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구원론입니다. 구원에 관해 관심이 없는 종교가 있겠습니까? 종교인 중에 구원받기를 바리지 않는 이들이 있겠습니까? 신을 믿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어떤 종교의 구원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는 일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주장하면서 구원과 의로움을 성경적으로 새롭게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큰 혼란이 계속되고 있기에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관심가져 주시고 널리 퍼뜨려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장 주-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구원
김주만 선교사
(태국 선교사)
기독교의 구원론과 다른 종교, 특별히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정말 성경에 충실한 구원론인지, 아니면 다른 종교와 유사한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의 나라인 태국 선교사로서 기독교의 구원론과 불교의 구원론을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구원론을 가지고 가르쳐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천국에 간다 vs 천국이 온다
구원론에 있어서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는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말을 해왔다. 이와 함께, “이 땅은 죄악으로 가득 찬 절망의 곳으로 다 심판의 불로 태워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 잘 믿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영원히 살면 된다.”라는 것이 기본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어 왔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세상은 악한 곳으로 고통이 있으며, 이 땅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고 진짜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불교의 가르침(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이다. 세상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집착은 죄다. 이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참선을 통해 도를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므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된다는 인생관을 낳을 수가 있다. 이러한 인생관은 결국 이 땅에서는 이 땅의 원리를 따르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이원론적 신앙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것이 천국에 관한 선포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 4:17)고 선포하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7: 20-21에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그런 곳 이전에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하는 천국이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의 임함 임을 가르치신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가지게 되는 회복된 관계를 더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죽어서 들어가는 장소 개념 이전에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개념이 더 강하며, 예수님이 바로 천국이라 표현한다. 따라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저 멀리 있는 어떤 장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 개념이 더 강하다. 천국 혹은 하나님 왕국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더욱 강조한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천국의 개념은 나의 윤리적 노력 혹은 은혜로 인해 미래의 어느 순간에 가게 되는 멀리 있는 어떤 곳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받는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들어가는 천국을 말한다. 성경은 열반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관계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신앙 vs 구도자적 신앙
그렇다면 구원론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기본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미래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도 있으나 많은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 현재 받고 누리는 구원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관련된 신앙 생활의 목적은 이 땅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신앙 생활은 지금 현재 여기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있으며, 우리의 육체와 영혼과 전 인격이 누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기대하며 성숙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다. 이에 반하여 다른 종교, 특별히 불교는 구원을 받기 위한 구도의 종교이다. 여기서 구원의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은혜를 통한 구원 vs 대차대조표식 구원관
불교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통상적으로 대차대조표식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싱가폴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가졌던 비교종교학 리서치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이다. 선과 악의 대차대조표에서 선이 더 많으냐 아니면 악이 더 많으냐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이 난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신앙 생활의 가장 저변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이러한 두려움은 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기본이 된 하나님과의 관계(하나님은 사랑이시라)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불교, 특별히 민속 종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로서의 불교는 신(귀신, 악귀를 포함해서)에 대한 ‘두려움’이 그 관계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스도 중심 그리고 은혜 중심 vs 나 중심 그리고 업보 중심
불교는 사실 석가모니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원래 윤회 사상과 업보(karma) 사상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구원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태국) 불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태도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구원에 대한 열망 보다도, 다음 세대에 짐승이나 미물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은 명상(참선)이나 선행을 통해 열반에 이를 수 있는 확신이 없으므로, 이러한 궁극적 구원에 대한 열망은 포기하고, 끝없는 윤회의 바퀴 속에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원관은 이 땅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한 관심에만 머무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구원관을 가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불교인들의 관심은 저 하늘(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다. 즉 미래에 성공을 하여 부자가 된다든지,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든지, 다음 생애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태국) 불교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서의 구원도 없으며, 마지막 날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태국의 한 한 학자는 태국의 불교를 ‘업보 중심적 불교’라고 말한다. 이것은 결국 불교에서 버리라고 하는 ‘이 땅을 향한 집착’을 다시금 소유하게 만드는 구원론이다.
또한 불교의 구원론의 중심에는 ‘나’(ego-centered)가 있다. 나의 선한 행위, 나의 참선(명상), 나의 노력이 중심에 있다. 믿음, 은혜와 같은 개념은 저급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구원자’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다. 구원은 내가 직접 이루어야 한다. 결국 내가 참선을 통해 ‘도’ (道)를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내가 신이 되는 것’이다. 즉 내가 해탈하여 열반에 들어가 신(대자아)과 합일해야 한다.
이에 비하여 기독교의 구원은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다(Christ-centered).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고 가르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가 곧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 속에서는 인과응보적 혹은 대차대조표적 구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땅: 하나님의 창조물 vs 고통과 저주의 장소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론은 세상은 고통이 있는 곳이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러야 하고, 대자아에 소자아가 합일 함으로 나의 존재는 사실상 소멸되고 대아와 합일을 이루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고통 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땅(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죄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으므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이 땅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벗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나의 자아가 없어지는 합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자아를 소유한 자로서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소멸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몸으로 새롭게 완성된 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슬픔도 고통도 죄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바른 구원관에 기초한 교육’을 위한 제언
구원에 대한 교육에서 은연중에 우리의 선행을 강조하고, 헌금을 강조하고,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나 중심적 구원론’을 세워나가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좀 선하게 살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내가 죄인이며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때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만드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고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나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강조하는 것에 있어서도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의 심장은 사랑이지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죄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가르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단지 미래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기차표 정도로 여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이 땅, ‘여기 그리고 지금’에 있다. 따라서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와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현재적 구원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온전하여지고 완성된다는 미래의 완성된 구원 또한 강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미래의 구원은 현재의 구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현재의 구원은 미래의 완성될 구원에 소망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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