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에서 찬송에 관해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고대로부터 찬송과 고백이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래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진정한 찬송을 통해 교회의 하나됨과 신앙의 활력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장 주-
공예배에서 악기 사용, 어떻게 해야 하나?
성희찬 목사
(마산제일교회)
1. 오늘날 주일 공예배에서 회중 찬송을 도와서 반주하는 목적으로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사용하는 악기가 다를 뿐이다. 대부분 교회는 피아노를 사용하고 있고, 나아가 오르간이나 나아가 드럼이나 전자기타, 신디사이저 등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찬양대와 함께 기악부가 있어서(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등) 찬양대의 찬송과 회중찬송을 돕기 위해 연주되기도 한다.
2. 예술이나 음악이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어서 이를 우리 생활에서 물리칠 이유는 전혀 없고, 또 이를 잘못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 한다는 점에도 다수의 신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주일 공예배에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자들과 교회들마다 의견이 갈라질 것이다. 어떤 악기는 되고, 다른 악기는 되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역사를 보면 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있어왔다.
3. 예를 들어 개신교회의 뿌리가 되는 종교개혁 당시 개혁가 칼빈은 주일 공예배에서 오르간이나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예배가 숭고해지기 위해서 악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당시 로마천주교회는 말씀보다는 여기에 더욱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이와 관련하여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기 위해 탬버린이나 여러 악기를 사용한 것은 참된 예배의 한 요소로서 그림자 역할을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배 시의 악기는 오직 구약시대 즉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약시대의 예배에서 이러한 음악 악기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지금 필요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나타난 빛을 다시 어둡게 하고 여기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골고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제물로 드리신 이후로는 그림자로 있는 제사가 지나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집한다면 이는 하늘과 땅을 섞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단순하고 순수한 멜로디가 우리의 마음과 입에 어울리며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특히 칼빈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특히 당시 오르간이 온갖 종류의 세속적인 연주와 오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으로 인하여 이후 칼빈주의 교회 예배에서 오르간은 물론 다른 악기들이 비록 회중찬송의 반주를 목적한다고 할지라도 쉽게 자리 잡을 수 없게 되었다.
4. 종교개혁 당시 개혁가 칼빈만 공예배에서 악기사용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 시대 교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를 비롯해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신학자들도 오르간 사용을 반대하였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력과 권위가 컸기에 그의 말은 수 세기에 걸쳐 오르간 사용에 대한 의문점들을 잠재우기에 충분하였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교회의 경우 17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오르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고, 교회에서 오르간 사용도 조심스럽게 늘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오르간은 물론 아직 일부이기는 하지만 기악부가 있어서 회중찬송을 돕는 교회들도 늘어가고 있다.
5. 칼빈의 후예이면서도 과거 칼빈이 주장한 대로 공예배에서 악기 사용을 거부하지 않고 이미 이를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교회와 공예배에서 악기 사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 구약시대에 신자의 생활과 공예배에서 악기가 어떤 기능과 목적으로 사용되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구약의 성전예배에서 악기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1)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울 때 4000명의 레위인을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함께 세우게 된다.
역대상 23:5, 사천 명은 문지기요 사천 명은 그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만든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이라
2) 솔로몬은 선왕 다윗의 명령을 따라서 일부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매일의 일과대로 찬송하는 자들을 세웠다.
역대하 8:14, 솔로몬이 또 그의 아버지 다윗의 규례를 따라 제사장들의 반열을 정하여 섬기게 하고 레위 사람들에게도 그 직분을 맡겨 매일의 일과대로 찬송하며 제사장들 앞에서 수종들게 하며 또 문지기들에게 그 반열을 따라 각 문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에 이렇게 명령하였음이라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시에 이 찬양대가 이미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하였다(역대하 5:12,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
3) 히스기야 왕이 성전을 개혁할 때에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악기를 연주하는 레위인들을 다시 세우게 된다.
역대하 29:25, 왕이 레위 사람들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령하셨음이라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왕이 레위인들을 두어서 악기를 잡게 한 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라는 대목이다. 단순히 사람의 명령이 아니란 점이다.
6.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된 악기들은 거기서 어떤 기능을 하였을까?
첫째,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시편 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71: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50:3-5,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둘째, 회중의 찬송을 반주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래를 보면 수금과 음성이 함께 병행하여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수금이 회중의 노래를 반주한 것으로 보인다.
시편 98:5,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셋째, 예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
다윗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 288명을 구별한 것은 악기들을 사용하여 예언하게 한 것이었다. 한글개역성경에는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고 하였지만 히브리서 원문은 ‘예언을 하게 하였으니’이다. 그래서 다수의 영어번역을 보면 ‘prophesying’ ‘prophesy’로 번역하였고, 한글공동번역은 ‘예언하는’으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언’은 어떤 것은 가리킬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율법을 해설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한글개역성경에서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으로 번역한 것은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예언하는’ 혹은 ‘선포하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K. Roubos의 역대상 주석-POT 시리즈). 더구나 25:5을 보면 헤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라고 하고 있다(대하 29:30, 35:15). 사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예언이 노래의 형태로 주어지기도 하였다. 미리암의 경우(출 15:20, 21. 특히 20절을 보면 ‘예언하였다’는 말이 사용되었다. 한글개역은 이 번역을 살리지 못하였다!), 드보라의 경우(삿 4:4, 5:1021), 그 외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시의 형태로 예언을 하였다.
그런데 왜 악기를 연주하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하였을까? 악기 연주를 통해 마음이 차분해져서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며, 특히 노래하거나 말해지는 말씀을 강조하고, 더욱 분명하게 마음에 와 닿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신인 성령이 임하시도록 기다릴 때 사용되었다.
선지자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기를 찾아 온 왕들 앞에서 거문고 탈 자를 찾고 있고, 그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있었다고 하였다(열왕기하 3:12-15). 세 왕 앞들에서 분노한 그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정을 얻기 위해 거문고 탈 자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상 살핀 대로 악기가 사용된 기능과 목적은 오늘 우리가 공예배에서 악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 여부를 결정하고, 또 어느 악기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때에 큰 통찰력을 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능은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유효하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7.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악기
1) 어린 양과 어린 양의 피로 속량을 입은 성도들이 주님께 새 노래를 부를 때 거문고 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계시록 14:1-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2) 그러나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에 더 이상 악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계시로 18:21-22,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8.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까? 공예배에서 과연 악기 사용은 가능한 것일까?
1)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목적이라면 공예배에서 악기사용은 가능하다.
개혁가 칼빈이 교회 공예배에서 오르간의 사용을 금한 것은 결국 그가 자신이 산 시대의 한계에 갇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로마천주교회가 공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악기사용에 더 몰두하고, 실제로 당시 오르간이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널리 사용되고 있던 점이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성경을 주석하여 악기사용을 구약시대에 국한 것으로 보고, 참 예배의 그림자로 본 점은 오류로 보인다. 앞서 서술한 대로 악기사용의 네 가지 기능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 왜냐하면 회중(성가대) 찬송을 반주하여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내면을 잘 표현하며, 또 찬송가의 가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닿도록 강조하기 위해, 또 차분하게 성령의 은혜를 기다리며 묵상할 때 악기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예배 전이나 예배 후에, 혹은 성찬 시에 연주를 하여 예배를 준비하고 성령의 은혜를 기다리고, 말씀을 묵상하는데 유익을 줄 수 있다.
이러한 기능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원론적으로는 어떤 악기라도 공예배에서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악기를 신중하게 선별해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떤 악기가 과연 말씀을 잘 수종들 수 있으며, 우리의 깊은 내면을 잘 표현하여 찬양하는데 유익하며, 어느 악기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리며 말씀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될 지를 생각하며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악기사용은 공예배를 드리는 공간의 음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기에 각 개체교회마다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2) 악기를 연주하거나 반주하는 사람은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먼저 참 신자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예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예배의 거룩이지 예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하였다. 연주하는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를 위해 있어야 할 예술적 역량이 탁월하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주자
와 연주자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행위를 돕는 자이기에 그가 먼저 복음을 깨닫고 복음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비록 직분자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세례를 통해 회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는 그 교회 회중 중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교회 회중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그 회중과 함께 회중의 찬송을 반주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회중의 교제권에 있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다른 교회에 적을 둔 교인을 아르바이트 하듯이 데려온다든지, 심지어 불신자를 기악부에 두는 것은 공예배의 거룩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주자나 기악부원은 자기들의 신앙 뿐 아니라 훈련을 통해 예술적 역량을 함양할 수 있어야 한다. 예배의 거룩 뿐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3) 반주자와 기악부의 부원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좋은가?
반주자와 기악부의 부원은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으면 자기의 직무를 다할 수가 없다. 이들이 만약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시간을 내어서 연습과 훈련을 하며, 나아가 악기를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나 자기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책이나 음반이나 기타 재료에 드는 비용을 생각할 때에 교회가 이들에게 이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들이 손을 벌리기 전에 교회에 먼저 이들의 형편을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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