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터’를 보고
성영은 교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1)
중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10월 18일 (재)개봉될 ‘루터 (2003년작)’ 영화를 미리 볼 기회가 있었다. 좋은 영화를 본 감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집에 오자마자 루터 전기 『마르틴 루터(Here I Stand)』를 다시 펼쳤다.2) 이 루터 전기는 작년과 올해 내게 큰 위로를 준 책 중 하나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시대가 그 강도만 다르지 지금 우리 시대와 너무나 흡사한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 신자라 할지라도 우리의 종교심 속에 로마 가톨릭적 요소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자랑하는 종교개혁의 후손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의 후손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철저히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인식 하에서 루터의 ‘믿음’이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아니 그 믿음을 주신 주님이 유일한 위로와 소망임을 본 것이다. 오직 은혜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루터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는 방대한 주제를 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다루고 있어 대목마다 또 등장인물마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기억나는 대목들을 루터 전기의 도움을 받아 정리해 보았다. 자연히 이 글의 많은 부분은 나의 것이 아닌 이 루터 전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구별하기 쉽게 처음 나올 때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사람 이름과 지명은 독일식으로 표기했다.
영화는 루터가 22살 에르푸르트 대학생이었을 때 벼락 치는 폭우 속에서 땅에 나뒹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때 루터는 무시무시한 하나님, 가차 없는 심판장 그리스도, 자신을 낚아채 지옥에 끌고 가려는 마귀들을 떠올리며 광부인 아버지의 성인인 성 안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절규한다. 그 시대 교회는 하나님과 기독교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협박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 서약에 따라 루터는 보름 뒤 바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엄격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한다. 루터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지만 2년 뒤 그가 첫 미사를 집전할 때 전 가족을 데리고 아들을 만나러 온다. 그 첫 미사에서 라틴어로 “우리를 주님께, 곧 살아계시며 참되시고 영원한 하나님께 바치옵니다”라는 대목을 낭송할 때 거룩하신 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루터를 후려쳤다. “내 혀가 무엇이기에 감히 하늘의 왕께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앞에서는 더 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루터는 결국 포도주를 쏟고 만다. 루터의 이런 심정은 모른 채, 미사 하나 제대로 집례 못하는 이런 아들을 보고 루터의 아버지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언급하며 늙도록 스스로 밥벌이 하는 것이 누구 때문이냐고 화를 낸다.
그럼에도 루터는 더 본질적인 영적 평안을 위해 몸부림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마귀와 씨름하면서 금식과 철야 고행과 기도 등 엄격한 수도원 생활에 전념한다. 루터의 수도원 생활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만일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자기가 첫 번째 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다는 것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힘이 없음을 알고 교회의 가르침대로 성인들의 공로에 의지해보려 한다. 당시에 성인들의 남아돌아가는 공로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면서 교회를 통해, 교황을 통해 그 공로가 신자들에게 양도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은 천국에 가기 전에 연옥에 가서 지은 죄로 인해 벌을 받는다는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당시 교회는 교회가 가진 공로로 그 벌을 감해 준다고 속였다. 예를 들면 교회가 소유한 성인들의 유골을 보기만 해도 연옥의 형기를 4,000년 감해준다는 식이었다. 루터는 1510년 성인들의 유물의 보물창고인 로마로 수도원 업무수행 겸 순례여행을 떠난다.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 앞의 2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계단’은 예수님이 죽기 전에 서셨던 빌라도 궁전 계단을 그대로 뜯어온 것이라면서 무릎을 꿇은 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끝까지 올라가면 연옥에 있는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루터는 이 빌라도의 계단을 기어오르면서 이 좋은 기회에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공로를 사용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대신 죽은 할아버지 하이네 루터를 꺼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일어서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누가 알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일을 하고 나서도 그 어떤 신앙적 확신도 가질 수 없어서였다. 영화에서는 그의 이런 의심이 그가 계단 아래에서 산 면죄부(면벌부)를 구겨버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1511년 인구 2,000~2,500명 되는 작은 비텐베르크로 전속되어 나머지 일생을 그곳에서 보낸다. 이 마을에는 작센의 선제후(황제선출권이 있는 통치자) 프리드리히 3세(현인 프리드리히)가 아끼는 비텐베르크 대학이 있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한 후 훌륭한 영적 스승을 만났는데 독일 관구장 요한 폰 슈타우피츠였다. 루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다. 루터는 “슈타우피츠 박사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지옥에 빠져들고 말았을 거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루터는 쉴 새 없이 슈타우피츠를 찾아가 고해했다. 끈덕지게 고해를 하니 대충 큰 범죄는 제거되었다. 그러나 죄를 모조리 토해낼 수는 없었다. 6시간이나 고백한 뒤에도 여전히 죄가 남아있다는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었다. 사소한 죄까지 다 고해를 하고 나면 이제 다 고해했다는 만족감에서 나오는 교만이라는 죄가 솟아나는 그런 식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이 그를 사로잡았다. 슈타우피츠는 이런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루터에게 박사 학위 과정을 밟은 다음 대학에서 성경 강의를 맡아 보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루터를 성경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이후 루터는 성경의 내용을 배우고 또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513년 시편 강의를 시작했다. 1515년에는 로마서를, 그리고 1516년에는 갈라디아서를 강의한다. 루터는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리스도께서 루터가 당할 것을 이미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가 없으신 분이 왜 그러셨을까? 루터가 찾은 유일한 해답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새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인가? 그러면 교회가 가르치는 무서운 심판장이신 그리스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 그리스도는 심판하시면서 그 심판받는 자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으신 분이다. 심판장이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은 자로 바뀐 것이다. 한없이 사랑이 많으신 그리스도시다. 그러면 소름끼치는 무서운 하나님에 대해서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렇게 소름끼치도록 무섭기만 하던 분이 자비로운 분이셨다. 노여움과 사랑이 십자가에서 용해되어 버린 것이다. 죄인을 죽이시기보다 돌이켜서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쓰라린 죽음의 고통 속에서 죄인과 화해를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으로서는 어림도 없다. 오로지 믿음만이 이처럼 숭고한 신비를 붙잡을 수 있다. 가장 높으신 분, 가장 거룩하신 분이 또한 사랑이라니. 감히 입으로 부를 수도 없는 그 분이 우리의 육신을 입고 버림받고 죽으셨다. 복음이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복음을 그 시대 루터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온 유럽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당시 교회들은 이 복음 말고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었을까? 지금은 어떤가? 루터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 복음을 정말로 알고 있을까 하는 깊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을 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교회나 직분자들이 혹은 신자들까지도 버젓이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였다. 정의가 흐지부지되어 관용으로 뒤바뀐다면 그런 분이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일 수 있겠는가? 그 점에서 루터에게 사도 바울 연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바울 역시 자기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필사적으로 고민하다가 해답을 얻은 사람이기에 루터는 서신서를 붙잡고 늘어졌다. 마침내 빛이 쏟아졌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신칭의! 루터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그 의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내 마음이 증오로 꽉 차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고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 순간 당신 곁에는 은혜로운 하나님이 서 계신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서부터야 비로소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되었다.
1517년이 되면서 면죄부(면벌부)는 더 왜곡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막대한 돈을 필요로 했다. 사제들은 대주교 자리를 사기 위한 막대한 돈을 교황에게 건넸다. 독일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이미 두 곳의 대주교였지만 마인츠의 대주교까지 노리면서 교황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독일의 은행가를 통해 빌려준다. 물론 그 빚은 자신의 몫이었다. 교황은 그 엄청난 빚과 이자를 갚기 위해 특별 면죄부를 발급해주면서 이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뉘우치거나 죄를 고해할 필요 없이 죄가 사해지는 것으로 가르쳤다. 이 면죄의 선언은 능수능란한 면죄부 상인 테첼에게 맡겨졌다. 이 면죄부 상인은 현인 프리드리히가 자기 영토인 작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하였기 때문에 작센에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그 경계까지 와서 면죄부를 판매했다. 루터의 교구민들은 엄청난 특권인 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작센의 경계선을 넘었다. 그 날이 만성절 전날인 1517년 10월 31일이었다. 이에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라틴어로 쓴 95개의 논제를 성(城) 교회 문에 붙이고 신학자들의 토론을 제안했다.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벽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날이 오늘날 종교개혁 기념일이 되었다. 올해가 이 일이 있은 지 500년이 되기에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불린다. 그런데 신학적 토론을 원한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이 95개조는 은밀하게 독일어로 번역되고 출판되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한 사본이 마인츠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전해졌다. 대주교는 이 논제들을 즉시 로마로 보냈다. 교황 레오 10세는 즉시 교서를 발표하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총회장을 새로 임명하면서 그로 하여금 불을 끄라고 한다. 불을 끄려는 일이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있었다(하이델베르크 논쟁). 그런데 불을 끄는 일이 신통치 않게 끝난다. 이에 교황은 루터에게 로마로 와서 이단과 명령 불복종 혐의에 대해 답변하라는 소환장을 보낸다. 루터는 소환장을 받은 다음날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궁정 신부인 대학교 동기 게오르크 슈팔라틴을 통해 선제후의 개입을 요청한다. 이때부터 루터의 친구인 슈팔라틴은 선제후와 루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루터를 로마에 보내지는 않겠다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노력으로 마침내 루터의 청문회는 독일 땅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 심문은 여러 해 지연된다.
신중한 사람인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청문회에 앞서 먼저 교황의 사절인 카예타누스(카예탄) 추기경과 협상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먼저 개인적인 심문을 받도록 주선했다. 루터의 친구들은 안전 통행증 없이는 가지 말라고 충고했고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황제에게서 이 통행증을 받아준다. 1518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는 추기경 카예타누스와 세 차례 면담한다. 그 자리에 수도원 관구장 슈타우피츠도 동석한다. 루터가 최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면담은 시작된다. 추기경이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교서를 들어 교회가 공로의 보고라 하자, 루터는 추기경이 틀리게 말한 점을 지적한다. 또 교황의 성경 해석을 놓고 서로 논쟁한다. 루터는 “교황이 성경보다 위라는 점은 반대합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추기경은 버럭 화를 내면서 “레보코(저는 취소합니다)”를 말하기 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 영화는 이 면담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루터는 이 면담에 대해 추기경에게 문제를 처리하도록 맡기느니 차라리 나귀에게 하프를 연주하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곧 풍자화가들은 이 소재를 주제로 하여 풍자화를 그렸다. 이 면담이 끝나고 나서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수도회에 순종하기로 맹세한 서약을 면제해 준다. 루터는 이제 자기가 속한 수도회에서도 배척받았다고 느꼈다. 이때 추기경에게 루터를 체포할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성의 문이란 문은 다 삼엄하게 경비되기 시작했다. 루터는 수도복을 입은 채 도망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카예타누스 추기경은 루터 면담 보고서를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보내면서 루터를 로마로 보내든지 추방하든지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시간을 끌면서 루터를 자기 영토에 남아 있게 한다. 교황에게는 자기 영토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덜 위험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1519년 1월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황제가 죽는다.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골치 아픈 독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황제가 절실했지만 마땅한 후보가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현인 프리드리히를 지지하겠다고 나선다. 만일 일이 성사되었다면 루터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을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조카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왕 카를 5세에게 표를 던진다. 그렇게 선출된 카를 5세는 그 후 1년 반 동안 스페인에 매여 있어 독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관식도 그 이후에야 치러진다. 자연히 독일 땅에서 프리드리히가 가진 힘 때문에 교황조차도 루터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교황은 회유책을 쓴다. 카예타누스 추기경은 독일인 카를 폰 밀티츠를 조수(대주교)로 임명해 교황의 황금 장미와 선제후가 소장하고 있는 성인들의 유골에 헌금하는 사람에게 유골마다 연옥의 형벌을 각각 100년씩 줄여주는 특혜를 전달한다. 그런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처리하는 일은 실패한다. 오히려 프리드리히는 보름스 의회에서 청문회를 열 것을 주선한다. 그러나 교황은 이 제안을 인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아 얼마간 아무런 조처도 따르지 않았다.
그 동안 루터는 계속해서 논쟁에 말려들고 있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출중한 사람으로는 카를슈타트와 멜란히톤이 있었다. 카를슈타트는 루터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사람으로 박식했으나 신중한 면은 없었다. 그는 열렬하고 격정적이었다. 그가 루터의 가르침에 심취하면서 반대자들을 얼마나 호되게 몰아붙였던지 루터 본인도 주춤해지는 때가 있었다.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는 뒤에 루터의 대적자가 된다. 멜란히톤은 상냥하고 어렸다. 이 때 나이 겨우 21세였다. 1518년 10월 카예타누스와의 면담 후부터 1520년 10월 교황의 파문 교서가 도착할 때까지 루터는 이 기간을 십분 활용한다. 이 시기에 나온 유명한 글들이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이다.
그러나 사실 그 사이 이미 루터를 없애려는 고소가 재개되고 있었다. 1520년 5월에 추기경 회의가 네 차례 열린다. 5월 22일 교황은 즐겨 찾는 로마 인근의 사냥터에서 루터를 41개 조항으로 정죄하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낸다. 그것이 루터 파문 경고 교서 ‘엑수르게 도미네’이다. 교황의 교서는 사냥터의 분위기에 맞춰 이렇게 시작한다. “일어나소서, 주여. 당신의 소송 사건을 심판하소서. 한 마리의 멧돼지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하였나이다. 일어나소서, 오, 베드로여... 일어나소서, 오, 바울이여...교회의 성경 해석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1520년 6월 15일). 영화에서는 이 대목을 실제 교황의 멧돼지 사냥 장면으로 더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교서는 3개월 뒤에야 루터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이미 교서가 집행되고 있었다. 루터의 책들이 불살라졌다. 교황청은 요한 에크와 지롤라모 알레안드로를 교황 사절이자 특별 재판관으로 임명해서 이들에게 북쪽에서의 교서의 집행을 맡겼다. 황제에게 교서를 전달하는 임무는 알레안드로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독일 땅 전역에서 루터의 책들을 불태우는 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집행관들이 책을 불태우는 것을 거절한다. 심지어 알레안드로에게 돌 세례를 가하기도 했다. 1520년 10월 10일에야 교황의 교서가 루터에게 도착했다. 루터는 슈팔라틴에게 편지하기를 “이 교서를 보니 바로 그리스도가 정죄받고 있군요”라 하면서 앞으로는 이 교서를 위조품으로 간주하고 행동하겠다고 한다. 교서에 적힌 60일 유예 기간이 끝나는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운다.
1519년 6월에 선출된 카를 5세는 1520년 11월에서야 독일 땅 아헨에서 대관식을 갖는다. 이때 교황의 사절인 알레안드로는 루터 사건을 교황에게 위임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황제와의 면담 자리에서 청문회를 열지 않고는 루터를 정죄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 제국 의회가 열리는 보름스에서 청문회를 열기로 한다. 그러나 이 청문회는 몇 차례 철회 소동 끝에 토론 없이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것인지 아닌지 그 대답만 듣는다는 조건으로 최종 합의된다. 이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제명)된 루터에게 황제의 안전 통행증이 발부되고 1521년 4월 루터는 보름스에서 황제 앞에 서게 된다.
보름스 청문회에 앉아 있는 황제는 가톨릭 왕계의 후계자였고, 유럽 최고의 명문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예요 그 어떤 나라보다도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리는 카를 5세였다. 그 앞에 선 루터는 한낱 광부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빼면 내노라 할 만 한 배경이라고는 없는 보잘 것 없는 수도사에 불과했다. 루터 앞에는 그가 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심문관에 의해 그는 먼저 이 책들이 그의 책들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루터는 “이 책은 모두 저의 것입니다. 이 밖에도 더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이에 이 책의 주장들을 취소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루터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관계됩니다. 바로 영혼의 구원 문제가 여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청컨대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소란 끝에 황제는 자비를 베풀어 하루 여유를 주기로 한다.
다음날은 더 큰 홀이 선정되었지만 어찌나 많은 사람이 밀려들었던지 황제 외에는 아무도 앉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루터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전날의 질문이 되풀이 되었다. 루터가 책들을 세 종류로 구분하여 대답하자 간단히 취소할 것인가 아닌가로 대답하라 한다. 이에 루터는 답한다. “성경의 증거와 명료한 이성에 비추어 저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저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하나님,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몸을 도우소서.” 루터는 이 대답을 독일어로 했다. 그러자 라틴어로 다시 대답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황제가 독일어를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혹은 독일 사람들의 흥분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루터는 라틴어로 다시 같은 대답을 한다. 이 세상의 최고 통치자인 황제와 교회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교황이 보낸 특사 앞에서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다.
황제는 선제후들을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황제는 선제후들에게 자신이 직접 쓴 루터를 악명 높은 이단으로 간주하겠다는 글을 읽는다. 다음날 참석한 선제후 6명 가운데 4명만 황제의 견해에 동의하여 서명한다. 반대자는 팔츠의 루트비히와 작센의 프리드리히였다. 5월 8일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의회에 제출하여 5월 26일에 승인된 최종안에 서명한다. 그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루터를 이단으로 확정하는 바이다. 아무도 그를 환대해서는 안 된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의 책들은 인간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그로써 루터는 교회에서도 세상 국가에서도 추방되었다. 이 땅 어디에도 거할 곳이 없었다.
루터는 보름스 청문회를 마치고 칙령이 발표되기 전인 1521년 4월 26일 보름스를 떠난다. 루터의 안전을 염려한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몰래 숨겨두기로 결정한다. 마차를 타고 비텐베르크로 향해 가던 중 아이제나흐 마을 근방 숲 속에서 루터는 무장한 기마병들에 의해 납치된다. 이 책략을 이미 알고 있던 동료는 일부러 납치범들에게 마구 욕을 하면서 루터가 실제로 납치된 것처럼 위장했다. 5월 4일 납치범들로 가장한 기마병들은 루터를 옛 기사들의 요새인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데려간다. 이제 루터는 세상에서 사라진 인물이 되었다. 루터는 그곳에서 수도사 복장을 벗고 기사의 옷차림을 하고 턱수염을 길렀다. 보름스 칙령 때문에 우울한 루터의 기분을 바꿔 주려고 관리인이 그를 사냥에 데려갔는데 토끼 한 마리가 덤비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루터의 망토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사냥개들이 루터의 옷 째 물어 그 안에 있는 토끼를 죽이고 말았다. 루터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마치 교황과 마귀가 우리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군” 이라고 하면서 “나는 싸움터에 있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가 그곳에 은신하고 있다 해서 싸움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싸움터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둔하는 중에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다. 신자가 성경을 직접 읽는 그 일이 얼마나 천지를 흔드는 일인지 그 뒤 역사를 보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루터의 생애는 ‘오직 은혜’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사이 비텐베르크에서는 종교개혁이 재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루터가 자신이 속한 로마 가톨릭 교회 개혁을 바라며 진행했던 일이 이제 새로운 교회로 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신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루터가 교회를 분열시켰다고 비난하지만 막상 교회의 주인은 그 분열을 오히려 기뻐하셨다는 뜻을 보이셨다. 교회의 촛대를 옮기신 것이다. 루터가 없기에 자연히 지휘 통솔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인 멜란히톤, 카를슈타트,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 가브리엘 츠빌링이 맡았다. 이들에 의해 지금까지 일반 서민들에게는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루터의 개혁이 이제는 그들에게 분명히 감이 잡히는 형태를 띠게 된다.
1521년과 22년 사이에 걷잡을 수 없는 개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신부들과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결혼했다. 미사에서 쓰는 포도주가 평신도에게 허용되었다. 평신도들이 떡에 손을 댔다. 신부들은 일반 복장으로 성례를 집례했다. 탁발 수도사들이 머리를 길렀다. 미사의 일부분이 독일어로 낭송되었다.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성인들의 상(像)들이 박살났다. 그러나 이런 소식들은 루터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 루터가 보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러운 자유가 기껏 복장, 식사, 머리카락 길이 문제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루터는 멜란히톤을 통해 이런 문제들에 대해 글을 쓰고 그 글들을 출판한다.
멜란히톤은 1521년 9월 떡과 포도주로 새로운 성찬을 집례 했다.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는 10월부터 미사가 중단되었다. 그런데 11월 들어 대중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읍민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이에 1521년 12월 루터는 변장한 채 비텐베르크에 잠깐 방문하여 상황을 파악한다. 그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도 난동이 벌어졌었다. 학생들과 읍민들이 칼을 숨긴 채 교회에 침입하여 제단에서 미사 경본을 내동댕이치고 신부들을 몰아냈다.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던 자들은 돌 세례를 받았다.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다시 돌아온 루터는 서둘러 폭력에 호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경고를 발표했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파괴되게 되어 있습니다. 폭력을 쓰면 그를 더욱 강자로 만들 뿐입니다. 설교하고 기도합시다. 싸우지 맙시다.” 그리고 성경 번역에 더욱 몰두한다. 힘써 설교집도 집필한다.
1521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에 성(城) 교회에 읍민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2천명이 모였다. 카를슈타트는 이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독일어로 성찬을 베풀었다. 카를슈타트의 통솔 아래 비텐베르크 읍 의회는 첫 종교개혁 규례를 발표했다. 그 중에는 교회에서 성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종교 미술과 종교 음악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읍 의회는 어디에도 지도력을 찾아볼 수 없어 ‘비텐베르크 의회와 전 읍민’의 이름으로 루터에게 돌아오라는 초청장을 보낸다. 루터도 사실 더 이상 숨어 지내며 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약 번역을 마치고 구약 번역은 비텐베르크에서 히브리어에 더 정통한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온 초청장은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과 같았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선제후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지만 선제후는 주저했다. 독일 땅 어디에도 황제나 교황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만 신뢰하기로 한다.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무엇보다 먼저 신뢰와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설교대에서 인내와 사랑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자고 강조했다. 제단들을 부수고, 상들을 박살내며, 신부들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일은 루터에게는 지금껏 교황 제도가 자기에게 가한 그 어떤 공격보다도 더 크고 심각한 일로 여겨졌다. 어쩌면 자신은 그의 추종자들보다 로마 쪽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루터는 설교에 온 힘을 기울인다. “악용되는 대상을 없애 버리면 악습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성급함과 횡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저는 기도와 설교 밖에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셨나 보십시오. 말씀이 이 모든 것을 해낸 것입니다…제가 조용히 앉아 멜란히톤과 맥주를 마시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교황 제도에 치명타를 입히셨습니다.” 그러나 과격한 그의 스승 카를슈타트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한다는 루터의 성찬을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로 반박했고, 유아 세례를 배척했으며, 목사와 일반 성도를 전혀 구분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대로 교구 사람들이 그를 “박사님”이나 “목사님”이 아닌 “착한 이웃”이나 “안드레아스 형제”로 부르게 했다. 만인제사장설을 평등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는 자기 먹을 것을 위해 쟁기를 잡고 직접 일했다. 루터가 카를슈타트의 이런 태도에 전혀 호감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상 파괴 등 카를슈타트의 열정적인 행동이 사실이든 아니든 혁명적인 선동가 뮌처와 연결되면서 루터는 결국 작센에서 카를슈타트의 추방을 묵인한다. 마침내 비텐베르크가 잠잠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안 되어 종교개혁은 ‘농민전쟁’이라는 사회적 폭동과 합쳐지면서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1523-5년의 농민전쟁만큼 루터로 하여금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 움츠러들게 한 것도 없다. 영화에서는 이런 루터의 심정을 곳곳에 처참하게 죽은 농민들을 보여줌으로써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운동은 16세기 종교적인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일어난 것이 아닌 독자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비텐베르크의 혼란과 전적으로 무관하지는 않았다. 추방된 카를슈타트는 남부 독일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열성으로 움직이는 농민 봉기가 종교개혁의 영향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인제사장설이 루터에게는 평등주의를 뜻하지는 않았지만 카를슈타트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톨릭 제후들은 이 폭동의 책임을 루터에게 돌렸다. 농민들은 반란이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루터를 배신자라며 비난했다. 영화에서는 작센에서 농민전쟁을 보는 루터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 급진주의자 뮌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살인과 유혈의 참극은 비참했다. 루터는 깊은 영적 상처를 입는다.
종교개혁으로 수도사들뿐 아니라 수녀들도 수도원을 떠나고 있었다. 수녀들이 루터에게 복음주의적 신념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상담을 청해 왔다. 루터는 손수 수녀원으로부터 그들의 도피를 거들기도 했다. 루터가 아무도 모르게 도피에 동원한 사람 중에 60세의 레온하르트 코프라는 수녀원에 청어통을 날라다 주던 상인이 있었다. 1523년 부활절 전날 밤 그는 12명의 수녀를 그의 빈 청어통에 실어 도피시킨다. 청어의 비린내가 얼마나 고약했을까? 그 중 셋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아홉은 비텐베르크로 왔다. 루터는 그들 모두에게 집과 남편을 찾아주는 것을 자기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모두들 신랑을 찾아가고 카타리나 폰 보라 한 명만 남았다. 1525년 6월 농민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루터는 그녀와 결혼한다. 그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영화에는 결혼하는 루터가 너무 젊어 보인다. 수도사였던 루터의 결혼은 당시 사회를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보름스 의회 이후로 모든 독일 지역의 의회마다 루터교 문제를 다루지 않은 의회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점점 북부 독일은 루터교로 바뀌고 있었다. 남쪽에서도 스트라스부르, 아우크스부르크, 울름,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가 그랬다. 그러다가 1530년 황제 카를이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 제국 의회에 참석차 오게 되었다. 루터는 이 의회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황제는 도착 다음날 루터파 제후들을 불러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루터파가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제후들은 반대했다. 황제는 루터파 목사들이 논쟁적인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후들은 또 반대했다. 황제는 다음날 로마 가톨릭 성체 축일 행렬에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제후들은 다시 반대했다. 황제가 계속 자기주장을 고집하자 한 제후가 나서면서 이야기했다. “누구든 제게서 하나님 말씀을 빼앗아 가거나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릎을 꿇고 제 목을 쳐 달라 하겠습니다.”
황제는 일단 제국이 일치단결해 터키와의 전쟁에 참여하게 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래서 나흘 안에 이 새로운 개신교의 주장이 무엇인지 밝히라 한다. 개신교의 믿는 내용을 밝히는 사명이 멜란히톤에게 떨어졌다. 루터는 제국에서 추방된 인물이기에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멜란히톤은 여전히 황제와 가톨릭 진영의 온건한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개혁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마침내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이렇게 하여 황제 앞에서 낭독 발표된다 (1530년 6월 25일). 루터는 바른 신앙이 온 천하에 알려진 것을 기뻐한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루터파 믿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견해 때문에 스위스 사람들은 그 고백에 서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성명을 따로 제출했다. 스트라스부르 사람들도 여기에 서명하지 않고 또 다른 신앙고백을 들고 나왔다. 어쨌든 이날부터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양 진영은 서로 맞섰으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카를 5세는 개신교도들에게 다음해 1531년 4월까지 가톨릭 측 교리에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이 위협에 맞서 루터는 로마 진영의 화해파 지도자, 곧 그의 옛 원수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조정을 호소했다. “이제는 믿음의 만장일치를 전혀 바랄 수 없는 만큼 귀하께서는 다른 쪽에서 평화를 지키도록 노력해 주실 것을 겸손히 간청합니다.” 이 루터의 평화 권고는 원칙 위에서가 아니라 마지못한 이유로 받아들여졌다.
영화는 이 19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의 일로 끝난다. 그러나 루터는 그 후 15년쯤 지난 1546년 소천한다. 그 남은 기간 그는 구약성경 번역 작업을 완수한다(1534년). 이후 구약, 신약 번역본 수정작업을 죽는 날까지 한다. 그가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얼마나 소중히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루터는 그가 작성한 요리문답으로 아이들과 어른들의 신앙교육을 실시한다. 루터가 또 하나 힘쓴 것이 공적인 예배 개혁이다. 예배에서 미사 예전문이 사라지고 성경 말씀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설교가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성찬은 독일어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루터는 교회 음악을 개혁한다. 사제가 읊는 성가, 성가대의 합창, 회중이 부르는 찬송 모두를 개혁하려 했다. 그는 류트를 탈 줄 알았고 노래를 불렀다. 음악에 대한 열성이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이 개혁을 고무시키고 격려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루터는 찬송가 창작에도 마음을 기울여 이미 1524년 23곡이 담긴 찬송가를 내놓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터는 교회의 목사로서 설교와 기도에 힘썼다.
그토록 어둡고 암매한 시대에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믿음으로 서슬 퍼런 당대의 그 어떤 권력에도 굽히지 않았던 루터의 삶이 그때만큼이나 어두운 시대를 사는 이 땅의 신자들에게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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