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전혀 다를까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도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고통, 그리고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치유하는 길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 편집장 주
중년의 결혼생활
김창선
(울산교회 정근두 원로목사 아내)
요즈음에는 신조어들이 꽤 많습니다. 나처럼 정보에 둔한 사람은 들어도 모르는 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중에 ‘졸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결혼을 졸업하는 거랍니다. ‘졸업이면 마친다는 얘긴데 아니 왜?’ 나 같은 교과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것도 수십 년을 함께 살다가 늘그막에 ‘졸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좀 더 들어보았더니 평생 남편 밥해준다고 힘들어서 더이상 못해 먹겠으니 당신은 당신 팔 흔들고 나는 내 팔 흔들고 자유롭게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밥하는 문제만 있었겠습니까? 나름 쌓인 게 있었겠지요. 결혼할 때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겠다는 서약과는 상관없이 서로에게 메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이야기인데, 자식들도 집을 떠나고 이제는 외로움을 탈 나이에 난데없이 ‘졸혼’이라니 웬 날벼락인지 말입니다. 시대가 바뀌어 개인의 자유, ‘나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런 말도 나올 법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구시대를 사는 나로서 ‘졸혼’은 불안하고 위험한 단어로 들립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딤후 3:1-3)
얼마 전에 하동에 사시는 형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소장에 천공이 생겨서 진주 경상대학교 병원에 입원을 하셨답니다. 한 십 년은 가까이 되었을 것 같은데 악성 근염으로 오랫동안 약을 드시다보니 그리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주버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연세도 팔십이 넘으셨는데 병원에서 아내 뒷바라지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요. 다행히 서울과 부산에 사는 딸들이 교대로 다녀가며 간병을 도와주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실은 형님 내외분은 십 수 년쯤 전에 재혼을 하셨습니다. 그 때 형님은 아주 건강하셨고 아주버님이 오히려 상처를 하고, 수년을 힘겹게 사시느라 건강이 좀 좋지 않았지요. 그런데 결혼하고 몇 년 후에 형님이 편찮으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버님은 워낙에 성품이 유하신 데다, 배려하고 돌보는 일을 잘 하시는 분이라 환자가 된 아내를 돌보는 그 고생스러운 일을 기쁨으로 잘 감당하고 계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도 루게릭병으로 병원에 계시는 장로님 한 분이 생각납니다. 울산 극동방송국이 처음 개국될 때 초대 지사장이셨던 분인데 한 이태 전에 루게릭병으로 판정을 받고 이제는 정말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을 만큼 병이 진행되어 아내 권사님께서 밀착간호를 하고 계십니다. 그나마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가락 신호를 보내거나 눈동자를 움직여 의사소통을 하던 일도 이제는 불가능해졌습니다.
힘들게 숨 쉬는 일을 도와드리고, 넘길 수 없는 침을 하루종일 닦아드리고 유동식을 관을 통해 넣어드리며 배변을 처리하는 일, 굳어가는 팔과 다리를 주물러 풀어주는 일 등 권사님의 고생이 말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 남편을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정말 그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 찬양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부부가 되어 산다는 것은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 때나” 서로에게 신실하기로 서약한 관계입니다.
그러면서 꽤 한참 전에 영국에 사는 조카가 제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이모는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뭣 하러 결혼은 해 가지고 한 남자에게 메여 살아요?” 질문을 듣는 순간 ‘메여 산다? 글쎄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로 너무 다른 우리 두 사람이 만나서 살다보니, 남편이 나를 보면 답답하고 내가 남편을 보면 아직도 황당하지만, 내 인생에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참 재미없게 살았을 거다. 교과서요, 표준전과 다보니, 놀고 즐기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일중독으로 일만 하고 살았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남편을 반려자로 보내주셔서 인생이 훨씬 재미있고 풍성해졌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 언젠가 젊은 여성도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 누구의 아내로 누구의 엄마로 살다보니 ‘나’라는 존재는 없어져 버린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존재가 바로 ‘나’이고,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존재만큼 귀한 존재가 또 있을까요? 아내, 엄마가 없었다면 인류가 존속할 수 있었을까요?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인생,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처럼 순식간에 떠나가면 그만인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 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고 세워주며 산다면 의미 있고 귀한 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거룩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은퇴하기 전에도 늘 목회자인 남편의 일정에 맞추어 살아왔고, 지금은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고 두 사람만 살다보니 남편의 시간표가 내 시간표이고, 남편의 식사습관이 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남편 한 사람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고귀한 사명과도 같은 일이니까요. 원래 결혼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서로 ‘돕는 배필’로 살도록 의도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평생을 그 많은 땀을 흘려가며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까지 고생하며 일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게 젊은 날 서로를 사랑하며, 자녀를 키우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일보다 어쩌면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남은 나그네 인생길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노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년에 배우자를 향해 갖게 되는 사랑, 그것은 누군가가 말했듯이 ‘사랑한다는 것은 낭비하는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스케줄을 망가뜨리고 아니 매일의 삶을 송두리째 다 바쳐서 사랑하는 한 사람을 섬기는 일은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합니다.
언젠가 읽었던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당신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네요. 아무 값도 없이, 한없이 부으시는 사랑 말입니다. 그 사랑을 본받아, 한 사람 남편을, 아내를 또 자녀를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몇몇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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