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성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베푸시는 방편은 오직 '말씀과 성례'입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를 비판하면서 말씀 중심의 예배를 회복했지만 성례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반동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것을 이어받은 것인지 현대교회에서 세례는 가면 갈수록 약화되고 있고 성찬은 형식적인 예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례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예배와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이번 기획기사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위원장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는 오직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성례를 포함한 예전을 약화시킨 교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은 예전이 성령의 역사를 억압한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예배순서를 정해놓고 그대로 따라가면,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하면, 설교문을 충실히 준비해서 설교하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가로막는다는 생각마저 한다. 상황이 이렇기에 성례가 약화될 뿐만 아니라 성례가 오용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세례는 교회 와서 신자가 되겠다고 하면 몇 주 안에 얼렁뚱땅 줘 버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아세례는 태어난 유아에게 즉시로 베풀지 않고 늦추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성찬은 더욱 무시되고 있다. 성찬은 되도록 자주 베풀어야 하는 은혜의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1년에 서너 차례 행하는 형식적인 예식이 되어 버렸다.
한국교회가 성례를 포함한 예전을 등한시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선교사들의 영향, 교회성장의 여파, 설교위주의 예배,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 등의 측면에서 살펴 보자.
선교사들의 예전 무시 경향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과 영미의 청교도적 경건생활을 가미하고 있었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강조했으나 찰스 피니와 D. L. 무디 등이 일으킨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리와 교파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복음주의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선교사들 중 많은 이들이 세대주의와 세대주의 전천년설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므로 예전에 대해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예배 때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고, 이것을 배운 한국교회는 즉흥적으로 기도하는 전통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한국교회에서 활동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이교적인 상황에서 복음을 전했기에 세례를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찬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은 것 같다. 세례가 기독교인이 되는 출발점이라면 성찬은 기독교인으로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삶을 비추어주는 것이 아닌가? 특히나 성찬은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개인적으로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서 이루어가는 것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성찬에 대한 이런 강조는 드물었다.
이렇게 예전을 무시하는 경향은 부흥운동 시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때부터 배태되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예전에 대해 지나치게 반동적이었다. 종교개혁은 공교적인 전통인 유아세례를 인정했지만 재세례파가 일어나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재세례를 주장하곤 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미사를 배격하였기 때문에 성찬에 있어서 기념설쪽으로 기울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성찬의 토착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빵 대신 떡을, 포도주 대신에 막걸리를 사용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지만 성찬에 대한 보다 더 근본적인 접근이 아쉽다.
교회성장이 가져온 여파
고대교회는 이교적인 상황 속에서 세워졌기에 세례와 성찬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한국의 상황이 이와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선교초기에 한국교회는 부흥사경회를 통해 성경을 배우고, 회개하는 집회가 붐을 이루었다. 이런 부흥회는 교회를 성장시킨 도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에서 주일마다 드리던 공예배의 모습마저 결정짓는다. 지역교회에서 드리던 공예배도 점차 집회형식을 띄게 된 것이다. 집회는 찬송을 많이 하고 성경을 해설한 후 길게 기도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런 모습이 주일 공예배에도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고난받던 교회가 해방 후 도시화와 산업화에 힘입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성례는 더더욱 예배에서 구석 자리로 밀려난다.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예배를 몇 부로 나누어서 드리다 보니 이제 성례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면서 성례는 새로운 탈출구를 얻는다. 예를 들면 군대 내에서의 집단세례식이든지, 대형집회에서 각 교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의식으로 성찬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급속한 교회성장이 가져온 여파가 성례의 위축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설교에 대한 지나친 신뢰
예배에서 성례를 배제시킨 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의 잘못된 생각에 기인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자신을 예배인도자로 생각하기 보다는 설교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주눅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설교만 잘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을 웃고 울릴 수 있는 설교자들을 부러워한다. 예배가 온통 설교에 집중되어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설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예배는 치우친 예배, 모자란 예배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점점 약해질 뿐만 아니라 복음선포가 사라지고 있다는 염려의 목소리가 높은데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목사가 예배의 다른 순서들보다는 설교에 더더욱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설교가 복음의 선포가 되기 위해서는 성찬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종교개혁의 구호가 ‘오직 성경’이었지만 오직 성경은 성경만 들여다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경은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설교자의 설교가 복음적인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를 찬란하게 전시하고 맛보게 해 주는 성찬이 회복되어야 한다. 개혁가들이 설교와 성례를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구분한 것은 설교와 성례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설교가 성례를 비추고, 성례도 설교를 비춘다. 설교가 허튼 소리나 잔소리가 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성찬이다. 성례야말로 설교가 설교답게 해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매 주일 예배 때 성찬을 베푼다면 목사의 설교는 성찬을 위해서라도 복음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만담과 같은 설교가 복음적인 설교로 바뀌기 위해서라도 성찬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양태를 승인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급속한 속도로 공동체성을 상실해 버렸다. 한국사회의 이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가장 큰 덕을 본 것이 교회이다. 도시로 몰려나온 이들, 가족과 마을공동체를 잃은 이들이 자신들의 안식처로 찾은 곳이 교회였다. 교회는 가족과 마을을 대체하는 유사공동체 역할을 했다. 교회에 오면 출산과 결혼과 장례를 다 해결해 주었으니 교회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교회에서 직장까지 알선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결과 제국의 신민들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자 교회는 그들을 제대로 기독교화하지 못했다. 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한국교회는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몰려오는 이들에게 합당한 가르침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 교회는 사람들이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쉽게 말하면 교회는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심성을 변혁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수용해 버렸다. 교회는 서구문화의 개인주의와 물질숭배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승인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와 성찬은 교인들에게 자신들이 신자라는 딱지를 붙여주는 의식으로 굳어져 갔다. 교회가 수없이 세례를 베풀었지만 죽고 사는 세례가 아니라 산 상태를 그대로 승인해주는 세례를 주었다고나 할까. 교회가 성찬을 베풀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성찬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을 확인해 주는 성찬을 베풀었다고나 할까. 한국교회는 성례의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시켜 버렸다.
한국교회의 유례없는 성장은 한국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유례없는 헌신에 기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열심과 헌신은 바른 신앙고백 위에서 이루어졌기에 교회성장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아무리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공교회적인 유산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자랑에 빠져 말씀에 있어서도 부족하고 성례에 있어서는 더더욱 부족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설교는 만담으로, 성례는 엔터테인먼트로 대체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온갖 인위적인 고안물로 성례를 대체하려고 하니 말이다. 성례를 강조하는 것은 로마가톨릭교회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지혜로운 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공교회적인 유산인 은혜의 방편(말씀과 성례)을 제대로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종파화(섹터화)를 막고 세계교회와 보조를 같이 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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