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사역의 위기와 희망: 더 깊게, 더 낮게, 더 오래 가는 청년사역
배준완 목사(서울서문교회 청년부)
1. 머리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
지난 15년간 나는 서울 근교의 신도시와 강남 지역에서 대학생 연령의 청년부를 담당하면서 청년 세대의 영적 변화와 흐름을 지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최근 3년간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위상 하락과 더불어 청년들의 급속한 영적인 쇠락을 절실히 느낀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말씀에 대한 무지이다. 3년 전 청년 리더들과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리더들 중에 구약성경은 고사하고 신약성경을 제대로 일독한 친구들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로서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학생들이 아브라함을 모르는 것이다. 그 중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알아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출애굽기를 공부 할 때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셉을 통해 이집트로 건너가게 된 것부터 이야기하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요셉을 모르고 있었다. 출애굽기 서두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요셉을 모르는 세대”가 눈앞에 앉아있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이다. 누가복음을 공부하면서 탕자 이야기가 나올 때는 그래도 탕자는 알고 있으려니 했는데, 정작 내가 “탕자를 모르는 탕자”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놀랐다. 나름 한국에서 세속적으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아왔다는 청년들이 성경에 대해서는 이토록 무지한 현상을 보면 한국교회 청년들의 영적인 현주소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몇몇 교회의 청년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브라함을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 탕자를 모르는 탕자들, 요셉을 알지 새로운 세대들, 이런 현상은 특정 지역 특정 교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2. 영적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청년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많은 분들이 청년들이 처한 사회적 요인, 교회 외적인 요소들을 지적한다. 물질적 풍요가 만들어낸 사회 구조적이고 시대적인 악과 장애물들이 주원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풍요의 시대에 자라난 청년들을 말씀으로 가르쳐 무장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열정적인 일꾼으로 세우는 것은 더 힘들다.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입시와 경쟁에 길들여져 청년들에게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시키기에는 큰 장애가 있음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다. 우리나라의 입시교육이 청년들에게 스스로 진지한 독서를 할 여유를 주지 않고, 또 갈수록 치열해지는 취업경쟁으로 청년들의 삶이 더 고단하고 팍팍해 진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시험과 학점관리와 스펙 쌓기에 치인 청년들은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쿨”(cool)하고 “핫”(hot) 경험들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그러니 더더욱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말씀에 대해서 무지해져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캠퍼스 선교단체들이 힘을 잃고 죽어가도, 사회 분위기가 그렇고 시대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학생 선교단체들이 활기를 잃고 죽어가는 캠퍼스에 이단들이 더욱 세력을 확대해 그 자리를 메우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단에 빠진 청년들과 상담을 하면서 놀란 점이 있다. 바로 이단들이 청년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킬 때 상당히 많은 시간의 “헌신”을 요구하는데도, 그들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났던 한 청년은 불신가정에서 자라서 대학에 입학하면서 한 이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나와 만난 첫 만남에서 대화를 시작한 지 30분이 되지 않아, 이단의 교주를 “메시야”로 고백하고, 목사인 나에게 성경구절을 줄줄 들이대면서 자신의 사상을 담대하게 전했다. 내가 그 이단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니, 왜 기성교회가 그것을 문제 삼는지에 대해서 나름 변호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불신친구를 일 년 만에 신앙고백(?)은 물론 전도(?)와 나름 변증학(?)까지 가르쳤단 말인가?
이처럼 이단들은 불신 청년이라도 전도해서 지속적으로 1-2년 정도 “훈련”을 시켜, 열렬한 추종자로 만들 뿐 아니라 이단사상을 전파하고 다니는 “선교사”로 만든다. 그런데, 똑같이 경쟁 속에 피곤하고 바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이단들이 청년들을 다루는 방식과 그 결과가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교회나 선교단체와 왜 이토록 차이가 나는가? 문제의 원인을 단순히 시대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과 같은 청년 사역의 위기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교회가 지금까지 청년사역에 접근한 전략과 태도, 즉 내부적인 요인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 않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청년 사역이 쇠락한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청년들에게 소위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너무 복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다. 많은 청년사역자들이 가지는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아이들은 조금만 진지하고 깊이 있게 성경을 가르치면 못 알아듣고 금방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재미와 흥미와 자기중심적 만족을 요구하는 청년들의 입맛에 최대한 맞추려다보니, 성경 본문의 깊은 의미를 길어내서 전달하는 강해 설교나, 교리를 진지하게 해설하는 설교는 제쳐두고, 부담 없고 다루기 쉬운 메시지에만 치중하게 된다. 그 결과는 청년들이 영적으로 다양한 영양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패스트푸드”에만 그 입맛이 길들여져 버려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린다는 것이다.
오래 동안 청년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재미있는 사실은, 교회에 오래 다닌 친구들 일수록 다소 “딱딱하고 진지한” 설교를 소화하기 힘들어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반면에, 교회에 그야말로 처음 나오는 새가족들이나 기존 교회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들은 설교가 조금 길고 내용이 생소해도 의외로 진지하게 경청하고 반응한다, 이는 설교 후 소그룹 나눔 시간에 설교 내용에 대한 이해와 적용을 구체적으로 질문해보면서 일관적으로 발견한 현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닌 청년들일수록, 청년들의 입맛에 맞춘 가볍고 자극적인 메시지에 훨씬 더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들은 가볍고 자극적인 메시지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더 깊고 묵직한 본질적인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한 달에 한 번씩 모대학원의 실험실 학생들과 식사하면서 대화하고 상담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확인한 사실이다. 80% 이상이 불신자들인 대학원생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주로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던 내용을 성경구절 인용만 빼고 거의 그대로 전한다. 그런데 불신자들인 대학원생들 다수가 그 메시지에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한다. 때로는 개인적 상담을 요청해오면서, 목사인 나에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고민과 아픔을 털어놓기도 한다. 청년들이 목회자나 교회로부터 듣기를 기대하는 것은 세상에서 어디에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인생의 본질을 건드리는 이야기, 복잡하고 어렵고 정답을 찾기 어려운 현실 속에 분명한 확신과 방향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3. 더 깊게, 너 낮게, 더 오래가는 청년사역
교회안의 청년들이 영적인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져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보면, 청년들이 교회 공동체와 “고립”되고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특히 요즘 청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세대가 함께 드리는 공예배와 청년예배(모임)에 모두 참여하기보다, 낮예배만 참석하거나 청년부서 자체 모임에만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주일 낮예배만 참석하는 청년들은 헌신과 훈련 없이 그저 설교 청중이나 설교 소비자로 남는 문제를 야기 시킨다. 그러나 청년예배(모임)에만 참석하는 청년들 역시 말씀과 함께 성례가 베풀어지고 교회의 치리에 따라 세대와 세대가 함께 어울려 예배하는 공예배로부터 단절되는 한계가 있다. 이런 단절이 주는 영적 손실은 심각하다. 청년들의 예배(모임)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간의 거룩한 대화로서 예배의 공교회성을 잃고,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하나님이 애드립을 쳐주시기를 기대하는 예배로 쉽게 전락한다. 예를 들어, 청년들끼리 모이는 예배에는 찬양인도를 주로 청년들이 자체로 준비하는데, 선곡하는 찬양들이 그 때 그때 기분(?)에 맞는 찬양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마땅히 올려야 할 영광이나 공동체의 영적인 필요와 회중들 사이의 영적인 교통에 대한 고민과 관심은 결여된 채, 오직 내 문제, 내 관심, 내 눈물, 내 아픔 등등 ‘나’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찬양곡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예배의 형식을 띠지만 참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예배라기보다, “자아 숭배”(ego-cult)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위험이 있다. 청년들은 아직 영적으로 불안정하고 많은 것을 윗세대로부터 전수받고 배워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청년들이 ‘자신들끼리’만의 예배 속에 고립되어서 교회 안에 흘러내려오는 풍성한 신앙의 전통과 유산, 지혜를 배우고 경험하고 소통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청년사역의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내적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청년사역은 공교회성을 강화시키고, 예배의 참 본질을 회복하며,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어 신앙의 전통과 유산이 아름답게 전수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의 청년사역은 어떤 프로그램이 청년들에게 먹히는가, 어떤 메시지와 어떤 목사가 청년들에게 통하는가, 어떤 찬양이 요즘 가장 핫(hot)하고 청년들에게 어필이 되는가와 같이 "What"에 강조점이 주어졌다. 향후 청년사역에서는 단순히 “어떻게”(know-how)나 "방법론적인 무엇“(methodological-what) 보다, “왜(Why)”와 “어떤 자세로(attitudinal-how)”라는 본질적 질문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부사를 사랑하신다”는 청교도들의 말처럼, 나는 이러한 청년사역의 전략적 원리를, “더 깊게’, ‘더 낮게’, ‘더 신실하게’ 라는 세 가지 부사로 표현하려 한다.
더 깊게: 말씀과 성례, 신앙고백에 충실한 청년사역
먼저, 이 시대에 청년사역은 ‘더 깊게’ 이루어져야 한다. 청년들의 문화와 세태가 얕고 가벼워질수록 교회의 사역은 오히려 더욱 깊이 교회의 본질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교회의 뿌리가 되는 성례와 말씀, 그리고 교회의 유산인 신앙고백에 충실하는 것이다. 시대와 문화를 분별해서 수용하는 것과, 유행하는 시대의 문화를 좇아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청년사역은 시대의 흐름을 지혜롭게 분별하고 문화적으로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유행하는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거나 좇아가서는 결코 안 된다. 도리어 시대정신과 문화 속에서 말씀의 가치에 위배되는 것들을 분별하고 저항하며, 때로는 시대를 역행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어야 한다. 시대의 풍랑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의 닻을 견고히 내릴 수 있도록 교회가 든든한 지대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1)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진리의 말씀이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넘어서, 공동체적 삶의 진리로 전해져야 한다. 우선,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더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요구된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청년 세대는 갈수록 논리적 설득으로도, 감정적인 호소로도, 웬만한 자극으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청년들이 공기처럼 매일 호흡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문화들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감각적이기 때문에 말씀과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영적인 욕구를 마비시켜 버린다. 그래서 영적으로 메말라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청년들이 생수를 곁에 두고도 생수를 찾지 않고 반응조차 하지 않는 “영적 좀비”같이 되어 버리게 만든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는 더욱 더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에 대한 깊은 확신을 선포해야 한다. 말씀의 능력이 아니면 청년들의 죽은 영혼의 껍질을 깨트릴 수 있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부분은, 오늘날 교회가 청년들에게 선포해야 할 말씀은 말과 입술로만 선포되는 진리가 아니라, 삶을 통해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진리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듯이, 구체적인 인격과 삶 속에 체화된 말씀(embodied word)이어야 한다. 즉,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삶으로,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 청년들이 그 말씀에 대해 서서히 조금씩 반응을 한다. 교회가 쇠퇴하는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깊고도 분명한 진리를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선포하되, 그 진리를 온 몸으로 살아가고자 부단히 몸부림치는 청년사역자들, 믿음의 부모들, 어른 세대들, 교회 공동체의 노력과 모범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이런 노력 없이 청년들에게 대충 좋은 말로, 대충 좋은 관계로, 대충 보여주기 식으로 접근해서는 이 시대의 영적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2) 둘째, 성례가 확고한 신앙 정체성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편이 되도록 시행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청년들은 무엇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회의와 냉소를 품고 살아간다. 급변하는 문화와 삶의 풍파 속에 뿌리가 없이 수없이 흔들리는 청년들이 깊고 견고한 신앙을 가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더욱 말씀과 더불어 성례와 성례교육의 중요성을 주목해야 한다. 성례는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다. 다른 어떤 실용적인 방법론이나 유행하는 프로그램보다, 성례는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달하는 ‘보이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의 신앙고백이 가르치는 바대로 세례와 성찬을 바르게 시행하고, 그 의미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세례와 성찬에 청년들이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알고, 더 온전한 믿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세례가 형식적인 차원을 넘어 우리의 믿음이 시작되는 자리라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 청년들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매번 세례가 베풀어질 때마다 세례자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전체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뿌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함께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특별히, 당회)는 세례가 바른 신앙 고백위에 엄중하게 시행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해 감독하고, 세례자들을 사랑과 기도로 지도해야 한다. 청년담당 교역자들은 세례 교육을 온 교회의 기도와 지원 속에서 더욱 철저하게 시행하되, 한번 반짝하는 단회성 교육을 넘어서 매 세례식 때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라는 신앙 정체성을 청년들이 다시금 확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청년들은 성찬에 참여할 기회가 자주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된 삶이라는 신앙의 신비를 기억하고, 고백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성찬의 유익은 믿음으로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받을 때 참으로 풍성하고도 강력한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청년들을 위한 설교 스케줄을 짤 때 주로 교회력에 맞추어서,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 좋다. 부활절까지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신앙고백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강림절 이후에는 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에 대한 메시지를 선택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때 늘 그 기초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메시지 위에 놓여 있어야 하다. 세례와 성찬은 바로 우리의 삶이 단순히 윤리적인 당위를 넘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존재론적인 변화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가르쳐준다. 사역자가 매 설교마다 이것을 설교를 통해서 강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청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윤리적 메시지를 들을 때라도 단순하고도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하는 삶의 신비를 경험하고 은혜에 동참할 수 있다.
(3) 셋째, 성찬과 더불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교리와 신앙고백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원의 기본적 교리,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십계명, 개혁교회의 유산인 신앙고백서들을 청년들에게 계속 가르쳐야 한다. 요즘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청년들에게 맞지 않은 낡은 전통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가르칠 때 급변하는 시대 속에 변하지 않는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의미의 전달이 필요하다. 그럴 때,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더 많은 것처럼, 개혁교회의 뿌리가 되는 신앙의 유산위에 든든히 서 있는 청년들이 급변하는 시대의 풍랑에 휩쓸리지 않고 더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다. 뿌리가 없으면 시대의 유행을 타고 흔들리지만, 뿌리가 깊으면 유행을 거슬러 깊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교회 쇠퇴 시대의 청년사역이 새로운 희망을 보기 위해서 더 깊은 뿌리를 파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포스트모던 문화 속을 살아가는 청년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회의와 의심과 두려움의 안개 속을 헤맨다. 수많은 질문과 정리되지 않은 혼돈스런 생각들과 가치관들을 안고 살지만, 교회
안에서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고, 속 시원한 답도 얻을 수 없기에,
혼자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교회 안에 있는 청년들 역시
분명한 확신과 가치관에 대한 정립 없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매주 예배는 꼬박 꼬박 참석하지만, 실제
삶과 사고방식은 교회 밖 세상 청년들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청년들이 복음에 담긴 소망의
이유와 복음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진솔한 질문과 대답 속에서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사도신경과 십계명,
주기도문에 대한 해설을 분명히 가르쳐야 하고, 교리 문답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더 깊이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청년들이 무엇을 믿고, 왜 믿는가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찾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이 제시하는 분명한 푯대와 기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더 낮게 : 세대와 세대가 소통하고 섬기는 청년사역
더 깊은 청년사역을 강조하면, 자칫 교회가 권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전통에 대해 청년들이 거부감을 먼저 느끼는 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교회는 청년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깊게 파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만, 결코 권위주의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태도는 청년들과 벽을 쌓고 단절의 골을 깊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1) 먼저,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가지되 권위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더 낮은 자세로 청년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청년들의 깊은 갈망과 불안과 질문들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한다. 청년들이 무엇에 회의를 느끼고, 무엇이 그들의 신앙과 영적인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빠진 교회는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잘 듣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다. 나이 든 세대와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는 특히나 더 어려운 도전이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마음, 성육신의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젊은 세대의 에너지를 교회의 소중한 자원으로 기꺼이 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윗세대가 성육신의 자세로 더 낮아져야 한다.
(2) 둘째, 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청년들을 초대해야 하고, 예배와 교회의 중요한 사역에 청년들이 자신들의 열정과 목소리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대와 세대가 함께 연결되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울 수 있고, 그 속에서 다음 세대를 길러낼 수 있다. 유학시절 내가 다녔던 한 미국 교회는 새로운 담임 목사를 구하는 청빙위원회에 각 세대별 대표들을 동참시켰는데, 거기에는 10대와 20대 학생도 포함되었다. 교회의 향후 30-40년을 이끌어갈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청년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미국 Christian Reformed Church에 속한 한 교회는 급격하게 ‘늙어가는’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교회 컨설팅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자문을 받고, 교회의 예배 기획팀에 신학공부를 하는 한 젊은 여성 댄서를 리더로 세웠다. 그 여성은 자신의 은사인 댄스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예전을 창의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교회의 신앙고백과 예전에 맞는 춤을 통해 예배를 섬기도록 훈련시켰고, 세대와 세대가 함께 소통하는 예배 공동체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윗세대가 낮은 마음으로 청년 세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3) 셋째, 청년들의 구체적인 필요들을 다각적인 방법으로 채워주려는 지속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갈 수 있는 영역과 방법은 너무나 많다. 성숙하고 지혜로운 어른들이 청년들을 위해 멘토가 되어 줄 수도 있고, 배고픈 청년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수도 있다. 일 년에 몇 번은 청년들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해서, 교회가 청년들을 사랑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 줄 필요가 있다. 이전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 청년들을 위해 여선교회에서 고기파티를 해 주었는데, 청년들이 고기를 먹으면서 다들 고마워하고 좋아하면서 “우리가 뭐가 이쁘다고 집사님들이 매번 이렇게 수고를 해 주시나”라고 되묻곤 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것임을 스스로 느낀다는 말이다. 해외 유학생 사역을 하는 한인 교회들에 청년들이 많이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에 가면 맛있는 한국식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늘 이런 구체적이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은혜’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교회가 청년들을 영육 간에 풍성히 먹이고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낮은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청년들의 발걸음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그동안 청년들을 여기 저기 교회의 필요한 곳에 ‘써 먹을 생각’만 했지, 청년들이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도록 초대하고 세워줄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다. 청년들은 경험과 생각과 신앙이 아직 미숙한 면이 많다. 그래서 교회의 성숙한 어른들이 청년들을 지도해 주어야 하고 기도로 도와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은 이미 청년시절에 길러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헌신되고 열정 있는 청년들에게 리더십을 경험할 기회를 과감하게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쇠퇴 시대에도 여전히 새벽이슬같이 주께 헌신된 청년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오래 : 더욱 신실하게 인내와 눈물로 뿌리는 청년사역
마지막으로 교회 쇠퇴 시대에 청년사역은 더 큰 인내가 필요하다. 더 꾸준하고 더 오래 더 신실하게 말씀으로 씨앗을 뿌리며 청년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교회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청년들은 교회의 목회자와 직분자와 같은 외적인 권위를 잘 받아들이지도 신뢰하지 않는다. 이런 청년들의 이러한 탈권위적, 반권위적 성향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이다. 이런 청년들에게 어떻게 믿음의 세대로 세울 수 있을까? 그것은 포기하지 말고 더욱 신실하게 인내와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방법 외에는 없다.
청년사역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사역”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청년 사역자에 대한 교회의 깊은 신뢰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탈권위적인 청년들은 어떤 사역자가 와도 처음부터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알아서 잘 따르지 않는다. 성장주의에 빠진 교회들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청년부를 성장시킬 “스타 목사”를 기대하고, 쉽게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자주 청년사역자들을 갈아치우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사역에 열정을 가지고 있고, 기본적인 성실성과 신학적 건정성, 목회적 소양이 검증된 사역자라면, 당장 눈에 띄는 변화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소신껏 청년 부서를 맡을 수 있도록 믿어주고 일정 기간 기다려 주고 지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매년 청년 사역자가 바뀌는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마음 붙일 곳을 찾을 수가 없고, 자기들끼리의 (탈권위적, 반권위적 성격의) “하부 문화”가 더 강화되어 버리는 현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교회가 소신을 가지고 지긋하고 신실하게 씨앗을 뿌리면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더라도, 청년들의 태도와 체질이 서서히 바뀐다.
오늘날 청년사역자들은 물론 청년들을 일으키고자 하는 교회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이런 난관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가가 문을 두드리고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인내와 신실함이다. 아무리 굳은 심령들이라 해도, 꾸준히 말씀의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결국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딱딱한 심령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요구된다. 결코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더욱 소망을 가지고, 성실하게 씨를 뿌리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지난 15년 가량 청년사역을 계속해 오면서 3-4년을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한 공동체를 섬겼다. 그렇게 3-4년을 계속해서 섬기다보면 맡은 청년 공동체가 해마다 조금씩 전년대비 출석수가 증가했고, 리더층도 단단해졌고, 공동체의 영적 체질이 강해졌다. 지금 맡고 있는 청년부서 또한 3년 전에 처음 와서 맡았을 때 청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하면, 목회자인 나를 무슨 상품 외판원이나 텔레마케터 대하듯 하는 청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수의 청년들이 내가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이며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청년사역에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 있어서라고 결코 생각지 않는다. 그저 교회가 믿고 맡겨 주신 청년들을 소신껏 인내와 성실로 가르쳤을 뿐이다. 사실 청년사역에는 특별한 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눈물로 씨를 뿌릴 수 있는 열정과 뚝심이 더 필요하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담대히 말했듯이,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어렵고 절망스러워도 하나님께서 구원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에게는 들을 귀를 열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우리 시대의 청년사역에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오늘날 청년 사역자와 교회가 견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은 청년들의 영적 상황의 암울함과 시대적 위기를 바로 직시하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비관적 낙관론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낙관과 순종으로 오래도록 한 길을 걷는 청년사역자들과 교회를 통해, 영적인 암흑기와 같은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춰지고, 주님의 청년들이 일깨워지는 역사가 지속될 것이다.
4. 맺음말: 시대의 어둠 속에 희망을 밝히는 예수 청년들을 꿈꾸다
청년사역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이다.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급속한 부흥의 축복을 경험했지만, 어쩌면 그에 못지않은 급속한 속도로 쇠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2000년 역사를 통해 기독교적 기반을 사회와 문화 곳곳에 든든하게 세워 온 서구 교회들과 달리, 한국 교회는 신앙적인 가치와 유산을 사회 속에 제대로 남겨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가 더 걱정스럽고 더 암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한국교회가 청년들과 다음 세대에게 2000년 교회의 풍부한 전통과 유산을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면, 어른 세대가 청년들을 일깨우기 위해 더 큰 희생을 감수한다면, 그래서 청년 사역이 더 깊이, 더 낮게, 더 오래 갈 수 있도록 지원과 배려와 섬김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는 아무리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라도 여전히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신실한 예수 청년들을 통해 어두워져 가는 조국 교회가 어둠 속에 빛나는 새벽별을 다시금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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