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코로나19와 교회입니다. 코로나19는 예배와 교회생활을 너무나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목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존재감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교인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다른 측면으로는 옛적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물러나더라도 변화된 심성과 환경으로 인해 우리는 더 큰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직분자들의 직무수행이 더 구체적이고 세밀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편집장 주
코로나 19와 목회적 돌봄
최정복 목사
(세종시 장로교회 담임)
1. 서언
교회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소모임을 하는 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가대, 남녀 선교회, 구역/목장/순 모임, 소규모 성경공부 모임, 기도 모임, 청년 모임 등등. 대형 교회들은 말할 필요가 없고, 작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문화이자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소모임이 많을가? 영혼을 효과적으로 돌보고 양육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성도들을 돌보는 목양을 소모임에서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효율적인 목회적 돌봄을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조직은 소모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요즘 코로나 블루가 걱정이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 19에 대한 방역은 잘 대응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 건강은 그만큼 돌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되다 보니, 20-30대의 우울증 상담 건수도 늘고 자해 건수도 많아졌다는 기사들이 많이 보인다. 주변에서 쉽게 우울, 분노, 무기력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황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교회는 시의적절하게 사회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공백을 채워주면서 선교적 사명을 활발히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오히려 교회의 크고 작은 소모임이 코로나 19 전파의 연결 고리로 지목되다 보니, 방역을 책임지는 정부 당국이 소모임 자제를 요청하거나, 금지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를 향한 사회적 시선이 나빠졌다. 게다가 많은 교회들이 방역 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선교는 고사하고 외부인의 출입마저 금지한 상태이다. 사회의 안녕을 위해 이바지하기는커녕 내부적으로 성도들을 돌보는 일마저 어려움에 처한 상태이다. 사귐과 사랑의 교제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마저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먼저 교회 내부의 돌봄 구조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교회의 약자가 누구인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성경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돌보는 것을 영혼들을 돌보는 기본적인 원리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교회는 돌봄의 대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이나 사회 경제적 위기가 닥쳐오게 되면 믿음이 약한 자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게 되고, 그 피해 역시 가장 깊기 때문이다.
누가 ‘믿음이 약한’ 사람일까? 가장 먼저 우리가 돌봐야 하는 대상은 아이들이다. 물론 아이들은 적응이 빠르기 때문에 좀 더 그 피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물을 주는 만큼 빨리 자라지만, 물을 주지 않는 만큼 빨리 마를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이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성경을 배우고, 우정을 쌓는 ‘교회학교’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각 교회는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돌봐야 하는 사람은 청년들이다. 물론 교회에 귀하지 않은 영혼은 한 사람도 없다. 100마리의 양들 중에 한 마리도 귀하지 않은 양은 없다. 그러나 길을 잘 잃어버릴 위험이 높은 양들은 분명 존재한다. 청년들이 바로 그렇다. 청년들은 열정은 있을 수 있지만, 아직 더 단단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하다. 특히 최근 대학 신입생들은 자신과 같은 과 학생들과 대면하지도 못한 채, 온라인 수업과 과제에 열중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취업이 매우 불분명한 상태이다. 일을 하고 있는 경우에도 인턴이나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어 취업을 위하여 준비한 기간과 비교해 볼 때 노동 환경이 열악하다. 교회는 특별히 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돌봐야 하는 대상은 노인이다. 노인들은 마땅히 존경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거나, 혹은 방문판매 등의 경로를 통하여 60대 이상이 확진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이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 내에서 세대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특히 노인 성도들은 기저 질환을 가진 분들이 많아서 코로나에 더 조심하다보니, 동네 노인정도 문을 닫은 상태이다. 이 뿐 아니라 노인들은 젊은 층보다 온라인을 활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다. 사회적 고립감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느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이들이 명예롭게 삶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3. 누가 돌보아야 하는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아이들, 청년들, 노인들을 누가 돌봐야 할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절박한 지금 상황에서 돌봄의 책임은 대부분 가족들에게 주어질 수 밖에 없다. 이전보다 가족들의 역할이 훨씬 커진 것이다. 가족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 19 상황을 가정안에서의 돌봄을 회복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중요한 수단은 아마도 가정 예배, 가정 기도회, 가정 성경공부가 될 것이다. 가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경건의 훈련 장소가 아닌가?
가정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좋은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코로나 블루를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정에서 머무는 시간이 장기화되어 가정 폭력이 증가하거나, 더 큰 우울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오히려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인 ‘돌봄’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돌봄’의 외주화가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는가? 얼마나 학교, 학원, 유치원, 요양보호소에 가정의 역할을 이양해 왔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가정을 돌보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각 가정마다 사유가 다 다르다. 사람마다 복잡한 가족사가 있을 것이다. 일률적으로 코로나 블루 상황이 이것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유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돌봄을 기독교인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돌봄의 일이 하나님께서 본래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주신 사명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가족을 돌보는 일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삼시 세끼 먹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가정에서 자녀들을 교육하고, 부모 공경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지난 몇 개월동안 온 국민이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그럴수록 성령님의 은혜로 가정이 세워지도록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가정이 돌봄이 이루어지는 1차적 장소이지만, 가족이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그 때에는 돌보는 주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교회’란 교회의 직분자로 볼 수 있다. 사실 학교가 멈추어도 돌봄교실 선생님은 멈출 수 없었다. 요양보호사도 마찬가지이다. 전염병으로 사회가 멈추어도 멈출 수 없는 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에도 멈출 수 없는 분들이 존재한다. 목사와 장로, 집사의 직무가 그러하다. 이 직무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쉴 수 없는 직무이다. 물론 방식은 이전과 달리할 수 있다. 직접 심방에서 온라인을 이용한 간접 심방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 더 수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목사, 장로, 집사도 코로나 블루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정부 정책이 불만스럽기도 하고, 동네 확진자 수에 신경도 많이 쓰인다. 그만큼 염려가 커질 수 밖에 없고, 스트레스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 장로회, 집사회, 목사들의 모임도 이전처럼 자유롭게 가질 수 없다. 그러다보니 목사도 무기력증을 느낄 수 있다. 필자 역시 무기력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직무는 위기의 순간에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지금이 구속 역사의 특별한 때라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지만, 전시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교회의 양들을 돌보도록 직분을 세우셨음을 다시 기억하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담대하고 신실한 마음을 구해야만 한다.
4.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먼저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전시 상황에는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던 도구들이라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필자는 매주 소그룹으로 온라인 기도회를 하고 있다. 기도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기에 바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교회들에게 편지하며 비록 만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지만, 교회를 위한 기도에 더욱 힘썼다(.
그 외에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돌봄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부모님들과 자녀들이 함께 말씀을 묵상하도록 QT책을 교회에서 구매하여 각 가정별로 배송해주었다. 한 분의 헌신자가 말씀을 암송할 수 있는 동영상을 제작하여 매주 암송구절을 녹화하여 댓글로 달도록 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5-6세 아이들도 말씀을 암송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모여서 하면 안되겠느냐는 청년들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참자며 다독여가며 온라인 성경공부도 하고 있다. 멈추었던 교리 공부도 다시 시작했는데, 온라인 환경을 감안하여 40-50분 공부하던 분량을 10-15분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온라인 책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 노년 성도들을 위하여는 다른 성도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처럼 꼭 만나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자.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도구들이지만, 전시 상황에는 다 도움이 된다.
나아가 위기의 순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질적 도움이다. 교제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온라인’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것은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 프로젝트를 길게 강조한다. 그는 분명 위기를 교회의 하나됨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듯 하다. 사도는 아가야에 있는 교회가 ‘힘에 지나도록’ 연보에 힘썻다는 것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어려움을 은혜를 증거할 기회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물질을 보내는 이것이야말로 복음과 신앙고백에 합당한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사도 바울은 확실히 고난과 역경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것이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지체를 위하여 각 교회별로, 시찰회와 노회별로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구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어떨까? 혼자 밥을 차려 먹어야 하는 아이들, 취업에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낙심한 청년이나, 수입이 급격히 감소한 비정규직 노동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진 노년이 성도분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 글을 마치며
누군가 복은 고난의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온다고 했다. 코로나 19는 분명 위기이지만, 위기만은 분명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풍년과 흉년, 비와 가뭄, 건강과 질병이 모두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이 될 수 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문답 참조).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실 것이다. 우리의 돌봄이 그분의 입과 손과 발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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