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투스주의와 교회법
성희찬 목사
(작은빛교회)
1.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개혁파 교회 내부에서 교회권징(勸懲)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과 신앙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던 때에 개혁파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 중 하나는 독일의 팔츠 지방 수도인 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이면서 의사인 토마스 에라스투스(1520-1583)가 연관된 사건이었다. 에라스투스는 팔츠 지방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3세가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때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찬론에서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가 츠빙글리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던 에라스투스는 개혁가 칼빈이 활동하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 교회의 모범을 따라서 교회조직을 세우기 위해 팔츠 지방에서 이를 주도하는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교회법 작성의 주요 책임을 맡은 올레비아누스가 팔츠 지방에 교회권징을 정착시키려 할 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이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개혁가 칼빈이었다. 올레비아누스는 1560년 4월에는 칼빈에게 제네바 치리회의 법규를 부탁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제네바의 교회권징 규칙을 부탁했다.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작성자로도 알려진 이 두 사람,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는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을 수록한 개혁주의 교회법을 도입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 교회개혁을 안정적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런데 교회적인 권징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되었을 때 두 사람의 활동은 거세게 저항을 받게 되었다.
정치 상황은 교회적인 권징에 반대하는 에라스투스에게 훨씬 더 유리하였다. 팔츠의 대부분 귀족은 물론 선제후의 아들들, 대부분의 학자, 다수의 대중이 모두 에라스투스 편이었다. 다만 올레비아누스 편에는 수가 적었지만 몇몇 핵심 인물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교회적인 권징의 가장 중요한 변호자는 우르시누스였다. 우르시누스는 이미 자신이 작성한 대교리문답서에서 교회권징을 가르쳤다. 교회권징의 필요성과, 이 권징은 국가 권력에 매이지 않고 교회가 독립적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적인 권징을 하는 방식도 가르쳤는데, 악하게 생활하는 자들에게 개인적인 권면을 한 다음에 장로들이 지적하고, 장로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생활의 변화를 약속하고 보여줄 때까지 성찬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징은 국가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교회권징이 포함된 우르시누스의 대교리문답서는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이 작성(1563년)되기 직전인 1562년 즈음에 작성된 것으로, 본격적인 교회권징 논쟁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우르시누스는 교회권징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며 지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권징의 내용이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에 포함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제82문은 신앙고백과 생활에서 불신과 불경건을 드러내는 자들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묻고 그런 자들에게는 천국의 열쇠를 사용해서 생활을 돌이킬 때까지 성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답한다. 천국의 열쇠는 복음의 설교와 권징이다. 그리고 제85답에서 교회권징을 통해 어떻게 천국이 닫히고 열리는지 묻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 처음에는 형제로서 권고하고 그래도 돌이키기를 거절하면 교회나 교회에서 위임받은 자들에게 알리고 교회의 권고도 거절하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성도의 사귐 밖에 두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은 교회의 권고와 교회의 권징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것이 교회의 고유한 일임을 밝혔다. 교회권징의 원리가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에 포함된 것이다.
사실 교회권징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 배경에는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 두 도시의 교회구조가 서로 다른 것에 있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교회구조의 차이로 인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없었지만,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영토 중심의 교회정치원리”가 이미 영향을 받고 있던 터에 독일 팔츠 지방의 수도 하이델베르크가 굳이 특별히 스위스 제네바 교회의 실례를 따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제기되었다.
에라스투스
2. 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영토 중심의 교회정치
독일 다수 지역에서 영향을 미친 영토 중심의 교회정치원리는 원래 루터교회에서 채용된 정치형태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여파로 독일인들의 신앙에 혼선이 왔을 때 각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인 제후의 종교가 곧 그 지역 주민의 종교가 된다는 정치적인 해결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각 지역의 통치자들은 이전까지 교회의 감독이 행사해오던 교권(敎權)을 자신들이 맡아 행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토(지방) 중심의 교회정치 혹은 국가교회 정치형태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곧 이 정치형태에서 교회정치는 교회의 직분자가 아니라 세상의 위정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3. 하이델베르크에 도입되는 절충된 교회권징의 질서와 계속되는 갈등
1570년 7월 13일 에라스투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절충을 이룬 교회권징의 질서가 하이델베르크에 도입되어, 교회권징의 수행 완수를 위한 정부의 도덕적 책무가 또한 첨가되었다. 이 법령은 우선 각 교회가 장로회를 조직하고 성도들의 생활 지도를 하도록 하였다. 이 점에서 이 법령이 장로들에 의한 교회권징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교의 최종 결정은 이 지역의 최고 통치자인 선제후가 갖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 교회권징의 질서는 교회권징에서 국가(정부)로부터 완전한 교회의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이 절충안은 양쪽에서 불만을 가져왔고 양쪽의 갈등은 그치지 않게 되었다.
에라스투스가 개혁주의 교회질서에 가장 반대하는 이유는 교회권징의 권한을 정부에게서 빼앗아 이를 교회에 준 것에 있었다. 에라스투스는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주도하는 일에서 한 국가 안에 두 개의 권위 체제가 형성되는 위험을 보았다. 자칫하면 중세교회에서 경험한 것처럼 정부가 교황이나 목사에게 복종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였다.
에라스투스는 사실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가 츠빙글리의 국가관과 교회관을 추종하여 이같이 국가로부터의 교회의 독립성을 반대하고 교회의 치리권을 국가에 돌릴 것을 주장하였고, 교회가 권징을 행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전제적이라고 하였다. 에라스투스는 일찍이 성찬에 관해 츠빙글리의 견해를 지지한 바 있다.
4. 개혁가 츠빙글리(1483-1531)의 신정(神政)정치
취리히의 개혁가 츠빙글리가 다른 개혁가들처럼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동일한 신학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왜 신정정치 혹은 국가교회정치를 주장하고 시행하였을까?
그리스도의 나라는 오직 하나의 나라로서 그 특성상 내면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외면적이어서 교회와 국가, 불가시(不可視) 교회와 가시적(可視的) 교회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가시적 교회에서 죄인들을 형벌(=권징)하는 것이 정부의 통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상의 가시적 교회에는 믿음이 없는 거짓 신자와 위선자가 섞여 있는데 이들은 심지어 성찬에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들을 다스리고 권징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통치가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츠빙글리는 국가가 공연히 칼을 가진 것이 아니며, 국가의 권위와 칼의 권세 없는 교회는 무능하며 불구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는 이 권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국가의 공직자들도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주신 목자들이며, 이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의 위임자로서 권징의 권세를 시행한다고 하였다.
그의 국가교회정치는 곧 신정정치(神政政治)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직접 한 다음의 말에 분명히 요약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곧 신실하고 훌륭한 시민이며, 기독교 도시는 곧 기독교 교회이다.”
한마디로 츠빙글리는 설교를 통해 교회개혁을 주도하면서 여기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생활의 영역을 포함시켰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생활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영적 왕국과 세상 왕국을 구별하는 루터와 달리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는 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종교는 곧 정치이며, 정치가 곧 종교였다. 교회와 사회는 영혼과 몸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취리히 시의 공직자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모범을 보이는 시민들의 목자였다. 정부는 교회의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그러나 그 법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식으로 스위스의 취리히는 츠빙글리를 통해 국가와 교회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신정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
5. 에라스투스 사상의 파급
이러한 에라스투스의 교회정치 이론은 네덜란드의 소위 항론파(抗論派)라 불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 지지를 얻게 되었다. 17세기 항론파들은 자기들의 신학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의 도움을 입고자 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는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는 때든 혹은 교회가 평화를 누리던 때든 결코 정부의 도움을 입기를 바라지 않았다. 정부와 교회는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 각각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한편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에라스투스주의란 이름으로 교회에 대한 국가의 주권을 강조하는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믿음의 통일성을 위해 언약의 일환으로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에서 교회정치를 다룰 때 에라스투스의 사상이 언급되었다. 에라스투스의 추종자들은 교회는 국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교회 직원의 권세는 제한되어 있고 그들의 말은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사람을 교회와 성례에 허용하고 출교하는 권리는 교회가 아니라 정부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다수결로 논박되었다. 이때 총대로 온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가 자신의 저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Aaron’ Rod Blossoming, 1646)를 통해 에라스투스주의를 반박한 것은 유명하다. 그럼에도 에라스투스 사상은 끊임없이 총회 석상에서 언급되었고, 마침내 총회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신앙고백서에 담기에 이른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임금이시오 머리로서 국가공직자와는 구별하여 교회 직원들의 손에 치리를 맡기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0장 교회권징)
위 고백은 에라스투스주의를 한 번에 논박하고 있다. 이 정치형태의 가장 큰 잘못은 본래 의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교회의 영역이 크게 혼돈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따르는 교회에는 목사 외에 다른 직분자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 직원에 의한 권징이 있을 수가 없고, 나아가 교회가 교리와 생활 면에서 거룩을 지켜갈 수 없게 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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