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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조완철 목사)가 2021년 5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단 전문상담가 3차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교수가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을, 로뎀장로교회 권기현 목사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의 위협 세력과 대처 방안’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본보는 두 강의안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장 주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 이단의 뿌리와 교회의 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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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들어가면서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바른 복음은 항상 거짓된 이단을 수반하였다. 이것은 이미 성경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갈 1: 8). 사도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요한 사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믿지 않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였다(요일 4: 2). 이와 같은 예들은 이단들이 거의 처음부터 교회 안팎으로 존재하면서 교회의 기반을 위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살았을 동안 교회 안에서 이단들에 대한 최고의 재판관은 당연히 사도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도들이 죽고 이단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 초대 교회는 여러 이단으로부터의 공격을 자신들의 힘으로 막아내야만 했다. 여러 이단 중에서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대표적인 이단들은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그리고 몬타누스주의이다. 여기에 대해서 교회는 신앙의 준칙(regula fidei, the rule of faith)을 확립하고, 감독(주교)의 사도권을 교회 내에 정착시키고, 정경을 확정함으로 응전하였다. 아주 단순화 시킨다면 이렇게 도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단의 공격에 대하여 초대 교회는 신조와 정경과 직분의 확립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이단(heresy)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에 이상한 교리를 더하여 혼합시키거나, 새로운 계시를 더하거나, 본질적인 교리를 빼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예가 영지주의이고, 둘째 번 예가 몬타누스주의라면, 셋째는 마르시온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이단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먼저 발생했던 이단들이며 사실 상 모든 이단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는 사도적 가르침 외에 비밀스런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주장하였고(과거), 몬타누스는 사도적 가르침 보다 더 신령한 예언(미래)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들과는 반대로 마르시온주의는 사도적 가르침에서 구약적인 요소를 빼버렸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신천지를 비롯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에 존재하는 이단, 사설, 혹은 신흥종교들은 다 이 카테고리 중 하나에 속한다. 따라서 초대교회가 이단들의 응전을 어떻게 연구했는가를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에 출현한 이단들은 교회에 아주 해로운 영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이단들과의 싸움 속에서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보다 명백히 하는 작업들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단들을 사용하셔서 교회 안에 있던 거짓 신자들과 가라지를 제거하고 교회를 굳건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도 이단들의 도전을 심각하게 생각하되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교회의 체질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1. 영지주의(Gnosticism, 1-2세기)

 

   영지주의라는 말은 헬라어 지식(gnosis)이라는 말에서 왔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지식을 통한 영혼의 우주적 구속을 가르친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신과 인간과 구원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역사적 선후관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사도행전 8장의 마술사 시몬이 최초의 영지주의자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는 거의 동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님과 사도들이 능력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을 때, 이단들은 그 계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더 확장시킨 것이다. 기독교가 헬라 문화권에 전파되어 영지주의자들에게도 소개되자 이들은 기독교의 교리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빌려서 자신들의 교리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영지주의는 기독교적인 색채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진리와 거짓의 혼합주의이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유대주의적 기원으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헬라 사람들은 기독교를 자신들보다 열등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종교 중 한 종파로 보았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유대인이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 헬라 사람들은 야만인에게서 진리가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가 비록 유대교에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의 어떤 진리들은 아주 매혹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기독교 안에는 생명, 말씀(로고스), 빛, 메시야와 같은 보편적 종교 사상도 있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개념들을 끌고 와서 그 당시 헬라문화에 끼워 맞추어서 복음의 진수를 변질시켰다.

 

   엄밀히 말하면, 영지주의는 이단이 아니라 다른 종교 혹은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도 있었다. 영지주의는 여러 분파가 많고, 교리도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서 영지주의의 교리들을 다 소개할 수도 없고 소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지주의의 중요한 몇몇 교리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대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특히 판타지나 공상과학 영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적어도 젋은이들은 알게 모르게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교리를 일반화 시킬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영지주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이원론에 근거해 있다. 이것은 그들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들은 특히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적어도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창조주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은 열등한 창조주인 Demiurge(데미우르고스)가 만들어 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교리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이고 현실도피주의적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들의 이원론적 신관은 교부들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교부들은 일관되게 하나님은 하나이며,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구원론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물질(육체)에 갇혀 있다. 따라서 이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참다운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득도(깨달음)를 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구원에 따르면, 진정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행함이 아니라 참 지식의 소유 여부에 달려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윤리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바라보았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이단들이 윤리적인 문제들을 많이 일으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식을 어떻게 소유하는가이다. 교회는 이 지식을 사도들과 그들의 후예들에게 이어진 가르침, 특히 성경에서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에 관한 참 지식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은 이 지식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만 비밀스럽게 전수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성경을 통해서도 증명될 수 있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또한 사도들이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서 온전히 알지 못하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그들은 도마복음과 같은 책들을 통해서 교회가 알지 못하는 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대중들을 선동하였다.

 

   영지주의는 진리란 책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음성(viva voce)에 의해서 전달된다고 보았다. 비록 성경을 통해서 진리가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영지주의의 살아있는 전통에 의해서 올바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성경의 진리는 문자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이 영적인 해석은 (사도들이 아니라) 영적인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계시되었다.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 안에 나타나 있지 않고 문자 밖에 감추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견해는 겉으로 보면 성경의 말씀과도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예수님도 천국의 비밀이 모든 사람에게 계신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영지주의는 세계관에 있어서 철저하게 운명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이론을 전파하였다. 악이라는 것은 자연 안에 원래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예: 천재지변이 어떻게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견해를 반박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초대교부들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강조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열정적으로 옹호하였다. 예를 들어 2세기 변증가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예정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반대로 인간의 자유가 지닌 한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후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이전의 교부들을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영지주의의 교리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할 뿐 아니라 너무나 생소해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가 왜 그렇게 유행하였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이 난해함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유혹적이었다. 논리적으로 차분히 보면 말도 안 되지만 그들의 교리는 아주 신비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더구나 처음에는 기독교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이 없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도 교회인체 하면서 그 당시 성공적으로 확대되는 기독교에 편승하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은 기존 교회가 가르쳐 줄 수 없는 것(계시의 범위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을 가르쳐 준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유혹하였다.

 

 

 

2. 몬타누스주의 (Montanism, 2세기 후반)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공통점은 참 지식이 이미 온전히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다른 점은 그 지식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전자는 교회를 통하여 공적으로, 후자는 특별한 사람들을 통하여 비밀스럽게 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반하여 몬타누스는 참 지식이 아직 완전히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며 자신이야 말로 참 지식의 전달자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그룹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예언”이라고 불렀다. 사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 시대로 완전히 끝났는가 아니면 “새로운 예언”이 계속되는가는 그 당시 아직 교회적으로 결정이 나지 않는 문제였다. 구약 시대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선지자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언급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 신약은 미래의 종말에 대해서 완전하고 분명한 가르침을 다 담고 있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지에 대해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종말이 제자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지연되자 교회는 점차 제도적 교회로 변했고 성도들의 삶은 이전과 달리 많이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활력은 점차적으로 상실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몬타누스는 자신이 참 예언자라고 주장하면서 재림의 임박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 모든 신자들에게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브리스길라(Priscilla)와 막시밀란(Maximilan)이라는 두 ‘선지자’도 가담하였다. 이들은 특히 시한부 종말론자들이었다.

 

   이들의 금욕주의적인 삶은 교회의 세속화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많이 포섭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서방교회의 최초의 교부라 불리는 터툴리안이었다. 처음에 이 운동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당하지 않았으나 성경의 권위 보다 예언자의 권위를 더 높이게 되자 최종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당하였다. 이들의 소망과는 달리 정해진 날짜에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이 운동의 추종자들은 역사 속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누스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전을 주고 있다. “성령님께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수 없는가?” 예를 들어서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물론 우리는 예수님도 그 날을 몰랐다고 쉽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께서 몰랐을까? 그럼 예수님의 신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몰랐다면 어떤 의미에서 몰랐을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때가 되면 자신의 참된 제자들에게 알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꿈과 계시로 자신에게 계시를 전달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제는 그런 일을 하시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답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점 더 몬타누스의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3. 마르시온(Marcion, 160 경)

 

마르시온의 신학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 구약에서 묘사된 하나님, 특히 징벌하시고 원수를 갚는 하나님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마르시온의 해결책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관련된 구절이 있으면 삭제하였다. 그는 바울을 대단히 존중하였는데, 4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만을 받아들인 것도 그가 사도 바울의 조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주의적 기원이 있는 제3장 이전의 탄생 이야기는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성경을 구성하였다.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가 기존의 성경에 어떤 가르침을 더한 것이었다면, 마르시온은 정 반대로 성경에서 본질적인 부분들을 삭제하였다.

 

마르시온의 질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너의 적들, 심지어 아내들과 아이들까지도 죽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은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가, 모세인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는가?

 

더 나아가 마르시온은 이 세상을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보았다. 악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였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열등한 신 데미우르구스가 창조하였다고 보는데, 당연히 이 창조와 데미우르구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이 구원은 금욕을 실천함으로써(육체는 악이니까)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성찬에서 포도주를 금하였고, 결혼도 금하였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도 마르시온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가상의 육체를 취했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오늘날 마르시온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교회 안에는 마르시온적인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는 성경의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거나 그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성경 전체의 교리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면서 신약이 구약보다 월등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통전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부분적이거나 파편적으로 이해되어 복음의 진리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마르시온주의는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러 형태로 (강하게 혹은 약하게) 등장하고 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사랑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지옥이나 심판을 말하지 않음.

(기복주의, 긍정의 신학, 고난 없는 복음 등)

2) 과학주의 및 이성주의: 성경의 내용 중 역사적/과학적 사실에 맞지 않으면 성경을 거부함.

3) 교회 성장주의나 전도 지상주의: 성경의 교훈 전체를 강조하지 않음.

4) 초대교회에 대한 이해: 어떤 한 측면만을 강조함.

 

 

 

4. 교회의 응전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들의 출현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넘어가는 일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크게 혼란을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단의 주장이라고 해서 완전히 100%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필요성을 인식한 교회는 그들에게 1) 신앙의 준칙, 2) 정경의 확립, 3) 감독직의 사도적 계승을 확립함으로 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

 

 

4.1 신앙의 준칙 (Rule of Faith, Regula Fidei) = 정통의 기준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요약한 신앙의 준칙은 이단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예를 들면, 오늘날도 사도신경은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가장 기초적인 이단판별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을 분별함에 있어서 일반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단의 교리를 비판한 전문적인 신학서적이 아니다. 심지어 성경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이단 판정에 대한 최종적인 규범이지만 이단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 당시에는 정경이 완전히 확립된 시기도 아니었고, 또한 확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대중적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급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다 읽고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즉, 성경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단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신앙의 준칙이 이단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지만 이단으로 인해서 보다 정교해지고 풍성해졌다. 교회는 이미 기존에 교회 안에 존재하여 왔던, 그래서 성도들에게 익숙했던 어떤 제도(세례 형식문)를 사용하여 이단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신앙의 준칙은 기원에 있어서 세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르면 세례는 신자를 제자화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세례를 주라고 하였는지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해야 할 과업이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εις)”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고 이 연합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당연히 세례를 베풀기 전에 수세자에게 신앙을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이것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까? 성자 하나님을 믿습니까?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질문에 수세자는 “나는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을 하였다.

유대교에서 개종할 경우에는 이렇게 간단한 문답으로 가능하였지만(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단지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몰랐을 뿐이다)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 더 많아지자 세례문답을 조금씩 확장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각 교회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례문답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문답 내용 자체는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었고 이 고백이야 말로 교회의 정체성(symbol)을 가장 잘 확실하게 보여주는 표지였다. 예를 들어 2세기에 이미 다음과 같은 세례문답을 보게 된다.

 

문: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답: “나는 믿습니다(credo).”

 

문: “당신은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답: “나는 믿습니다.”

 

문: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답: “나는 믿습니다.”

 

 

   이런 문답은 교회에서 비공식적으로 구전을 통해서 각 교회마다 조금씩 달리 전파되어 내려왔다. 교회마다 조금씩 달리 내려오던 이 세례문답은 이단들의 도전 앞에서 선언적 표지문(declaratory symbols)의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교리의 내용은 같지만, 형식이 달라진 것이다. 또한 교회의 일치성을 위해서 고백문들은 점점 더 지역의 공식회의를 통해서 하나로 통일되어 문서화 되었다. 이것을 통해서 그동안 사방으로 흩어졌던 교회들이 실제적으로 가시적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교회의 일치는 본질적으로 신앙고백의 일치이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서방교회의 고백문이다. 예를 들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순전히 성경적이기도 하지만, 물질세계를 악으로 보는 영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짧은 진술문이기도 하였다. 또한 육의 부활 역시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간단한 신앙의 준칙을 사용하여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평신도라 할지라도 아주 쉽게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기독교적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이 비밀스럽고 사적인 지식을 강조하였다면, 교회는 보편적이고 공개된 지식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진리를 감추지 않고 복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였다. 특히 그들은 신조를 통하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고 외쳤다. 비록 각 교회마다 이 고백문(신조)들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고 있었다. 교회는 이 신조를 통해서 하나됨을 이룰 수 있었고, 이 하나된 힘을 가지고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배격할 수 있었다.

 

 

 

4.2 정경의 형성

 

   사도들의 죽음 이후 기록된 정경에 대한 필요성은 갈수록 커졌다. 예수님은 가르치기만 하였지 그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구전이었다. 이 가르침은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달되었다. 이 역할을 한 사람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었다. 이들의 구전은 오류가 없었는데 성령님께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이들의 오류없는 증언으로 복음은 순수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초대교회에는 사도들의 증거가 교회 내에서 가장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사도들과 사도들의 조력가 특히 “복음 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전적 가르침을 책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함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오류가 없도록 역사하셨다: 이것을 성경의 영감이라고 한다. 성경은 형식에 있어서 구전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본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같고, 특히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은 성경에 온전히 담겨지게 되었다. 물론 성경에 담겨지지 않은 내용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성경에 담긴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구전이 계승되면서 신뢰도를 상실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로마교와 개신교의 차이가 있는데 로마교는 구전 역시 성경과 마찬가지로 오류가 없이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처음에 초대교회는 66권으로 된 한 권의 성경을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각 교회마다 부분적으로 다른 책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어떤 교회는 마태복음만을, 어떤 교회는 마가복음만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들은 복음서들을 공유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경이 아닌 것들도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의 등장은 정경을 확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정경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가장 확실한 기준은 “사도성”이었다. 그러나 사도성을 결정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1. 사도들이 쓴 것: 가장 확실한 기준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예) 히브리서.

질문: 누가 쓴 것인지도 모르는데, 성경으로 받을 수 있을까?

 

2. 사도들과 함께 한 사람들이 쓴 책으로서 사도들의 증거와 일치하는 책. 예) 마가복음, 누가 복음. 허마의 「목자」도 상당히 오랫동안 교회의 예전에서 사용되었다.

 

3. 교리의 내용. 영지주의자들 책 중 상당 수가 사도들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들이 썼다고 해서 성경으로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책의 내용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실제적으로 어떤 교회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쓴 복음서를 정경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 신앙의 준칙이었다. 신앙의 준칙은 사도적 가르침의 요약이었고 성경과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조와 성경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다. 즉, 성경은 성경 자체가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할 것이 하나있다. 교회가 정경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는 정경이 아닌 어떤 책을 정경으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교회는 정경을 확인, 수용, 보존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성경 자체에 최종적인 권위가 있다. 교회의 승인과 상관없이 성경은 그 자체로 성경이다. 이것은 순환논법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성경 밖의 권위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말씀보다 더 뛰어난 권위를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 온전한 정경이 확정이 되자, 구약을 거부하는 마르시온주의는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이제는 정경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입장이 교회에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정경의 하나됨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교회의 하나됨을 누릴 수 있었고 이 하나됨을 통하여 마르시온주의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만약 이 당시에 교회가 통일된 정경을 형성하지 못하였다면 오늘날에도 수많은 마르시온주의자들에 의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4.3 주교(감독)의 사도적 계승

 

몬타누스는 성령의 이름으로 교회의 정경관과 직분관에 도전을 던졌다. 몬타누스가 보기에 정경이 완성되었다는 것과 성경의 진리가 사도들의 후예인 감독들에 의해서 전수된다는 주장은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에 의하면 성령님은 각 시대마다 새로운 예언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 감독들은 인간들에 의해 선출되었기에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새로운 계시에 의하여 판단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삶에 있어서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보통 감독들보다 훨씬 더 고상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들의 주장은 큰 설득력을 지녔다.

 

   교회는 비공식적인 사도들의 메시지가 따로 비밀스럽게 존재한다는 명제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 결과, 사도적 메시지는 공개적으로 교회 안에서 특히 주교를 통해 전수된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감독들이 역사적으로 사도들을 지속적으로 계승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교회는 주교계승 목록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리용의 이레니우스로 그는 그 당시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론 각 지역 교회의 주교도 자신의 직분의 기원이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초대교회부터 이미 로마 카톨릭적 직분관이 일찍 자리를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개신교는 사도적 계승권은 궁극적으로 사도적 가르침 자체에 있다고 본다. 즉, 사도들의 교리를 오늘날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면, 그것은 사도를 계승한 것이 되지만 아무리 역사적으로 안수를 통해서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면 사도직의 계승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사도직의 계승은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의 계승(successio doctrinae)이지 직분의 계승이 아니다.

 

   몬타누스주의와의 싸움에서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비해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립하였다. 몬타누스주의와 정 반대로 새 가르침이 옛 가르침에 의해서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순간 교회가 이전에 가르친 모든 교훈들은 상대화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교회의 기초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런 위험을 제대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사도적 가르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 가르침을 교회의 공적인 직분인 감독들을 통해서 올바로 교회에 전달하기를 힘썼다.

 

 

 

5. 현대적 적용: 신천지를 중심으로

 

5.1 영지주의적 신앙태도를 극복해야

 

초대교회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이단도 덩달아 활기를 쳐왔다. 우리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초대교회의 예를 따라 우리도 이것을 교회를 더욱 굳건하게 세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모든 이단들이 다 그렇지만, 오늘 한국교회에서 흥기하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원칙적으로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그리고 몬타누스주의가 지니고 있는 오류들을 다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 이단들은 3세기 이후에 나타난 아리우스주의나 펠라기우스주의에 비하면 수준이 현저히 낮은 저급한 이단들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신천지는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강조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영적인 해석은 터무니없는 풍유적(알레고리) 해석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 필자가 본 동영상에 따르면, 이만희는 자기의 장막 성전을 과천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천은 청계산 밑에 위치하는데, “계”의 의미는 시내를 뜻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듯이, 새로운 메시야는 청계산에서 계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 한 예만 보더라도 신천지의 교리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신자면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신천지의 교리 중 대부분은 영지주의의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비판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들의 가르침에 빠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신천지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구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시내”가 한글이 아니라 히브리어 단어라는 것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문자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신비스러운 해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이 왜 이런 황당한 교리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그 늪에 빠지게 되는가?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 영지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필자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0-80년대 소위 인기있는 부흥 강사들은 이단은 아니었지만 소위 영적인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풍유적인 가르침들을 강단에서 전달하였다. 이단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오늘날에 천박한 풍유적 해석은 기독교 텔레비전을 통하여 점점 더 대중화되고 있다. 이런 설교에 익숙하게 되면 성도들은 더 “나은” 풍유적 해석을 찾게 되는데, 신천지는 이들의 필요를 잘 채워 주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이들의 교리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 보다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설교를 통해서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야 말로 이단들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은 신천지에 비해서 활력을 잃고 있다. 설교가 도덕적 훈화가 되어가고 있거나 재미있는 토크 쇼로 변질되고 있다. 정말 성도들에게 필요한 성경적 교리는 “어렵다”는 이유로 설교 시간에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신천지의 ‘설교’는 철저하게 교리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예(시내산)에서 필자가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그런 황당한 설명을 듣고도 신천지 신도들이 모두 “아멘”하고 환호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한국 개신교 안에도 그런 식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목사가 얼마나 많은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것이야 말로 참된 신앙이라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한,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계속해서 우리 양들을 하나씩 자기 울타리로 끌어들일 것이다.

 

 

5.2 신앙고백서의 중요성

 

이단과 정통의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는, 전자는 분파적(sectarian) 특징을 가지고 반면 후자는 공교회적(catholic)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신천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특별한 진리를 강조하면서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개적인 혹은 누구나 다 쉽게 알 수 있는 진리는 무시한다. 또한 이들은 마르시온주의자들과 같이 성경의 가르침 중 특별한 부분(예를 들면 종말론이나 성령론)에 집착한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역사나 전통은 하나님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다 악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반대로 정통 교회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진리를 일부 사람들에게만 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그 가르침 “전부”를 담아서 신앙 고백서에 담았다.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요리문답을 만들었고, 이것을 통해서 참 교회는 성경의 모든 진리를 신자들에게 다 가르쳤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한다.

 

   역시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오늘날 보편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분파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개 교회 중심주의는 이미 도를 넘어 섰다고 보아야 한다. 장로교회 교파만 하더라도 200개를 넘는 실정이다. 강단에서도 설교자는 성경의 특정부분만 강조한다. 어떤 교회는 선교만, 어떤 교회는 사회정의만, 어떤 교회는 교회 성장만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목사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영혼구원이 최고라고 설교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마르시온주의적 태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강단에서 전도를 강조하지만, 정작 구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거나 아주 간단하게 처리해 버린다. 당연히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은 그 궁금증을 교회 밖에서 찾는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에 속한 수많은 신자들이 제대로 된 교회를 찾아 헤매고 있다.

 

   우리가 교회의 보편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한국 개신교회는 모래알과 같이 흩어져서 결국 사라질 지도 모른다. 보편성을 회복하는 첫 번째 방법은 보편적 신앙고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성경의 일부분이 아니라 성경의 전부를 가르쳐야 하고, 자신만의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통한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여야 한다. 신천지의 등장으로 한국교회가 교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신천지는 신앙고백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사도신경이라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서 가르쳤다면 우리의 신자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쉽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5.3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

 

‘특별함’에 대한 이단들의 강조는 성령론까지 확장된다.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성령의 사역을 끌어들인다. 방언을 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연히 이런 특별한 일들을 행하지 못하는 보통 목사들을 그들은 무시한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그들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함으로 대응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실제로 오순절 교파들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이적들은 이단들에게서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실제로 우리에게서 그것들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대응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적들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들이 일어나지 않거나 적게 일어나면 교회도 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보편적 신학을 추구하여야 한다.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이적들과 같은 특별한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내주하셨고 오늘날에도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내려 주신다. 그것들은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이기 때문에 특별하지만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측면에서 보편적이다. 성령의 은사는 무엇보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정당한 직분자들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보편적인 수단인 말씀을 강조하여야 한다. 성령과 말씀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굳건한 가르침이다. 이것을 떠나는 순간 성도들은 이단의 가르침에 쉽게 현혹될 수밖에 없다. 하나 더 강조하자면, 말씀의 두 가지 형식은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세례와 성찬)이다. 일반적으로 이단들도 설교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말씀인 성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례는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쉽게도 한국교회에서 성례는 설교에 비해서 아주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세례문답 교육이 아주 형식화 되어 버렸고, 성찬은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일 년에 2차례 정도 시행될 뿐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중요한 외적 수단들이 교회 안에서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체험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교회의 공예배 속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런 경험을 가지기를 원한다. 이런 신자들이 많아질수록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계속 교세를 불려 갈 것이다.

 

 

 

나가면서

 

신천지의 교리들이 정말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신천지에 빠지는 궁극적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천지에 빠지는 사람들은 거의 기존 신자들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성경을 가르쳐 주겠다고 접근을 한다. 성경을 배우고 싶으나 교회에서 아예 배울 수 없는 신자들은 이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더 나아가 “특별한 해석”을 주장하는데 목사의 설교나 성경공부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신천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교회 안에는 항상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고자 하는 교인들이 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신자들은 심지어 신천지의 교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서도 (맞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신천지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사가 부도덕한 경우 아무리 그 설교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에 끝까지 남는 성도는 거의 없다. 더구나 오늘날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예배가 공연으로 바뀌면서 성도의 공동체성이 현저하게 약화되어가고 있다. 반면 이단일수록 단일한 공동체 사회를 형성하여 서로 간의 확실한 유대감을 유지한다. 교리의 문제를 떠나서, 오늘날 이단은 뭔가 의지하고 싶은 불안한 신자들에게 뭔가 모를 위안과 확신을 준다. 목사가 강단에서 성경의 교리를 확실하게 전하지 않고, 성례를 통하여서 성령을 체험하게 하지 못하고, 성도의 교통으로서의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지 못할 때 이단들은 우리 안에 있는 양떼들을 도적질 하는 일을 쉬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개혁신학이 가르친바 교회의 참된 표지를 회복하는 것만이 이단을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결국 바른 교리의 기초는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저급 이단들은 삼위 일체 교리만 있어도 교회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단의 교리들을 성도들에게 다 가르칠 필요가 없다. 신앙교육은 세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세례 교육을 강화시켜야 하고 세례와 더불어 삼위 하나님이 중심이 된 예배가 회복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찬송과 성찬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설교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뜻과 구원사역이 선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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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 이단의 뿌리와 교회의 응전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조완철 목사)가 2021년 5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단 전문상담가 3차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교수가 ‘바른 교리와 이단 개론’을, 로뎀장로교회 권기현 목사가 ‘포스트 코로나 시...
    Date2021.06.02 By개혁정론 Views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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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고신교회 제7차 헌법개정의 방향과 과제에 대해 성희찬 목사 (작은빛 교회) 서론 교리표준(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과 관리표준(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으로 이루어진 교회 헌법은 법 조항들로 이루어진 교회론이라 할 수 있...
    Date2021.05.11 By개혁정론 Views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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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뇌과학이 본 인간 이해 박해정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교실, 정신과학교실, 인지과학협동과정,시스...
    Date2021.04.30 By개혁정론 Views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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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아래 논문은 2021년 4월 22일(목) 오후 2시 남서울교회당에서 진행된 "고신설립 70주년 컨퍼런스 2차 세미나"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 편집자 주 인공지능기술의 현황과 전망 김상범 교수 (서울대) 오늘 뜻깊은 자리에서 제가 큰 흥미를 느끼는 주제에 대해...
    Date2021.04.26 By개혁정론 Views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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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설] 제7차 개정헌법 헌의안, 총...
[사설] 총회장은 교단의 수장이 아...
[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공적 금식과 공적 기도를 선포하자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