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문맥’이다
최근에 고신 교단지인 기독교보에 황대우 박사가 성경과 이단이라는 주제로 쓴 두 번째 글인 ‘교리적 이단과 실천적 이단’이 문제가 되었다. 기독교보 다음 호에 즉시 황 박사의 해명 글이 실렸고, 동시에 황 박사의 문제가 된 글을 비판하는 총회이단대책연구소 서영국 소장의 시론(“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이 같은 호수 다른 지면에 실렸다.
황대우 박사의 글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마천주교가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교리적 이단으로 분류될 수 없고....천주교를 구원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단으로 분류될 수 없다.’
서영국 소장도 이 표현을 주목하여 이를 비판하는 시론(“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을 썼다. 서 소장이 시론에서 쓴 것처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명시하고 있고, 마리아를 중보자로 주장하고 그의 동정녀와 무오, 승천교리를 가지고 있고, 잘못된 성경관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그릇된 구원관, 연옥교리 등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가 어떻게 핵심교리를 부인하지 않고 있다는 표현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찌 이단이 아니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였다.
서 소장의 말이 옳다. 천주교는 서 소장이 열거한 대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분명히 부인하고 있고, 이 점에서 천주교는 분명코 ‘이단’이다. 이는 평범한 기독교인의 상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황 박사는 분명히 교회의 일반 교인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되는 표현을 썼다. ‘기독교의 핵심교리’, ‘이단’의 개념을 황 박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학자로서 엄밀하게 좁혀서 자기가 원하는 주관적인 뜻을 주장하기 위해 이 오해의 소지가 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황 박사에게 아쉬운 것은 본인의 주장을 나타내기 이전에 이 용어의 표현이 일반 대중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글을 통해 그의 논지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사용하는 각 표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표현을 말하는 전체 문맥이다. 숲에 해당하는 문맥을 보면서 각 나무에 해당하는 각 표현을 이해해야 할 때가 있다. 서영국 소장의 시론은 이 점에서 조금 아쉽다. 더구나 그가 총회이단대책연구소 소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 박사가 사용한 문제가 되는 표현이 어떤 문맥에서 나왔다는 것을 안다면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 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황 박사가 쓴 두 개의 글을 읽어보면 황 박사는 서영국 소장이 열거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천주교가 분명히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고, 이에 대해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황 박사는 종교개혁 당시 천주교와 투쟁한 종교개혁가 칼빈과 부써의 교회론을 연구했기에 일반인 보다 훨씬 더 천주교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황 박사가 천주교의 교리를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 서영국 소장이 총회이단대책연구소 소장의 이름으로 황 박사를 비판할 때 황 박사가 마치 ‘로마가톨릭 옹호표현’을 했다고 한 것은 너무 과장되었다.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 마치 황 박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배척하는 것처럼 몰고 가서는 안 된다.
둘째, 다만 황 박사가 사용하는 ‘이단’이나 ‘기독교의 핵심교리’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훨씬 좁기 때문에 이런 오해와 불상사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 옳다. 황 박사가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삼위일체교리와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에 국한시켰다. 어디까지를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점은 학자든 일반 신자든 간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황 박사가 표현한 ‘반복음적 이단’ 혹은 ‘교리적 이단’은 적어도 이 두 교리를 부인하는 이단이라는 뜻에서 좁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황 박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단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승구 박사가 교회역사에 나타난 이단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이단(아리우스주의, 양태론, 세르베투스 등), 기독론적 이단, 성령론적 이단, 구원론적 이단, 교회론적 이단 등이다. 그는 여기서 천주교를 교회론적 이단으로 분류하였다. 그들의 미사와 화체설, 교황이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대신하는 행위,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문제 등을 문제 삼았다. 적어도 천주교가 가진 공식적인 교리를 볼 때 천주교는 삼위일체이단과 기독론적 이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이단이라는 개념은 학자마다 다를 수 있고, 다만 어떤 뜻에서 이단인지를 보다 더 자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이단은 모두 같은 이단으로 뭉뚱그려서 말할 수 없고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신중해야 한다.
셋째, 그리고 황 박사가 ‘천주교에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적어도 구원의 근거와 구원의 원천과 기원에 해당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천주교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황 박사에게서 아쉬움을 가진다. 구원의 원천이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기에 천주교에 구원이 없다고 감히 단언할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이루신 구원을 우리가 받는 통로이자, 교회에서 공예배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방편’ 혹은 ‘구원의 방편’에 해당하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가 천주교에서 심각하게 부패하고 훼손되었다는 점에서는 천주교에서는 구원의 길이 지극히 좁거나 지극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동시에 언급해야 했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천주교가 삼위일체교리는 부인하지 않기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천주교의 영세를 고신교회 총회(58회)는 인정하기로 가결하였다. 왜냐하면 세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경건이나 의도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제정의 말씀에 달려 있기 때문이고(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7장 3항), 세례는 누구에게든지 단 한 번만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8장 7항).
이단 문제를 다룰 때는 가능하면 표현도 적절하게 엄밀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점에서 황대우 박사가 비록 학자의 입장에서 사용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대중이 오해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는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서영국 소장도 황 박사의 글을 몇 가지 표현만 가지고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라고 한 것은 성급한 것으로 보인다. 표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문맥이기 때문이다. 몇 개의 오해 소지가 있는 표현을 가지고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표현과 사실은 진실과 거리가 멀 수 있다. 사람들은 겨우 두 개의 사실과 표현을 가지고 사실이라고 한다. 표현과 사실이 적어도 다섯 개가 모여야 진실이 된다. 표현과 문맥을 함께 봐야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서 소장이 그의 시론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교회가 이단을 논할 때 로마가톨릭에 관해 적그리스도라고 지적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배척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고백서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하였지, 로마가톨릭 자체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단 문제를 다룰 때는 결코 감정적으로나 허술하고 과장된 자세로 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정직하게 절제 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이 문제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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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하나님이 완성하신 구속사에 마리아 은총중재가 필요하였다면 성자 대속의 완전한 구속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러면 기독론에 결국 대속의 완전하신 충성과 승리를 부인하게 되니까 천주교에서는 기독론에도 잘못이 안되는가요?
그리고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면 천주교가 적그리스도 종들 아닌가요?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웨민의 이해는 천주교 자체의 우두머리를 기본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아는데
교황은 틀렸고 천주교는 이단이 아닙니까? 이게 정통신학(고신)의 천주교에 대한 이해입니까?
물론 전고신인의 신학적 이해는 아니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