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전도와 선교'입니다. 가면 갈수록 전도와 선교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전도하면 '너희나 잘하라'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고, 선교에 대한 교회의 열의도 점차로 쇠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웃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개혁주의 전도와 선교 원리와 작은 실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 편집자 주 |
개혁교회 선교원리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선교활동을 왕성하게 벌이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른 선교원리를 따르지 못해서 선교지에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바른 원리를 따라 선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고 이 토대를 견고히 할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선교원리를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원리: 교회의 사명은 무엇보다 선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누가복음 24:47-48)
위 말씀은 흔히 선교명령으로 잘 알려진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터요 교회의 대표자인 사도들에게 주신 이 명령은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가서 교회의 항존 직무인 설교와 성례, 그리고 권징을 시행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주신 선교명령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예수님은 여기서 교회에 항존(항존) 할 직무 중에서 설교와 성례, 그리고 설교를 지키기 위한 수단(특히 여기서는 권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설교와 성례, 권징이라는 항존 직무를 맡은 사역자가 선교명령을 받아 특별히 모든 민족이나 타 문화권에 가서 사역을 할 때 특별히 그 사역을 선교라 하고, 그 사역자를 가리켜 선교사로 부른다.
어쨌든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교인의 수가 증가하고, 시설을 완비하고 조직을 구비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자기들이 속한 가까운 지역 공동체와 교류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먼 나라 일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이들은 마치 회원권을 제한하는 폐쇄적인 친목단체와 같다. 국내든 해외든 선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선교사를 강사로 모시는 것을 꺼려한다. 또 다른 교회는 선교를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교회의 사명을 교회 내부의 일로 국한시키고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것과 복음을 어떻게 지역사회에 변증할 것인가, 혹은 기독교학교를 세우고 가까운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 돈을 투자하고 나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개혁교회는 마치 기독 지성인을 위한 것이지 해외에 있는 미개인이나 어린이에게 가서 선교하는 것에는 사명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게 하나님 나라의 때가 언제인지 물었을 때 주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모든 민족에게 가라고 명령하셨다. 땅 끝에 가서 하늘과 땅을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은 그들도 우리와 함께 모든 나라의 주재이신 주님을 찬송하고 예배할 자이기 때문이다. 말일에 모든 나라의 백성이 여호와의 전인 산에 와서 주님의 길을 배우고 주님의 길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상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함께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을 찬송하는 것이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편 22:27-28)
둘째 원리: 선교의 주체는 교회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회정치 제159조는 목회자이든 전문인이든 그가 선교사로 가려면 모두 총회의 파송을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총회의 지도감독을 받을 것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이는 파송의 주체가 교회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교회에 이 일을 위임하셨다. 따라서 선교사는 자기 개인의 헌신이나 의지와 열정으로 선교지로 자원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물론 우리는 이를 무시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교회를 대표하는 총회(세계선교이사회)에 의하여 파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감독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 선교사를 발굴하고 훈련하며 파송하고 후원하며 보고를 받고 감독하는 주체는 교회이다. 결코 변할 수 없는 개혁주의 선교원리는 선교는 선교사 개인이나 선교단체가 아니라 교회가 중심이 되어 수행하는 것이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으시되 복음의 말씀을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고백이다.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지 독립된 개인의 사명이 아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을 보면 사역자를 선택하여 보낸 것도 교회이며, 새로운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듣고 연락을 계속하면서 그 사역을 든든하게 한 것도 교회이다.
예루살렘에서 모인 최초의 총회는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지시도 없이 나간 자들이 선교지에서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사도행전 15:24). 갈라디아 교회에도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갈라디아서 2:4)들이 교회를 요동시켰다(갈라디아서 5:10). 이들은 선교의 열정과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선교지에 나갔지만 이는 교회와 무관한 개인의 일이었고, 결국 말로 선교지와 성도들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 자들이었다. 그 결과 선교지에서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발자취를 따라서 선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총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여러 측면에서 그를 검정해야 하고, 또 선교지에 파송한 이후에도 계속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그가 바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바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회가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그 자체만을 강조하는 현대의 선교관에서는 선교사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가 약화될 우려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을 불러서 교회를 모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총회와 치리회의 파송을 받지 않고 또 이러한 감독 아래 있지 않은 선교사들은 아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의 교회를 세우거나 자기의 사업을 하거나 자기의 왕국을 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교현지에서 선교사들이 교회의 지시와 감독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나 선교현장에서 교회에 보고하는 자료가 부실한 것은 교회를 선교의 주체로 고백하는 것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총회는 현재 매년마다 교세보고서를 통하여 개체교회 및 각 노회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비록 선교지의 상황이 천차만별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이에 준하는 정기 보고서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선교현장에서 몇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유아세례를 시행하였는지, 또 얼마나 장로와 직분을 세우고 당회를 세웠는지, 얼마나 많은 신학생을 배출하였는지, 몇 개의 노회가 있는지, 재산상황은 어떻게 되는지, 회집 인원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원리: 선교의 목적은 교회건설 곧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이미 우리가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선교명령을 살펴 본 대로 교회의 기초를 놓을 사도들에게 주신 선교명령은 다름 아니라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까지 나가서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통해 교회를 세우라는 교회건설명령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후에 이 반석 위에 학교나 건물 세우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6장 18절). 따라서 선교지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학교를 세우고 고아원과 병원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가를 항상 물어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은 결국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것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 항존 직무(말씀과 성례와 권징)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있는 것이 바로 교리표준(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과 관리표준(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이다. 그리고 이 직무를 수행할 항존 직원 즉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고 개체교회를 감독할 노회를 세워야 한다. 따라서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설계도를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 내한(來韓) 장로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회를 건설하면서 너무 간단한 설계도면, 혹은 원칙이나 중심이 없는 설계도면을 가지고 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당시 내한 장로회 선교사들이 과연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교회와 교회건설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가졌는지, 신앙고백서와 장로회정치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였는지, 영혼과 선교에 대한 열정은 비할 데가 없지만 교리표준이나 공예배나 직분이나 치리회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졌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교리표준의 경우 1907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채택한 12신조는 너무나 간단한 기독교 교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922년에 가서야 총회가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교리문답인 소교리문답(107개 문답)을 헌법에 수록하고, 고신교회의 경우 장로회 선교사 내한 85년이 되는 해인 제19회 총회(1969년)에 가서야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을 채택하기 때문이다.1)
또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결성 시 채택한 <교회정치> 역시 12신조의 경우처럼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본래 초안하여 인쇄한 웨스트민스터교회정치가 아니라 “간단한” 교회정치였다는 점이다: “너무 중한 짐이 되어 연약한 교회가 감당키 난하니 맛당히 만국장로회의 보통원리에 터하야 간단히 제정 사용하다가 몇 개 년 후 교회가 성장하여 장로회교회에 한숙하게 된 후에 교회가 자기의 형편에 적당한 정치를 제정하는 것이 합당하다.”2)
결국 1907년에 채택한 교회건설의 설계도면에 해당하는 ‘간단한’ 교회정치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곽안련 선교사가 주도하여 개정한 1922년 <교회정치>에서 북장로교회의 교회정치로 거의 채색되어 이후 조금씩 리모델링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이 도면에 의해 세워진 하나님의 집, 이 집에서 생활하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것은 부족한 것도 있고(예) 장로 윤번제), 불편한 것도 있고(예) 서리집사에 대한 조항), 무리한 것도 더러 있고(예) 직원 선출 시 3/4, 2/3 규정), 왜곡된 것도 있다(예)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본 것과 장로의 직무에 행정을 더한 점 등).
이는 새로운 토대에서 새로운 교회건설에 진력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와 너무 대조가 된다. 예를 들어 제네바 교회의 칼빈은 간단한 신경이나 교회정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제네바교리문답 뿐 아니라 제네바교회정치(1537년, 1541년, 1561년)를 작성하였고, 독일의 팔츠 지방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과 함께 팔츠교회정치(1563년)를 작성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시 신앙고백서와 함께 제1권징서(1560년), 제2권징서(1578년)를, 웨스트민스터총회(1643-1649)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 예배모범과 함께 교회정치(1645년)를 작성하였다. 폴란드 태생의 종교개혁가 요한 아 라스코(1499-1560) 역시 영국 런던에 소재한 난민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교회를 꿈꾸면서 첫째, 교회건설의 가장 중요한 단계로서 신앙의 주요사항에 대한 교리를 담은 <교리개요>를 작성하여(1551년 1월) 교회에 가입하는 교인은 모두 이에 공적으로 서명한 후에야 교인명부에 이름을 올리도록 하였으며, 둘째, 일종의 예배지침과 교회정치를 합친 것이라 할 수 있는『영국 런던에 있는 피난민 교회 교회적 봉사의 전반적인 예식과 가르침』에서 보듯이 같은 신앙고백을 통해 연합을 이루는 교회, 교회의 4대 공적 사역, 즉 설교와 성례시행, 구제, 권징이 공적으로 신실하게 시행되는 교회(이를 위해 네 직분 제시), 교인들이 직분자 선출과 권징(특히 출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 장로들의 회인 치리회를 통해 권징이 나타나는 교회, 특히 교회의 공적 사역인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를 제시하였다.3)
교회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후원하며 선교활동이 왕성하게 나타날 때에 우리가 더욱 조심하여 우리의 선교가 과연 바른 터 위에 서 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교회의 사명은 선교이며, 선교의 주체는 교회이며, 선교의 목적은 교회건설이라는 평범한 선교의 원리를 잊지 말자.
2) 곽안련 편, 한국교회사전휘집(경성: 조선예수교서회, 1918),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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