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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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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길 목사

고신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업,사회복지석사), 사)소망호스피스연합회(회장), 소망의집(원장), 천상소망요양병원(대표)




6. 복음병원의 설립일, 설립자, 초대원장 문제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살펴 본 복음병원 설립자와 설립일자, 초대원장 문제들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객관적 자료들을 살펴 봄으로 현재의 복음병원 연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부터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말미에 가서 전영창의 탄핵사건을 밝힘으로 역사왜곡의 실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전영창 탄핵사건 이후 복음병원 역사를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재편집하다 보니 병원설립일자가 뒤로 밀려나게 되고 설립자는 물론 초대원장까지 삭제 또는 왜곡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진료소 설립일자를 정확히 밝히게 되면 설립자와 초대원장 문제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고 역사도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1) 우선 현 복음병원의 설립일이 1951. 6. 21일이 아니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951. 6. 21일은 어떤 날인가? 이 날은 전영창이 한상동,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장기려를 찾아가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청원하고 장기려 박사가 이를 수락 한 날이다. 
    전영창과 함께 복음진료소를 1951. 1. 15일 개원했던 차봉덕 원장은 산부인과 의사였기 때문에 전쟁 후 외상환자의 수술 등 외과적 치료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병원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 장기려 박사는 흔쾌히 이를 수락하고 그 달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사직 하고 1951. 7. 2일 복음진료소로 부임을 했다. 
    그러므로 1951. 6. 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여전히 제3육군병원에 근무할 때임으로 당연히 복음진료소 설립일자가 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6월 21일은 장기려가 복음병원에 합류할 것을 수락한 날이다. 
    장기려도 1951. 7. 2일 제3영도교회 창고로 갔을 때 이미 그곳에는 복음진료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차봉덕 원장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 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 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p.269)

    즉 장기려박사가 제3영도교회에 왔을때는 이미 차봉덕이라는 의사가 복음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복음진료소는 당연히 전영창이 설립했던 그 병원이었다. 
    지강유철씨가 장기려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하다 보니 위와 같이 애매한 내용으로 기술하면서 장기려가 마치 복음진료소를 시작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게 된다. 
    그래도 차봉덕 의사가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 주었기에 전영창을 설립자로, 차봉덕을 초대원장으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주요 근거를 제시해 준 셈이다.

     2) 전영창 선생이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밝히고 있다.
    현재의 복음병원 연혁에서는 경남구제회의 설립일은 1951년 1월까지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영창 선생은 평소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말했고 그의 장례식 때 연혁보고에서도 복음병원의 설립일을 1951. 1. 15(월)로 밝혔다.(전성은 저, 전영창 전집2, 미루그래픽스, 2013년)

    복음병원 설립일은 설립자가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경남구제회 설립일과 복음진료소 설립일이 같은 날 동시에 설립이 되었는지 아니면 몇 일간, 또는 몇 달간의 시차를 두고 설립이 되었는지는 전영창선생의 관련 문헌 외에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전영창선생의 인격과 삶으로 볼 때 그 분의 말씀과 장례식 때의 연혁에 근거해서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제54회 경남노회(1951. 3.6~8일)에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가 승인되었다.  
    1951. 3. 6일 개최된 제54회 경남노회 촬요에 의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승인하고 각 교회는 연보하여 구제회(부산시 광복동 고려신학교 내)로 보내 주시되 연보는 4월 29일 주일 일제히 하여 주기로 함”이라고 결의되어 있다. 
이 경남노회 촬요를 볼 때 경남구제회의 설립일은 1951년 3월 노회 이전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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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노회록 사진


     4)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의 증언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은 복음병원의 설립은 아버지 전영창 선생이, 그리고 병원 설립도 1월 달이었음을 증언했다.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전북 무주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가 1951년 1월 말경이었고, 산위에는 눈이 많이 와 있었으며 그때 아버지가 병원차를 타고 가족을 데리러 왔더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귀국(1951. 1. 9)후 복음진료소를 개원했다. 그리고 그 해 1월 말경에 가족들이 빨치산들의 위협 속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의 이사를 위해 전북 무주로 오셨다. 이때 타고 온 차량(봉고형 승용차)에 복음진료소 이름과 병원 표식이 있었다. 이때는 산에 하얀 눈이 많이 있었던 추운겨울 1월 말경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무주를 떠나 진주로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뗏목을 타고 진주 남강을 건너 마산을 거쳐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그때 병원에는 차량이 2대가 있었다. 그 중에 한 대를 타고 전북 무주까지 오셨다, 그렇게 이사를 온 나는 영선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을 하고 5학년 때 까지 부산 영도 병원천막에서 장기려 선생님과 직원들과 함께 같이 생활을 했었다”(2014. 5. 19. 경남 거창에서 전성은 선생이 김세중 목사, 고명길 목사에게 증언) 

    그러므로 전영창의 복음진료소는 1951년 1월 말 이전에 개원한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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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


    5) 복음진료소 맹숙희 간호사의 증언(함양 서상 대남교회 권사, 1930. 2.25일생)
    “복음병원 설립자는 당연히 전영창 선생님이십니다. 1951년 중순 경 전영창 선생님이 불러서 복음진료소로 갔습니다. 월급도 얼마 준다는 말씀도 없으셨고, 전 선생님과 같이 천막에서 생활했습니다. 숙소가 없으니까 낮에 수술했던 수술실 바닥을 씻고, 거기에 전 선생님의 신혼이불을 깔아 주면서 자게 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때 병원 창고에 가니 난산 분만 때 쓰는 ‘분만감자’라는 기계가 있어서 “저 기계가 왜 창고에 있느냐?” 라고 물으니 “장기려 박사가 부임하기 전 차봉덕 의사가 근무할 때 가져와서 사용했던 기계들이다. 나중에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가 부임한 이후에는 쓸 일이 없어서 창고에 두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삼 년을 같이 근무했는데 어느 날 전영창 선생님이 억울하게 쫓겨났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60년 가까이를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간호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맹숙희 너는 꼭 살아서 전영창선생의 억울함을 풀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맹숙희(1930. 2. 25일생) 간호사는 그 후 같이 근무했던 김종렬과 결혼하여 지금 함양 대남교회에서 은퇴 권사로, 남편은 은퇴 장로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맹숙희 간호사(조산사)는 당시 24살 처녀 때였으니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외의 많은 증언들을 해 주었다. <2014. 5. 19,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로길 27-14 맹숙희 김종렬 자택에서, 김세중, 고명길 목사에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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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맹숙희간호사 증언.jpg05.맹숙희(함양서상 대남교회).jpg 6-2 맹숙희간호사 증언.jpg

 복음진료소 맹숙희 간호사  



    6) 차봉덕의 조카 차진실 사모(남편 박희천 목사, 내수동교회)의 증언
    차진실(당시 16세)은 차봉덕의 조카로서 피난시절 고모 차봉덕과 함께 살았다. 
“1951년 겨울에 전영창 선생이 초량산부인과로 찾아와서 복음진료소를 같이 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 권유에 따라 차봉덕 고모님은 영도로 가서 복음진료소를 개원했고 그때 산부인과 기구들도 그곳으로 가져가서 진료를 했어요. 그때 당시 복음진료소는 전란 중의 피난민들과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영창과 고모인 차봉덕 의사가 시작했지요. 나중에 장기려 선생님이 오신 이후 다시 초량동으로 와서 차산부인과를 개원해서 저가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님 밑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했어요.”

    차진실은 나중에 한상동 목사님 소개로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과 결혼(한상동목사 주례)함으로 고모 집에서 독립하여 나왔고 나중에 서울 내수동교회를 목회하다 은퇴한 후 지금은 서울서 박희천 목사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다. (2015. 5. 29. 서울 마포구 토종동 138 박희천 목사 사택에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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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봉덕의 조카 차진실 사모


    7) 이재술 장로의 복음병원 설립자 및 초대원장 증언
    “전영창은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군과 유엔의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의약품과 구호품을 조달했다. 전영창은 유엔 CAC 민사위원회 경상도 팀 소속 노르웨이 의사 넬슨 씨를 만나 복음진료소 운영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넬슨 씨는 진료소 의약품 보조 조로 월 $500씩(1일 50인분)을 지원받아 경영하기로 하고 직원 3명(女의사, 간호원, 총무)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였던 것이다”. (코람데오 닷컴)

    이재술 장로 역시 전영창을 복음병원 설립자로 여자 의사(차봉덕)를 초대원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8) 박영훈 장로의 복음병원 설립자 증언
    기독교보(2007. 6.9일자) 전영창 선생 추모사 중에서 “전영창 선생님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일영도교회(실제는 제3영도교회임)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 설립을 결심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 로 기록하고 있다.
박영훈 원장은 복음병원 설립 당시에는 학생이었다가 나중에 장기려 박사를 통해 의사가 되고 그 이후 복음병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도 복음병원의 설립자를 전영창 선생이라고 했다.

     9) 황영갑(차봉덕의 남편)목사의 자서전에서의 증언
    황영갑은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병원 초창기시절 순회 진료 담당의사로 지원하여 복음병원과 함께 하다가 나중에 차봉덕 의사와 결혼한 외과 의사였다. 그가 나중에 목사가 되어 “작은 불꽃”(1983, 류신각)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이 자서전에서 자기 아내 차봉덕 의사가 전영창선생의 권유로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도 한번 아내 자랑을 해 보려고 한다. 평양북쪽 사인당 근처 시골에서 나서 자라고 평양 정의여학교를 줄곧 기차통학으로 졸업한 차봉덕은 소학교 선생을 좀 하다가 큰 마음 먹고 가난한 농가이면서도 경성여의전을 응시하여 하늘의 별따듯 기쁨을 안았다. 한 이년을 다니다가 8.15가 되고 그 후는 집과의 연락이 어렵고 그래서 고학을 하며 고생고생 하여 졸업은 서울여자의과대학의 이름으로 6.25가 나기 이태 전에 겨우 마친 것이다. 당장 생활을 해야겠기에 인턴을 마치고 나서 부산에 내려와 초량 어느 이층에 방을 얻어 조그맣게 개업을 했다. 몇 달도 안 되어 6.25사변이 나고 피난민들이 밀려 내려오고...(중략)..., 피난 중에 만난 조카 4명을 거두어 고등학교 졸업 시까지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혼기도 다 놓치고 나와 결혼 할 때에는 사십을 바라보는 노처녀가 된 것이었다...(중략)...친구 신영희 형이 중매를 했을 때 내가 이미 그의 소문을 들어 대강 알고 있었고 복음병원을 처음 시작할 때 고 전영창 선생이 지금의 내 아내와 같이 시작했음도 들었다. 그래서 맞선 보던 그날 강원용 목사님 댁에서의 첫 인사를 하면서 이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뜻이라 믿고 결혼을 결심했었다. <황영갑저, 작은 불꽃 p.356~p.357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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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갑 자서전


    10) 장기려 박사의 증언
(1) 장기려는 “나의 생애와 확신” (<부산모임>제59호(1977년 6월 35쪽)에서 복음의원에 참여하게 된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후 부산 제 3육군병원에서 일을 돕다가 1951년 7월 부산 영도에서 전재민과 극빈자들을 위한 무료의원(복음의원)을 여러 분들의 힘을 얻어 개설하고 그 의원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때 나의 존경하는 전종휘 박사와 더불어 매일 100명 가량의 무료 진료를 하게 되었다”. 
즉 “여러분들의 힘을 얻어 개설하고”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분들이 협력했음을 밝히고 있다.

(2) 그의 전집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 홍성사, 2007)에서도 장기려가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사직하고 7월 3일 제3영도교회로 갔을 때는 이미 차봉덕 여의사가 설치 운영하는 복음진료소가 거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 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p.269), 
즉 이미 차봉덕 원장이 진료소를 설치운영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3) 장기려는 복음병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복음병원 설립자는 저 장기려가 아니라 전영창선생이다”라고 증언하였다.

복음병원은 병원설립 2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장기려를 설립자로 기려 공로패를 증정하자 장기려가 단상에 나와서 “우리 복음병원 설립자는 저 장기려가 아닙니다. 저기 계시는 조금순 여사님의 남편 전영창 선생이 설립하였습니다.”라고 정정 발표 하였다. 

전영창(1917년생)과 장기려(1911년생)는 평생 서로 존경하며 아끼는 동지로 지냈다. 장기려가 재정에는 재주가 없어서 모든 재정지원과 후원은 전영창이 맡았다. 복음병원을 암남동으로 이전할 때도 모금에 전영창이 앞장섰고, 복음병원 간호사 기숙사를 지을 때도 장기려가 전영창에게 부탁하여 ICCO라는 국제구호단체에 영어문서를 만들어 주도했고, 그 외에도 거제 건강원 건축 시에도 영어행정서류를 작성 지원했고, 두 사람은 평생 우의 있게 지냈고 전영창은 장기려 박사를 평생 거창고등학교 이사로 모시고 함께 했다.

복음병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때 장기려는 당연히 전영창의 병원설립 업적을 알기에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설립자로 잘못 소개하는 것을 듣고 이를 정정한 것이다. 당시 전영창은 거창고등학교일로 서울출장 가는 선약 때문에 부득이 행사에는 불참했으나 그의 부인 조금순 여사를 대신 참석케 했고, 그 자리에서 설립자 공로패는 자신이 받아야할 것이 아니라 전영창 선생이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정정해 준 것이었다. (‘거창고등학교 이야기’(배평모 편저, 도서출판 한걸음, 2000년), 전성은 선생의 증언’)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복음병원의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며, 초대원장은 차봉덕 원장이고, 복음병원 설립일자는 1951. 1. 15이었다. 



7. 전영창은 왜 복음병원을 갑자기 떠났을까?

    전영창에 대한 탄핵은 고신 태동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린 아픔의 역사이다.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들이 분리될 때 교회당의 재산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상동 목사가 초량교회당을 그냥 넘겨주고 나와서 삼일교회를 설립한 경우도 있었지만 곳곳에서 재산권 문제로 고소고발, 다툼과 분쟁, 아픔들이 있었다. 복음의원 역시 직원과 재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리고 더 넓은 장소로의 병원 이전을 모색하고 있는 시점에 당시 교단 인사들에게는 복음병원 재산권 문제에 대한 걱정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영창에 대한 탄핵도 고신의 태동이라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하면 그 때 상황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영창 자신은 결코 복음병원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인사들이 전영창을 탄핵할 때 그는 억울함에 3일이나 창고 문을 잠그고 단식기도를 드렸다. 전쟁 중에 귀국하여 병원을 설립하고 전재민들을 치료, 구제하던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쫒아 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고 추악한 행위였다.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복음의원)를 설립하여 활동했던 때는 1951. 1. 9~1953년 여름까지였다. 그가 설립한 복음진료소(제3영도교회의 창고, 초대원장 차봉덕)는 장기려 박사가 2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전종휘 박사 등이 합류하면서 하루에 진료인원이 50명이 아니라 100명 200명으로 늘어 갔다.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여 복음진료소의 장소를 영선초등학교 옆 공터로 옮겨 3동의 천막을 치고 피난민 구호와 지역의료, 농어촌 순회 진료 등으로 계속 발전해 갔다. 그해 1951. 12. 23일 당국으로부터 ‘복음의원’ 병원개설 허가도 받았다.

    이때 복음진료소 개설과 복음의원 개원 등 모든 운영은 전영창이 총괄 책임자였다. 법적으로도 미국 기독교구제위원회 한국 지회 격이었던 ‘경남구제회’ 전영창이 병원의 대표자였고 이 사실은 당시 교계 인사들도 다 인지하고 있었다. 
    진료원장은 장기려였으나 병원의 총괄 업무와 운영은 전영창의 몫이었다. 요즘 병원 조직으로 보면 전영창이 복음병원의 설립자요 대표요 이사장이었던 셈이다. 영어에 능통한 전영창은 미군부대와 유엔군을 찾아다니며 각종 구호품과 의약품을 확보해서 피난민들을 구제하고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즉 복음의원은 치료와 구제를 동시에 수행한 의료기관이었다. 당시 환자들만 진료할 뿐 아니라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옥수수가루와 우유로 죽을 만들어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52년도에 고신교단이 출발(1952, 9, 2, 진주 성남교회)되고 고려신학교와 교단이 발전해가는 시점에 복음의원 또한 넘쳐나는 환자들로 영선동의 천막병원(3개동)으로서는 한계에 부닥친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료진료로는 병원경영상 한계가 있었다.
    마침 말스베리 선교사가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건축 자재를 복음의원 건축을 위해 후원을 약속하자 복음의원은 고신교단에 마땅한 부지와 건축비 도움을 요청한다. 이것이 복음병원과 고신교단이 관계되는 첫 번째 고리가 된다.

    이때 고려신학교의 이전도 필요했던 터라 학교와 병원을 짓기에 적합한 땅을 물색한 곳이 바로 지금의 암남동 34번지였다. 1만3천 평 땅에 복음의원 5천 평, 신학교 8천 평을 사용하기로 하고 건축모금을 시작했다. 부지 구입선금을 지불하는 데는 부산남교회 한명동목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부지구입 헌금으로 인해서 복음병원은 고신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게 된다.
    전국교회가 힘써 헌금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영어에 능통했던 전영창이 앞장서서 미국의 후원교회와 교단들에 모금을 했다. 고신교단 교회들이 1백만 환을 헌금하여 모금하고 말스베리 선교사가 미국 선교부에 3만 달러를 후원받는 등 건축이 어렵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교단과 병원이 확장해 가는 시점에 전영창에 대한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음의원은 법인소유도, 교단소유도 아닌 무소유 상태였다. 어쩌면 ‘경남구제회’ 대표요 복음의원의 운영을 총괄했던 전영창 개인소유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다.
    고려신학교 역시 오랫동안 한상동 개인 명의로 있다가 나중에 교단 재산에 편입되었던 것처럼 복음병원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교단 분리 시 교회당 소유권문제로 아픔을 겪고 있었던 때라 소유권의 문제는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고신교단에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한상동목사가 고려신학교를 이것은 내 개인 재산이요 라고 주장하지 않을 분이었던 것처럼 전영창 역시 복음병원은 내 것이요 라고 말할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영창을 품고 감당할만한 인사가 고신 내에서는 없었다. 그의 인간됨과 꿈과 인격을 품지 못한 교단 주요 인사들은 복음의원을 더 이상 전영창에 맡길 수 없다고 판단을 하고 그를 배제하기 위한 탄핵 구실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단의 000목사가 미국의 후원교회 대표와 함께 밤 9시경 복음의원을 불시에 찾아와서는 재정장부 일체를 압수(?)하고 회계감사를 강제하고 그 감사결과 전영창이 복음의원이 지원받은 약품들과 의료기계들을 국제시장에 팔아서 축재를 했다고 하고서는 사임을 강요하게 된다.

    이에 전영창은 “나는 결코 의약품이나 의료기를 후원받아 그것을 국제시장에 내다 팔지 않았다. 있을 수 없다. 나는 오직 환자들을 치료하고 구호하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혼신을 다해 충성 했을 뿐이다. 억울하다”고 결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영창은 병원 창고(3개의 텐트 중 하나)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상위에 성경책을 펴서 읽으면서 억울함을 기도로 호소하였다. 이때 간호사 3명이 들어가 전영창 선생을 붙잡고 울면서 “선생님 너무 억울합니다. 이럴 수 없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당시 전영창 선생이 맹숙희 간호사를 부르더니 “창고 문을 열쇄로 잠가라 나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만 하겠다.”라고 하고서는 3일간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단식)기도를 했다. 근무 중 문득 생각이 나서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여전히 양반자세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맹숙희는 “전영창 선생의 청빈과 검소한 생활로 볼 때 그 분은 결코 축재하실 분이  아니었다. 전영창선생의 억울함을 언제가는 풀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오늘에야 가슴에 한을 풀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다.(2014. 5.19. 함양 서상면 자택에서)

    “당시 전영창 선생님은 저를 초빙해 와서는 간호사 기숙사가 없자 저녁이 되면 복음의원 수술실 바닥에 선생님의 신혼이불을 깔고서는 자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병원 천막이 3개가 있었는데 한 동은 병원으로, 또 한 동은 직원 기숙사로, 또 한 동은 전영창 선생님 가족과 장기려 박사가 같이 기거하였습니다. 사모님은 가족들과 병원직원들 양말까지 직접 바느질로 꿰메어 신고 다니게 했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했는데 부정축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축재를 해서 더 나은 살림살이로 사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전영창 선생님은 너무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쫓겨났습니다.”<맹숙희 간호사 증언>

    “저희 아버님은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시절, 그리고 거창고등학교 시절에도 스스로 도장을 찍어 결재를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모든 서류나 장부는 담당 직원들로 하여금 직접 관리케 하고 자신은 장부를 작성도 결재도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구호품으로 받은 의약품과 의료 기구를 국제시장에 팔아 부정축재 했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아버지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요 수치였지요.”(전성은 증언)

    그래도 000목사 외 인사들은 전영창을 축재혐의로 몰아붙이고 결국 1953년 노회에서 회계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영창을 복음병원에서 파면할 것을 청원했고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당시에 전영창의 탄핵에 대해 조수옥, 전성도, 황철도, 김상도, 안용준, 최일영 목사가 그럴 수 없다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영창의 파면을 강행하자 이에 대한 항의표시로 안용준 목사가 교단을 떠났다고 한다.

    또한 전영창의 파면에 격분한 복음의원 직원들(특히 간호사들)도 전영창을 파렴치한 장물애비로 만드는 것에 대한 항의표시로 장기려 박사 외 몇 분을 제외한 전원이 사임을 하여 전영창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 맹숙희 간호사도 이때 복음의원을 사임하고 떠났다. 1953년 가을이었다. (김종렬 장로, 맹숙희 간호사 증언)

    복음의원은 전영창이 떠난 이후에
    1957. 5. 28. 복음병원 신축 이전(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 건평 240평)을 하고
    1961. 8. 27. 비영리 의료기관 복음병원 개설 허가(개설자: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1965. 9. 6.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병원재산이 편입되기 까지 전영창이 설립한 경남구제회도 무려 15년간 존속해 있었다.

    물론 전영창이 훗날 수요예배시간에 부산의 000목사를 직접 찾아가 예배를 같이 드리고 모든 교인들이 다 나간 후 예배당 가운데서 서로를 껴안고 울면서 화해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000목사는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전영창 선생이 1953년 가을 복음의원을 떠나 서울로 쓸쓸히 올라가 다시 컨콜디아 신학교에 유학을 떠나고 1956년 귀국하여 폐교직전의 거창고등학교를 맡아 기독교 명문 고등학교로 세워가기까지, 그리고 그가 59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우리 고신교단은 그에게 한 번도 복음병원 설립자로 공적을 치하 하거나 인정을 해 드린 적이 없다. 

    그는 평생 동안 그렇게 떠난 고신과 복음병원에 대해서 섭섭함을 표현하지 않고 초월적인 자세로 살았다. 자신이 미국서 가져온 5천불이 복음병원 설립 시드 머니가 되었음과 설립 당시 차봉덕 의사를 모시고 온 상황이나 축출될 때의 억울함을 충분히 토로할 수 도 있었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침묵하였다. 어쩌면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그의 높은 신앙인격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신 교단은 전영창 선생에 대한 명예회복을 한 번도 해 드린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복음병원 역사의 기록도 어정쩡하고 애매하게 왜곡되게 기록하여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복음병원 창립기념일이나 교단창설 기념일 때 지금이라도 그의 후손들을 불러 전영창의 초기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와 복음병원 설립’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고 인정해 드린다면 그의 명예도 회복되고 우리 교단이 그동안 섭섭하게 해 드린 것에 대한 다소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사료된다. 



8. 결어 : 전영창과 차봉덕의 복권은 가능할까?

    당시 고신의 일부 인사들이 전영창을 파문하고 축출한 그 이면에는 교단 초기 신사참배라는 문제를 겪으면서 장로교에서 축출 될 때 교회당 재산 등 기득권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나와서 외롭게 고신교단을 형성해 온 선배들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는 일견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가진 분들이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의 설립자인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에게도 꼭 같은 종류의 아픔을 주었다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요 아픔이다.

    전영창의 이름을 복음병원 역사에서 축소 또는 지우기 위해서는 장기려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장기려를 초대원장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차봉덕의 이름도 자연히 복음병원 역사에서 지워졌고, 복음병원 설립일도 어정쩡한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진실해야 한다. 
    전영창을 복음병원 설립자로, 차봉덕을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으로 원상복구 한다 해서 우리교단과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의 명예나 위상에 조금도 흠이 될 일이 없다. 
    장기려 박사는 장기려 박사대로 초창기 복음병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기려 박사는 자신이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이라는 말을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전영창을 설립자라고 했고, 자신이 제3영도교회에 왔을 때 이미 차봉덕이 복음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전영창을 배제하기 위해 역사를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벌써 두 세대가 지난 지금은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할 때이다. 초창기 자신의 전부를 바쳐 헌신했던 분들의 명예는 이제 회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나 역사 앞에 그리고 그 후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일 것이다.

    반세기도 훨씬 지난 지금 교단설립자 한상동 만큼이나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도 함께 그 공적을 인정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 간다면 교단과 복음병원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그 후손들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확신한다.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역사 바로 세우기] 복음병원 누가 언제 설립했나?(3)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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