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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1월 13-14일 열린 미래교회 포럼의 발제문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 편집자 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유산과 한국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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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락 교수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I. 들어가면서

 

II. 늦은 종교개혁과 긴 종교개혁

 

III. 제2치리서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

 

IV. 제2치리서의 거울에 비추어 본 한국장로교회

 

V. 나가면서

 

 

 

I. 들어가면서

 

지난 두 세기 동안 학자들의 관심은 종교개혁의 성패에 집중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은 성공한 사건이었나, 아니면 실패한 사건이었나? 이 논쟁은 주로 신구교 역사학자들 사이에 경계가 날카롭게 형성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을 ‘가장 심오한 정신혁명’, ‘세상을 깨운 위대한 역사적 과정’ 등으로 묘사하였고, 가톨릭 역사가들은 ‘긴 종교개혁(the Long Reformation), 또는 ‘개악(deformation)’으로 보았다. 스위스 종교개혁사가 메를 도비뉴(J. H. Merle d’Aubigné, 1794–1872)는 종교개혁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로 인해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고 보았으나, 19세기 가톨릭 신학자이며 역사가였던 요한 뒬링거(Johann Joseph Ignaz von Dollinger)와 요하네스 얀센(Johannes Janssen)은 종교개혁을 한 세기 후에도 정착되지 못한 실패한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독일 종교개혁에 대한 최근 역사학계의 평가는 도비뉴보다는 뒬링거와 얀센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듯하다. 1975년 독일 종교개혁의 성공여부를 논한 제랄드 스트라우스(Gerald Strauss)는 프로테스탄트 문헌을 이용하여 1570년대 작센 선제후국(Electoral Saxony)의 농촌교회의 상황이 종교개혁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교회 출석률은 낮았고, 교리교실은 더 열악”했으며, “예배를 드리는 자보다 낚시를 간 자들이 더 많았다. 설교가 시작되면 참석자의 절반이 걸어 나갔고, 그들은 목사의 간청을 듣지 않았다”. 로버트 스크라이브너(Robert Scribner)의 연구도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스크라이브너는 종교개혁의 영향이 교리나 신학에서와는 달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종교개혁이 일부 영역에서 신비적인 요인을 추방하는 데 성공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일상에 있어서는 영향이 미미하였고 사람들의 삶은 그 이전과 유사하거나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가톨릭과의 단절을 가져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새로운 신비적 요소를 도입한 경우도 있다고 보았다. 스크라이브너의 제자인 울린카 루블랙(Ulinka Rublack)은 그의 Reformation Europe에서 신교가 16-17세기 세계를 깨우기보다는 오히려 1650년대까지 중세의 우주관을 더 강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톨릭 역사가들은 ‘긴 종교개혁(the Long Reformation)’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해석은 루터의 종교개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최근 연구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크리스토퍼 헤이(Christopher Haigh)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성패에 대한 판결은 보류했지만 그 함축적 의미는 분명하다. 헤이에 따르면 종교개혁 직후 대다수 아이들은 교리문답에 대해 무지했고, 목회자들은 무능했으며, 성도들은 무관심하였고, 많은 개혁자들은 실패를 자인하였다. 캠브리지 대학 신학부 왕립석좌교수(Regius Professor)를 역임한 에이몬 더피(Eamon Duffy) 교수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종교개혁의 성공은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피에게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수많은 대중들의 저항을 받은 운동이었고, 성공적이지 못한 사건이었다. 대중들은 종교개혁가들이 추구한 노선을 따르기보다는 중세적 가톨릭 신앙과 생활과 문화에 집착하였고, 수도원의 해산과 중세음악과 도서관의 파괴는 종교적 격변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재앙으로 여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패논쟁에 참여한 신구교 역사가들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에 기초로 하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이 추구한 개혁은 단순히 교회와 교리의 개혁만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와 교리를 통해 총체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하였다. 종교개혁가들은 총체적인 사회개혁이 단시일 내에 이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긴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는 종교개혁의 성패가 단기간의 정착여부로 단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1천 년 이상 지속되어온 기존 교회의 제도와 사회의 문화를 바꾸고, 새로운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은 결코 단기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필연적으로 ‘긴 종교개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긴 종교개혁’은 실패한 운동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길 수 밖에 없는 운동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긴 종교개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유럽에서 가장 늦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완전한 정착까지 80여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교회 정치에 집중된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설명하는 세 가지 주된 범주는 교리(Doctrine)와 예배(Worship), 그리고 조직(Government)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들 세 부분에서 가톨릭의 전통과 결별한 사건이다. 또한 이 세 범주에서의 차이로 인해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7)의 핵심사상은 이신칭의(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 only)와 만인사제주의(萬人師弟主義,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다. 즉, 루터의 강조는 가톨릭과 다른 구원교리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 칼뱅의 종교개혁은 루터와는 달리 예배와 조직의 변화에 강조점을 둔 것이었다. 물론 칼뱅이 구원과 관련된 교리에서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정립된 칼뱅주의 5대 교리, 즉 TULIP은 인간구원에서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강조한 칼뱅의 신학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의 주장은 가톨릭과의 결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루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엄격히 말해 칼뱅의 예정설은 루터의 사상 이신칭의의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뱅은 보다 가시적인 부분 즉 예배와 조직에서 근본적인 구분을 제시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이 같은 칼뱅의 개혁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장로교회의 특징도 구원론보다는 예배와 조직에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종교개혁’ 기간 중에 스코틀랜드 교회가 총력을 기울인 영역은 완벽한 장로회제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장로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예배와 조직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장로교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주는 도전은 무엇인가?

 

 

 

II. 늦은 종교개혁과 긴 종교개혁

 

스코틀랜드는 유럽국가중에서 가장 늦게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합류한 국가이다. 루터가 95개조 항의문을 발표한 것이 1517년인데 비해 스코틀랜드가 신교국가가 된 것은 1560년이었다. 왜 이처럼 늦었을까? 변방국가여서일까? 16세기 초 스코틀랜드에는 대학이 세 개나 있었고, 매우 뛰어난 학자들이 많았으며, 대륙과의 학문적 교류도 많았다는 사실로 보아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사실 1520-30년대 스코틀랜드에는 이미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전파되었으며 순교자들도 나타났다. 그러면 이처럼 뒤늦은 종교개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스코틀랜드 사회의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16세기 스코틀랜드는 친족(Clan) 중심의 사회였고, 각 친족은 강력한 친족장의 지도아래 단결해 있었다. 저지대보다는 고지대에서 친족제도가 더 발달했으나 저지대도 기본적으로는 친족중심의 사회였다. 친족원들에게 있어 친족장에 대한 충성은 종교적 신념이나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 더 강력한 것이었다. 강력한 친족의 장들은 스코틀랜드의 주요 귀족이 되었고, 이들은 스코틀랜드 사회를 지탱하는 주요한 구조였다. 이 같은 사회구조는 친족장의 종교적 개종 없이는 친족원 개개인의 개종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 일부 귀족들이 신교로 개종한 것은 1540년대였고, 충분한 수의 귀족이 개종한 것은 1550년대 말이었다. 1550년대 제네바에 망명 중이었던 종교개혁가 존 녹스가 귀족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존 녹스가 제네바에서 귀국한 것도 신교도 귀족들이 ‘회중의 귀족들’(the Lords of Congregation)이라는 동맹을 맺고 정부에 무력으로 맞서면서이다. 종교개혁에 가장 우호적인 귀족은 강력한 캠벨 친족(the Campbells)의 친족장이자 4대 아가일(Argyll) 백작인 아치발트 캠벨(Archibald Campbell, 1507-1558)이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존 녹스의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로 성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의 군사적인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회중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어린 메리(Mary) 여왕을 대신해 섭정직을 맡고 있던 기즈 메리(Mary Guise)와의 내전에 승리하면서 1560년 종교개혁이 성취된 것이다. 1560년 8월 새로이 소집된 스코틀랜드 의회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담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s Confession)를 받아들이고, 교황의 사법권이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교황사법권 폐지법’(the Papal Jurisdiction Act)을 통과시켰다. 거의 30여 년이 넘는 긴 종교개혁운동이 첫 열매를 맺으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공식적으로 개혁교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단지 몇 개의 법률로서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관료적(Magisterial) 종교개혁을 추구한 국가에서는 종교개혁을 지지한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거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순수한 개혁을 추구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은 타협을 길 또는 점진적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루터나 칼뱅 그리고 녹스 등 거의 모든 종교개혁가들에게서 보인다. 녹스가 주도적으로 초안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난다. 제1치리서는 1560년 12월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첫 총회(general assembly)에서 통과된 교회조직에 대한 개혁안이다.

 

   제1치리서에서 가장 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시찰감독’(Superintendents)의 직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1치리서는 스코틀랜드 전역을 10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 시찰감독을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임명하신 목회자들이 특정 장소에 임명이 되고 그곳에만 계속 머무른다면 이 나라의 큰 부분이 교리가 없는 곳이 될 것이며, 큰 잡음이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분간(for this time) 이 나라에 있는 모든 경건하고 학식 있는 이들 가운데 12명 또는 10명(우리가 전국을 구분한 지역만큼)을 선택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현재 목회자가 없는 곳에 목회자를 세우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이 사랑과 돌봄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나라 곳곳에 고르게 전파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일은 사람들이 임명되어 그들에게 맡겨진 지방을 충실하게 여행하지 않는다면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시찰감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종교개혁 이전의 주교와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제1치리서는 시찰감독의 관할 영역을 ‘주교구’(Diocese)라 칭했으며, 기존의 주교구와 크기 면에서도 비슷하였다. 또한 제1치리서는 시찰감독에게 목사를 세우고, 시찰을 통해 교구 목사들의 목회를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주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은 봉록이 책정되었다. 이는 ‘사역자간의 평등’이라는 장로교회의 원리와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존 녹스가 당시 스코틀랜드 상황에 따른 점진적인 개혁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제1치리서는 시찰감독직이 ‘당분간(for this time)’의 직책, 즉 임시적 직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종교개혁가들은 “단순하고 무지한 이들”에게 “하나님과 참된 종교와 예배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알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고, 이를 위해서 전국적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시찰감독직은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시찰감독은 곳곳에 목회자들이 세워질 때까지 돌아다니는 일종의 순회목회자였던 셈이다. 녹스는 시찰감독직을 영구적인 직책으로 계획하거나, 기존의 주교 세력을 포용하기 위해 타협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순착륙을 위해 임시적인 조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고 바람직한 일이었다.

 

   제1치리서는 시찰감독직에 대해 구체적인 제한 조건을 두기도 하였다. 시찰감독들에게 주어진 핵심 임무는 순회와 설교였다. 제1치리서는 “그들 스스로가 설교자가 되어야 하고, 한곳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이는 시찰감독직이 주교직과는 완전히 다른 직책임을 말해준다. 또한 제1치리서는 시찰감독들에게 “이전의 게으른 주교처럼” 살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시찰감독직은 녹스가 ‘긴 종교개혁’을 예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녹스가 행한 또 하나의 중요한 타협은 종교개혁에서 세속권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제1치리서의 형식이다. 제1치리서는 형식상 총회가 의회에 청원하는 일종의 청원서 형태의 글이었고, 당시 의회와 추밀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던 주요 귀족들의 회의체인 신분회의(the Convention of Estates)에 제출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교회의 직책인 시찰감독의 선정권도 신분회의에 일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녹스가 당시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있는 귀족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 속에서도 녹스는 장기적으로는 교회의 독립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시찰감독은 신분회의에서 선정하도록 했지만, 이후 결원에 대해서는 그 관할영역의 목회자들과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은 시장과 시의회에서 선출되도록 하였다. 장기적으로 시찰감독은 공적으로 선출되는 교회의 직분이었다.

 

   또한 제1치리서는 <학교에 대해>라는 긴 문서를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녹스는 세속권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학교에 대해>는 교구학교, 문법학교, 대학교 등에 대한 체계와 교육과정, 조직과 행정 등을 담고 있는 스코틀랜드 교육체계에 대한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당시 교육기관은 교회의 기구로 인식되고 있었고, 학교에 대한 통제는 교회의 책임이었다. 녹스가 교육에 대한 세속권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능력만으로는 전국적인 공교육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전국적인 학교 제도의 설립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상교육 등은 세속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순수한 장로교회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1578년에 채택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에서이다. 이 제2치리서는 글래스고 대학 문학부 학장이었던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에 의해 초안되었는데, 그는 칼뱅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와 오랫동안 제네바에서 함께 동역한 인물이었다.

 

   제2치리서에 나타난 장로교회의 세 가지 주요특징은 “회의체에 의한 조직”(governments by assemblies)과 “사역자간의 평등”(parity between ministers) 그리고 “두 왕국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일컬어 “가장 잘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Church)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제2치리서가 규정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제네바 모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창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가 지리적 범주, 정치적 상황 등에서 제네바와 차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바는 조그만 도시였으나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국가였고, 언제든지 장로교회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왕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 속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스스로의 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III. 제2치리서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

 

제1치리서는 교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개별 회중은 자신들의 목회자를 선정할 수 있어야 하며, 교구는 자조(self-support)가 가능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1치리서는 여전히 기존의 주교 대신 10-12명의 시찰감독(superintendents)의 자리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벽한 장로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로회제도의 완전한 모습은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에서 나타난다. 이는 오늘날 장로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가운데 장로교회 정치의 근간이 되는 문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문서의 핵심을 알아보자.

 

1) “회의체에 의한 조직”(governments by assemblies)

 

장로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회의체에 의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주교제도 또는 감독제도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주교제도에 따르면 교회의 조직은 사람으로 구성되며, 조직을 구성하는 사역자들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가진다. 즉 주교제도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교구 신부를 최하위로 하는 피리미드형의 교회조직이며, 교황과 주교, 주교와 교구 신부 사이에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장로교회는 동일한 피라미드형의 교회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성요소는 사람이 아니라 회의체(eldership)이다. 주교제도가 교황과 주교 그리고 교구사제로 구성되는 피라미드형 위계질서를 가진 것에 비해, 장로회제도는 총회, 노회 그리고 당회로 구성되는 피라미드형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 총회의 결정은 노회들을 강제하고, 노회의 결정은 소속 당회를 강제하며, 당회의 결정은 회중을 강제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직후 모든 칼뱅파 교회들이 교회의 회의체 조직을 채택하였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보다 더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한 곳은 없다. 제네바는 독노회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부회의체를 가지지 못했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경우는 정부의 박해로 인해 전국적인 체계를 갖추는 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피라미드형 조직이 가장 잘 발현된 곳은 국가적으로 종교개혁을 이루고, 다수의 노회를 갖춘 스코틀랜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2치리서』 7장 2조에 따르면 장로교회의 조직은 4종류의 치리회, 즉 개별교회의 치리회인 당회(kirk assembly), 그리고 특정 지역의 치리회인 지역회(provincial assembly), 전국적 치리회인 총회(general assembly) 그리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국가의 회의체인 국제총회(assembly of all and divers nations)로 구성된다. 지역회는 바로 ‘노회’(presbytery)와 대체가능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제2치리서는 국제총회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장로교회의 국제적 연대 또는 가톨릭의 교황에 상응하는 회의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제2치리서는 모든 교회가 당회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작은 교회들은 3-4개의 교회가 하나의 ‘연합당회’(the communal eldership)를 구성할 수도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교구와 노회의 개념이 분명히 정착된 것은 1581년의 총회에서이다. 1581년 총회는 전국의 약 1천 개 교회를 600여 개의 교구(parish)로 나누었고, 각 교구에는 한 명의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작은 교회의 경우 2-3개의 마을을 묶어 하나의 교구로 만들었다. 이는 각 교구가 목회자의 생계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총회는 약 50개의 노회를 만들고 각 노회에는 12개 내외의 교구를 배정하였다. 그러나 노회의 조직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1581년 장로교회가 잘 수용된 저지대(Lowland)를 중심으로 13개의 노회가 조직되었고, 1593년까지 전국에는 47개의 노회가 세워졌다.

 

스코틀랜드에서 개별교회에 노회의 권한은 매우 컸다. 노회는 개별교회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노회는 “한 지역의 목사, 박사 그리고 지역의 장로들로 구성된 합법적인 회의”로서 “중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개별 당회에서 행하지 않았거나, 잘못 행해진 모든 것”을 바로잡고, 개별교회의 ‘직분자’(office-bearers)를 파면할 수 권한을 가졌다.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운 교회를 심는 것은 총회의 결정사항이었다.

 

2) 사역자와 사역자간의 평등(parity between ministers)

 

제2치리서 2장은 교회행정을 다룰 교회직분자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은 교회의 최고 통치자인 예수 그리스도 아래 교회를 통치하는 자들이다. 제2치리서는 신약성경에서 말씀과 교리의 사역자로 “사도, 선지자, 전파자, 목사, 교사”를, 치리를 위해 “장로”, 교회의 재산을 위해 ‘집사’를 언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중 “상시적인 네 직분”(four ordinary offices)은 목사(또는 주교)와 교사와 장로(presbyter or elder) 그리고 집사이다. 이는 영역에 따른 구분이었다. 제2치리서는 교회의 정치를 세 영역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교리(doctrine), 규율(discipline), 그리고 나눔(distribution)”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자는 이 세 가지 분류에서 나온다. “하나는 목사 또는 설교자, 다음은 장로 또는 치리자, 마지막은 집사 또는 나누는 자”이다. 이들 세 직분자는 ‘교회 사역자’로 칭해진다. “교회 내 독재를 없애기 위해 직분자는 형제들의 동의를 바탕으로 통치해야 하고, 동일한 권한을 가지며, 자신들의 기능을 가진다”.

 

   제2치리서는 사역자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람으로 구성된 종교개혁 이전의 주교제도는 교황과 주교 그리고 교구사제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칼뱅파 교회가가 이를 거부한 것은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필연적으로 권력남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종교개혁가들은 개인에게 주어진 권력은 쉽게 남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반면에 회의체 정부는 평등한 권한을 가진 이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였다. 치리회에는 회의를 주관하는 총회장, 노회장, 그리고 당회장이 있지만 그들은 가톨릭의 주교나 교구사제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상설적 존재가 아니라, 총회, 노회 그리고 당회가 열리는 동안만 존재하는 회의의 사회자(moderator)에 불과하였다. 사회자는 모인 모든 자들의 동의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는 직책이었고, 구성원들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무를 가져야 하는 자였다. 그는 부지런해야 하고, 회의를 잘 진행시키는 의무를 가진 자였다. 이는 목사만 사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없음을 의미하고, 실제에 있어서도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목사가 아닌 자들이 총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 사이에도 엄격한 평등이 존재하였다. 제2치리서는 “장로직은 사역자(목사)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기능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목사와 교사들의 역할이 말씀을 가르치고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면, 장로의 역할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말씀이 열매를 거두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장로들은 양 무리를 돌아보는 일을 해야만 했다. 장로의 주된 임무는 목사와 교사와 함께 치리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장로는 누가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한 지 점검하고 병자를 방문하는 데 있어서 목사를 도와야 했다. 한 회중에서 수 명의 장로들이 선출되었다면 “레위지파가 성전에서 봉사하듯이” 합당한 기간 내에서 휴무할 수 있다. 제1치리서는 제2치리서와는 조금 다른 언급을 하고 있어 흥미롭다. 제1치리서에서 집사는 매 3년마다 재선출되지만 장로는 매년 선출을 권하고 있으며, 주요 역할은 교인들과 목사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장로는 교회의 공적 업무에서 목사를 도와 판단과 판결을 해야 하고, 경건치 못한 교인들에게 충고하고 교정해야 하며, 목사의 삶, 태도, 근면, 공부 등에서 충고하고 바로잡아야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제2치리서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역할은 차이만 강조되었다.

 

3) 두 왕국 이론

 

역사적으로 교권과 세속권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어왔다. 항상 힘이 강한 쪽은 자신들이 상대방의 영역에도 간여할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고, 힘이 약한 쪽은 두 영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분명히 분리되어 있으므로 한 쪽이 다른 영역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역사적으로 두 권력은 ‘두 정부’ 또는 ‘두 왕국’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왕국간의 갈등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존재하였다.

 

4세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 내 교리문제에 간섭하며 여러 가지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제국 말기의 단성론 문제나,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나타난 성상문제에 있어서 황제들은 교회의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자 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공회(council)의 표결에 압력을 가하거나 공회의 결정을 뒤집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교황을 체포하여 구금하기도 하였다. 이에 반발한 5세기 교황 레오 1세(Leo Ⅰ, 440-461)는 당시 단성론 문제로 교회 일에 간섭하는 마르키아누스 아우구스투스(Marcianus Augustus, 396-457)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정반대 현상이 발생하였다. 서양 중세사회가 기독교사회가 되면서 교회의 대표 격인 교황의 권위는 세속군주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황제나 왕들은 교회 문제에 간섭하다가 대부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당시 교회의 파문은 세속권의 정당성을 흔들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반란을 초래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세속권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카노사의 굴욕>은 1075년 독일(당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 1053-1105)가 교회문제에 개입하다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Ⅶ, 1073-1085)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그로 인해 제후들의 도전을 받게 되자 사흘 간 눈 속에서 맨발로 교황에게 용서를 구한 사건이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Henry Ⅱ, 1154-1189)도 교황에게 도전하다 비슷한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교황의 권력은 세속권으로 하여금 교회 간섭을 못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며, 명백한 세속정부의 일인 황제선출에까지도 관여하였다.

 

세속권이 교황으로부터 세속권의 독립성을 강변한 것은 중세 말이 되어서였다. 중세 말에 세속권의 독립을 강조하는 많은 사상들이 나타났다. 파리의 장(Jean de Paris, 1255-1306),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Patavinus, 1275-1342) 등이다. 파리의 장을 인용해보자.

 

왕권과 사제권 중에서 어느 편의 권위가 앞설까? …

 

사제가 절대적 의미의 권위에 있어서 군주보다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매사에 있어서 위대하다는 것은 아니다. …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는 세속적 권위는 영적 권위보다 위대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한 편이 다른 한 편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두 권력 모두 하나의 최상의 권위인 신의 권위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위의 권위가 상위의 권위에 매사 예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중세 말 결국 권력은 다시 세속권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교황이 프랑스 왕의 포로가 되어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기는 일도 나타났다. 아비뇽 시대(1309-1377) 교황은 사실상 프랑스왕의 하수인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교황청의 아비뇽 포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황권을 누른 세속군주들은 그들의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왕권신수설은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니 왕은 그 책임을 오직 신에게만 지는 존재이므로 백성과 교회는 왕의 일에 간섭하거나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었다. 왕권신수설은 피지배민에 대한 사상인 동시에 교황권에 대한 사상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종교개혁 이전에도 두 왕국 간의 갈등은 존재하였고, 이 갈등은 중세 정치사상이 발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물론 두 왕국이 항상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8세기 후반 가톨릭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는 교권과 세속권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어 단합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았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그의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신국과 지상국을 구분했을 때도 그는 두 왕국의 대립적인 관계보다는 두 왕국이 각각 어떠한 운명을 가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였을 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 없는 로마제국이 왜 멸망할 수밖에 없는지, 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신국, 즉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답하고자 하였다.

 

두 왕국, 즉 세속정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은 교회의 시작과 함께 제기된 문제였지만 종교개혁 당시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아니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루터는 교회를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교회의 독립은 보이지 않는 영역 즉 양심과 관련된 부분에서이고, 보이는 부분 즉 설교, 성례, 행정 등은 가시적이므로 세속통치자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속 통치자는 교회의 정치(polity)에 대해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전제적인 세속권에 대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결과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성공을 위해 제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로마가톨릭교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세속군주들에게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주어야만 했고,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외치는 농민들을 박해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치리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루터와는 분명히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제2치리서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교회와 국가, 교회 사역자와 국가 통치자의 역할과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 스코틀랜드 섭정 모튼(morton) 백작이 형식적인 주교제를 부활시키려 하면서 제네바에서 갓 귀국한 앤드류 멜빌과 부딪히게 된 것이었다. 제2치리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제2치리서가 다루고 있는 두 왕국 이론은 앤드류 멜빌과 그의 조카 제임스 멜빌(James Melville, 1556-1614)이 제시했다는 점에서 ‘멜빌주의’(Melvillianism)라고 불리기도 한다.

 

제2치리서에 따르면 국가와 교회는 엄격히 분리되며 각자 고유한 통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세속군주는 국가의 통치를 담당하지만 교회는 그의 통치 영역 밖에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또 다른 왕국이므로 세속권력이 절대로 간섭할 수 없고, 하나님이 임명한 교회 직분자(church officers)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세속권력은 교회에 대한 어떤 권한도 없으며 다만 의무만 있을 뿐이다. 세속권력은 교회가 외부의 세력에 의해 위기에 처해졌을 때 칼(공권력)을 사용하여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속권력에게 정의와 교회의 보호를 위해 칼을 맡겼지만 교회의 일에 간섭할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반면, 교회는 세속통치를 위한 기구가 아니므로 교회의 직분자들이 통치의 영역을 직접 담당해서는 안 된다. 단지 교회가 세속정부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국왕의 실정에 대해 경고할 수 있을 뿐이다.

 

제2치리서에 규정된 이 두 왕국 이론은 1596년 총회장이 된 앤드류 멜빌과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James Ⅵ&Ⅰ, 1567-1625, 나중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됨)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총회 소집과 관련된 제임스 6세의 간섭에 격분한 총회장 앤드류 멜빌은 국왕의 소매를 당기면서 그를 ‘하나님의 어리석은 종이여!’라고 불렀고, 이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전하, 이 말을 꼭 해야 하겠습니다. 이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회입니다. 제임스 6세도 이 왕국에서는 한 명의 신민입니다. 왕도, 귀족도, 우두머리도 아니며, 단지 한 사람의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 우리는 전하의 지위를 인정하며 정당하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합니다만 전하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전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 심지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조차 줄 수 없으며, 그것을 빼앗을 수 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모이고, 교회의 이익을 위해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두 왕국 이론은 스코틀랜드에서 정립되었지만 스코틀랜드 교회만의 것은 아니었다. 잘 알다시피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칼뱅의 주된 싸움 대상은 교회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려는 제네바 시정부였다. 칼뱅은 세속권이 제네바 노회(Consistory)에 간섭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두 왕국이론의 원조는 칼뱅이었던 것이다. 칼뱅의 후계자였던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도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정통하였고, 앤드류 멜빌과도 긴 세월 교류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들의 영향이 크게 미쳤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정부가 교회문제에 대해서 교회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회에 간섭할 수 있다는 시각을 일컬어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라고 부른다. 이는 16세기 중반 하이델베르크 대학 의학부 교수였던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83)의 사상을 뜻한다. 당시 하이델베르크는 칼뱅주의자였던 팔라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515-1576)의 통치 아래 있었고, 제네바와 같이 엄격한 칼뱅주의 규율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이에 반발하여 에라스투스는 칼뱅파 교회 지도자들의 권력남용을 비판하고, 장로직과 교회의 파문권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권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기독교 국가에서 모든 강제력은 그것이 영적이든 또는 세속적이든 오직 한 곳, 국가에 의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의 치리권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멜빌주의와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여기에서 두 왕국 이론의 새로운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왕국 이론에서 교회는 과연 국가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것인가? 영역주권 이론이나 두 왕국 이론에 따르면 정부가 교회 일에 간섭할 수 없듯이 교회 역시 정부 일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해를 부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교회에게 허락되지 아니한 것은 신정정치(theocracy)이지 세속정권에 대한 조언까지 부인된 것은 아니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지 않는 자들에게 조언을 해야 하며, 조언을 끝까지 무시하는 통치자는 ‘언약위반자’로 간주하고 백성들에게 무력저항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칼뱅주의이다. 칼뱅파가 전파된 모든 곳에서 혁명과 내전이 있었다. 물론 장로교 저항사상이 가장 잘 발전된 곳은 스코틀랜드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사상가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과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이 저항사상을 정교하게 만든 인물들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왕의 권한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언약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 국왕 폭정을 행하면 이는 언약의 위반이다. 언약을 위반한 왕은, 국왕이 무력으로 참된 종교에 위해를 가한다면 저는 저항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폭정은 마귀의 것이므로 이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직전의 내전과 17세기 중반의 잉글랜드 내전은 찰스 1세(Charles Ⅰ, 1625-1649)의 독재와 박해에 대한 장로교 저항이론의 실현이었다.

 

 

IV. 제2치리서의 거울에 비추어 본 한국장로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와 학계 모두 이를 나름대로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곳곳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강과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고, 많은 이들이 루터와 칼뱅 그리고 녹스의 흔적을 찾아 비행기를 타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장로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의 스코틀랜드 교회가 남긴 유산을 얼마나 지키고 있을까? 세월이 많이 흘렀고, 세상과 교회도 많은 부분에서 바뀌었다. 아무리 종교개혁시대의 교회가 옳다고 해도 그때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주류가 장로교회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무엇을 공유하고 있으며, 무엇을 상실했고, 무엇을 발전시켰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형식을 받아들이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이 가졌던 장로교회 정신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노회문제>

 

노회는 장로회제도의 중심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노회의 기능이 사실상 실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이름만 장로교회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독립교회이다. 개별교회를 지도해야할 총회와 노회는 교회의 정치(polity)가 행해지는 곳이 아니라 교권모리배들의 정치(politics)가 행해지고 있는 장일뿐이다. 대부분 장로교단의 노회는 개별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별교회가 장로교의 모습을 잃어도, 개별교회의 목회자가 문제를 일으켜도, 개별교회가 노회의 결정을 무시해도 노회는 이미 이를 시정할 힘을 잃어버렸다. 대부분 경우 노회는 큰 교회의 눈치만 보는 형식적인 조직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개별교회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도 노회가 그 권한과 책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교회의 설교내용이 빗나가도, 성례가 빗나가도, 예배가 말초적이 되어도, 교회가 기업이 되어도 노회가 문제 삼는 일은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제2치리서에 규정된 노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제2치리서는 모든 목사, 교사, 장로가 노회의 구성원임을 규정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교회 정치는 역시 “노회는 합당한 말씀 사역자(ministers of the Word)와 교회치리자(church-governors)로 구성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목사와 모든 장로가 노회의 회원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오늘날 목사들을 당연직 노회원으로 여기면서 장로들의 경우에는 당연직 회원임에도 불구하고 ‘장로 대의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장로교의 근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로의 수가 너무 많아 노회의 모임이 어렵다면 작금의 노회를 세분할 필요가 있다. 실상 한국 장로교의 노회는 너무 않은 교회를 관리하고 있으며 이는 노회의 실제적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부분이다. 만에 하나 노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세 대결을 우려하여 장로들을 노회의 참석에 제한한다면 이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자들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노회와 교회시찰 문제>

 

노회의 주요 기능은 개별교회에 대한 시찰과 법정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제2치리서에 따르면 모든 치리회는 교회와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교회의 평안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사법권 아래 있는 교회나 회의체에 시찰(visitation)을 실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초기 스코틀랜드 장로교 노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시찰이었다. 그들은 2명의 이상의 시찰단을 조직하거나, 전 노회원이 참여하는 개별교회 시찰을 통해 개별교회를 감독하는 역할을 시행하였다. 노회는 특정한 교회의 시찰에 앞서 시찰일과 설교자를 정하였으며, 시찰 당일에 시찰단은 먼저 예배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을 실시하였다. 그 후 시찰단은 방문한 교회에서 목사를 제외한 당회원들과 모임을 갖고 목회자에 대해 감사를 행하기도 하였으며, 장로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사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당회의 기록 및 교회당의 상태와 재정문제 등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시행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시찰은 하루종일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의 노회는 그 산하에 시찰회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으나 시찰회가 그 기능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시찰회가 이웃 교회 목회자들 간의 친목회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지금이라도 진정한 시찰이 이루어지도록 특별 시찰단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교회를 시찰하고, 위반자에게 엄격히 벌을 내리는 것에서 노회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개척과 분립>

 

제2치리서에서 교회의 설립은 총회의 관할업무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노회의 규모가 작았고, 교회설립이 총회차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많아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만들어진 조항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1치리서에서는 이 일을 시찰감독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즉 노회의 관할로 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부분 교회설립은 개개인 목회자들이 시작하고 노회는 형식적 승인만 해주는 상황이다. 노회는 새로운 개척교회에 대한 타당성이나 개척 목회자의 자질을 검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개척교회가 어떠한 재정적 어려움을 갖고 있든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개척교회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고, 쉽게 생겼다 사라지는 경우가 부지기이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상황이 동네 구멍가게 하나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개척교회, 노회가 결정하고, 노회가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논할 여유는 없다. 참된 교회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오늘날 수만 명의 교인을 가진 교회가 있어도 노회는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고 있다. 노회는 산하교회들이 진정한 예배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교인수가 일정 수를 넘는 교회에 대해서는 분립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통제해야 할 것이다. 2017년 고신총회가 500명 이상의 교인을 가진 교회에 분립을 권고한다는 결의를 한 것은 다행이라 여겨진다.

 

 

<목회자 양성>

 

제2치리서는 “경건하고 학식 있는 자”를 목회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이후 비록 “경건하고 학식 있는 자”가 많지 않다 해도 그 기준을 낮추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차라리 잘못된 목회자보다는 아예 없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의 각 노회는 엄격한 잣대를 부여하였고, 이들이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다음에야 목회자로 수용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오늘날 한국장로교 역시 이론적으로는 같은 절차를 따르고 있다. 노회는 교단 신학교에 보내 훈련 받을 신학생들을 선정하고, 신학교는 각 노회에서 추천된 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이 형식적이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노회는 목회자가 되려는 이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제대로 된 검증절차를 통해 신학생을 선발하고 추천하는 노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각 교단의 신학교는 노회의 추천을 받지 않는 학생들을 입학시키기도 하며, 심지어 사후 추천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생을 모집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나 신학교를 갈 수 있고, 졸업만 하면 누구나 쉽게 목회자의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는 올바른 장로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노회의 철저한 검정과 노회의 추천을 받은 자만 입학시키는 전통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노회의 직무유기는 추천된 신학생들의 교육적 상황과 재정적 상황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노회는 훈련기간 중 위탁한 신학생의 성적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태만한 신학생에 대해서는 추천을 철회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신학생들이 재정적 어려움 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노회는 이 부분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재정적으로 어려운 신학생들은 학비를 벌기 위해 교회에 일자리를 찾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우리는 제대로 훈련받은 목회자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각 노회가 신학생들을 위한 기금을 만들고 지원을 행했던 것을 기억하자.

 

덧붙여 노회는 목회자들 간의 사례에 간섭해야 할 의무가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오늘날 같은 노회 내에서 목회자들 간의 사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례를 받는 반면,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는 본인의 굶주림은 물론 자녀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정은 은퇴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노회는 이러한 불합리를 시정할 의지도 힘도 없는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노회는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조사를 시행하고, 목회자간의 경제적 대우를 중재하여야 한다. 일정 금액 이상은 노회가 거두어 어려운 목회자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시찰이 중요한 이유이다.

 

 

<총회총대의 선출>

 

노회는 노회회원중 상회인 총회에 참석할 대의원을 선출하는 기능을 가진다. 16세기 후반의 스코틀랜드 교회도 완벽한 장로교 제도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교회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왕 제임스 6세는 때때로 여러 노회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원하는 이들의 이름을 밝히고, 총대로 선출되기 원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간혹 노회에 엄청난 하사금이 주어진 적도 있었다. 물론 총대를 사기 위한 것이었다. 국왕의 의도는 자신에게 순종적인 자들로 총회를 구성하고, 총회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교회정책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회는 국왕의 간섭에 항의하고 소신 있게 자신들의 총대를 선출하였다. 오늘날 노회에 대한 외부적 강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회의 총대 선출이 교회정치꾼들의 영향아래 들어간다면 이는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총대 선출이 총대의 역량 때문이 아니라 패거리 정치로 이루어지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총회의 기능이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것”인 만큼 노회는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회원을 선출해야할 의무가 있다.

 

 

<불의한 정권과 한국 장로교회>

 

잘 알다시피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질곡의 한국의 근현대사와 일치한다. 한국사회는 개항하자마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대상이 되었고, 일제는 민중의 자유와 재산을 수탈했을 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았다. 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받았고, 교회의 예배는 왜곡되었다. 교회의 저항을 받아 마땅한 폭정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결정하는 등 오히려 폭정에 협조하는 길을 택하였다. 나치 치하의 독일교회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해방 후 개발독재로 민중이 수탈당하고 민주주의가 질식되었을 때조차 한국 장로교는 아브람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영역주권론 아래 숨어버렸다. 교회의 영역과 정부의 영역이 다르며 서로 간섭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실상 이마저도 아전인수 격 해석이었다. 영역주권은 국가의 무소불위, 문어발식 권력남용에 대해 다른 영역에서의 독립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교회가 정부의 폭정을 눈감아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칼’을 함부로 휘두르는 자의 손에 들린 칼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직면한 문제와는 상이하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그리고 훨씬 더 복잡한 문제를 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 루터나 칼뱅의 문제보다 훨씬 더 위험하기도 하다. 교회의 사회참여가 극도로 신중해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바른 사회참여를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각 교단의 총회는 사회참여를 위한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해나가야 한다.

 

 

V. 나가면서

 

종교개혁은 긴 개혁일 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엄격히 말해 지난 500년간 교회는 개혁운동을 지속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개혁은 요원하고, 어쩌면 더욱 더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듯하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세습을 단행한 한 대형교회의 모습은 우리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습은 흉내 내었지만 그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은 낙심하지 않는 일이다. 모든 국가의 종교개혁이 긴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였다. 개혁의 후퇴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는 우리 역시 긴 개혁의 과정을 따라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지속적으로 개혁을 길을 가야 하는, 어직도 끝나지 않은 여행이다. 종교개혁으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들의 신앙을 ‘개혁신앙’(Reformed Faith)이라 칭한다. 협의로는 칼뱅파 교회와 칼뱅주의(Calvinism)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개혁주의”라는 용어이다.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길은 없다. 이는 분명 ‘reformed’가 아니라 오히려 ‘reformism’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reformed’가 완료된 개혁을 의미한다면 ‘reformism’은 항상 개혁하는 정신에 더 무게를 둔 개념이다. 즉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개혁교회를 도입하면서 앞으로도 개혁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정신도 같이 설정한 것이다.

 

진정한 종교개혁의 유산은 바로 개혁주의이다. 교회는 늘 타락에 열려 있다. 교회사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며,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는 종교개혁이 단회적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함을 말해준다. 세상의 종말까지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야 한다. 종교개혁을 현재진행형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바통을 이어받을 때 비로소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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