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주일을 기다리며, 기독교인들은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들어가며
부활 주일이 다가왔다. 부활 주일 이전 40일을 많은 교회들의 교회력에서는 “사순절”(四旬節, 헬라어-“테사라코스테이”)이라고 하여 절기로서 지킨다. 그런데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기독교인들이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논쟁들이 뜨겁다. 사실, 사순절에 대한 논의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가는 개신교도들만 토론하는 문제도 아니다.
외국의 경우에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양쪽 진영에서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가 종종 있었다. 그 외에 기독교 교파들, 예를 들어 사순절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교파 중 하나인 동방 정교회에서 사순절에 대한 토론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개신교도들과 로마 가톨릭 신도들은 사순절을 지켜야 하는지 아닌지, 지킨다면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을 자주 했다.
이 주제를 정당하게 다루기 위해서 사순절에 대한 교회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어떤 신학 주제이든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살펴볼 시기는 사순절을 처음 시작한 4세기와 그리고 그것이 미신적으로 변해버렸던 중세 후기와 그것을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개혁기이다.
사순절에 대한 역사적 고찰
사순절이 처음 시작되었던 것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것에 기인한다. 그때까지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들 중에 하나로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자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세례라는 중요한 의식을 의미 있게 받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두 가지 관습을 발전시켰다.
첫째로, 교회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철저하게 교리 교육을 받도록 했다. 기독교의 기초 교리를 잘 깨닫도록 “교리 교육(카테키즘)”을 실시했다(그 뿌리가 되는 구절들 중에서는 갈 6:6 참조). 이때 배우는 교리를 나중에는 “신앙의 규칙(regula fidei)”이라고 불렀다. 기독교 신앙을 요약하고 안내하는 규칙이 되는 가르침을 말한다. 보통 3년 가까이 이런 교육을 실시하고 최종적으로는 지식과 삶에 있어서 배운 바대로 사는지를 철저하게 확인한 다음에 부활절 새벽에 세례를 베풀었다.
둘째로, 교회는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신자들이 특별히 부활절 이전 40일 동안 경건에 힘쓰도록 가르쳤다. 즉 그들에게 이 40일 동안에 더욱 기도하고 자주 금식하고 성경 공부에 힘쓰도록 했다. “40일”은 모세, 엘리야, 예수님의 생애에서 40일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출 24:18, 왕상 19:8, 마 4:2). 이러한 40일의 세례 준비는 비단 세례 받는 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관습이 더 확대되어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이나 다음에 세례를 받을 사람들 역시 이 40일 동안에 경건에 힘쓰도록 했다.
세례를 준비시키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후자의 관습이 지금 우리가 “사순절(四旬節)”이라 불리는 절기로 고착된 것이다. 특별히 이 기간 동안에 초기 기독교회의 설교자들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더욱 자주 함으로써,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을 더욱 잘 준비되게 했다. 또한 세례라는 것은 새로운 신자를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시키는 성례이므로, 온 교회가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 40일의 기간 동안 함께 기도하고 금식하였다.
따라서 사순절이 처음 시작된 4세기에는 세례를 준비하기 위한 경건과 제자도의 훈련을 위해서 이 기간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세(中世)”에는 이 사순절을 형식적이고 미신적으로 지키기 시작했다. 특히 사순절에 금식하는 관습은 아주 왜곡되었다. 사람들은 이 기간 동안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또한 하루에 한 끼 먹는 식사 시간을 점차 앞당기기 시작했다. 금식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허례허식이 되었고, 그저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외식(外飾)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상실된 것은 세례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중세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므로 사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세례를 준비하는 경건의 훈련은 사라졌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설교하는 관습 역시도 희미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취했다.
첫째로,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을 형식적이고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외식이 가득한 율법주의로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자유(自由)”를 참되게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의미는 강조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가르치는 교리 교육과 성경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다.
사순절에 대한 실제적 지침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사순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단순히 사순절을 지키자 말자 하는 이분법으로 풀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4세기에 사순절이 처음 생겨났을 때와 종교개혁 시기에 그것의 참된 의미를 회복시켰던 것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지침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부활 주일을 앞두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이 꼭 40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실 교회사를 보더라도 그 기간은 다양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는 일이다.
둘째, 우리는 사순절을 미신적으로나 율법주의적으로 지켜서는 안 된다. 특정 기간에 금식하거나 기도하는 일(“특별새벽기도”), 특정한 절제 운동(“미디어 금식”)은 신앙을 돕는 한에서 시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에 얽매여 오히려 신앙이 주는 자유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지킴으로 영적인 우월감을 가져서도 안 된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는 일은 날마다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도 매순간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사순절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매년 특정 기간을 두고 경건한 일에 힘쓰는 일은 신앙에 분명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경건의 능력 뿐 아니라 모양마저 다 상실해 버린 세태 속에서는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 주일을 앞두고 더욱 힘써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회개하고 봉사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세례의 참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사순절은 원래 세례 의식을 돕기 위한 방편으로 형성된 관습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를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해 교회의 교리 교육을 강화하고 삶의 실천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이 일을 온 성도가 축하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누려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는 혹은 안 지키는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순절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문제는 일종의 “아디아포라”(허용된 것)에 속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께서 인간이 되신 것 자체가 희생이요 고난이었다. 그분은 가난한 자로 사시면서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도우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눅 4:18-19). 그분은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도리어 섬기셨으며,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기꺼이 내어주셨다(막 10:45). 그렇게 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시고 지극히 높은 이름을 주셨다(빌 2:5-11).
우리가 부활 주일을 앞두고 묵상해야 할 것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낮아지셔서 거기서부터 온 세상을 번쩍 들어 올리신 분의 인격과 사역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생명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골 3:1-4; 갈 2:20). 따라서 사순절과 부활절 절기에 우리가 기억하고 훈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
<참고자료>
1. “Lent” in F. L. Cross and Elizabeth A. Livingstone, ed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971-972.
2. “Lent” in Walter A.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Second Editio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1), 679-680.
3.
John D. Witvliet, “Yes and No: Lent and the Reformed Faith Today” at http://worship.calvin.edu/resources/resource-library/yes-and-no-lent-and-the-reformed-faith-today (2016.3.22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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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교수님 유익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