은 복음병원의 설립은 아버지 전영창 선생이, 그리고 병원 설립도 1월 달이었음을 증언했다.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전북 무주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가 1951년 1월 말경이었고, 산위에는 눈이 많이 와 있었으며 그때 아버지가 병원차를 타고 가족을 데리러 왔더라는 것이다.“아버지는 귀국(1951. 1. 9)후 복음진료소를 개원했다. 그리고 그 해 1월 말경에 가족들이 빨치산들의 위협 속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의 이사를 위해 전북 무주로 오셨다. 이때 타고 온 차량(봉고형 승용차)에 복음진료소 이름과 병원 표식이 있었다. 이때는 산에 하얀 눈이 많이 있었던 추운겨울 1월 말경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무주를 떠나 진주로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뗏목을 타고 진주 남강을 건너 마산을 거쳐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그때 병원에는 차량이 2대가 있었다. 그 중에 한 대를 타고 전북 무주까지 오셨다, 그렇게 이사를 온 나는 영선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을 하고 5학년 때 까지 부산 영도 병원천막에서 장기려 선생님과 직원들과 함께 같이 생활을 했었다”(2014. 5. 19. 경남 거창에서 전성은 선생이 김세중 목사, 고명길 목사에게 증언)그러므로 전영창의 복음진료소는 1951년 1월 말 이전에 개원한 것이 확실하다.
▲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5) 복음진료소 맹숙희 간호사의 증언(함양 서상 대남교회 권사, 1930. 2.25일생)“복음병원 설립자는 당연히 전영창 선생님이십니다. 1951년 중순 경 전영창 선생님이 불러서 복음진료소로 갔습니다. 월급도 얼마 준다는 말씀도 없으셨고, 전 선생님과 같이 천막에서 생활했습니다. 숙소가 없으니까 낮에 수술했던 수술실 바닥을 씻고, 거기에 전 선생님의 신혼이불을 깔아 주면서 자게 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때 병원 창고에 가니 난산 분만 때 쓰는 ‘분만감자’라는 기계가 있어서 “저 기계가 왜 창고에 있느냐?” 라고 물으니 “장기려 박사가 부임하기 전 차봉덕 의사가 근무할 때 가져와서 사용했던 기계들이다. 나중에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가 부임한 이후에는 쓸 일이 없어서 창고에 두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삼 년을 같이 근무했는데 어느 날 전영창 선생님이 억울하게 쫓겨났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60년 가까이를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간호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맹숙희 너는 꼭 살아서 전영창선생의 억울함을 풀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맹숙희(1930. 2. 25일생) 간호사는 그 후 같이 근무했던 김종렬과 결혼하여 지금 함양 대남교회에서 은퇴 권사로, 남편은 은퇴 장로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맹숙희 간호사(조산사)는 당시 24살 처녀 때였으니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외의 많은 증언들을 해 주었다. <2014. 5. 19,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로길 27-14 맹숙희 김종렬 자택에서, 김세중, 고명길 목사에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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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진료소 맹숙희 간호사
6) 차봉덕의 조카 차진실 사모(남편 박희천 목사, 내수동교회)의 증언차진실(당시 16세)은 차봉덕의 조카로서 피난시절 고모 차봉덕과 함께 살았다.“1951년 겨울에 전영창 선생이 초량산부인과로 찾아와서 복음진료소를 같이 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 권유에 따라 차봉덕 고모님은 영도로 가서 복음진료소를 개원했고 그때 산부인과 기구들도 그곳으로 가져가서 진료를 했어요. 그때 당시 복음진료소는 전란 중의 피난민들과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영창과 고모인 차봉덕 의사가 시작했지요. 나중에 장기려 선생님이 오신 이후 다시 초량동으로 와서 차산부인과를 개원해서 저가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님 밑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했어요.”차진실은 나중에 한상동 목사님 소개로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과 결혼(한상동목사 주례)함으로 고모 집에서 독립하여 나왔고 나중에 서울 내수동교회를 목회하다 은퇴한 후 지금은 서울서 박희천 목사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다. (2015. 5. 29. 서울 마포구 토종동 138 박희천 목사 사택에서 증언)
▲ 차봉덕의 조카 차진실 사모7) 이재술 장로의 복음병원 설립자 및 초대원장 증언“전영창은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군과 유엔의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의약품과 구호품을 조달했다. 전영창은 유엔 CAC 민사위원회 경상도 팀 소속 노르웨이 의사 넬슨 씨를 만나 복음진료소 운영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넬슨 씨는 진료소 의약품 보조 조로 월 $500씩(1일 50인분)을 지원받아 경영하기로 하고 직원 3명(女의사, 간호원, 총무)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였던 것이다”. (코람데오 닷컴)이재술 장로 역시 전영창을 복음병원 설립자로 여자 의사(차봉덕)를 초대원장으로 기록하고 있다.8) 박영훈 장로의 복음병원 설립자 증언기독교보(2007. 6.9일자) 전영창 선생 추모사 중에서 “전영창 선생님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일영도교회(실제는 제3영도교회임)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 설립을 결심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 로 기록하고 있다.박영훈 원장은 복음병원 설립 당시에는 학생이었다가 나중에 장기려 박사를 통해 의사가 되고 그 이후 복음병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도 복음병원의 설립자를 전영창 선생이라고 했다.9) 황영갑(차봉덕의 남편)목사의 자서전에서의 증언황영갑은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병원 초창기시절 순회 진료 담당의사로 지원하여 복음병원과 함께 하다가 나중에 차봉덕 의사와 결혼한 외과 의사였다. 그가 나중에 목사가 되어 “작은 불꽃”(1983, 류신각)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이 자서전에서 자기 아내 차봉덕 의사가 전영창선생의 권유로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나도 한번 아내 자랑을 해 보려고 한다. 평양북쪽 사인당 근처 시골에서 나서 자라고 평양 정의여학교를 줄곧 기차통학으로 졸업한 차봉덕은 소학교 선생을 좀 하다가 큰 마음 먹고 가난한 농가이면서도 경성여의전을 응시하여 하늘의 별따듯 기쁨을 안았다. 한 이년을 다니다가 8.15가 되고 그 후는 집과의 연락이 어렵고 그래서 고학을 하며 고생고생 하여 졸업은 서울여자의과대학의 이름으로 6.25가 나기 이태 전에 겨우 마친 것이다. 당장 생활을 해야겠기에 인턴을 마치고 나서 부산에 내려와 초량 어느 이층에 방을 얻어 조그맣게 개업을 했다. 몇 달도 안 되어 6.25사변이 나고 피난민들이 밀려 내려오고...(중략)..., 피난 중에 만난 조카 4명을 거두어 고등학교 졸업 시까지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혼기도 다 놓치고 나와 결혼 할 때에는 사십을 바라보는 노처녀가 된 것이었다...(중략)...친구 신영희 형이 중매를 했을 때 내가 이미 그의 소문을 들어 대강 알고 있었고 복음병원을 처음 시작할 때 고 전영창 선생이 지금의 내 아내와 같이 시작했음도 들었다. 그래서 맞선 보던 그날 강원용 목사님 댁에서의 첫 인사를 하면서 이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뜻이라 믿고 결혼을 결심했었다. <황영갑저, 작은 불꽃 p.356~p.357에서 인용>
▲ 황영갑 자서전10) 장기려 박사의 증언(1) 장기려는 “나의 생애와 확신” (<부산모임>제59호(1977년 6월 35쪽)에서 복음의원에 참여하게 된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그 후 부산 제 3육군병원에서 일을 돕다가 1951년 7월 부산 영도에서 전재민과 극빈자들을 위한 무료의원(복음의원)을 여러 분들의 힘을 얻어 개설하고 그 의원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때 나의 존경하는 전종휘 박사와 더불어 매일 100명 가량의 무료 진료를 하게 되었다”.즉 “여러분들의 힘을 얻어 개설하고”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분들이 협력했음을 밝히고 있다.(2) 그의 전집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 홍성사, 2007)에서도 장기려가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사직하고 7월 3일 제3영도교회로 갔을 때는 이미 차봉덕 여의사가 설치 운영하는 복음진료소가 거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 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p.269),즉 이미 차봉덕 원장이 진료소를 설치운영하고 있음을 인정했다.(3) 장기려는 복음병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복음병원 설립자는 저 장기려가 아니라 전영창선생이다”라고 증언하였다.복음병원은 병원설립 2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장기려를 설립자로 기려 공로패를 증정하자 장기려가 단상에 나와서 “우리 복음병원 설립자는 저 장기려가 아닙니다. 저기 계시는 조금순 여사님의 남편 전영창 선생이 설립하였습니다.”라고 정정 발표 하였다.전영창(1917년생)과 장기려(1911년생)는 평생 서로 존경하며 아끼는 동지로 지냈다. 장기려가 재정에는 재주가 없어서 모든 재정지원과 후원은 전영창이 맡았다. 복음병원을 암남동으로 이전할 때도 모금에 전영창이 앞장섰고, 복음병원 간호사 기숙사를 지을 때도 장기려가 전영창에게 부탁하여 ICCO라는 국제구호단체에 영어문서를 만들어 주도했고, 그 외에도 거제 건강원 건축 시에도 영어행정서류를 작성 지원했고, 두 사람은 평생 우의 있게 지냈고 전영창은 장기려 박사를 평생 거창고등학교 이사로 모시고 함께 했다.복음병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때 장기려는 당연히 전영창의 병원설립 업적을 알기에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설립자로 잘못 소개하는 것을 듣고 이를 정정한 것이다. 당시 전영창은 거창고등학교일로 서울출장 가는 선약 때문에 부득이 행사에는 불참했으나 그의 부인 조금순 여사를 대신 참석케 했고, 그 자리에서 설립자 공로패는 자신이 받아야할 것이 아니라 전영창 선생이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정정해 준 것이었다. (‘거창고등학교 이야기’(배평모 편저, 도서출판 한걸음, 2000년), 전성은 선생의 증언’)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복음병원의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며, 초대원장은 차봉덕 원장이고, 복음병원 설립일자는 1951. 1. 1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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