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정치와 교회법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종교개혁과 세 가지 정치 형태
종교개혁은 교리, 예배, 정치의 개혁이었다. 교리에 있어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회복했고, 예배에 있어서는 미사를 폐하고 말씀과 성찬 중심의 예배로 회복했으며, 정치에 있어서는 교황주의와 성직주의에 대한 반발로 성경적 직분을 회복시켰다.
정치개혁은 한편으로 장로회(presbytery) 정치로 나타났다. 교황이나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가 아니라 목사와 장로의 회(presbytery; 딤전 4:14)가 다스리는 교회로 개혁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따르는 교회정치 형태다.
뿐만 아니라 일부는 비록 교황주의(사도계승권)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감독제를 고수했다. 영국 국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감리교회에도 그 전통이 남아 있다. 교황제의 심각성은 벗어나되, 다스리는 직분으로서의 감독은 어느 정도 남겨두었다.
또 한편으로는 회중정치로 나타났다. 장로회 정치가 장로의 회에 의한 정치를 주장한다면, 회중정치는 모든 회중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는 정치형태다.
회중교회, 독립교회, 자유교회
회중교회는 그 기원이 영국 국교회에 대한 반대를 배경으로 한다. 회중주의자들은 영국 국교회의 감독제를 강하게 거부했다. 교회의 최종 권위는 ‘개별교회’에 있다고 보았다. 개 교회 외에 다른 어떤 권위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수장도, 감독도 있을 수 없다고 보면서 개교회 회중의 완전독립을 주장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이란 무엇보다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독립이었으니, 그들을 가리켜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라고 불렀다. 하지만, 독립(獨立)이라는 표현이 한편으로 분리(分離)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기에 그들은 그런 표현을 거부하고 “함께 모이는 자들”이라는 회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그들을 회중파(Congregationalism) 혹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라고 부른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이를 조합교회(組合敎會)라고 번역했다.
회중교회는 또한 모든 사제권 제도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개인적 판단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자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위와 연합된 자유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자들이 모여 구성한 교회야말로 정치적으로 자유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을 때로 자유교회라고도 한다.
회중정치의 기원과 발전
회중정치는 잉글랜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이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유명한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1616-1683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회중주의자들은 잉글랜드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기에 1620년 May Flower호를 타고 뉴잉글랜드, 즉 미국으로 건너가서 회중교회를 세운다. 우리가 흔히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라고 표현하는데, 그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청교도 중에서도 회중주의자들이다. 그렇게 건너간 이들의 후예 중에 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다.
원래 회중주의자들은 신학에 있어서는 개혁주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중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심지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태리언주의자들로 바뀌었다.
참고로 회중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세 부류 중 하나였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필립 나이(Philip Nye, 1595-1672),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윌리엄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등 5명이었다. 비록 참석자의 숫자는 적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지지를 받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교회정치와 관련한 회의에서는 장로회주의자들과 자주 충돌했다. 회중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 1658)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회중주의는 특히 침례교회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1611년 혹은 1612년에 토머스 헬위즈(Thomas Helwys), 존 머튼(John Murton)이 영국 런던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후 침례교는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의 설교로 크게 부흥한다. 미국에서는 노예제도 문제로 1845년에 남침례교가 분열하였으나, 미국 내지 선교에 진력하여 북서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은 로마가톨릭에 이어 미국 최대 교파다.
침례교, 재침례교(아나뱁티스트), 형제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퀘이커교, 유니테리언 등이 회중정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회중교회의 주요 특징
1) 회중교회의 교리관
회중교회는 성경만을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다. 무슨 말이냐? 그들은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리는 하나의 참고용이다. 대표적으로 침례교회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도신경의 내용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그렇게 체계화된 교리와 문서상의 교리를 수용하지 않는다.
2) 회중교회의 교회관
개교회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독립적이다. 그렇기에 노회나 총회 등으로 개교회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외적이고 상회의 모든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모든 교인이 자유로운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여 구성한 자치교회가 참 교회다.
신앙고백, 예전, 규칙, 직분자 세우기 등은 개 교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지역교회 간의 상호 협의회가 있지만, 자발적인 모임일뿐 구속력이 없다.
회중정치와 교회법
지금까지 회중교회와 회중정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회중정치와 교회법을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겠지만, 회중정치는 따로 교회법이 없다. 그들은 신조조차도 만드는 것을 거부하기에 교회법을 따로 만들기를 원치 않는다. 교회 정치는 개 교회가 알아서 할 일이니 굳이 교회법을 만들 필요도 없다. 이 교회가 시행하는 방법과 저 교회가 시행하는 방법이 다르니 법이라는 테두리가 불필요하다.
회중교회는 치리회로서의 당회도 없고, 당연히 장로도 없다. 한국의 침례교회의 경우 간혹 장로를 두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회중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일을 ‘사무처리회’나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전체 회중들의 의견에 따라서 교회의 결정과 정치가 실행된다. 그리고 그 절차나 과정도 각 교회마다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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