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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당에서 열린 제5회 개혁교회들의 아시아태평양 대회(Asia-Pacific Conference of the Reformed Churches. 약칭 AP-CRC, 주제: 세례와 성찬)에서 있었던 공개강연에서 발표된 덕 반 가더른 목사(뉴질랜드개혁교회)의 논문입니다. 주최측인 독립개신교회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개혁정론에서 소개합니다.

      개혁교회들의 아시아태평양 대회(AP-CRC)ICRC(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국제 개혁교회 협의회, http://www.icrconline.com)에 속한 교회 중 아시아와 호주, 뉴질랜드에 있는 교회들이 각 지역별로 4년에 한 번씩 서로 교제하고 선교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이는 회의로, 고신교회도 회원교회입니다.

 



THE WESTMINSTER STANDARDS

BAPTISM AND THE GOSPEL

세례와 복음


Dirk van Garderen

덕 반 가더른

(Reformed Churches of New Zealand)


서론


세례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우리 시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 곧 신앙고백적인 복음주의 교회와, 개혁교회 및 장로교회들은 이러한 일의 여파를 우리의 가정 안팎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위임령(마 28:18-20)에서 명하신 세례는 논란의 주제이자 분열을 낳는 주제가 되었으며, 그 결과 덜 중요시되는 것으로 제쳐지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을 대개 세례를, 어쨌든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인 것도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성경 자체도 세례의 교훈과 관련하여서는 분명치 않고 심지어 양면적이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1)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는 철저하게 개혁신앙적인 일반인들이 여러 지역에 (부모들이 주도하는) 기독교 학교들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그들은 이전에 네덜란드에서 경험하였던 것을 단순히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발전시킨 세계관 및 인생관에 근거한 언약 개념에 따른 것입니다. 이 학교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 외에 복음주의적이고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학교에 들어오고 싶어 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복음주의자들은 대개 예외 없이 침례교도이거나 혹은 열린 형제단(Open Brethren, 플리머스 형제단에서 유래한 일파. 역주)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개혁신학에서 대개 은혜의 교리들(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라 불리는 교리들)이라고 하는 것의 좀 더 온건한 형태에 대하여서는 관용적이었으나 세례에 관하여서는 다른 관점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비록 학교에서 특히 성경공부 시간이나 주중 예배 모임 같은 데서 복음이 선포되기는 하였지만, 성례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게 되었으며 특히 세례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례[세례]에 대한 이해와 적용은 사람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고, 많은 사람들은 이 성례에 대한 내용이 그리스도의 복음(말씀)을 선포하고 해명하는 일에서 핵심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학교에서 세례가 열외로 취급되면서, 그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과 청년들도 점차 비슷한 견해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은, 심지어는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여부조차도 전체적인 큰 그림에서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성례 없이도 말씀(복음)만으로 족하게 되었습니다.

(2)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저는 친구 중 한 명과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는 인도의 시골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는 제 강의 초안을 그 지역 대표에게 보내었는데, 그 반응은 매우 분명하였습니다.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또 선한 친구로 여기는 이 형제는 다음과 같이 제게 회신하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어린아이의 세례를 성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변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선교 현장의 상황을 보면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온갖 교파의 사람들이 성경을 자신들에게 맞추어서 바르게 혹은 그릇되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나는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될 때에 가서야 우리가 믿는 바가 옳았는지 그릇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합니다(요일 3:2).

인도는 수많은 문화와 언어가 혼재된 나라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인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라는 말은 단지 지리적인 표현일 뿐이다. 적도가 한 나라가 아닌 것처럼, 인도도 한 나라가 아니다’ 중동에서는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고 다니는데, 바울도 그것을 지지합니다. 나는 그것이 비록 성경적이긴 하지만, 호주의 기독교인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중동의 다른 문화들에 대하여 그러하듯, 그러한 풍습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하여서 결정할 때에도 인도의 종족들이 지닌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CSI(장로교의 한 분파)에서 나고 자랐고 목사이신 아버지께서는 나를 언약 신학에 기초하여 가르치셨고, 또 내가 아기일 때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장하면서 나는 다른 교단 출신인 선생님들이 내게 ‘만일 네가 성인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 거다’ 하는 말을 듣게 되었고 위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두려워서 나는 성인 세례를 다시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그 당시에 아무런 개혁신앙의 기초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 두 번째 세례를 받았던 일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녀들도 같은 일을 겪을까 염려가 되어, 아예 내 자녀에게는 유아세례를 시행하지 않았고 그들은 지금 모두 성인 세례를 받은 상태입니다. 나는 선교 현장에 있는 우리 신자들이 혼란을 겪을까 염려하고 있고, 그들이 가장 좋은 가르침을 받지 못한 나머지 세례를 다시 받게 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인도의 교회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서로 간의 교리의 차이가 매우 적어서 CSI나 CNI, 감리교도, 침례교도들이 모두 주일 첫 예배는 자신들의 교회에서 드리고 두 번째 예배는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에 속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합니다. 만약 베니 힌(Benny Hinn)이 벵갈루루(Bengaluru, Bangalore)에서 집회를 연다면 모든 교단 사람들이 저녁에는 거기에 참석할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 목사님께 인도의 주요 정치 상황이 적힌 신문 내용을 요약해 보내면서 설명한 적이 있었지요……. 여기는 아이들이 기독교인으로 회심하는 일을 막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어른과 아이의 회심을 막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남편과 아내가 선교 현장에서 기독교인들이 된다 합시다. 그때 우리는 오직 남편과 아내에게만 세례를 베풀 수 있고, 그 아이들에게는 세례를 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회심한 수년 후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세례를 주어도 되긴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정부나 인도의 법이 판단하기에는 좀 더 ‘예식적인 행사’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주류 교회들 가운데서 유아 세례를 주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그 경우는 ‘회심’이라기보다는 ‘예식’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현장에서는 소아/유아 세례가 ‘회심’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반(反)회심법의 적용을 받는 경찰과 정부의 이목을 끌 수 있습니다.1)


이 편지에서 짚고 넘어갈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저는 “나는 오직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될 때에 가서야 우리가 믿는 바가 옳았는지 그릇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한다(요일 3:2)”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형제는 인도에 있는 대다수의 복음주의적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세례에 대하여 분명한 견해가 나와 있지 않다고 믿고 있으며, ‘세례를 어떻게, 왜, 누가 집례하여서, 언제 시행하여야 하는가’를 결정할 때에 교의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인 상황을 더 고려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사례는 인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단지 인도 대륙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또 다른 지역들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모임에서 그 점이 거듭거듭 확인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짧은 발표문에서 제가 의도하는 바는, 이러한 문제를 여러분이 정면으로 직시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세례의 교훈의 중요한 내용들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성경에 (그리고 이와 같은 ICRC 모임에 적합하게 우리의 개혁/장로교 신앙고백서들에) 의존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제자 삼는 일의 전 과정에서 세례의 중요성이 충분히 드러날 것입니다. ‘무엇을’, ‘왜’, ‘누가’, ‘어떻게’라는 의문사들을 가지고서 함께 생각해 봅시다.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 시골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성경에 근거한 분명한 자료를 제공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세례의 교훈에 대하여 이해하고 확신하며 그 교훈의 옹호자들이 되도록 도우려는 것이 이번 강의의 요점입니다.

 



1. 복음의 선포 및 세례와의 관계


우선 우리의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들 중 일부를 언급함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이 문서들을 좀 더 철저하게 공부하기를 바라며, 특히 이 문서들에 담긴 성경 구절들을 깊이 숙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恩德)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답: 성신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며 성례의 시행(施行)으로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주일 65문답)


성례는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어떤 것에 대한 표와 인이며, 이 방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신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성례가 나타내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33조)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거짓 종교들로부터 구별되어 전적으로 그분께만 속하게 되며, 그분의 표(標)와 인(印)을 지니게 됩니다. 이러한 세례는 그분이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되심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34조)


세례는 신약의 성례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세례 받는 자를 보이는 교회에 엄숙히 받아들이기 위함일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은혜 언약의 표(標)와 인(印)이 되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과 중생과 죄 사함 및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새 생명 가운데에서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 1절. 세례에 대하여)


복음 선포에 속하고 그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으로서, 세례가 지니는 탁월함중요성에 대하여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위임령’(마 28:18-20)은 사람들을 제자 삼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 주는 일과 이 새로운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분리할 수 없도록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의 핵심에 속하는 이 세례의 중요성과 탁월함을 설명하는 일에, 신약 성경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밝혀 주는 방식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 사복음서는 각각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안내합니다(마 3:1-12; 막 1:2-8; 눅 3:1-20; 요 1:6-9, 19-28).

⦁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의 세례가 그분이 처음으로 자신을 알리신 공적 행위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마 3:13-17; 막 1:9-13; 눅 3:21-23; 요 1:29-34; 3:22, 23, 26).

⦁ 마태복음의 정점은 사람들을 제자 삼아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는 부르심이 나오는 부분입니다(마 28:18-20. 또한 다음을 보시오. 막 16:16).

⦁ 누가는 자신의 메시지의 둘째 부분(사도행전)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의 사역을 다시금 언급하면서 새로운 세례를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행 1:4).

⦁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주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예루살렘에서부터 모든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 일을 조명합니다(행 1:8). 중요하게 볼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이렇게 새로운 경계선을 세울 때마다 항상 세례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예루살렘 (행 2:38-41)

○ 사마리아 (행 8:12,16,17. 마술사 시몬, 행 8:13)

○ 에티오피아 내시 (행 8:36-40)

사울(바울)이 회심한 직후 (행 9:18)

○ 로마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온 집안(친족과 친한 친구들) (행 10:47,48. 또한 행 11:15,16)

○ 땅 끝: (두아디라의) 루디아와 그의 집안(행 16:15), 그리고 빌립보의 간수와 그의 집안(행 16:31-34). 고린도(디아스포라의 유대 지도자이던 그리스보와 그의 집안)(행 18:8). (이방인 회심자로 추정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행 19:1-7).

○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1:10-16에서 언급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이러한 구절들을 조명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언제나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표와 인(印)인 세례라는 방편이 동반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세례는 뗄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는 일은 반드시 세례라는 방편을 통해 공적으로 표시하고 확증됩니다. 세례는 하나님 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에 들어가고 거기에 속하게 되는 일에서 선택 사항이나 부차적인 일이 아닙니다. 세례는 제자들을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선택적인 여분의 사안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2. 세례란 무엇인가?


이번 대회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는 세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잘 훈련받지 못한 목사나 장로들과 종종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에 여러분의 사역지가 어디든 거기서도 거의 기정사실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받은 인상은 그곳의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세례에 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심지어 확정적이지 않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보다 넓은 기독교 세계에서는 세례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이해가 대개 다음의 두 가지 견해 중 하나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1) 첫째는 로마 가톨릭의 견해입니다(이 견해는 성공회의 고교회파의 견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루터파와도 비슷한 편입니다). 이들의 견해를 간단히 말하면, 세례는 성신께서 세례 받는 사람에게 (그가 신자이든 아니든) 새 생명(중생,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을 ‘주입’ 혹은 ‘창조’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 혹은 ‘통로’, ‘수단’입니다. 세례가 중생의 도구적 원인이 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표현인 ‘엑스 오페레 오페라토(ex opere operato)’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2) 세례는 성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도입니다. (따라서 ‘christe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둘째는 그 정반대 견해로서 (소위 ‘침례파’의 관점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견해로서, 잘 알려진 교단으로는 침례교회, 형제단, 오순절 및 은사주의 교회들이 이에 해당한다), 세례는 신자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에 대한 외적인 표시이고, 세례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공동체(신자들과 불신자들 모두) 앞에서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근본적으로 자발적인 행위이고, 신자는 그가 이미 영적으로 경험한 일에 대하여 그러한 물리적 표징을 수단으로 삼아 확증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그리고 장로교회)는 그 두 가지 견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례를 이해하는데, 그것은 아주 독특한 방식입니다. 네 가지 핵심 (성경적) 용어들을 사용하면 상당히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네 가지 용어는 ‘언약’과 ‘약속’, ‘표’와 ‘인입니다.


2.1 언약 (베리트, 디아쎄케)


‘언약’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두 당사자 간의 지극히 구속력이 있는 엄숙한 협약, 혹은 협정, 조약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매우 구속력이 있어서, 언약을 깨는 당사자는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언약은 예식을 통하여 피(생명을 나타냄)를 포함하는 표로써 인을 쳤습니다. 언약은 정의(定義) 즉각적으로 전체 ‘가정’과 그 종/노예들과 자손들을 포함하였으며, 그들의 자손은 집안의 ‘천 세대’를 포함하였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놀라운 진리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은혜의 행위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이 창세기 17:1-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핵심은 ‘내가 너와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잘 유의해서 볼 것은, 그 언약의 내용을 정하시는 일과 또 아브라함과 그 집안을 언약의 수혜자로 정하시는 일 모두 주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의 당사자들을 택하셨고, 그 반대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천 대까지’ 구속력이 있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피(할례)로 인 치며, 아브라함의 집안 전체에 구속력이 있었습니다.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창 17:12).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심지어 언약의 표와 인을 받지 않는 데에까지 나아가면, 그렇게 언약을 범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잘라내어집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은 서로를 결속하되, 언약에 수반된 그 놀라운 특권과 함께 생명을 거는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서로에게 매입니다.

이러한 기본 언약(종종 ‘은혜 언약’이라 불리는 언약)은 하나님의 나머지 말씀들이 그 근거로 삼는 토대가 되는 약속으로서 존재합니다. 이 언약은 계속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반향이 되고 있습니다.2) 모세 시대에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의 책’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출애굽기 24:1-8에 기록된 예식을 통하여 확정됩니다. 어린 송아지의 피를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모세가 대회로 모인 백성에게 읽어 준 언약의 책에 나오는 내용들]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그 이후 수백 년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거듭 언약을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회복시키시고 재천명하시며 그 깊이를 더하심으로써 그분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거듭거듭 드러내셨습니다. (전형적인 예가 예레미야 31:31-34이다.)

바로 이 점에서 구약과 신약(그리스어로 디아쎄케 ‘διαθήκη’)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주신 새 언약(눅 22:20, 고전 11:25, 참조. 마 26:28)은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대신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완성하시고 깊게 하시며 확장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완성’이라고 보는 점에서 (칼빈을 따르는) 개혁 신앙은 독특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복된 소식)은, 오직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여시고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 약속의 상속자가 될 길을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새’ 언약인 것은 언약의 근본 내용이 변화된다는 면에서 새 언약인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깊고 (마음에 새겨짐) 더 넓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품는 것) 더 강력하기 (성신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 때문입니다. 꽃봉오리와 만개한 꽃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견해가 타당하다는 사실은, 예레미야 31:31-34에서 ‘새 언약’은 ‘그들의 열조와 세운 [옛]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구분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옛 언약의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행전 2:38-39에서 베드로는 그의 (유대인) 청중에게 이렇게 그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신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마음이 깨끗하게 씻음을 받고, 모든 죄가 사함을 받으며, 죄책이 제거되고 씻어 없어지는 일은 예수님을 ‘통하여’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속죄의 제사로 드리신 생명으로 인해 씻음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이상의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다시 태어난’ (위로부터 난) 사람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변화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러 오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4-15) ‘약속’이라는 말에 대하여서는 잠시 후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베드로도 사도행전 2:38-39에서 초청한 세례가 성신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시작하는, 눈에 보이는 표와 인(보증)이라는 점을 주목해서 봅시다. 이러한 일을 하신 성신님은 주 예수께서 요한복음 14:2615:26에서 말씀하신 대로,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저는 대위임령에서 세례를 명하는 대위임령의 말씀인 ‘아버지의 이름[안]으로, 그리고 아들의 이름[안]으로, 그리고 성신의 이름[안]으로’(마 28:19)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새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성부께 그분의 자녀로 나아갈 길을 열고, 우리 안에 지금 거하시는 성신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로 살 힘을 준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2.2. 약속 (그리스어로 ‘헤 에팡겔리아’)


정의상 언약은 둘 또는 그 이상의 당사자들 간에 맺은 엄숙하고 구속력이 있는 ‘협약’입니다. 그러한 협약은 반드시 ‘약속들’, 즉 그 구속력 있는 협약이 가져올 확실한 결과물들을 포함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죄인의 죄와 죄책을 제거하는 (씻어내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하여, 그리고 성신께서 내주하시면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 가운데 그 생명을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강권하심을 통하여 성취됩니다(고후 5:13,14). 성경에서는 이것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적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고,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들입니다.

약속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려면/가르치려면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이사야 9:6,7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하나님의 백성)에게 나신 한 아기인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는 우리에게 보냄 받으신 아드님으로서,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만큼 비교 불가능한 광채를 지니신 분입니다. 그분은 한 나라를 세우시고 다스리시는데, 그 나라는 공의와 의로움으로써 영영히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새 언약의 공동체(하나님 나라)가 그때부터 계속하여 영원히 지속될 약속의 통로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영원히 실제로 지속될 그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28-39를 보시오)

지금 여기서 이 주제를 더 깊이 다루기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강조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39에 나오는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그 약속’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점을 지적하는 이유는, 제가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거듭거듭 그들이 세례를 새 신자로부터 주님께로 드려지는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와 세상을 향해 제시하는) 표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서약/약속을 하는 것이 세례라고 여깁니다. ‘세례는 내가 나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자리다. 나는 그 약속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며 또한 나는 나 자신을 그 약속에 매이게 하고 그 약속에 따라 살기로 서약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혼인 예식에서 반지를 서로 교환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남편이 반지로써 약속을 보증하고, 아내도 동일한 일을 합니다. 쌍방 간에 교환이 이루어지면, 동반자의 관계가 확증됩니다. 분명 이러한 것은 ‘이 약속이 너희를 위한 것이다’ 하는 말씀의 의미가 아닙니다. 세례는 동반자 관계의 징표가 아닙니다. (그 동반자 관계가 설령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우리에게 언약적으로 의존적인 분으로 만드는 격이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99%이고 우리는 1%’라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속성을 흐리게 만듭니다. ‘오직 은혜만으로’에서 ‘오직’을 부정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논의를 지속해 가면서 깊이 다루어야 할 내용입니다.)


2.3 ‘표’와 ‘인’


‘표’와 ‘인’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성찬의 성격과 목적을 이해하는 데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용어들입니다. 세례는(옛 언약에서 보면 할례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가리키는, 눈에 보이는 표와 인입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볼 때에 세례는 (그리고 7성례의 다른 성례들도) 신적 은혜를 주입시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방편입니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세례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언약의 약속들과 그 약속이 실행되는 일을 가리키고 보증하는,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표와 인이라고 이해합니다.

세례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와 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향하고 있습니다. 만약 세례가 구원 얻는 은혜를 주입시키고 한 사람을 위에서 태어나는 영적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통로 혹은 도구적인) 방도가 아니라면, 대체 세례는 무엇을 의미하고, 세례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3:21에서부터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의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는 모든 사람은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사도의 말을 들어 봅시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29,30).

로마서 4:1 이하의 내용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의 공덕이나 혹은 민족 혈통 때문에 된 일이 아님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할례 받기 이전이었습니다.3)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아브라함이) 할례의 (sign)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친(seal) 것이니……”(롬 4:11).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울이 할례의 목적을 나타내기 위해 ‘표’와 ‘인’이라는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실 것과, 그를 큰 나라로 만드시고 그에게 위대한 유산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신실하실 것에 대하여 친히 주신, 눈에 보이는 표와 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례와 관련하여서 몇 가지 사실을 추론하게 됩니다.

첫째, 할례의 목적 혹은 이유를 설명하는 이 ‘표’와 ‘인’이라는 말은 세례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골로새서에서 사도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할례와 세례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고 말합니다. “또 그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할례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와 인이었듯이,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륜에서도 세례는 비슷한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지닌 여러 세례 예식문들에 표현되어 있듯이,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여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여서(행 15:5) 베드로와 바울이 행하였던 일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45(고넬료의 집)과 16:15(루디아와 그의 권속), 16:33(빌립보 간수와 그의 가족)을 보면 모두 오직 세례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둘째, 세례는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께로 받는 세례 모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에 구원주로서 임재하심을 개인적으로 인 치시기 위해 주신 표로 이해하는 것 외에 달리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잘 믿지 못하는 신자로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전혀 합당한 자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라고요?’ 하고 울부짖으며 묻습니다. 세례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렇다. 너를 위해서다. 여기 이 물에, 이 표 안에 내 든든한 보증이 있다.’ 예를 들어 요한은, 회개하고 약속된 메시아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위해 준비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세례 받은 이유는, 구약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세례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이 자비를 간청하는 소리에 응답하신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표와 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 모여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물었는데, 전에 요단강 에서 요한의 말을 들었던 군중들처럼 그들 또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행 2:37).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죄를 사하시고 성신님을 그의 안에 거하시도록 하실 것을 보증하는 방편으로서, 눈에 보이는 표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서라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조상 아브라함이 이것에 대한 표와 인으로 할례를 받았듯이, 여러분도 이것에 대한 표와 인으로서 세례를 받으십시오.’

왜 세례를 받는 것입니까? 표와 인으로서 받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 표와 인이 필요합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하고 스스로 회의에 깊이 빠지는 일이 줄곧 일어나는 와중에, 거짓의 아비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이 필요하고 새 언약의 약속이 ‘나를 위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물리적인 징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으로서(마 28:18-20), 우리의 나약함과 연약함, 그리고 사탄의 지칠 줄 모르는 공격이 우리의 확신을 갉아먹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세례를 마련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세례의 목적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오류에 절대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요약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세례의 교훈을 그 풍성함과 영광과 목적 그대로 가르치고 지키려 한다면, 언약과 약속과 표와 인이라는 이 네 가지 성경적 용어 혹은 개념들을 가지고 이것들을 중심으로 가르치도록 합시다! 그 모든 내용을 항상 가르쳐야 합니다!



3.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와 대비하여 다루다 보면, 저는 침례교도인 제 동료를 떠올리게 되곤 합니다. 그는 도발적으로 말하기를 즐기던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목회자 협의회의 회원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면 변함없이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름은 더크 판 가더른(Dirk van Garderen), 개혁교회 목사인데 유아 세례는 믿지 않는 분입니다.’ ‘아니, 뭐라고요?’ 당황스러워 하는 반응들을 보면서 그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유아 세례를 믿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세례는 믿습니다.’ 그가 말하려던 것처럼, 그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세례를 받는가?’ 하는 질문에 관하여서,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에 아무 이견 없이 공통분모를 이루는 답변은 ‘신자들’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안에서 그 피를 통하여 새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갖게 되며, 성신님으로 충만케(filled; baptised) 됨을 나타내는 표와 인입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라면 (세례를 통한 중생을 믿는 관점에서) ‘그리고 자녀들’을 덧붙이되, 그 자녀를 세례 받도록 하는 자들(부모, 조부모, 기타 관련자들)의 믿음 여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고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언약의 관점인데, 이 관점에서는 ‘누가 세례를 받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신자들과 오직 그들의 자녀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오직 그럴 때에만 성경적으로 건전한 사실로서 진정성이 있습니다. 앞서 저는 이것을 꽃봉오리와 만개한 꽃의 관계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장 간단한 논증은, 언약의 정의에 그대로 나타나듯 은혜 언약이란 ‘대대로 영원한’ 것이고(창 17:7 이하), 이것과 병행되는 표현으로서 ‘천 대까지 언약의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신 7:9). 언약은 깊어지고 넓어지며 확장될 수는 있지만, 결코 단절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신자들만 세례를 받는다’는 생각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은, 옛 언약과 새 언약 간에 당연히 불연속성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옛 언약에서는 전적으로 아브라함과의 혈연 (외부적) 관계만이 중요하였던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환원주의적인 이유는, 옛 언약이 지닌 영적인 면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최소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생각은 새 언약과 관련하여서는 오직 영적인 토대(즉, 예수님을 의식적으로 믿는 것)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배제합니다. 하지만 신명기 12:16에 있는 모세의 요구나 예레미야 4:4 및 9:26에 나오는 말씀,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 2:25-29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그와 같은 대조가 성립하지 않음을 잘 보여 줍니다.

침례교도들의 견해(오직 믿는 자에게만 세례를 준다는 견해)는 세례를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참되고 구원받는 믿음에 연결시켜서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특히 복음이 새롭게 전파되는 지역의 상황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약이, 새 언약의 영광과 위로 및 그 언약이 신자의 (영적 및 육체적으로 의존적인) 자녀들에게 주는 약속들을 배제할 정도로 항시적인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안에서 표하고 인 치는 언약의 약속은 신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행 2:39). 이들이 포함되는 근본적이고도 함축적인 이유는 은혜 언약이 지닌 연속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 집에 속한 생후 8일 이상 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창 17장).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그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그 집안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동일하게 약속의 상속자들이었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습니다. 추후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들은 오늘날 ‘바르 미츠바’(Bar Mitzvah, 직역하면 ‘율법의 아들’, 일종의 성인 의식을 치른 사람을 가리킴-역주)라고 불리는 그러한 상태에 속하기 위해 마음으로 헌신할 것을 표시하여야 했습니다. 침례교도들이 주장하듯이 새 언약에서는 신자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담긴 복과 위로에서 ‘배제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것은 언약의 범위를 좁혀 놓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서, 이 타락하고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과 자신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신자의 자녀를 제외함으로써 언약의 범위를 좁히는 생각은 성경의 교훈과 맞지 않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그러한 아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수십 년 전에 뉴질랜드에서 한 은사주의 전도자가 큰 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는 한 유료 광고에서, 아무라도 자신에게 아기와 어린아이의 세례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람에게는 두둑한 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그 상금을 받ᄋᆞᆯ 사람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접하는 진실 한 가지는, 질문의 내용 안에 질문자가 어떤 답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했던 질문보다 더 도전적인 (그리고 제 생각에는 성경적으로 정당한) 질문은, 신자의 자녀가 새 언약에서 배제되고 하나님의 권속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에서 증명해 보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로마서 4:1-12의 내용을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할례보다 우선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 받지 않았을 때에 믿었습니다. 그가 이 단락에서 논의한 결과물은 분명, 혈통이나 혹은 할례(세례) 같은 예식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다 차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 점은 선교 현장에서 언제나 접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자신의 인생을 넘어서까지 파급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 아래, 그 복과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집안의 생후 8일 이상 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들 안에 하나님의 언약의 표와 인을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처음에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믿음이나 헌신 때문에 할례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 때문에,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집안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집안의 머리로서 아브라함의 직무는 그 모든 집안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로 영과 진리 안에서 자신과 함께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신약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사실은, 한 가정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는 일들이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에서 분명합니다(행 16:15; 16:31-34; 18:8). 이 구절들이 자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 자녀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침례교도 형제들이 이 부분에서 종종 제기하는 또 다른 논증은, 신자들이 그들의 자녀 또한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언약’이라 부르지 않아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이 눈에 보이는 표와 인으로서의 세례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언약은 완전한 꾸러미입니다. 언약은 긍정적인 약속(복)과 부정적인 약속(저주)을 포함하며, 언약이 존재하는 증거로서 눈에 보이는 표와 인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표와 인이 없는 언약이란, 그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그들은 ‘헌아식’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점차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물 없이 시행되는 세례’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믿는 부모는 누가복음 2:22-23에 나오는 요셉과 마리아의 사례를 따라 자신의 자녀를 주께 성별하여 드린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몇 가지로 간단히 평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만약 그 구절에서 ‘드린다’는 표현을 따라 행한다면, 왜 그 바로 앞의 21절에 있는 것(할례)은 똑같이 따라서 행하지 않습니까? 둘째로, ‘명령’의 무게가 없는 ‘사례’를 따라 지킨다는 것은 통일성도 일관성도 없습니다. 셋째, 아이를 드리는 행위는 비록 그 의도에서는 가치가 있다 해도, 일차적으로 부모가 하나님께 자녀를 드리고 또 자녀를 마땅한 길로 양육하기로 서약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언약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자녀와 그의 가정에 주시는 약속에 대한 표와 인으로 받는 것입니다. 헌아식은 부모의 측면에서 ‘그들의’ 기대하는 바에 초점을 두고 있고, 언약의 세례는 그 아이와 부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대한 표와 인입니다. 그 두 가지 면이 다 맞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이의 양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부모의 책무를 떠받치는 반석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모두 다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있으며, 그러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운 서약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이 눈에 보이는 표와 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동일하게 응답되어야 합니다.



4. 세례를 어떻게 시행하여야 할까


침례교도들은 세례를 반드시 침례로 시행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물을 뿌리거나 혹은 붓는(머리에 물을 더 많은 양으로 붓는) 방식에 대하여서는 즉각 배격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엄격하게 (조금 심하게 말하면 편협하게) 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세례를 가리키는 그리스어인 ‘밥티조’(βαπτιζω)와 ‘밥토’(βαπτω)는 물에 담가서 적시고 가라앉히며 물이 스며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말이 원래의 그리스어로 그리스어권 독자들에게 의미하였던 바를 그대로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는 로마서 6:1-7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는 일이 우리가 그분 안에서 죽고 그분 안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면에서 마치 그분 안에 푹 잠기는 것과 같다고 분명하게 강조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초점은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에 대하여 다시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완전히 푹 잠기는 것은 이러한 점을 가장 정확하고도 선명하게 상징합니다. 하지만 물을 뿌리는 것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살아나는 일에 대한 상징은 타당성이 있고 우리 교회들 가운데서 사용되는 여러 세례 예식문들 가운데서도 흔히 언급하고 있는 바이지만, 세례에서는 그것보다도 씻고 깨끗하게 하는 일 혹은 정결하게 하는 일의 측면이 더욱 강조됩니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세례의 의미는 ‘세례’라는 낱말의 그리스어 의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유대적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요한이 시행한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는 내적인 갱신과 깨끗게 함 혹은 정결케 함에 대한 외적인 표 혹은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받는 일은 예수의 피로 씻는 일, 곧 내적으로 마음을 신령하게 씻어 내는 일을 상징합니다. 개혁 신앙의 전통에서는 베드로전서 3:21의 말씀이 최소한, 세례가 마치 물로 몸의 더러운 것을 외적으로 씻어 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적으로 마음/영혼을 깨끗케 하는 일과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둘째로, 피나 물을 정결케 함의 상징으로써 뿌리는 개념은 토라의 수많은 교훈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레위기에서 두드러집니다. 그 맥락을 보면, ‘언약의 책’에 들어 있는 율법과 은혜의 약속에 대한 표와 인이 피를 뿌리는 행위입니다(출 24:6-8). 특히 에스겔서에는 (이 책은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쓰였는데) 물로 뿌리는 일이 정결함과 씻음과 새롭게 함을 상징한다는 점이 표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그러나 36:26-28을 보시오).

그러면 잠그는 것 대신에 ‘뿌리는 것’ 혹은 붓는 것이 정당한 방식입니까? 이에 대하여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주 예수께서 물에 잠기시는 방식으로 세례를 받으셨고(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당시의 다른 사람들도 요단 강 ‘안에서’ 세례 받았다고 주장합니다(마 3:6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등).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실제 본문에 너무 많은 것을 넣어 읽는 셈이 됩니다. 요한이 사람들과 주 예수님을 물에 잠기게 하는 방식으로 세례 베풀었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뿌리거나 붓는 방식 또한 요단강에서 시행했음직한 방식입니다.

사도행전 2:41에서는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단 하루에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람을 잠그는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 만한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하루에 3,000명이나 세례를 받는 일은, 그 ‘방식’이 출애굽기 24장과 같이 그 백성에게 뿌리는 방식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하게 들립니다. 사도행전 2:9-11에 열거된 수많은 나라들을 고려해 볼 때에, 에스겔이 ‘열방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나라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데리고 나오실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에스겔서에 언급된 ‘뿌리는 일’이 그와 같이 많은 대중에게 세례 베풀 때에는 적당한 방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무리들의 세례에 대한 언급들(고넬료의 집안, 빌립보 간수의 집안)도, 만일 물에 잠그는 것만이 유일하게 세례의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면, 설명하기 복잡하게 됩니다.

물에 잠그는 방식만이 유일한 세례의 방식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본문에 너무 많은 것을 얹어 넣는 셈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방식이 세례의 가능한 (혹은 정당한) 방식 중 하나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세례 행위의 상징(정결케 함, 깨끗케 함, 새롭게 함)과 성경에서 설명하는 세례의 사례들을 볼 때에 물을 뿌리는 방식이야말로 참으로 분명히 세례에 대한 정당한 기초를 놓는 방식입니다.

맺음말


이제 논의를 마치려 하면서 느끼는 것은, 제가 말하면 말할수록 오히려 더 말해야 할 것들과 설명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발표의 목적은 아닙니다. 저의 짧은 발표문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촌락들 가운데서 수고하는 선교사들과 복음 전도자들, 목사와 장로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도록 성경에 근거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분명 서구의 세밀하게 구분되는 교단적인 차이는 그들의 상황에서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는 ‘성경에 토대를 둔’ 기본적인 기독교 교훈에 붙은 일종의 장식과도 같습니다. 이 발표문에서 저는 세례가 제자 삼는 일이나 그들을 가르치는 일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사안에 해당한다는 점을 논증하였습니다(마 28:18-20).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장 쉬운 해법은 그냥 기권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방식을 주장하는 것을 다 그만두고 ‘신자는 오직 물에 잠그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주장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실질적으로 신자들에게서 삼위 하나님이 세례를 통하여 주시는 특별한 도움(은혜!)을 앗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위로와 격려와 힘을 조금이라도 더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이 땅에서 선교의 최전방에 속하는 지역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의 돌봄을 받는 자녀들에게까지 미치는 위로와 확실한 소망입니다. 세례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사실상 세례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갑옷이나 핵심 병기가 없이 싸우는 군사들과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앞에는 두 가지 면에서 도전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시골의 복음전도자들과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세례에 관한 개혁신앙의 (성경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 발표문은 성경적인 교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핵심 성경 용어들인 ‘언약’과 ‘약속’과 ‘표’와 ‘인’이라는 표현들을 소개함으로써, 기본적인 체계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례에서 인 쳐진 삼위 하나님의 약속이 신자들과 또한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것’임을 주목하게 하여서, 세례와 관련하여 ‘왜’ ‘누가’ ‘어떻게’에 해당하는 내용을 설명하고 옹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자의 (돌봄을 받는) 자녀들에게도 해당됩니다.

2. 부록에서 저는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교회 회원들에게 세례의 이러한 언약적 관점을 가르치는 일을 돕기 위한 간단한 교육 자료를 제공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같은 고전적인 요리문답의 예를 따라, 일련의 문답에 증거성구들을 첨부한 교리교육 자료를 만듦으로써 그 내용을 암기할 수 있게 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방식도 깊이 생각해 보는 데에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1. 이 강의를 듣거나 강의안을 읽으시는 분들은 제가 강의 중에 어떤 저명한 신학자들을 직접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발표자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강의안이 그 성격상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목회적인 목적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학적 훈련을 잘 거친 분들이고, 넓은 의미에서 개혁교회 및 장로교회 소속으로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선교의 일을 하고 혹은 목사나 직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여러 해 동안 저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수많은 주요 신학자들을 깊이 연구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E Voto)나, 베르까워(G. C. Berkhouwer, The Sacraments), 헤르만 바빙크(H. Bavinck) 같은 저자들도 있고, 클라스 루니아(Klaas Runia)는 조직신학 교수로서 우리에게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조직신학』)를 소개하여 주고 그의 학생으로서 분석적으로 때로는 비평적으로 깊이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3. 제 견해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하였고 지금도 기여하고 있는 글들 중 일부를 특별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Booth, Robert R. Children of the Promis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NJ (1995)

Bromily, Geoffery W. Children of Promise. W B Eerdmans, Grand Rapids (1979)

Chaney, James M. William the Baptist. Great Christian Books, Delaware (no date. Assume 1850s)

Coppes, Leonard J. The Baptism Debate. Providence Presbyterian Church Press, CO (2002)

Fairfield, Edmund B, Letters on Baptism. Reformation Seminary Press. (No date: 1840s?)

Hodge, Charles. The Mode and Subjects of Baptism (Orig The Biblical Repertory and Princeton Review, 1861. Reprinted Burlington Press, Nth Cambridge, England (1966)

Madsen, Alfred. The Question of Baptism. Spectator Publ. Co. Melbourne (1921)

Marcel, Pierre Ch., (Translated P E Hughes) The Biblical Doctrine of Infant Baptism. James Clarke and Co, London (1953, 1959)

Murray, John. Christian Baptism.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 Co NJ (1977)

Sartelle, John P. What Christian Parents Should Know about Infant Baptism.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 Co. NJ (1985)



1) 2015년 4월 17일 사적인 편지의 일부 (강조는 발신자의 것)

2)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29을 보시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 로마서 3:30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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