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코로나19와 교회입니다. 코로나19는 예배와 교회생활을 너무나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목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존재감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교인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옛적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물러나더라도 변화된 심성과 환경으로 인해 우리는 더 큰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직분자들의 직무수행이 더 구체적이고 세밀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편집장 주
코로나19와 종말론적 신앙
전영욱 강도사
(성산한빛교회)
코로나19로 인해 온 나라가 큰 혼란에 빠져있다.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코로나19만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뿐인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폭우와 긴 장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들도 있으며, 이상 기후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또다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 바로 “세상이 말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는데, ‘아! 정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도 오늘 우리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당시 로마 제국의 멸망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재앙을 통해 선인들은 인내와 교육을 받게 될 것이며, 악인들은 교정을 받고 회심으로 인도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코로나19를 비롯한 어떤 어려움이 우리 앞에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인 혹은 악인 중 어떤 인간으로서 이 어려움을 겪느냐가 중요할 것이다(『신국론』, 1.8.1).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은 오늘 이 시대의 교회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1. 두 가지 잘못된 오해
신자는 오늘이라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자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종말의 때가 단순히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간과 장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와 그 시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이다(마 24:36). 반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사이 주님께서 실질적으로 교회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종말의 때를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는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사람은 코로나19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정말로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측면이 완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나 현상들을 성경이 말씀하는 종말의 때와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투영하지도, 앞으로 일어날 어떤 특정한 사건을 언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종말론은 미래학(futurology)이 아니다.
또 한 가지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마지막 때를 너무 비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지금이 종말의 때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비관적인 상황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개념은 무조건 비관적이지 않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어떤 징조, 재앙, 자연재해, 핍박 등이 종말의 주요 내용이 아니다. 항상 종말론을 둘러싼 이단들의 특징은 매우 비관적이며, 마지막 때를 비판함으로 사람들을 미혹해 왔다. 대표적으로 휴거, 666, 바코드, 베리칩, 14만 4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비롯하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설명해주는 것이 성경이 다루고 있는 종말의 개념은 아니다. 이런 부분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미래학이 아니며, 비관적이지도 않다!
2.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 : 마태복음 24장 ‘감람산 강화’를 중심으로
그렇다면 성경적 종말의 개념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종말론의 핵심은 미래에 신자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로 소급해 와서 맛보는 것이다. 미래가 현재로 침투해 들어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오늘 이 시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코로나19 시대에 교회는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은 ‘감람산 강화’에 잘 나타난다(마 24장).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를 찬찬히 읽어보면 굉장히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는 말씀을 듣고 매우 놀랐다(마 24:2).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는다(마 24:3).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표징(sign)으로 ‘난리와 난리를 넘어 소문, 전쟁, 재난’ 등을 언급하신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고도 말씀하신다(마 24:7). 이러한 현상들은 표면적으로 볼 때 엄청난 징조이며, 표징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마 24:6, 8).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을 ‘시간적인 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에서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지 끝에 대한 징조는 아니다. 즉 전쟁, 재난, 기근, 지진 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날에 대한 표징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표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있을 중요한 표징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핍박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핍박 중에서도 복음이 전파됨’을 강조하신다(마 24:9-14).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때의 중요한 표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핍박이나 재난, 전쟁 등이 마지막 때의 중요한 표징이 아니라, 핍박 중에서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중요한 표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는 신자! 곧 교회가 가장 중요한 표징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처음으로 경험하는 큰 재난 앞에 놓여 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도전해 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큰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현상들이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를 넘어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 24:13). 큰 재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복음을 위해 견디는 교회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지막 때의 진정한 표징이며, 유일한 표징이다(14절). 왜냐하면 “그제야 끝이 오기” 때문이다(마 24:14).
3. 코로나19와 종말론적 신앙
우리는 마지막 날의 표징을 단순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단의 속임수다. 종말에 대해 어떤 호기심으로 접근하거나 어떤 현상을 성경을 통해 찾고자 하는 시도도 버려야 한다. 특별히 이러한 것으로 다른 신자들, 교회 공동체를 혼란에 빠지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처럼,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참된 신자로 사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고 있다(요 5:24).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도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영광스러움 속에서 더 영광스러운 영원한 확신을 끝까지 붙들며 오늘도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다(히 3:14. 시 95:7).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떤 표징을 구하며 살아야 할까? 먼저 신자인 우리 자신이 마지막 날의 진정한 표징이 되어야 한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고,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때의 유일한 표징이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끝까지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그 어떤 핍박이나 위협 속에서도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 이것이 마지막 때의 유일한 표징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가가 교회를 향해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교회는 이웃 사랑의 측면에서 최선을 다해 방역과 안전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마지막 때의 유일한 표징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공공신학을 추구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도, 알 수 있는 자도 없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정확한 뜻을 알려주지 않으시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말씀해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한계이며, 연약함이다. 하지만 동시에 C.S. 루이스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하나님의 가장 큰 확성기”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 앞에서도 겸손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해야 한다. 교회가 유일한 표징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견디어 도중에 탈락하는 자들이 없도록 서로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히 12:15-16).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자의 삶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종말론의 핵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누리게 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현재로 가지고 와 맛보는 것에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 마지막 날의 유일한 표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지만,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움을 바라보며, 그것을 지금 이 시간으로 가져와 오늘을 참된 신자로서 믿음으로 살아가자! 오늘은 영원과 통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서로를 돌아보며, 끝까지 견디는 교회!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때의 유일한 표징이며, 코로나19 시대에 필요한 종말론적 신앙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약속을 붙들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분류의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교회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마 6:9). 하늘에서 천군 천사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듯이 땅에서도 교회가 주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복종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92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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