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청년멘토'입니다.
멘토라는 말이 유행한지 제법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는 너도 나도 청년들의 멘토가 되려고 합니다. 스스로 멘토노릇하려는 이들은 꼰대가 되기 쉽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청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맨토들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이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 미래에서 호출해낸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반면교사들로 인해 우리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말없이 멘토가 된 이들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 편집자 주 |
청년 아우구스티누스
안정진 목사
(서초동교회 담임)
『서양 고전 읽기 특강』(좋은씨앗)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주후 354-430)는 지금부터 1,500년도 훨씬 지난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대부분을 방탕하게 지내다가 32세에 회심하였고, 37세에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고대와 중세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종교 개혁가들이 로마가톨릭교회와 싸우기 위해 의존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 기독교 사상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고백록』을 비롯하여,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인의 교양』, 『하나님의 도성』과 같은 수많은 불후의 작품들을 집필했다. 19세기의 신학자 하르낙은, “사도 바울과 루터 사이에 아우구스티누스에 비할 만한 인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끼친 광범위한 영향에 있어서 누구도 그에게 비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찬사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쨌거나 이것은 그가 회심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일어난 일과 업적들이다. 그렇다면 회심하기 전, 곧 32세 이전의 청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그의 자서전 『고백록』(Confessiones)은 이러한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준다. 보통의 자서전처럼 인생을 마무리하면서가 아니라, 그는 43세에 히포의 주교로서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고백록』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3년 후 46세에 완성했다(주후 397-401). 총 13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구성 중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1-9권이 과거에 대한 기억과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인간의 죄와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관용에 대한 것이다. 즉 그의 고백은 이중적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언”의 기록이다. 그가 묘사하는 청년기의 유혹과 죄는 대체로 우리의 경험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역할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세 가지 범주로 요약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 청년 시절, 하나님을 떠나 이런 죄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져 버린” 상태로 묘사한다(2.1.1). 허망한 것에 대한 사랑이 내면의 질서를 산산이 깨뜨려 버려서, 삶의 통일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육신의 정욕
특히 카르타고 유학 시절에 이런 죄들이 그를 압도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로 문화, 정치, 상업, 종교의 중심지였다. 또한 카르타고는 쾌락의 도시였기에, 육적인 청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도시의 쾌락, 정욕에 빠진 추악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고상하고 세련된 사람으로 보이고자 노력했다. “나는 ‘카르타고’(Carthago)로 왔는데, 거기에서는 내 주변의 도처에서 추악한 애욕의 ‘솥단지’(sartago)가 큰 소리를 내며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나는 . . . 애욕을 사랑하고 있었고, 덫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안전하고 순탄한 길이 싫었기 때문에, 애욕의 대상을 찾아다녔습니다”(3.1.1). 그는 한 여자를 만나 동거하는 가운데 사생아를 낳았고, 마니교 이단과 점성술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욕의 대상을 찾아다닐수록 그 속에는 쓰디쓴 것들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애욕의 달콤함을 즐길수록, 애욕은 은밀하게 점점 더 나를 옥죄어 왔습니다.” 후에 그는 이것을 그는 주님의 채찍이었다고 증언한다. “달콤함은 지독한 괴로움과 뒤섞여 짜여 있어서, 나는 시기와 의심, 두려움과 분노와 다툼 등과 같은 벌겋게 달구어진 쇠막대로 채찍질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3. 1.1).
안목의 정욕
도시에는 구경거리들이 많았다. 검투사들의 경기, 전차 경기가 있었고, 연극 공연들이 있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연극공연을 즐겼다. 나중에 이것을 “안목의 정욕”이었다고 고백한다. 허구적인 비극 공연을 보면서 쓸데없는 감상(연민)에 젖어들었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욕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피부를 긁고 곪아 썩게 하는 상처와 같았다. “내 마음의 표면만을 살짝 긁고 지나갔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슬픔들은 독이 묻어 있는 손톱들처럼, 나의 마음에 염증을 일으켜서, 내 마음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결국 썩어 문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나의 삶이었습니다”(3.2.4).
이생의 자랑
청년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뛰어난 자질이 있었는데, 수사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했지만, 그 때문에 교만함으로 부풀어 자기보다 못한 학생들을 혐오하기도 했다. 그는 성공과 돈을 벌기 위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말로 이기는(때로는 기만적으로) 수사학적 기술을 학생들에게 팔기도 했다. 이렇게 19세에서 28세까지 카르타고에서 9년이라는 시간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여러 가지 욕망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미혹되고’ 다른 사람을 ‘미혹하며’ 스스로 ‘속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4.1.1).
뒤틀린 의지로 인해 생겨난 정욕의 습성은 회심하고 나서 히포의 주교가 된 이후의 삶에도 지속되었다. 『고백록』을 집필하고 있던 그 시점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악의 잔상이 꿈과 무의식중에 나타나 집요하게 그를 괴롭히고 있음을 고백한다(10. 30.41). 그러나 지난 날 독한 정욕과 욕망의 쇠사슬에 묶여 세상일들에 노예가 된 자신을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건져 주신 것을 상기하면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은총과 관용에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청년 시절에 직면하는 유혹과 죄의 실상에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배우게 된다. 그의 회심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의 회심을 준비시키셨을까?
어머니, 사랑과 기도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아들의 방탕과 주님을 떠난 삶을 인하여 오랜 세월을 고통스럽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비유속의 과부와 같았다(눅 18:1).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를 하면서 지내고 있을 때, 모니카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에게 와서 함께 지내었다. 그때,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존경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인 양 그를 위했고(6.1.1), 그의 말씀에 순종했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에서는 순교자의 무덤을 찾아서 떡과 술을 바치던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암브로시우스가 금지한다는 것을 안 후에 즉시 받아들이고 순종했다. 모니카는 “항상 선한 일을 하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고, 교회에 늘 출석하는 사람”이었다(6.2.2). 이 덕목은 신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볼 때마다 그러한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다. 어머니 역시 아들이 암브로시우스의 인도를 받아 신앙생활, 교회생활, 선한 생활을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잃지 않았다.
설교자, 암브로시우스
모니카 다음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력을 준 사람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암브로시우스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탁”이었다. “나는 암브로시우스의 가슴 속에 있는 주님의 저 거룩한 신탁 앞에 내 놓을 기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6.3.4). 여기서 신탁이라 한 것은, 암브로시우스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였음을 의미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모니카 역시 “이렇게 살아서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그런 아들이 망할 리가 없습니다”고 한 어떤 주교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3.12.21). 모자는 매 주일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하기를 원했는데, 거기서 그는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믿음이 먼저인가 아니면 아는 것이 먼저인가. 알고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믿어야 알게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먼저 믿어야 했습니다”고 말한다(6.5.7). 특히 이사야 7:9,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믿음이 앞선다는 것을 역설했다. 당시에 옛 라틴어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가 믿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etis)라고 번역했다. 복음의 설교가 그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게 되자, 그는 믿음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게 되고, 그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찰과 고민, 지적 회심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찰하고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내 과거의 생을 돌아보니 나는 스스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6.11.18). 특히 독신과 결혼생활, 죽음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했다. 이미 19살에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지혜에 대한 깊은 갈망이 생기게 된 터라, 그는 신의 존재와 본성, 악의 근원에 대하여 고민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성술과 마니교에 심취했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지적으로 더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지적 회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플라톤 철학과 성경의 가르침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 깨닫게 되자 바울서신을 더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차츰 성경 말씀 속에서 모든 것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여러 가지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네 영혼이 이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며, 똑 바로 누어보고, 옆으로 누워보고 , 배를 깔고 누워보고, 어떻게 해보아도, 내 영혼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는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6.16.26). 이 문장은 그가 30살이 되던 때에 경험한 자기 영혼의 고민과 그 결과로 생긴 영혼의 불면을 고백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 곁에 계셔서,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는 가련한 우리를 건져내어, 주님의 길 위에 세워 놓으시고는, 우리를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길로 달려가라. 내가 너를 안고 업어서 끝까지 데려다 주리라“(사 46:4). 해결책은 주님 자신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회심 이야기의 주체,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적으로 신 인식에 도달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적인 확실성이 아니라, 마음의 견고함이었다. “내가 바랐던 것은 당신의 존재에 대한 강한 확실성 보다는 당신 안에서 내 마음이 더 견고히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8.1.1).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릇된 육체적 습관의 쇠사슬을 끊고 거기서 해방되는 일이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회심하기 전에 이전에 회심했던 거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빅토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두 수행원들의 회심 이야기는 하나님께 돌아서게 되는 결정적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어느 날 별안간 회심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의 회심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여 오셨던 것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마침내, 죄악의 쇠사슬에 묶인 자신을 풀어 주시기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통곡하며 간구했다. 이때가 32세 때이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내일이라고요? 왜 지금 당장은 안 되는 것입니까? 왜 지금 바로 이 시간에 나의 추하고 부끄러운 삶을 끝내 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 때, “집어 들고서 읽어라 집어 들고서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신비로운 노래가 들려왔고, 그는 성경을 집어 읽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는 말씀이었다. 그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구절을 다 읽고 나자, 그 즉시 ‘확신의 빛’ 같은 것이 내 마음에 부어져서 의심의 모든 어둠은 사라져 버렸습니다”(8.12.29). 우리는 그의 회심이 사도 바울처럼 드라마틱하게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 생각하지만, 그 배경에는 오랜 세월을 관용하시며 그를 사랑하시고 준비해 오신 하나님의 은총과 열심히 있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재물을 주셨을 때에도 인자하셨고, 탕자가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더욱더 인자하셨습니다.”(1.18.28). 그의 회심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주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나가며
청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전은 어느 별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다. 중생한 신자도 하나님 안에 거하려는(in te) 열망과 그것을 거부하려는(ad te) “뒤틀린 의지” 사이에 살고 있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열망과 의지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관용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고, 그의 증거의 찬양은 우리의 찬양이 된다. 회심하기 직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친구 알리피우스를 찾아가 이런 말을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지? 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 천국을 붙잡는데, 배웠다고 하는 우리는 천국을 붙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혈과 육 가운데서 뒹굴고 있지 않는가!”(8.8.19). 후에 두 사람은 천국을 붙잡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인에게 너무 오래된 사람이지만, 이 같은 그의 질문은 청년 시절을 보내는 모든 이에게 유익을 준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는 청년들. 정욕과 욕망의 “후래이 팬”(sartago) 위에서 쉼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고 질문한다. 그리고 말씀의 “등불”을 다정하게 비춘다(시 11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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