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청년의 오늘과 내일'입니다. 작금의 청년들은 부모세대보다 못사는 유일한 세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청년세대의 오늘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미래는 암담하고 절망적입니다.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더 절망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돌리면서 분노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작은 틈이라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청년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청년의 영적 무기력
양명지 목사
(두레교회 부목사)
현대 사회는 바쁘고 분주하다. 한국 사회는 특히 더 그렇다. 게다가 바쁘고 분주한 지금의 수고가 내일의 안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내일은커녕 오늘마저도 불안하다. 이런 상황은 청년들에게 특히 더 그렇다. 경제적으로 부모세대 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출산율은 자꾸 낮아져서 초고령 사회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데 다음세대의 전망은 여러모로 긍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청년들은 포기를 선택한다. 연애, 결혼, 출산, 취미, 내 집 마련, 인간관계, 자기계발, 건강 관리, 외모 관리, 꿈과 희망 등 이런 것들 중에 N가지를 포기했다고 N포 세대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 나온 지는 벌써 한참 되었다.
이런 청년들의 상황에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더 가슴 아픈 현실이다. 물론 구별된 마음과 삶을 살아내는 청년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교회 안의 청년의 미래에 대해 걱정의 목소리가 많다. 어떤 어른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다음 세대를 향해 패기가 없고,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청년들이 포기를 한 것이냐 포기를 당한 것이냐 논의하기도 했다. 원인과 정체가 무엇이든 이 현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교회 안의 기독 청년들 사이에서 무기력이라는 시대 문화를 낳았다. 이 무기력은 그들의 신앙도 무기력하게 한다. 어떻게 하면 청년들이 영적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 기본을 무시하지 말라
많은 언론 매체는 청년들의 무기력에 대한 대안으로 안정된 직장을 제시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육신인 인간이 생업과 노동 없이 제대로 살기는 어렵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기업도 영적인 의미만 아니라 그들의 생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직장이 생긴다고 무기력은 해결되지 않는다. 직장을 다니는 청년들도 영육간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일상이 바쁘고 버겁기 때문에,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힘들다. 이 상황들을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자꾸 확인하기 때문에 무기력해진다. 그래서 창조적인 것보다 탈진과 정체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형편은 신앙생활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준다. 일요일은 주일이 아니라 휴일이 돼버린다. 교회에서 듣는 설교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청년들의 고뇌를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설교자의 게으름과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들으려는 열의와 마음이 생기지 않는 영적인 무기력 때문이다. 예배도 겨우 나왔는데 그 이상은 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이 쌓이면서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잠을 자던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재충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피곤한 몸이 휴식을 통해 회복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이 몸을 더욱 건강하게 하고 활력있게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일상이 피곤하다고 예배와 휴식을 바꾸면 당장은 주일의 일정이 없어지고 자유시간이 생겨 편할 것 같지만 결국은 더 큰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정말이지 다 양보하더라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 한 번 빠진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도 아니고, 주일을 다른 일로 보내게 되었다고 당장 믿음이 불확실해지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예배를 다른 것과 바꾸게 되면, 그리고 그것이 일 년 스케줄 중에 반복되어 자기의 라이프 스타일이 된다면 분명히 영적인 탈진과 무기력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 감격과 감흥 없이 예배만 참석하면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언약의 갱신을 다양한 순서를 통해 경험하는 자리 자체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끼의 식사는 크지 않지만 그 식사가 모여 완성되는 한 사람의 식생활은 건강과 생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루의 조깅은 대단하지 않을 수 있지만 꾸준한 운동 습관은 전혀 다르다. 하물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고 붙들면 좋겠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8)
영적인 무기력은 다양한 이유에서 시작될 수 있겠으나 주일을 휴일로 바꾸고 예배를 다른 것과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가속화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과 약화의 가장 기본적인 시작이 안식일 문제였던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문제를 예배로만 승리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공적인 교제가 기본과 시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을 누리는데서 완성되며 의미있게 하셨다(소요리문답 1문).
구조적인 문제와 교회의 형편에 따라 주일과 예배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그 문제는 모두가 협력해서 함께 해결해야 할 부분이 크다 하더라도 결국 예배를 다른 것과 바꾸고, 포기한다면 영적인 무기력은 해소되기 어렵다.
2. 대화의 상대를 찾으라
영적인 무기력은 혼자서 극복하고 일어서기 쉽지 않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개인의 경건 생활을 통해 극복할 수도 있고, 예배 가운데 회복하게 되는 일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점점 무기력해지는 사람이 그런 경우를 통해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어쩌면 그런 경험을 통해 회복되는 사람을 영적 무기력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좀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신앙의 성장 가운데 여러 굴곡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기력을 느끼는 사람이 혼자서 딛고 일어서는 것은 정말 어렵다.
홀로 고립되지 말고, 소통하고 마음을 나눌 상대를 찾아야 한다. 많은 청년들이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같이 있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연락하거나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다가와준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런 일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 안에 소통의 필요가 있을 때, 부담을 버리고 과감하게 소통을 시도하면 좋겠다. 문제의 핵심을 깊이 나눌 수도 있겠고, 전혀 다른 주제를 그냥 즐겁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든지 관계를 만들고, 지속하는 것이 시작이요 가능성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스스로 일어나는 것만 좋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를 돕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 6:2)
자기 문제에 대해 나누는 것은 자기 문제를 객관화하여 접근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와의 소통은 유익이 있다. 문제의 상황에 홀로 고립되면 실현 불가능한 적극적인 선택과 더 많은 문제를 가져올 소극적인 선택, 양극단만을 두고 고민하기 쉽다. ‘내가 다시 정신차리고 똑바로만 하면 되지’와 ‘다 포기하고 그만둘까’라는 선택지만 고려한다는 말이다. 소그룹 리더나 목회자와의 대화와 소통은 양극단 사이의 다른 옵션들도 고려할 수 있게 한다. 혼자서만 문제와 씨름할 때보다 함께 의논할 때 본인이 바라는 무기력 해소와 발전을 향해 갈 동력이 훨씬 쉽게 생기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나도 다른 이웃에게 기꺼이 마음과 소통의 자리를 내어주게 하는 기초가 된다.
3. 공동체라는 배경
기본을 지키고, 대화의 상대를 찾는 것을 정답만을 말하고, 무기력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만 요구하는 것 같아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앞의 2가지는 공동체라는 배경을 전제로 한다. 좋은 공동체가 있고, 나의 상황을 알아보고 먼저 도우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해도 결국은 본인의 의지와 결심 없이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본질적으로는 자신 안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지 않으면 어렵다. 하지만 그 의지 발현의 계기와 시도는 좋은 공동체 안에서 훨씬 더 잘 실현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랑의 수고”를 언급한다(살전 1:3). 계속 혼자 고립되려고 하고, 노력해도 원래 그 자리로 계속 돌아가는 무기력한 지체를 계속 품으려고 애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혹은 거기까지는 아니라도 힘들어하는 지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연락하는 수고를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참 중요하다. 아주 모범적인 공동체에도 소외되는 사람이 있고, 스스로 자기를 고립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없는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들을 품고 있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다.
그 공동체가 꼭 청년부가 아니라도 된다는 열린 마음이 있으면 한다. 우리 시대 많은 교회에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청년 공동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이 모두 또래가 아니고, 다양한 연령대가 모였지만 얼마든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이듯 영적인 가족인 교회도 그럴 수 있다. 또래 집단이 서로 공감하는 강력한 부분이 있지만 그 배경이 없다고 좌절하지 않으면 좋겠다. 다양한 연령이 공존하는 공동체도 얼마든지 따뜻한 위로를 공유할 수 있다. 이 부분에는 교회의 직분자와 지도자의 수고가 참으로 중요하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결국 누군가의 헌신으로부터 시작된다. 교회가 무거운 마음으로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영적인 무기력은 어디에서 시작했든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해소된다. 인생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결국 이웃과의 사랑 안에서 더 강화되고 완성된다(요일 4:12). 영적 침체의 해소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리멸렬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함께 힘써 가면 좋겠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각자를 새롭게 하시리라 믿는다. 어렵고 힘든 시대와 시기도 결국 회복되고, 극복된다는 값진 경험을 누리고, 나누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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