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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17.02.05 08:14

보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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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오전 심방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와 찹쌀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들을 읽고 있었다.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니 체격이 건장한 사람이 나를 보고는 겸연쩍게 인사를 한다. 그와 사무실 탁자에 마주앉았다. 다시 겸연쩍게 웃으며 제 인상이 조금 험악하지요, 한다. 인상이 범상치는 않아 보이는군요, 하고 답하고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구걸하러 왔다고 한다. 순간, 이 멀쩡한 청년이 지금 뭐라고 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이 일대를 돌고 돌았단다. 교회고 성당이고 가 볼만한 곳은 다 가보았단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핀잔만 들었단다. 멀쩡해 보이는데 일해서 돈을 벌면 될 것을 왜 구걸하며 다니느냐고 하더란다. 어떤 곳은 주민센터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면 도와줄 것이다, 이곳에 와서 이러지 말고 그곳으로 가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멀쩡해 보인다, 일하면 되지 않느냐, 무슨 사정이 있어 왔겠지만 솔직히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이런 경우 남의 사정 잘 안 보인다.
그러니 그가 말을 한다. 나도 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을 하기 힘들다, 여러 번 수술하여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다, 성한 곳이 없을 정도이다, 보여 달라면 보여주겠다, 어쩌다보니 주소도 말소되었다, 사실 주머니에 몇 만원 있다.
내가 물었다. 돈이 있는데 왜 구걸하느냐, 어디 특별히 쓸 데 있느냐. 그가 대답한다. 가지고 있는 돈은 차비할 것이고 구걸하여 생긴 돈은 며칠 생활비로 쓰려고 한다, 강원도 동해에 비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곳에서 며칠 지내며 앞날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다시 물었다. 앞날에 대한 대책은 있느냐. 없다고 한다. 내가 묻는다. 돌아다니며 얼마를 받았느냐. 한 푼도 받지를 못했다, 기사 식당에서 식사를 공짜로 한 것 말고는 다들 외면했다고 한다.
얼마나 필요한가 물었다. 2만 7천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정도면 가지고 있는 돈하고 합쳐 며칠은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노숙인 사역을 하던 시절, 아저씨들에게 자주 속았다. 간청하여 돈을 빌려 주면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런 경우 여러 번이다. 그래서 그때 세운 원칙이 하나 있다. 다른 방법으로 돕더라도 돈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다른 것이지만 돈을 주면 허투루 쓸 것 같다는 생각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저씨들이 간혹 교회를 돌아다니며 돈을 얻어내는 방법이랑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그 생각을 애써 억누르고 지갑에서 3만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혹 부산에 다시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소식지를 주며 그곳에 전화번호가 있다고 했다. 동해로 가는 길에 심심할 터이니 읽어보라고 했다.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변화는 뮈리엘 신부의 인간 보듬음에서 비롯되었다. 그 보듬음은 무조건이었다. 내 행동이 뮈리엘 신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냥 그가 말하는 처지를 그대로 보듬고 그것만 생각하려고 한다.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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