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월간 생명나무 (월간 고신) 7월호에 실린 글로 고신언론사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올립니다. - 편집장 주
청년 사역자의 눈으로 본 교회 청년
채충원 목사
(한밭교회)
들어가면서: 청년 사역자의 삶의 자리에서
청년 사역자들-이하 사역자들-도 청년입니다. 이 시대는 청년들이 살아가기 참 힘든 시대라고 하지요? 만일 그렇다면 사역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공식 모임에서는 정장을 입고,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찬양을 인도하고 설교도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결혼을 상대적으로 일찍 했을 뿐이지, 장래가 불안하고, ‘열정페이’, 즉 열정을 빌미로 낮은 수준의 사례금을 받으며 헌신적인 사역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같은 또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보통 청년들은 앞길이 막막한데, 그래도 교역자들은 장래 진로가 비교적 분명하게 그려지잖아요?” 예, 맞습니다. 길은 분명해 보이는데, 별로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 청년 사역은 정답을 찾기 힘든 사역입니다. 대도시에 위치한 소수의 거점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청년들을 보기 어렵고, 그나마 남아서 봉사하던 소수의 청년들도 해를 거듭할수록 부담이 적은 큰 교회들로 이동하곤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청년부 부흥의 역사적 사명을 사역자들의 어깨에 지우면서 단기적인 결과물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청년 사역을 해 온 사역자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통해서 지난 18년의 청년 사역을 되돌아보고, 후배 사역자들과 청년들을 생각하며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청년사역
사역 초기에는 청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시도해 보았습니다. 밥을 같이 먹고 커피 마시면서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같이 데리고 살면서 돌보기도 했습니다. 자기소개서 쓰는 것을 힘들어 하는 청년이 있으면, 초고를 읽어주며 첨삭도 해 주었습니다. 면접을 앞둔 청년이 있으면, 면접 준비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진로를 찾지 못하던 청년을 미국으로 연결하여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도 했고, 영어 때문에 힘들어 하던 후배를 위해 아침에 영어 큐티 모임을 하면서 회화 연습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취업과 진학을 위한 시험과 면접이 있는 날이면 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간절히 기도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취업이 안 되는 청년들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서라도 취업의 문을 열어주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준비하고 후원자를 모으려고 애쓴 적도 있습니다.
이성 교제와 결혼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참 멋있고 장래성 있는 청년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개와 협박(?)의 결과로 잘 만나서 주님 안에서 교제하다가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되면 그 때는 거의 천국 잔치에 버금가는 기쁨과 감사를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잘 되는 경우보다는 잘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사귀다가 자칫 상처를 남기고 헤어지기라도 하면, 당사자는 교회를 떠나기 쉽고, 청년부는 크게 휘청거립니다. 그럴 때는 밥도 잘 안 넘어갈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청년들이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고민을 털어 놓기 전에는 이성 교제에 관한 질문을 먼저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른들은 청년들이 예민해 하는 주제일수록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합니다. 어떤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지? 직장은 정규직이니? 어서 안정된 직장에 취업해서 결혼해야겠구나! 기도한다!” 청년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교회를 떠나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미혼 청년부를 부흥시킬 생각, 즉 청년들을 많이 모아 놓고 양육할 생각은 하지 말고, 모두 빨리 결혼시켜서 청년부 문을 닫을 비전을 가지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쉽습니까?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청년부 일이 많지 않아 보여도, 예민한 일이 많고 관심 가진 분들도 많아서, 가지 많은 나무처럼 바람 잘 날 없는 곳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바보들
그런데 청년 사역을 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경향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험에 합격하고, 취업도 하고, 사귀는 사람이 생겨도 만족하며 감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잠시 감사해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구동성으로 ‘바쁘다’고 합니다. 힘들게 취업을 하거나 진로가 정해지면 하나님께 더 감사하여, 이전에 소홀했던 예배 생활이나 교회 봉사에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할애해 줄 것을 사역자들은 기대하고, 리더로 봉사해 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임원이나 리더로 봉사하는 것을 기피합니다. 그래서 취업 이후에 더 열심히 예배하며 봉사하는 청년은 정말 보석 같이 귀하며, 결국 대부분의 교회 봉사는 재학생이나 취업 준비생들의 몫이 됩니다.
한편, 설상가상인 것은 교회 생활을 거의 안 하는 청년들이 오히려 취업이나 결혼을 더 잘 하는 것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역사지요.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봉사도 전혀 하지 않는 청년들이 좋은 직장 다니다가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제 마음도 솔직히 불편합니다. 정말 속이 좁은 목사지요. 물론 그 청년들이 취업 잘 하고 결혼 잘 하는 것은 축하할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수년간 취업 준비하면서 연애나 결혼을 무기한 연기하면서도 청년부 리더와 교회학교 교사 등으로 묵묵히 봉사하고 있는 청년들을 생각하면 정말 그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지금, 여기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제 생각을 고쳐주십니다. 제 눈이 청년들의 결핍과 고통에만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비록 가난했지만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배부르고 풍족할 때뿐만 아니라 굶주리거나 궁핍할 때도 언제나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청년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배운 그 비결을 그들도 배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취업이 안 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해도, 또는 그와 반대로 좋은 직장을 다니고 일을 많이 하면서 바쁘더라도 항상 주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궁핍하고 실패하여 비천함을 느끼게 되면 자존감이 끝없이 추락하여 신앙을 지키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 주시는 능력으로 신앙을 잘 지킨 사람은 그 후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어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년들을 생각하며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경기 불황이나, 취업난과 생활고와 사회적인 고립 같은 현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청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 여기에서’ 공급 받으며 살고 있느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무리 자기소개서 작성과 면접 준비를 잘 도와준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 심지어 거처를 마련해 주고, 취업지원금을 주고, 직장을 소개시켜 준들, 그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습니까? 물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나 만일 청년들이 궁핍하고 비천할 때뿐만 아니라, 인정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살 때도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있는 비결을 체득한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실패할 때나 성공할 때나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나오면서: 기도와 말씀, 그리고 공동체
그렇다면 청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학교 정규과정을 이수한 청년이라면 어렴풋이나마 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답이 기도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뻔해 보이는 답이지만, 답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으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빌 4:6,7). 기도를 하면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9절에서는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 즉 사도적 복음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붙들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지금도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심령도 평강으로 붙드십니다. 따라서 청년의 때에 필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청년들에게는 기도와 말씀을 공급 받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역자와 공동체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보다 많이 연약합니다. 사역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그 때에도 주님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전해주는 사역자를 통해,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내 이야기에 경청해주는 형제자매들을 통해, 삼위 하나님은 우리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즉 그리스도의 몸된 영광스러운 교회에 속한 지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를 ‘세겹줄’처럼 강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만일 청년들이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해 줄 수 있고, 그들이 울고 싶을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역자와 공동체가 그들의 곁에 있다면 그들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붙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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