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에 속지 말라
능력에 속지 말라. 능력과 실력, 있으면 좋다. 아니 있어야 한다. 하지만 ‘능력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실력을 갖추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실력을 갖춘 능력자를 ‘전문가’라 부른다. 뛰어난 실력자를 전문가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일은 정당하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그를 쉽게 만능인으로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한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다른 많은 능력도 갖추고 있을 것이라 속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때론 매우 해롭다. 흔히 탁월한 실력자를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인격과 인품도 훌륭할 것이라 기대하곤 하는데 이것 역시 과대평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능력과 실력이 좋다고 도덕적 성향이나 윤리적 자세까지 남달리 뛰어날까? 아니다! 단언컨대 능력과 인품은, 실력과 도덕적 성향은 완전히 무관한 별개의 문제다. 또한 한 분야의 능력자라고 쉽게 다른 분야의 능력자가 쉽게 되는 것도 아니다. 뛰어난 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정치적 역량도 탁월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공부를 잘 한다고 강의나 설교를 자동으로 잘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와 행정과 상담을 동시에 잘 해야 목회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목회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어패가 있지만 목회에 성공했다는 목사들 가운데 인품이 훌륭하다고 소문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목회 성공과 학업 성취도는 거의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학문적 실력과 훌륭한 인품이 목회 성공의 비결이거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런 현상이 정상적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대학 교수도 목사와 비슷하다. 실력 있는 교수라고 강의를 자동으로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강의를 맛깔나게 잘 하는 유명 강사라고 해서 모두 뛰어난 실력자인 것도 아니다. 머리에 든 지식이 많다고 잘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수려하고 감동적인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재주꾼들이라고 모두 대단한 지식꾼들인 것은 아니다. 한 분야의 능력자라고 인격까지도 훌륭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세계도 이와 비슷하다. 정치도 일종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기술은 때론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예술’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모든 사람을 속이는 현란한 마술’이 되기도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쉽게 속는 경향이 있다. 한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은 무엇을 맡겨도 잘 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요, 착각과 환상에 불과하다. 뛰어난 학자라고, 인정받는 검사, 판사라고 모두 정치를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분야건 어느 정도의 경륜을 쌓아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다양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하는 사람은 분명 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찾고 인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력자가 되길 원한다. 실력이 없어도 실력자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실력자들의 세상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보이는 실력에 따라 차별하고 이런 차별을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은 상대적 차별은 세상의 가치일 뿐만 아니라, 세상사의 이치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비교에 의해 상대평가 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최대 관심은 ‘더’와 ‘덜’에 있다. 시험을 잘 친 사람에게 우수한 성적을 주고, 우수한 성적을 받은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이것이 ‘더’와 ‘덜’의 세상 가치요, 이치다. 이런 상대적 가치 평가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기본적인 원리일 것이다.
세상은 ‘더’에 속한 사람을 소위 실력자라 부른다. 이들은 쉽게 민주주의 사회의 기득권층이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더’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인정과 보상을 동시에 받는다. 인정받는 실력자는 자신이 가진 ‘더’ 덕분에 세상적으로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수혜자다. 그는 자신이 받는 특별한 혜택을 자신의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당연시 한다. 수혜자들은 ‘더’ 좋은 혜택을 누리며 살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즉 무언가 ‘덜’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공감이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더’ 가진 것 때문에 ‘더’ 큰 혜택을 누리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덜’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기는커녕 때론 그들의 입장에 서는 것 자체를 혐오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기득권자들이 심심찮게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곤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갑질’이다. 이런 ‘갑질’을 혐오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갑질’하는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더’ 가진 기득권자들이 ‘덜’ 가진 사람들에게 갑질하는 세상이다. 갑질을 싫어하지만 좋아한다. 갑질 당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갑질하는 것은 좋아한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이유도 갑질 한 번 해보기 위해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갑질하는 실력자들에게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에는 안타깝게도 이런 실력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칭찬하고 과대포장해 주기만 바란다. 갑질하는 실력자들이 되기 위해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그 뛰어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하시고 또한 서로를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에서도 공평하시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더’ 가진 것으로 교만할 것도, ‘덜’ 가진 것 때문에 절망할 것도 없다. 오히려 ‘더’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우고, ‘덜’ 가진 자는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가치를 자신의 절대 기준으로 평가하신다. 비교를 통한 상대평가가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절대평가 하신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절대 가치를 주목하시고 ‘더’와 ‘덜’이 아니라 ‘좋은’과 ‘나쁜’으로 평가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자신만의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절대적 가치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사용에 따라 ‘좋음’이라는 선한 결과와 ‘나쁨’이라는 악한 결과를 차별하신다. 이것이 절대적 차별이다.
자신의 실력을 근거로 갑질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절대적 차별 앞에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능력은 선물인 동시에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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