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설교'입니다. '설교하지 마'라는 말처럼 설교가 희화화된 시대입니다. 목사들은 설교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설교에 목숨을 걸라'는 말마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도 목사의 설교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설교여야 합니까? 지금도 여전히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을까요? - 편집위원장
성희찬 목사
마산제일교회 담임목사
예장 고신총회 헌법해설집 발간위원회 위원
노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목사 임직과 이를 위한 고시(考試)이다.
임직(任職)은 어떤 사람을 교회의 공적 직분에 엄숙히 구별하여 세우는 일인데, 장로와 집사처럼 목사 임직은 교회 안에서 중단되지 않고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사람은 바뀌어도 그 직원들의 직무는 통상적으로 항상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 직원의 이름을 항존직원(恒存職員)이라고 부른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항존직원이라는 명칭은 직원의 시무가 종신 혹은 70세까지이기에 붙이는 것이 아니다. 항존직원 중에서 특별히 목사의 직무는 말씀의 봉사이다. 말씀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항상 통상적으로 있어야 할 직무이다.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는 선포되는 말씀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비록 교체된다고 할지라도 이 직무는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합법적인 과정이 없이 말씀의 사역자의 직분을 자기 스스로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교회의 직원을 세우시며 특정한 사람을 직원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을 확신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서 합법적인 절차를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청빙이 있는가(당회와 공동의회를 통해)?
둘째, 고시(시취)에 합격하였는가?
셋째, 임직에서 진실한 서약과 안수가 있는가?
목사 임직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1645년)는 “모든 말씀의 사역자는 임직 위원인 설교권을 가진 노회원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며 안수함으로써 임직되어야 한다.” 라고 규정함으로써 목사가 임직하기까지 고시, 서약 및 안수 등 임직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권한은 개체교회에 있지 않고 전체 노회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노회가 이 일을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엄중하게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목사로 임직될 사람은 사도들의 규칙에 따라서 삶과 목회적인 능력에서 충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임직할 자들과 청빙하는 교회에서 검증을 받고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
그 중에 목사고시는 목사의 정당한 소명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중요한 절차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어느 노회에서 고시부의 부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고시부 부원으로 배정된 첫 해에 몇 사람이 목사고시에 응시하였다. 성경주해, 논문, 설교 등이 고시과목이었다. 그런데 응시자들이 성경주해로 제출한 과제물을 보고 너무나 실망하였다. 내가 보기에 주해본문의 원문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원문성경을 갖다놓고 펼쳐보고 읽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서 나는 성경주해를 할 때 성경주석을 참고하였는지 여부와 또 참고한 주석이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이들이 하나같이 참고한 주석은 그랜드 종합주석, 호크마 주석이었다. 제대로 그 본문의 권위 있는 주석을 참고한 사람이 없었다.
그랜드종합주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목사 초년 시절 시골 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그 교회 장로님이 머리에 떠올랐다. 설교자인 내가 강단을 비울 때 그 장로님이 내 대신 권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참고로 보는 주석이 바로 그랜드종합주석이었다. 신학공부를 하지 않아서 다른 주석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장로가 그래도 권면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보는 주석을 신학을 공부한 목사 후보생이 설교자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목사고시를 치르는 중에 목사고시 과목인 성경주해에서 권위 있는 주석 한 권을 참고하지 못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즉 성경주해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정중하게 다시 성경주해 과제를 해 올 것을 주문하였다.
설교 역시 목사고시에서 중요한 과목이다. 그런데 당시 소속한 노회에서는 설교 본문과 성경주해 본문이 서로 달랐다. 성경주해와 설교 본문이 같으면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성경주해를 어떻게 하였으며 또 이를 토대로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연관성을 가지고 볼 터인데 이 점이 아쉬웠다. 아니 이상하였다. 성경주해 따로 설교 따로 하는 것은 설교자의 소명을 평가하는데 아주 비효율적이었다. 성경주해와 설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설교하는 시간의 분량을 10분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도대체 10분 설교 안에 무엇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발음이나 제스처나 설교기법 등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는 17세기 당시 설교 고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데서 검증이 되면 그는 섬길 교회로 파송될 것이고, 거기에서 세 날에 설교하고 교인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교인들을 세우기 위한 그의 은사를 시험하고 그의 삶과 행실에 대해 묻고 더 잘 알게 되는 시간과 기회를 가질 것이다. 설교의 은사를 시험하기 위해 정한 이 세 날 중 끝 날에 노회는 그 회중에게 공한(公翰)을 보내어 공적으로 낭독한 후 교회의 문에 게시함으로써 다음의 사실을 알릴 것이다. 즉 그 회중이 지명한 충분한 수의 회원들이 아무 날 노회에 출석하여 그 사람을 그들의 목사로 세우는 데에 동의하고 찬동함을 표할 것이며, 혹시 그렇지 아니할 경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다운 분별력과 온유함으로 이의를 진술할 것이다. 약정한 날에 그를 반대하는 정당한 이의가 없고 교인들이 동의를 한다면 그때 노회는 임직의 순서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 역시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에서 규정하는 대로 목사 고시의 설교 시험은 후보생을 청빙하는 교회에 고시부원들이 직접 가서 그 후보생이 공예배의 설교 시간에 직접 설교를 하는 것을 가지고 검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지금처럼 10분에 걸쳐 하는 설교를 듣고, 그것도 단 한 번 하는 설교를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평가하고 설교자의 소명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응시생이 많으면 부원들이 2명씩 짝을 짓든지 해서 이를 나누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시부원들 뿐 아니라 직접 회중들의 반응 또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 번은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 번 정도는 청빙하는 교회의 공예배 시간에 하는 설교를 고시부원이 제대로 엄격하게 평가하고, 청중들의 반응 역시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목사고시에 응하는 강도사들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할 때에는 주해를 공부하고 설교를 배우며 연습하였을 것이다. 그때는 이를 열심히 배우고 배운 대로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목사고시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상 형편이 없었다. 게다가 목사는 설교자이고 목사의 소명은 곧 설교자의 소명인데 이 소명의 정당성을 시험하는 설교 고시가 너무 느슨하다고 판단이 되었다.
근자에 요즈음 목사들이 성경주석을 사거나 소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주석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곧 성경해석과 주해와 설교에 치열한 관심이 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를 위해 강단의 품격을 높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단의 설교자의 소명을 확인하는 목사고시의 설교 기준을 지금보다 더 향상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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