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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1]

 

 

저자: 윌버트 판 다이크 (Wilbert M. van Dyk, 전 미국 칼빈 신학교 학장 및 설교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교회에서 드려지는 주일예배의 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보라. 세례반(盤)이 선명하게 보인다. 예수님을 믿는 부모가 세례 받을 유아를 목사에게 건네준다. 목사의 적셔진 손이 세례반(盤)으로부터 아이의 머리로 움직이면서 아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선포된다. 경외로운 경험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일까?

 

 

성경의 통일성과 언약

 

   만약 우리가 성경의 통일성을 확인한다면 믿는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다. 육 십 육 권의 책들, 신약과 구약, 하지만 하나의 성경. 성경의 각 권과 신약과 구약 각각은 그 자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이야기의 줄거리이다. 구약에서 동물 희생제사들과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제사의 전조가 되었다. 구약 선지자들은 기름부음 받으신 이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모인 회중들에게 말씀하실 때 신약과 구약 사이의 다리에 관한 확언을 하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 신약의 책들은 구약으로부터 인용된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로마서 4:16-17절과 갈라디아서 3:6-9절 말씀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로 간주함으로 신약과 구약 사이의 연속성에 관한 더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로마서 11장은 신약의 교회를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 묘사하고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간주한다.

   유아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자신의 언약을 세우셨을 때 시작한다 (창 17:1-14).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신실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야 했다 (창 17:1). 그 언약 제정의 표징으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권속들 가운데 모든 남자, 그리고 난 지 팔 일된 모든 남자 아이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창 17:10-14). 여기서 당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분별력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하기 위한 자신들의 인격적 헌신을 하고 난 다음 할례라는 언약의 표징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 본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가장 어린 아기들도 그들의 몸에 그분의 백성들과 맺은 그분의 언약의 표징을 간직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수십 세기에 걸친 구약성경 역사가 말해주는 바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분의 희생은 구약의 피의 성례들을 완성했고 그분은 교회를 위한 새로운 성례들을 제정하셨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그분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은 신약에서 폐기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피”라고 칭하셨던(막 14:24) 그분의 피를 통해 그 연속성을 가진다. 구약에서 하나님 이야기에 본질적인 것은 신약에서 하나님 이야기에 본질적인 것으로 남는다. 더 이상 피의 유월절은 없지만, 이제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있다. 더 이상 할례라는 피의 성례는 없지만 이제 세례를 베풀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있다. 오직 남자 성도들과 그들의 아들들만 할례를 받아야 하는 구약의 가부장적 문화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에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없는 신약의 문화가 있다 (갈 3:28).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 심지어 그들의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고 따라서 세례의 성례를 받아야 한다.

   당신 자신이 1 세기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상상해 보라. 당신 뒤에는 유아 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수 천년의 전통이 있다. 이제 당신의 아기가 갓 태어났다. 당신은 할례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알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은 그 점을 분명히 했다 (행 10:44-11:18; 롬 3:27-31; 갈 5:6). 당신은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세례가 필수적임을 알고 있다 (마 28:18-20).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쓴 편지의 기저에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와 세례, 이 둘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이해한다. 둘 다 우리의 죄를 잘라냄 혹은 씻어냄의 표징들이다 (골 2:11-12). 따라서 당신은 자연스럽게 당신의 선조들의 유아들이 할례의 성례를 받았던 것처럼 당신의 유아가 세례의 성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약의 기본 원칙은 이렇다: 만약 부모가 신자들이라면, 그들의 유아들은 언약에 포함되며 따라서 그 유아들은 언약 회원 자격의 표징을 받아야 한다.

 

 

관련 성경본문들

 

   이 생각은 또한 다양한 관련 성경본문들에 반영된다. 어린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태도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제공하도록 지시를 받은 돌봄의 방식에 나타난다 (신 4:39-40; 6:4-9; 잠 22:6).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고 기도해 주셨고” (마 19:13-14),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예로 그들을 세우셨다 (마 18:2-4).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복음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에 대한 것이라고 선포했다 (행 2:39). 고린도전서 7:14절에서 바울은 적어도 한 명의 믿는 부모를 둔 어린아이들은 “거룩한” 아이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본문들 중 어느 본문도 믿는 부모를 둔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본문적 증거를 제시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 – 성경의 통일성, 언약과 그 성례들, 성경에서 어린이들의 현저한 지위 – 는 믿는 부모가 세례반(盤)에서 그들의 유아들을 건네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세 가지 문제점들

 

   만약 유아세례가 성경본문과 사례에 의해 증명된 성경의 명백한 명령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부모의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은 적어도 주의를 요하는 세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한다.

 

첫 번째 문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예수님은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닐까? 하지만 예수님은 또한 유아로서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의 사례에 대한 강조는 유아 때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넌지시 말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사례는 세례가 믿는 성인들에게만 행해져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유아세례를 금지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 “회개하고 믿으라”

 

   베드로(행 2:38)와 바울(행 16:14-15)은 청중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며 세례를 받으라고 도전했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되게 성령께서 복음을 듣고 이해한 이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을 때, 이 새 신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16:15; 16:33; 18:8; 고전 1:16). 동일한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야 한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불신자를 믿음으로 초청한다. 회심자가 회개하고 믿을 때, 그 사람과 그의 자녀들은, 심지어 그 자녀들이 분별력 있는 나이에 아직 이르지 않았는 경우에도, 세례를 받는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패턴이다.

 

세 번째 문제: 유아가 세례를 받은 사례가 성경에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선교적 상황에서 유아가 세례를 받았던 사례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믿는 부모를 둔 아이가 세례를 받기 전 어떤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사례 또한 없다. 사례 혹은 사례의 부재(不在)는 하나님의 언약 가족에 믿는 부모를 둔 유아들을 포함시키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차적이다.

 

 

하나님의 가시적 말씀인 세례

 

   수세기동안 교회는 성례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시적 말씀”으로 이해해 왔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비록 성찬에서 용어들은 능동적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받고 먹으며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세례에서 용어는 수동적이다 (우리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에서 하나님은 공적으로, “이들 믿는 부모를 둔 이 아이는 나의 언약의 자손이다” 라고 선포하신다. 응답으로 그 부모는 그 아이를 기독교 신앙으로 양육하겠다고 약속한다. 교회는 동일한 의무를 행할 것을 약속한다. 그 아이가 가정과 교회의 돌봄 가운데 성장함에 따라, 그가 다음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공적으로 표현할 날이 찾아온다: “당신은 공개적으로 당신의 (유아)세례 때 당신에게 적용되고 인쳐졌던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받아들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 안에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구주 안에서만 생명을 얻기 원한다고 겸손히 고백하십니까?”

   물론, 세례반(盤) 앞에 있는 유아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그분의 은혜의 말씀을 발하시고 자신의 약속을 택하신 이들의 것이 되게 하실 자유가 있으시다. 애정이 깊은 부모는 그들의 유아에게 그 아이를 향한 자신들의 사랑과 그 아이의 장래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를 말해줄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것을 세례에서 행하시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겠는가?

   세례가 그 아이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그 아이가 기독교 신앙가운데 성장할 것을 보증하지도 않는다. 언약의 청소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아)세례 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무효화 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은 세례로 매여 있어 왔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방탕한 아들들과 딸들은 불신앙의 먼 나라들을 방랑하겠지만, 교회는 언젠가 세례로 표시되고 인쳐진 그 사랑의 줄이 그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것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한다.

   공적인 “아기 이름 짓기” 행사를 통해 아이에게 세례명을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적 교회 예식을 통해 아이를 봉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가 분별력을 가질 때까지 세례를 연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믿는 부모를 통해 태어나게 하심으로 자신의 언약으로 이끄신 아이들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의식을 받을 자격이 있다.

 

 


[1]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08년 가을 호에 “The Baptism of Babies: What Does the Bible Say?”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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