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성찬”이 가능한가?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1. 들어가며
“인터넷 예배”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 가운데, 이제 “인터넷 성찬”에 대한 논쟁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 글은 성경적 원리와 신학적 원리에서 봤을 때에 “인터넷 성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터넷 예배”는 주일에 온 성도가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공예배를 인터넷을 통하여 각 가정별로 혹은 개인별로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 성찬”은 그러한 “인터넷 예배” 도중에 인터넷 방송에 나오는 목사의 지도를 따라 성찬을 각 가정별로 혹은 개인별로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인터넷 예배”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한시적으로 허용된 가슴 아픈 “타협”(compromise)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터넷 예배”가 허용된다고 해서 “인터넷 성찬”까지 허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2. 성경적 근거
2.1. 핵심 구절(locus classicus)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찬식에서 읽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이 구절들에서 알게 되는 성찬의 기본적인 원리는 아래와 같다.
2.2.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다(23-26절).
먼저,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라는 것이다.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헬라어, “파라디도미”) 성찬은 자신이 임의로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헬라어, “파라람바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들 “파라람바노”와 “파라디도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소급되는 진리(앎)와 행위(삶)의 수납과 계승을 뜻한다.
기독교회는 니케아신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공교회”를 믿음으로 고백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단일성, 거룩성, 사도성, 보편성이라는 4대 속성이 나온다. 그 중에서 사도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속성을 근거시켜 주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사도성에서부터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도성은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 행할 때에 확보된다.
우리가 왜 성찬을 행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2:19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기념하라고 직접 명하셨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따라 행해야 한다. 목사 개인이 혹은 개체교회가 성찬의 형식이나 방법에 대해서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645년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주님의 만찬인 성찬 성례는 자주 거행되어야 한다. 거행 횟수는 목사와 각 교회 지도자들이 숙고하여 결정하도록 하며 목사들은 자신에게 위탁된 성도를 위로하고 교육하기에 가장 편리한 때를 찾아야 한다. 오전 예배 때 성찬 성례를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기에 “성찬 거행 횟수”는 가급적 자주 하는 선에서, 개별교회 당회가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성찬의 방식”은 개별교회가 임의로 정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교단에서 “예배지침”으로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고신교단의 경우 “예배지침” 제 5장 19조 31문에서, “성례전은 누가 집례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 다음, “성례는 사적으로 개인적인 장소에서 행해져서는 안 되며, 공예배 때 집행하고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듣고 볼 수 있는 회중들 앞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름 받아 합법적으로 안수 받은 목사가 수행해야만 합니다.”라고 정해 놓았다.
우리는 다 주님의 식탁에 초청 받은 손님들이며, 목사는 그 식탁에서 수종드는 종들이다. 수종드는 자가 어찌 임의대로 식탁을 주관할 수 있으며, 손님이 어찌 주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식물을 먹을 수 있겠는가?
2.3.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23-25절).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식사 도중에 성찬식을 제정하셨다. 성찬은 로마 가톨릭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처럼 “제사”가 결코 아니다. 성찬은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공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공동의 식사 교제를 하고 성찬을 행하였다. 그러다보니 애찬과 성찬이 함께 섞여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말씀 예배와 성찬 예배를 분리하기도 했다. 교회사가들은 2세기쯤에 성찬 시행이 애찬과 분리되었고, 동시에 말씀의 예배와 성찬이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추정한다(P. Drews, “Eucharistie,” in PRE, 3rd ed. V:562).
물론 성찬은 단순한 공동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티슬턴, 『고린도전서』, 323). 공동의 식사라면 어느 개인의 집에서 행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성찬은 “교회에서 행하는 공동의 식사” 가운데 행해지는 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집”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비시킨다(고전 11:22).
이것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 성찬은 “새 언약의 식사”라는 사실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비된다. “옛 언약”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식사를 “가족 단위로” 진행하였다(출 12:21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그것은 “가족이 행하는 제사”였다(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하지만 “새 언약” 하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모인다. 교회 회원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로 모여서 함께 새 언약의 공동식사인 성찬에 참여한다.
2.4. 성찬은 공예배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일 때에”라는 표현을 쓰며, 34절에서는 “모임”이라는 표현을 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33절에서는 동사(“모일”), 34절에서는 명사(“모임”)로 각각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는 모두 동사 형태인 “쉰에르코마이”이다. 17절에서 “모임”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18절에서 “모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역시 “쉰에르코마이”이다.
성경 사전들은 이 단어가 ‘예배드리기 위해 회중이 모이는 것을 표현하는 사도 바울의 특수 용어’라고 설명한다(EDNT; TDNT). 바울은 이 단락을 여는 구절들인 17-18절과 닫는 구절들인 33-34절에서 “쉰에르코마이”라는 단어를 무려 4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성찬의 문제는 “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다(“어휘적 일관성”[lexical coherence] 기법).
18절과 22절에서도 바울은 “교회”(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자신이 다루는 이 성찬이란 주제는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성찬은 공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의 회원이 다 함께 참여하는 성례이다. 여기에서 “공예배를 위해 모인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성찬이 “공예배”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 행해지는 것은 부적절함을 뜻함과 동시에, 성찬이 “모이지 않은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 역시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예외적인 사항들(“환자들과 고립된 자들을 위한 사적 성찬”의 문제)은 아래에서 교회사적 근거를 살필 때에 다루도록 하겠다.
2.5. 성찬은 자신을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린도교회에서 성찬이 문제가 된 것은 “분쟁들”(헬라어, “스키스마타”) 때문이었다(18절; 고전 1:10 참조). 그리고 그 분쟁의 원인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자들이 [지체 높은 손님을 위한 ‘트리클리니움’이라는 방에 설치된 장의자에 엎드려 누워] 성찬의 음식을 먼저 배불리 먹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은 [신분이 낮은 손님을 위한 ‘아트리움’이라는 방에 조밀하게 서서] 배고프게 된 일이었다(21절). 고린도교회의 분열(고전 1:10)은 주의 거룩한 성찬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는 바울이 자주 그렇게 하듯이, 이번에도 바울의 처방은 근원적인 데서부터 출발하여 실제적인 데로 나아간다. 근원적인 처방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찬의 의미”를 다시 알려주는 것이다. 실제적인 처방은 성찬을 먹기 전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28절), “주의 몸을 분별”(29절) 한 후에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살피거나(철저한 검증; ‘도키마조’) 분별하지(분명한 이해; ‘디아크리노’) 못할 바에는 차라리 성찬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29절).
여기에서 자신을 살피고,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문맥적으로 볼 때에는 두 가지 적용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성찬의 원래 의미를 잘 깨달아서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마음을 드높여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도들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성찬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뿐만 아니라 신자들 사이의 연합 또한 확인하고 경축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적용적 의미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빠져 있는데 다른 하나가 채워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2.6. 성경적 근거에서 본 “인터넷 성찬”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라 아래와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첫째, 성찬이란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의식이다. 따라서 성찬의 방식은 목사나 개체교회가 임의로 결정해서는 안 되며, 교회들의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신중한 사안이다.
둘째, 성찬은 교회 회원 전체가 한 가족으로 참여하는 새 언약의 공동식사이며 공예배 시간에 진행되어야 한다. 성찬은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인 회중이 참여하는 식사이다.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은 사람들이 사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셋째, 성찬은 자신을 살피고 분별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성찬 참여 전에는 개인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뿐 아니라, 교회적인 심방과 권면, 치리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성찬을 위한 준비에는 자신 개인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상황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많은 교회들에서 성찬이 있는 주일에 헌금 드린 것은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전통을 가지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런 고려들이 없이 성찬을 행하는 것은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서 “인터넷 성찬”을 평가해 보면, 그것이 오히려 성찬의 원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는 아주 안 좋은 의식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판단은 아래의 신학적 근거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3. 성례론적 근거
3.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성례
로마 가톨릭은 일곱 가지 성례를 가르친다. 영세 성사, 견진 성사, 성체 성사, 고백 성사, 종부 성사, 신품 성사, 혼배 성사가 그것이다. 영세 성사는 세례, 견진 성사는 일종의 입교식, 성체 성사는 성찬식, 고백 성사는 고해, 종부 성사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 신품 성사는 사제 임명, 혼배 성사는 결혼과 관련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두 가지 성례만을 가르친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이다. 개신교회들이 이 두 가지 성례만을 인정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신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눅 22:19).
3.2. 세례와 성찬의 다른 점
세례와 성찬이 다 같은 성례이지만 다른 점도 있고 같은 점도 있다. 먼저, 세례와 성찬은 아래와 같은 점에서 서로 다르다.
첫째, 세례가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성례라고 한다면, 성찬은 언약 안에서 교육 받는 성례이다.
둘째,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성례라고 한다면(롬 6: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재확인하고 누리고 감사하는 성례가 된다(고전 11:24 “축사하시고...”).
셋째, 세례는 단회적이지만, 성찬은 계속 반복된다. 세례와 성찬 모두 죄 사함을 받은 것을 확인하는 성례이지만, 세례는 중생과 관련되고 성찬은 그 이후의 지속적 회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넷째, 세례는 사람의 역할이 수동적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사람의 역할이 능동적이다. 세례는 수동적인 중생의 성례다. 그래서 세례는 그저 고개 숙여서 받는 것이다. 반면,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영적 생명의 양육을 위한 성숙의 성례다. 따라서 성찬을 받는 자들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 즉, 먹고 마심을 포함한다.
3.3. 세례와 성찬의 공통점
하지만 성례로서 세례와 성찬이 가지는 공통점도 있다.
첫째, 세례와 성찬 모두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여 교회에 주신 성례이다.
둘째, 세례와 성찬 모두 말씀과 연합할 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성례는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 visible word)이라고 불린다.
셋째, 세례와 성찬 모두 믿음이 있을 때에 의미가 있다. 믿음 없이 세례 받는 것이 무의미하듯이, 믿음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무가치한 먹음”(manducatio indigna; unworthy eating)이 될 뿐이다. 세례와 성찬은 이미 있는 믿음에 도장(印)을 찍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이 없던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음이 있는 자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믿음이 공고해진다.
넷째, 세례와 성찬 모두 공예배 안에서 시행된다. 모든 성도가 모인 공예배에서 세례가 시행되는 것이 가장 합당하듯이, 모든 성도가 모인 공예배에서 성찬이 시행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다섯째, 세례와 성찬 모두 말씀의 집례자가 시행한다.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가 세례를 베풀 듯이,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가 성찬의 떡을 떼며, 성찬의 잔을 나눈다. 직분자가 없는 성례는 사실상 집행될 수 없다.
여섯째, 세례와 성찬 모두 언약적 관점에서 파악된다. 세례가 구약의 할례에, 성찬이 구약의 유월절 식사에 비견되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언약적 통일성에 근거한다. 또한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이 할례를 받았듯이 신약 시대에도 신자의 자녀가 유아 세례를 받는 것은, 신자와 그들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주어진다는 언약 신앙에 근거한다.
일곱째, 세례와 성찬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와 신자들과의 관계 둘 다를 함의한다.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신자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의식이다.
여덟째, 세례와 성찬 모두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된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된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성찬이 그 자체로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게 된다.
아홉째,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들의 경건의 표현이며 고백이다. 따라서 참된 신자는 세례와 성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례를 행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성례를 잘못 행하는 것이다. 연인들 사이에서도 잘못된 표현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니함만 못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3.4. 성례론적 관점에서 본 “인터넷 성찬”
이상과 같은 성례론적 관점에서 “인터넷 성찬”을 평가한다면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인터넷 성찬’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인터넷 세례’도 가능한가?”하는 질문이 당장에 제기될 수 있다. 세례와 성찬은 성례론적 관점에서는 같은 지위를 가진다. 둘 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말씀의 사역자가 행하는 새 언약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세례가 말씀의 사역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성찬 역시도 말씀의 사역자만이 집례할 수 있다. 평신도에 의한 세례가 불가능하다면, 평신도에 의한 성찬도 불가능하다.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중에 집례자의 인도에 따라 성찬식을 행해도 된다면, 세례 역시 그런 형태로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세례 받음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기에, 위급한 경우에 행해지는 “평신도에 의한 세례”를 변호하지만, 실재적으로 이런 입장이 전적으로 견지되진 못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생기는 폐해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성찬”을 주장하는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신도와 목회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평등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씀의 집례자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의무를 등한히 여기는 것이며,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그러한 직무를 받지 못한 자에게 유기하는 것이다.
둘째, “인터넷 성찬”은 이상과 같은 성례론적 의미들을 오히려 갉아먹고 왜곡시키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우선, 성찬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연합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도들 사이의 수평적 연합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터넷 성찬”은 부적절하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잔을 함께 마시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각 가정별로 독립적으로 성찬을 행하는 것은 성찬이 지니는 그 풍성한 교제적 의미를 완전히 축소하고 말 것이다.
다른 폐해들도 예상된다. 가령,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인터넷 예배”를 드리면서 “인터넷 성찬”을 함께 한다면 그것도 정당한 은혜의 수단이 되겠는가? 이런 폐해를 막을 길이 있겠는가?
아울러서 과연 집에서 “인터넷 성찬”을 엄숙한 가운데 행할 수 있겠는가?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교회당에서 행하는 예배보다 훨씬 산만하게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행하는 성찬은 더욱 더 그 의미가 반감되지 않겠는가?
또한 성찬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해서 “인터넷 예배” 중에 행하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가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배제될 텐데 그런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셋째, “인터넷 성찬”은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와 가정에서 드리는 가정예배의 구분을 모호하게 할 위험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모두 다 곧장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이 모인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공예배의 장소”로서 가지는 위상은 다르다. 왜 교회들이 세례를 가정에서 베풀지 않고, 교회의 공예배 시간에 행하도록 하고 있는가? 그것은 세례의 성격을 볼 때에 “온 교회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됨”을 교회의 공예배 자리가 가장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고신교단의 경우 헌법해설 제 5장 20조 34문에서, “세례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부름 받은 목사가 수행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가 아닌 자는 집례할 수 없습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인 장소에서 행해져서도 안 되며, 공적인 예배 때 집행하고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듣고 볼 수 있는 회중 앞에서 행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해서 다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예배당에 모일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17세기에 다수의 청교도들은 마태복음 18장 20절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을 “직분자가 있는 교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했다.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국가나 기독교를 박해하는 이슬람 국가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두 세 사람이 모인 교회”가 있을 수 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목사의 지도를 받고, 직분자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교회와 가정을 분리해서는 안 되지만,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과 가정에서 가능한 일을 구분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는 아주 훼파되고 만다.
이상과 같이 성례론적 의미에서 보자면, “인터넷 성찬”은 매우 부적절하고 심지어 성찬의 의미를 훼손시킬 위험이 농후하다. 그런 것을 지역 교회 목회자나 당회, 개체교회가 임의로 결정하여 “강행”한다는 것은 신학적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상황상 성례를 행할 수 없으면 온전하게 성례를 행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다. “성례의 결핍”이 아니라, “성례의 모욕”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580).
공예배의 자리에서 온 성도가 함께 성찬을 받는 것만큼 큰 신령한 복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즐거움은 절제를 통해 누려진다. 성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원리와 질서에 따라 이뤄지는 식사라야 식탁의 즐거움이 그리스도 앞에서 유효하다.
4. 교회사적 근거
4.1. 초대 교회 시대
1세기부터 5세기 정도 이르는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성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억이다. 성찬이 지니는 과거적 측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떠올렸다. 그들은 부활하신 분이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현존하는 기쁨과 환희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성찬처럼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밝고 기쁜 분위기가 더 많았다(곤잘레스, 『초대교회사』[개정증보판], 164).
둘째로, 초대 교회 성찬은 교제의 의미가 강했다. 성찬이 지니는 현재적 측면이다. 2세기 이전에 성찬은 애찬과 함께 진행되었다. 모여서 먼저 식사 교제를 하다가 식사가 마칠 적에 성찬식을 가지는 식이었다. 이런 모습은 교회의 하나 됨을 아주 잘 보여준다.
2세기 초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라는 책이 있다. 『디다케』 9장 4절에 성찬의 빵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빵 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
성찬의 빵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한 몸, 한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고자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성찬에서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을 사용한다. 신자 수가 많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찬을 진설할 때에 다 함께 모아놓지 따로따로 떼어서 배치하지 않는다. [성찬과 교회라는 중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성찬의 세 번째 요소는 다시 돌아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이다. 성찬이 지니는 미래적 의미이다(『디다케』, 10장).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간마다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다(페르디난트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56; 『디다케』, 16장). 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장차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실 그 나라를 소망하였다. 삶의 힘든 현실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극복했다.
4.2.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대는 가히 성찬론의 대토론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빵과 포도주가 진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 루터는 공재설(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공존한다), 츠빙글리는 상징설(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칼뱅은 영적 임재설(그리스도는 성찬상에 영적이지만 사실상 임재한다)을 주장했다.
첫째로, 당시 로마 가톨릭의 성찬론은 “화체설”(化體設)이었다. 떡과 포도주가 정말로(realiter)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사제들은 결코 떡과 포도주가 땅에 떨어져 주님의 몸과 피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떡은 웨이퍼(얇은 과자) 모양으로 만들어 성도들의 입 안에 넣어줘서 한 조각이라도 흘리는 일이 없게 했다. 포도주는 더욱 흘리기 쉬우니 사제들만 먹음으로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일이 없게 했다. 남은 빵은 다음 미사를 위해 보관하고, 포도주는 집전 신부가 다 먹어 소실됨이 없게 했다. 특히 포도주를 일반 성도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은 화체설에 근거한 잘못된 관습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트렌트 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교리화 하였다. 그들은 떡과 포도주 어느 하나만 받으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함께 수여되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콘코미탄티아(concomitantia)” 교리를 천명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성찬 교리는 교회의 위계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둘째로,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은 성찬의 아래에(sub) 함께(cum) 안에(in) 공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공재설”(共在設)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찬론을 비판한다. 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일반 성도들에게 주지 않고 오직 사제들만 마시는 관습을 “포로 상태”로 표현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제사장이므로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다 받을 수 있다는 루터의 사상은 이후에 “만인 제사장직 교리”로 발전한다.
하지만 루터의 성찬론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말씀과 함께 하는 성찬”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모든 성도들이 누리고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임재는 말씀과 성례가 연결될 때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 식의 라틴어 미사를 없애고, 각 나라 말로 설교와 성례를 집행하도록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셋째로, 츠빙글리는 “상징설” 혹은 “기념설”을 주장하여 화체설과 가장 반대되는 입장을 가졌다. 츠빙글리에 따르면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며,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일 뿐이다. 츠빙글리는 당시에 존재하던 물질주의적 경향을 매우 싫어했다. 로마 가톨릭은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에다 은혜를 섞어버렸다. 그리고 점점 빵과 포도주 자체를 숭상하는 우상숭배의 죄, 피조물과 창조주를 혼동하는 죄를 저질렀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물질화 시키는 현상을 츠빙글리는 극도로 혐오했다.
츠빙글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따라서 지금 내 앞에 있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빵과 포도주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영”이며,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넷째로, 칼뱅은 성찬상에서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영적 임재설”이라고 한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사실상의 임재”(virtual presence 혹은 genuine presence)를 주장한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칼뱅도 역시 “말씀과 신앙”이 “성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신앙 없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해 계실 리가 없다고 보았다.
특히 칼뱅의 성찬론에서는 “성령의 사역”이 강조되는데, 우리가 마음을 드높여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상향운동”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는 “하향운동”을 모두 강조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이 종교개혁 시대의 성찬론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성찬 논의를 불필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성찬론을 가지고 그토록 열불을 내며 다퉜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의 성찬 이해와 경험이 너무나 일천해서 생긴 현상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성찬론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했다.
첫째, 성찬론은 기독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주님의 ‘만찬’”이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만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단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먹고 마시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찬을 잘못 시행하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교제를 누리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행위이지 살아 있는 예배가 아니다.
둘째, 성찬론은 교회와 구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성찬론을 통하여 사제중심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구원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찬론을 통하여 사제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구원론을 확립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사제중심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목사와 평신도 사이의 역할적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배우는 교회”(ecclesia discens)로 나누었다. “가르치는 교회”란 교황과 주교로 이뤄진 집단으로서, “교도권”(magisterium)을 가진다. 반면에 “배우는 교회”란 “가르치는 교회” 하위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인데, 교회의 진리를 수납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사제들조차 주교들의 권위 하에 있으므로 평신도들과 더불어서 “배우는 교회”에 속한다.
개신교회는 이상과 같은 로마 가톨릭의 구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와 평교인의 구분을 완전히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 개신교회는 “집합적 교회”(ecclesia collectiva)와 “대표적 교회”(ecclesia repraesentativa)의 구분이 있었다. 전자는 전체 신자들의 모임을 뜻한다. 후자는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목회자들을 뜻한다. 개신교회가 “집합적 교회”와 “대표적 교회” 사이의 위계질서를 로마교회처럼 부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와 평교인의 역할적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무질서한 교회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성경적 균형이 교회의 본질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찬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기독론),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시며(구원론), 그분의 몸이 된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한 교리이다(교회론). 그래서 중요하고, 그래서 16세기 신학자들은 이 교리를 두고 엄청난 논쟁을 벌였다.
4.3. 종교개혁 이후 시대
종교개혁 이후 시대는 성찬에 대해서 또 다른 토론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면 “사적(私的) 성찬”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적 성찬”이란 공예배 중에 성찬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자리에서 성찬을 받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의견이 나눠졌다. 몇몇 신학자들은 성찬이 “매우 특별한 경우에, 다른 성도들의 입회 아래” 병자들의 집에서 병자들에게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조건이 중요하다. “매우 특별한 경우”란 중병에 걸려 죽어 가는 환자와 같이 앞으로의 삶 가운데 도무지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경우를 뜻한다. 또한 “다른 성도들의 입회 아래”란 장로를 반드시 포함하고, 그 병자를 아는 신자들이 반드시 거기에 참석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적인 성찬이 미신에 빠지거나 남용되는 경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신학자들은 성찬이 ‘공예배’(cultus publicus; public worship)의 일부로서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만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들과 장로교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일치한 생각을 가졌다. 그들은 성찬이 사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찬이 공예배 현장이 아닌, 개인의 집에서 시행되는 것을 분명히 반대했다. 그들에게 성찬은 본질적으로 만찬(deipnon), 함께 모임(sunaxis), 잔치(convivium)이며, 그리스도와의 교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들의 교제도 되기 때문이었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688-689).
이 점에 있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29장 4절에서도 동일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다음과 같은 행동은 이 성례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제정과는 위배된다. 즉 사적 미사 곧 이 성례를 사제나 다른 이로부터 홀로 받는 일이며, 잔을 백성에게 주지 않는 일, 떡과 포도주를 숭배하는 일, 숭배를 목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거나 행진을 하는 일, 다른 유사 종교적 용도를 위하여 보관하는 일 등이다.”
따라서 사적으로 성찬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쪽에 더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동의한다. 사적 성찬을 허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 장로와 성도들의 입회하에 시행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가르쳤다.
4.4. 종교개혁기 이후에 정립된 교회의 직분론
이와 더불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직분론이다. 여러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이나 감독교회의 폐단을 극복하고 평교인들에게 장로직과 집사직 및 그에 따르는 사역들을 돌려주었다. 그것은 성경적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목사와 치리 장로와 집사의 임무는 구분되어 있다. 여러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목사의 직무는 “기도, 설교, 성찬 집례, 축도, 찬송 지도, 교리 교육, 심방, 가난한 자들을 돌봄, 교회의 규율을 보존하는 일, 교회의 회원(member)을 관리하는 일 등등”이다.
치리 장로의 직무는 “성도의 삶을 살피는 일, 교회의 질서를 보존하는 일, 말씀으로 성도들을 지도하는 일, 연약한 자를 심방하고 위로하는 일, 집사들을 돕고 지도하는 일, 목사에게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고 함께 논의하는 일,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는 일 등등”이다.
집사의 직무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 교회의 헌물을 관리하는 일, 교회의 식탁과 제반 봉사를 돌보는 일 등등”이다. [여러 교회에 있는 권사직의 직무는 장로와 집사의 직무가 적절하게 섞여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례는 목사의 고유한 직무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례의 집례를 개별 신자에게 맡기는 것은 목사의 직무를 무질서하게 다루는 일이 된다.
4.5. 교회사적 관점에서 본 “인터넷 성찬”
교회사가 가르쳐 주는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종합하여 “인터넷 성찬”을 평가한다면 아래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초대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주듯이 성찬은 교제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인터넷 예배”와 같이 온 성도들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교제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성찬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초대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주듯이 성찬은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인터넷 성찬”에서는 부득이 하게 각자가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과 교회의 하나 됨의 의미를 크게 훼손시켜 버린다.
셋째, 종교개혁기의 교회사가 가르쳐 주듯이 성찬에 대한 신학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상황에 이끌려 성찬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 교회에 대한 생각, 구원에 대한 관점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터넷 성찬”이 성도들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줄 지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넷째, 종교개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듯이 성찬은 말씀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각 개인이 집에서 거행하는 “인터넷 성찬”은, 말씀의 집례자가 성찬을 직접 집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말씀과 함께”라는 요소를 약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목사직의 고유한 책무를 평교인들에게 이임(移任)함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훼손할 수 있다.
다섯째,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에서 배우는 지혜에 따라, 사적 성찬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곧 죽어가는 병자와 같이 정말로 사적 성찬이 필요한 경우라고 한다면, 장로와 성도들의 입회하에서만 성찬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성찬을 받는 성도도 지금 내가 받는 이 성찬이 공예배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누린 그 은혜를 전해 주는 성찬임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5. 결론: 성찬의 주인께서 다시 식탁을 차려주실 때까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와 말씀의 긴밀한 연결성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요한복음 강해』[Tract. Ev. Jo.], 80.3).
“말씀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물은 다만 물일 따름이다.
요소에 말씀을 더하라. 그리하면 요소는 성례가 된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성경적 근거가 있을 때에 생명이 되고 경건이 된다. 성경적 근거 없이 행하는 행위는 단지 종교적 의식이 되고 말 것이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원리와 건전한 신학적 근거가 없는 성찬은 일반적인 빵과 포도주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아니,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성찬을 행하는 것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될 것이다(고전 11:17).
필자는 “인터넷 성찬”은 코로나 19가 교회에 끼치는 “미끄러운 경사(slippery slope) 현상”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미끄러운 경사 현상”이란 하나의 변화가 연쇄적으로 다른 변화를 일으켜서 결국에는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현상을 말한다.
교회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인터넷 예배”를 허용했다고 해서, “인터넷 성찬”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 둘씩 “인터넷 화(化)”시키면 교회는 화(禍)를 자초하는 셈이 된다.
“성경”이 알려주는 바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새 언약의 식사이며, 자신을 살피고 분별하는 성도들이 공예배로 모인 현장에서 말씀을 맡은 목사에 의해서 집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터넷 성찬”은 성경적 원리에 맞지 않다.
“성례론”의 원리로 보더라도 “인터넷 성찬”은 득(得)보다 실(失)이 크다. “인터넷 성찬”이 가져올 병폐들과 부작용들에 대해서 교회는 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성찬”을 열어두면 “인터넷 세례”에 대한 질문도 나올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인터넷 성찬” 개념이 부적절함을 알게 된다. 성찬은 공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의 떡과 잔에서 함께 누리는 잔치인데, 각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행하는 “인터넷 성찬”은 그런 의미를 없애버린다. 그것은 목회자의 직무를 훼손하는 것이며, 성찬이 지닌 기독론적, 구원론적, 교회론적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게 만든다.
이처럼 성경과 성찬론과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에 “인터넷 성찬”은 온당치 못하다. 성찬의 풍성한 의미를 축소시키고 왜곡시키는 “인터넷 성찬”을 굳이 하려는 이유는 정말 성찬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목회자의 공명심(‘나의 목회는 이 정도로 앞서 나간다.’)에 근거해서 그런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상황에서도 성찬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반드시 시행하고 싶다고 한다면, 목사와 장로들과 몇몇 성도들이 각 가정에 방문하여 다니면서 예배를 집례하고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교회사가 알려주는 지혜이다. 전염병의 위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성도들에게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성찬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고 “인터넷 성찬”을 강행하는 것은 편의주의적인 발상에 근거하여 성찬의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방식의 도입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인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지금은 스스로 부족한 식탁을 차려먹는 민첩함이 아니라 주인이 차려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기다려야 했다면(고전 11:33), 함께 모이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모일 수 있을 때까지 마땅히 더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시점에서 교회는 힘들지만, 어렵지만, 오히려 결핍과 주림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 주리게 하실 때에는 주려야지만, 주린 자가 누리는 배부름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식사 중에 가장 “품위와 질서”를 갖춰서 해야 하는 식사가 바로 성찬이기 때문이다(고전 14:40 참조).
“인터넷 성찬”을 시행하고자 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있다면, 이상과 같은 내용을 꼭 고려해 보실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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