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설교'입니다. '설교하지 마'라는 말처럼 설교가 희화화된 시대입니다. 목사들은 설교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설교에 목숨을 걸라'는 말마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웃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도 목사의 설교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설교여야 합니까? 지금도 여전히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을까요? - 편집위원장
설요한 기자
설교의 권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여러 의사소통 방식이 있다. 그중에 일방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수단을 꼽자면 TV나 라디오 방송, 책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거의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수단이 하나 더 있다. 게다가 TV나 라디오처럼 끌 수도 없고 책처럼 덮을 수도 없다. 즉 그 자리를 피하기도 어렵다. 바로 교회에서의 예배시간에 행하는 설교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과 더불어 해석되고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 교회 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설교의 내용들은 ‘이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일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다양하다.
은혜 받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해롤드 가핑켈은 “안녕하세요”라는 말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이웃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을 때 “뭐가 안녕한 것이냐”고 구체적으로 반문하고 그 반응을 살핀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별 싱거운 녀석을 다 보겠네”, “그냥 그런 것 뿐이에요. 별꼴이야.” 등의 반응이 나왔다.
한국 교회에서 “샬롬”과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중 하나는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왜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혹은 “어떤 부분에서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당혹해하지 않을까. 아마 질문자를 냉랭하거나 은혜 못 받은 사람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기억한다는 것, 만들어진다는 것
이전 주일의 설교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은 주일 당일 예배의 설교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런 것들도 사회학적 연구를 해 보면 매우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들어온 것 이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바로 전 주에 들었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들어왔던 내용들은 어느샌가 자신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매 시간 설교와 대화하는 사람은 그 대화의 결과가 자신의 언어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설교 내용이 점차 자신의 언어가 될 것이다.
사람은 일종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단순히 구성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사조로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다. 개혁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도 자신의 『개혁교의학』 1권에서 교의학적 작업이 자신의 신앙고백적 배경, 즉 일종의 전제를 두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여기서 설교의 중요성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설교자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이 공간에서 자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회중을 향해 어떤 소리를 발해야 하는가.
나는 설교를 어떻게 들을까
회중인 나는 설교를 어떻게 듣고 있을까.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첫째, 본문을 읽고 본문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이해하는지 혹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떠올려 본다. 여기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읽어 왔는가, 얼마나 성경을 알기 위해 기도해 왔는가, 얼마나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공부해 왔는가, 혹은 성경과 삶을 연결짓는 고민을 해 보았는가가 나타난다.
둘째, 설교는 그냥 들으려 한다. 이 말은 ‘설교자가 이런 성향을 갖고 있을 거야’라는 식의 어떠한 특정 전제를 갖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셋째,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경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성경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의 핵심 내용이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하나의 격언집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럴 때에라도 성경의 이야기에서 동떨어져서는 곤란하다.
넷째, 오늘날 나는 이 말씀을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담아낼 것인가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을 때 나는 그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순서를 정해 썼지만 설교를 듣는 동안 이 네 가지는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혹은 받아 적는 동안에 때로는 ‘아멘’을, 때로는 ‘의문’을 표출한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회중들이 어떻게 들을지 궁금해할까.
방송설교
나는 지금은 TV와 라디오에서 하는 방송설교를 거의 듣지 않는다. 방송설교를 듣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다. 설교를 방송이라는 형태로 송출하는 것이 예배와 분리된 설교라는 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설교의 내용이다.
말하는 대로 되는 신앙, 복의 신앙, 꿈의 신앙, 번영의 신앙. 이를 전파하는 설교가 TV, 라디오 방송을 통해 수도 없이 나온다. 한 기독교방송에 어느 목사가 나와 후원요청을 하는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선교사가 아직 들어가지 않은 고려인 지역에는 이미 방송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들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세계 각지에서 수십 년간 부흥회를 인도해 온 한 목사가 최근 실정법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목사는 대표적으로 번영과 축복의 신앙을 설파해 온 사람이다. 이 사람이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지역에서는 어떠한 기독교가 세워지고 있을까.
실은 이러한 번영신앙이 펼쳐지고 있는 공간에서 고민해야 할 것은 번영과 축복을 꿈꾸게 하는 각박한 사회가 아닐까. 고작 기독교는 현세의 축복이나 내세의 위안 정도를 제공하는 종교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하는지.
설교의 중요성, 그리고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일정 시간 동안 어떠한 내용을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 듣는 것은 교육의 차원에서도 굉장한 훈련이자 성장의 계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행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것이라면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영국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복음이 격하되고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이 사라져가던 시기에 “설교라야만 한다”고 외쳤다(로이드 존스, 『설교와 설교자』). 미국의 구약신학자 월터 부르그만은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고 외쳤다(월터 부르그만,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두 사람의 신학적 성향이 같지는 않다는 면에서 ‘어떤 설교’에 대한 고민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성경답게 선포하라’는 목소리를 동시에 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근래에 목사들의 설교가 교회 밖에서 회자되며 세간의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다. 비단 세월호 사건을 둘러싼 목사들의 설교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러한 경우는 있었다. 물론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다. 하지만 지금은 설교가 교회 내부에서도 비웃음당할 만한 것이 아닌지를 반성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가나안 성도(‘안나가’를 뒤집으면 ‘가나안’이 된다)의 증가는 단지 이들의 불신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설교를 어렵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설교가 ‘선포’가 되기를, 그리고 그렇게 들리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그 내용이 선포되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가 나타나 있다. 성경을 성경대로 전하고 회중에게, 나아가 사회에 기독교적 반향을 일으키는 설교를 어디서나 듣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 더 직접적으로는 목사의 존재 이유를 묻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지도 모른다.
“좋은 교회를 추천해 주세요.” 라는 질문이 점점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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