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테러(?)
고덕길 목사
(이슬라마바드 한인교회 담임)
1993년 7월 27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30 시간이 넘는 지루하고 초조한 비행 후에 텔아비브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지루한건 당연히 장시간의 비행 때문이었는데 나리타를 거쳐 방콕과 아테네를 경유하는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는 비행 스케쥴이었습니다. 초조했던 이유는 첫 해외 나들이에다가 텔아비브로 보낸 짐이 경유지인 방콕에서 이스라엘 보안요원들에 의해 다시 까다로운 보안검색을 받은게 원인이었습니다.
얼마나 까다롭고 힘들게 했던지 이스라엘에 입국하기 전까지 긴장과 초조함으로 내내 맘이 편치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들은 공항보안검색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아실것입니다. 게다가 떠나기 하루 전날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신문의 탑뉴스를 차지하면서 전세계인을 놀라게 하였기 때문에 혹시 이스라엘 공항에서 그냥 돌아오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조와 불안의 작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 발을 내딛었던 그해는 팔레스틴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수상 이츠학 라빈 사이에 평화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양측에서 협상을 반대하는 자들의 시위가 매일같이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고 심지어는 서슴없이 테러를 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자살테러의 뉴스가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하였습니다. 한번은 내가 타고 가던 시내버스의 바로 앞에 가던 버스가 폭발하기도 하였고, 또 살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폭발물이 터진 적도 있었습니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지만 히브리대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 직후에 그 식당이 테러의 희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끔찍하고 공포감도 밀려왔지만 테러는 거의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떠나온 후에 다시 파키스탄으로 간다하니 "자네는 왜 테러 나는 나라만 그렇게 좇아 다니나?" 하며 말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려했던 것처럼 파키스탄도 역시 테러의 나라였습니다. 크고 작은 테러가 조용하다 싶으면 한번씩 터지는 그런 나라입니다. 지금은 테러가 뜸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번화한 곳에는 가지말라고 주의를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테러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는 이유는 창세기 35장을 읽다가 5절에서 "하나님의 테러"(the terror of God) 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사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이 ...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다"라고 옮겼지만 거의 모든 영어성경은 "the terror of God was upon the cities..."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테러로 옮겨진 히브리어 명사는 구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소위 말하는 '하팍스레고메나'입니다. 칠십인역은 "두려움, φοβος" (포보스) 으로 옮겼는데 "파괴하다" 라는 뜻의 아카드어 atû 에서 온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인간의 테러는 파괴하고 두렵게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테러"는 파괴하고 두렵게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고 평안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테러가 공포심을 준다 하여도 하나님의 테러는 그 공포심에 비견할 수 없는 평화로 충만하기 때문에 그 공포심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는 그 어떤 공포심에도 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테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따라 테러의 나라에 사는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크신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지금은 테러와는 전혀 다른 코로나라고 하는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전세계가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인류를 위협하고 위험에 빠뜨린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전쟁, 기근과 더불어 전염병도 끊임없이 인간을 위협해 왔습니다. 이제 의학의 놀라운 발전으로 전염병 정도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그런 기대를 거둔지 오래인것 같습니다.
자타가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미국마저 바이러스 앞에서 맥을 못추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한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선진국이라고 자부했던 유럽의 주요 나라들이 모두 코로나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을 보면서 우주계획이 어쩌니저쩌니 하면서 장밋빛 밝은 미래를 꿈꾸던 인간이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코로나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하지만 또 언젠가는 코로나보다 더 강한 바이러스가 공격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두려움에 떨게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세에 되어질 일들에 비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왔고 또 겪고있는 문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아니 죽음 자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의 예수님을 알기에 그날 그곳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뿔뿔히 훝어졌던 제자들의 심정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다 알지 못할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감히 정죄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년반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훈련받은 제자들이 뭐 이래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 위험이 닥쳐오고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제자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고 해야겠지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부활을 노래하기 전에 이 죽음의 공포와 절망감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지음받은 첫 사람 아담의 죄와 사망 이래 모든 인류가 죽음의 감옥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고백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일 종려주일로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한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