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법이란 무엇인가?
임경근
(다우리교회 목사)
1. 교회법의 현주소
모든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더 이상 율법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신칭의 교리를 믿고,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를 주장하는 개신교인은 특별히 율법과 법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있다. 하나님이 직접 명령한 십계명조차도 예배 시간에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목사가 적극적이지 않으니 교인은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종종 짐으로 인식되는 ‘교회법’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겠는가? 교회법에 대한 개신교인의 생각은 긍정적이지 않다. 교회의 법은 교회 직분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성도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한국 교인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어떤 교파(敎派)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무엇이며, 그 교회는 어떤 교회법을 채택하고 있는지 모른다. 개신교 신앙이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개 교회적이다 보니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안타깝고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교회법을 논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회를 탄생시킨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법에 대해 달리 생각했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무시무시한 비성경적 교회법의 굴레를 벗어났다. 종교개혁 당시 반법치주의자들도 있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재세례파가 그 부류였다. 독일의 토마스 뮌쳐(Thomas MÜntzer)는 로마 천주교에 반대하다가 정 반대 극단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무법주의였다. 하지만, 칼뱅을 중심한 주류 종교 개혁가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법치주의’(法治主義)와 ‘무법주의’(無法主義)의 모순과 문제를 직시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경에 기초한 바른 교회법을 찾았다. 교회개혁은 신앙의 개혁이었고, 더 나아가 교회법의 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천상이 아니라, 땅에 세운 것이다. 의롭지만 여전히 타락하고 부패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 속한 교회를 개혁하려 한 것이다. 교회의 구조를 바꾸고, 체계를 세우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과 연구와 기도가 필요했다. 칼뱅은 로마 천주교의 사도적 전승에 기초한 ‘감독제도’를 거부하고 성경에 가장 근접한 제도인 ‘장로제도’를 시도했다. 장로제도는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 꽃 피었다. 네덜란드에서는 1618~1619년 도르트레흐트(Dordrecht)회의에서 교회법의 체계를 잡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만들면서 교회법의 틀을 형성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과 호주를 통해 종교개혁 정치체계를 이어 받았다.
2. 교회법이 중요하긴 한가?
죠셉 홀(Joseph H. Hall)은 베자의 말을 인용하며 교회법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사단은 교회의 기초인 교리를 버리는 것보다, 교회 정치를 버리도록 하는 것이 더 쉽기를 희망한다.”(Hall, 3)
베자에 의하면 교회법에는 성경적 원리인 교리가 들어 있다. 교회법을 소홀히 하면 결국 교회의 교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교리를 소홀히 하면 결국 성경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혜안이었다. 베자는 당대를 걱정하며 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 교회를 향한 시의적절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법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다시 던져 보는 것은 교회의 개혁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3. 교회법이 필요한가?
예수님이 비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법령들과 관련이 있다. 자신들도 지키기 힘든 조항과 규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인과 신을 버리는 심각한 문제(마 23장)를 낳았다. 하나님보다 더 엄격한 법을 만든 것이다. 수많은 법률조문으로 유대 전통을 만들고 사람에게 짐을 지웠다. 정작 자신들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실패는 안타깝게도 중세의 로마 천주교회로 이어졌다. 그들도 수많은 법령을 만들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는 일을 했다. 교회법이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무시하는 사악한 법이 되고 말았다. 이 교회법은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법이었다.
칼뱅은 이런 류의 교회법에 대한 무용론을 펼쳤다(Calvin, 4.10.1-21). 그렇지만 칼뱅은 더러운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재세례파의 우를 범하지 않았다. 칼뱅은 성경적 교회법을 찾았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 법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극단적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법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려 했지만, 칼뱅은 성경적 바른 교회법으로 교회를 세웠다. 그는 교회법의 필요성을 성경에서 제시하는 성도의 삶에서 찾았다.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모종의 조직 형태가 필요하다는 상식에 근거를 두었다(Calvin, 4.10.27). 교회법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기 위한 ‘몸의 근육’과 같다. 도르트 신경을 만들면서 도르트 교회법을 만들었는데, 제1장에 교회법의 목적에 대해 정의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질서 있게 잘 유지하기 위해 봉사, 모임, 교리, 성례, 행사, 기독교적 권징이 필요하다고 했다(De Gier, Dordts, 1).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고전 14:33),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질서 있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세운 교회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 기구와 제도를 허락하고 일꾼들을 세우셨다. 당연히 이 질서를 위한 조치는 성경과 신앙고백에 기초해야 한다. 이런 법은 교회를 세우고 살린다.
지상 교회법은 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를 위한 것이다. ‘완전한 의인’을 위한 법이 아니라, ‘전과 있는 의인’을 위한 법이다. 성도는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다(Hall, 12). 로마 천주교의 반쪽 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적 입장과는 달리 개신교회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를 믿는다.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이 부분에서 적극적이다. 그것은 도르트 신경 가운데 인간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진노의 자녀였던 전적 타락 교리에 기초해 성도에게도 국가의 시민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실제로 많지 않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내주하기 때문에 법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개신교회도 있다. 그러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만이 이 점에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도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경적 장로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정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죄인인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출발한다(Hall, 15).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어려움으로부터도 구원해 주기 원하신다. 조직과 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은혜와 지혜와 섭리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장로교와 개혁교회가 교회법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는 신학적 결론을 적용한 것이 ‘교회법’ 혹은 ‘교회정치’다. 곧 인간의 전적 타락을 교회 현실에 적용한 것이 ‘교회질서’라고 할 수 있다. 전과가 있는 성도를 위한 법이다.
모 신학대학원이 무감독시험을 시도했었다. 교회의 지도자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신학교에서 감독관 없이 시험을 치는 육군사관학교보다 못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논리로 시행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몇 명의 학생이 무감독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것이다. 학년 대표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신고해 문제가 밝혀졌다. 개혁신앙은 인간의 전적부패를 믿는다. 그래서 죄를 억제하고 구원하기 위해 법이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많은 사람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성경에서 교회 권징과 법과 같은 작은 문제를 다루실 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라고 한다. 교회법에서 다루는 문제는 지역사회와 국가에 맡길 문제이지, 교회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자신의 관리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Hall, 16).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사도들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고백이라는 ‘뼈대’를 세우고, 교회법이라는 ‘근육’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법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하나님의 법(Iustitio Dei)이다.
4. ‘교회법’, 적절한 용어인가?
한국 교회는 ‘교회법’(敎會法, Church Law)이라는 용어를 쓴다. 사실 부정적 어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법은 뭔가 딱딱하고 강압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교회의 법은 성도를 죄에서 구하고 교육하고 바로 잡기 위한 사랑에 기초한 도구인데 그런 분위기가 묻어나지 않는다.
‘교회헌법’(敎會憲法, Church Constitution)이라는 용어도 있다. ‘헌법’이라는 말은 법 가운데 특별히 변하지 않는 근본(기본) 원리에 대한 것을 강조하는 용어이지만, 교회법과 혼용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교회정치’(敎會政治, Church Polity)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한다. 정치는 법에 따라 혹은 필요하면 법을 만들어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바로 잡는 역할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요즈음 정치가 존경받기보다는 문제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많아 호감이 가는 용어는 아니다.
비슷한 단어로 ‘교회행정’(敎會行政, Church Government)이 있는데, 정치보다는 좀 더 좁은 의미의 정부나 단체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경영’(敎會經營, Church Management)과 크게 다르지 않은 데 교회에 적용하기에는 좀 어색한 감이 있다.
‘교회규정’(敎會規定, Church Regulation)이라는 용어가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잘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구체적 내규 같은 것에 해당한다. 개 교회의 정관도 이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독특한 용어가 있는데 영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럽 대륙 언어에만 존재한다. 그것은 독일어 ‘키르헨레흐츠’(Kirchenrechts)와 네덜란드어 ‘케르크레흐트’(Kerkrecht)이다. 영어로 직역을 하면 ‘처치 라이트’(Church-right)다. 그렇지만 영어권에서는 이런 용어를 쓰지 않는다. ‘레흐트’(Recht)라는 게르만어는 라틴어 ‘유스’(Ius 법)의 번역인데 ‘공의’와 ‘옳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그 무엇, 곧 법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용어도 성경적 본래의 교회법의 의미를 충분히 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치리’(敎會治理, Church Discipline)라는 용어도 있다. 이 용어는 종교개혁 당시 16세기에 많이 사용했으며, 특히 스코틀랜드 교회가 주로 사용했다. 영어의 ‘디시플린’(Discipline)은 ‘훈련’, ‘질서’, ‘징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 단어는 교회법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적절한 용어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로 이 단어를 품어 낼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문제는 교회법에 해당하는 단어가 성경에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교회법에 해당하는 가장 적절한 성경적 용어를 찾을 수 없을까? 성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용어가 있다. 그 단어가 교회 역사 가운데 많이 애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용어는 ‘교회질서’(敎會秩序, Church Order)다. 고린도전서 14장 40절에 보면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질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사실 교회법은 바로 이 성경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바울은 성령의 전인 교회에 질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회질서’는 강제력을 가진 세상법과는 다르다. ‘교회질서’는 영적 권위를 가진다. ‘교회질서’는 성령님의 개인적 내주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교회 전체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질서’는 가장 좋은 용어로 추천받을 만하다. 교회법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교회질서’가 훨씬 성경적 용어임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이 용어를 사용하는 나라와 교회들이 있다. 미국의 개혁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교회법 대신 교회질서, 곧 ‘처지 오더’(church order) 혹은 ‘케르크오르더’(Kerkorde)(Jansen, Bronkhorst, De Gier, Hovius)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독일어에도 교회질서, 곧 ‘오르드눙 데어 게마인더/케르헤’(Ordnung der Gemeinde/Kirche)(Barth, Brunner, Wolf, Bornkamm)라는 단어가 있고, 몰타어에도 질서(ordni)라는 용어를 쓴다. 이 용어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전신인 ‘신앙과 직제 운동’(Faith and Order Movement)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서 ‘오더’(Order)가 한국에서는 ‘직제’(職制: ‘단체나 조직 따위에서 직업상의 임무나 위치에 관한 제도’; ‘국가 행정 기관의 조직이나 명칭, 설치, 권한 등을 정한 규칙’)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질서’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