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찬송에 대하여’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흥얼거리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요? 찬송도 고백이라는 관점에서 찬송에 관해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고대로부터 찬송과 고백이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래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진정한 찬송을 통해 교회의 하나됨과 신앙의 활력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장 주-
찬송의 의미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단연 찬송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2000년 네덜란드 유학시절 대사관에서 표를 보내주어 국립 합창단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로테르담까지 2시간이나 운전해 네덜란드 친구들과 함께 참석했다. 합창단 공연은 한 마디로 최고였다. 한국에 살았다면 아마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없었을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차원으로 세계 곳곳을 방문하는 공연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고국에서 온 합창단원을 찾아가 반가워 인사를 나눴다. 그 때 놀란 것은 합창단원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음악대학교에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란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매주 한국 교회에 찬양대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성악가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음악’하면 교회음악을 떠 올려야 할 정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찬송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매주 예배에서 찬송을 몇 곡이나 부른다. 무슨 모임을 시작하기 전과 중간에 수시로 노래를 부른다. 기도회 때에도 찬송은 반드시 있다. 가정예배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개인적으로도 찬송을 수시로 부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은 장례식에서도 찬송을 부른다. 불신자들이 볼 때 장례식의 노래는 경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교 장례식은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옥에서도 부르는 찬송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구해주었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였다. 그런데 이런 암울하고 칙칙한 옥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불렀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바울은 또 다른 옥에서 찬송을 부른다. 그것은 에베소서에서 잘 나타난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편지다(기원후 60년 경, 엡 3:1; 4:1; 6:20). 바울은 로마에 죄인의 신분으로 잡혀 있을 때 찬송을 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그리스도인은 슬픔과 고통스런 환경 가운데서도 찬송을 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찬송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자주 부르고 좋아하는 찬송은 무엇인가? 우리는 찬송이 좋아서 부르긴 하지만, 찬송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를 살펴보자.
‘찬송’의 의미
도대체 ‘찬송’이 무엇이기에 그리스도인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바울이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할 때 헬라어는 ‘유로게토스’(eulogetos)이다. ‘유로게토스’는 ‘좋은 것을 말하다’는 의미에서 온 단어이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덕담’(德談) 같은 것이다. ‘유로게토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는 ‘바룩’(baruk)이다. 이 단어들이 하나님 편에서 사용될 때는 ‘복을 주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시는 것이니,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람 편에게 하나님을 향해 사용될 때에는 ‘찬송하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좋은 것을 말하게 되니, 그것이 ‘찬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찬송은 감사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뭐가 있을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 스스로 만든 뭔가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릴 뿐이다. 우리는 매 주일 모여 하나님께 예배한다. 그 때 우리가 드리는 것이 ‘찬송, 기도, 봉헌’이다. 그 가운데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기 히브리서 13:15에 나오는 “찬송의 제사”는 레위기 7:11-15에 나오는 ‘화목 제사’와 ‘감사 제사’와 같은 말이다. ‘감사하다’는 ‘찬양하다’는 말이고, ‘찬양’은 ‘감사’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렸을까?(레 7:11-15)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먼저 번제(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 위에 감사제물의 일부를 태운다. 그러면서 감사제목을 말한다. 감사를 고백한다. 그렇게 희생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기름 섞은 무교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은 딱딱한 빵도 드린다. 그리고 기름 바른 무교전병, 즉 이스트를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구운 맛있는 과자도 드린다. 마지막으로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구운 또 다른 종류의 과자를 함께 드린다(12절).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스트를 넣어 구운 빵도 감사 제사를 할 때 드린다(13절). 이 모든 것들을 ‘거제’로 하나님께 드린다. 곧 빵과 과자를 하나씩 좌우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린다. 그 후 그것을 제사장들에게 준다(14절). 이 맛난 것은 모두 제사장이 먹는다. 동시에 빠뜨리지 않고 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찬송을 부른 것’이다. 아마도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찬양의 제사’라고 부른 것은 찬송이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른 것이 감사제사의 특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통적으로 화목제사 가운데 감사 제사를 드릴 때 불렀던 찬양은 시편 42편 5절로 알려져 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또 한 편의 노래는 시편 100:4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감사 제사’에서 잘 나타나고, 신약 시대에도 그런 의미를 살려 예배 가운데 실현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말씀에서 봐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증거로, 시와 찬송, 신령한 노래가 나타난다. ‘시’는 구약의 시편을 의미하고, ‘찬송’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새롭게 만들어 부른 노래인 것으로 보이며, ‘(신령한) 노래들’은 성경에 나오는 시편 이외의 여러 노래들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찬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종합할 수 있다. 여하튼 그 찬양의 내용과 형식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는 찬양이고, 찬양은 감사인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감사 제사와도 연결되고 에베소서 5:20에 나타난 말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찬양은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베짱이처럼 일을 안 하고 노래만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과 공부에는 게으르면서 노래하는 일은 좋아서 앞장서기도 한다. 노래를 인도하는 찬양 팀은 그런 점에서도 인기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찬양은 단순히 노래를 즐긴다는 의미 이상이다. 물론 노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지만 칼빈이 ‘음악’을 ‘괴물’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로 위험한 요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은 온 회중이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하고(엡 5:19), 또 교회의 찬양은 악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대상 16:6), 기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점을 종교 개혁가들은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찬양은 찬양 자체를 위한 것이면 안 된다. 찬양은 신앙인의 삶의 반영이며, 신앙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다. 찬양이 전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이다. 찬양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입술의 제사인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삶이 없는 찬양은 의미가 없다. 찬양은 감사와 복종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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