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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기획기사는 선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열심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금에 선교의 폐해가 심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도 문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선교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해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장 주 


 

종교개혁자들에겐 선교개념이 없었는가?

 

 

황대우.jpg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

 


선교학자들의 평가

 

     개신교 선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19세기 독일 선교학자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이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선교 개념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고 혹평한 이후, 종교개혁은 선교와 무관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때로는 선교를 방해하는 골칫거리인 것처럼 호도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가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훌드리히 츠빙글리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는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예외적인 인물로 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주장이 종교개혁과 선교 사이의 연결고리로 작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교회사가 라토렛(Kenneth Scott Latorette)도 교회역사를 선교역사와 동일시하여 선교의 관점에서 교회의 역사를 서술한, 7권으로 된 대작 기독교 확장의 역사라는 책에서 16세기에 소수의 개신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양식을 새롭게 발견된 신대륙에 전파하려는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선교에 대한 개신교의 활동은 확실히 로마교에 비해 많이 빈약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기류에 편승하여 저술된 책이 성공회 출신 선교사 스티븐 닐(Stephen Neill)<기독교 선교 역사>이다. 이 책에서 닐은 17세기 로마교 신학자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누스(Robertus Bellarminus, 1542-1621)가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이 이단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변절시켰다는 것 외에 달리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을 신앙으로 회심시켰다는 말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다고 비난한 말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선교 사상과 활동을 무시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선교관에 관한 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루터가 종종 유대인들과 터키인들을 친근하게 여기고 또한 확실히 복음이 점차 세계로 확장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종교개혁자들이 비기독교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호의적인 말들을 동원하고, 또한 종교개혁자들의 저술로부터 가능한 모든 증거를 수집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은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정말 닐의 결론처럼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의 개념을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한 것일까?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신교는 로마교에 비해 선교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서 선교활동이 전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교 개념조차 전무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루터 연구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일으킨 루터 연구의 대가 칼 홀(Karl Holl)1924년에 발표한 글 루터와 선교는 루터에게 선교 개념이 없다는 당대의 일반적인 견해를 뒤집어엎었다. 홀은 원문 자료를 근거로, 루터의 선교 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루터 역시 실제적인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선교가 그 원리들을 따라 가야 하는지를 표시한 안전한 약도를 그려놓았다.”

 

부써의 선교 개념

 

     마르틴 부써와 제네바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선교 개념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칼빈의 경우에는 실제로 선교 활동을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인물이다. 부써는 종교개혁 초기에 저술한 자신의 주석서들에서뿐만 아니라, 1538년에 작성한 <참된 목회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영혼을 돌보는 목회가 필요한 대상을 에스겔 3416절을 근거로 다섯 종류로 구분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다시 찾아와야 할 잃어버린 자들이다. “누가 잃어버린 양인가?” 부써는 이렇게 대답한다.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택하셨으나, 아직도 전적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의 교회로부터 떨어져 있는 모든 자들이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이든 그렇지 않은 자들이든 [상관없다].” 부써는 잃어버린 자들 속에 유대인들과 터키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들도 포함시킨다.

     그러면 잃어버린 자들을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부써는 대답하기를, “복음은 온 세상과 모든 피조물에게, 즉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진리를 아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가 모든 라라들에 선포되고 제공되어야 한다.”

     부써는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조차도 이러한 전도와 선교적 사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당대의 상황에 대해 통탄한다. “만일 이런 방법으로 정부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받는 자들, 즉 태어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주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자들을 살필 때 그들 각자가 경건을 추구하고 발견하고 소원하는지를 살핀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들[=정부 통치자들]에게 확실히 복을 베푸실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정부 통치자들]은 또한 의를 추구할 수 있고, 또 유대인들과 터키인들과 다른 이교도들처럼 날 때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다. 그렇다. 그들이 자신들의 육적인 통치를 사랑하고 이 통치권의 확대를 위해 열정을 쏟아 붙는 만큼 그리스도의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열심을 내었다면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터키인들과 다른 이교들의 땅과 재산을 뺏으려는 열정은 있지만 그들의 영혼들을 우리 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열정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지 세상의 통치자들이라 불리는 일반 군주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성직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칼빈의 선교 사상

 

     칼빈도 부써 못지않게 선교에 대해 열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네바를 선교기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선교활동의 모범적인 종교개혁자이다. 하지만 실제 선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칼빈이 선교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런 평가의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바르넥이다. 그는 자신의 책 <개신교 선교 역사 개요>에서 칼빈이 선교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서 칼빈이 비기독교 민족들 가운데 기독교의 확장, 즉 선교에 대한 특별한 교육이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결론 내린다. 하지만 사도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근거로 네덜란드 신학자 빌름 당크바르(Willem F. Dankbaar)는 한 바르넥의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나아가 칼빈이 제네바를 사도적 중심지, 즉 유럽 모든 나라에 참된 복음 선포를 확산하는 힘을 공급한 곳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칼빈 생전의 제네바 목사회의 회의록을 면밀히 분석한 필립 휴즈(Philip E. Hughes)1555-1562년 사이에 제네바가 복음 전도를 위해 다른 지역에 파송한 사람들 가운데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만 88명이며 선교 활동이 정점에 달한 1561년 한 해에만 해도 12명의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무려 그 해에만 142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파송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칼빈을 선교 지도자라고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전도와 선교 원리는 단순히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교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조와 섭리의 원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자신의 디모데전서 2장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모든 시대와 시절에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졌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할 만했고 그분과 어떤 교류도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율법 시대에 그분이 한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자신의 날개아래 그들을 모으셨으며 나머지 세상은 혼란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 하지만 비록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자연히 그분께 속해 있다. 그리고 그분이 그들 모두를 만드신 것과 같이 그렇게 그분은 또한 그들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덕과 위대한 선하심으로 그들을 지켜주신다. 사람들이 타락을 향해 가는 것을 우리가 볼 때, 비록 그들이 불신자들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들을 우리와 결합하실 만큼의 은혜를 그들에게 베푸셨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마치 그가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자신의 손에 쥐고 계신 것과 같을 수는 없으나 우리 사이에 어느 정도의 형제애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마치 우리의 적이며 이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아주 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질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아야 하며 그들을 다시 한 몸에 연합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가능한 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잘려나간 지체들과 같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에게 새겨져 있고 끊어질 수 없는 끈이 있으나 우리 눈에는 마치 그들이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여운 불신자들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손을 그들에게 뻗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죄로 말미암아 찢겨져 잃어버린 형제들을 다시 찾는 회복운동이다. 이것은 만일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형제 사랑이 없는 자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다. 디모데전서 2장에 대한 자신의 설교에서 칼빈은 심지어 불신자에게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방해물과 걸림돌이라고 주저 없이 비판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제 자신들의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모든 자들과, 또한 가여운 불신자들을 인도할 마음은 없고 오히려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지도 않고 그분의 제국의 권능을 최대한 약화시키며 그분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지 못하도록 제한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의 도를 부분적으로 어둡게 만들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께 주신 위엄을 감소시킨다.”

 

칼빈의 선교 실천

 

     칼빈은 단지 온 인류를 위한 선교 이론과 원리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교도들을 위해 선교를 실천한 선교 파송자다. 16세기 제네바는 칼빈의 선교 이론을 배경으로 당시 다른 여러 유럽 나라에 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개혁교회 선교 기지국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특히 핍박 아래 있었던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들(Huguenots)의 지하교회를 위해 수많은 목회자들을 프랑스 선교사로 보내었으며 심지어 개혁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머나먼 남아메리카의 신대륙 브라질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래서 칼빈 연구의 대가 스탠포드 리드(W. Standford Reid)155년 이후 칼빈의 제네바를 선교의 중심지로 평가한다. 또한 그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라질에까지 미칠 정도로 활발했던 제네바 선교가 칼빈 사후에는 오히려 선교 활동이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정황들은 16세기 개혁주의 선교의 중심지로서 제네바 선교를 주도한 인물이 칼빈이었음을 증거 한다.

     칼빈의 제네바는 빌러가뇽(Villegagnon)의 요청으로 1556년에 브라질에 파송할 2명의 선교사를 선출했는데, 피에르 리허르(Pierre Richer = Richier)와 기욤 샤르띠에르(Guillaume Charretier = Chartier)가 그들이다. 이들은 브라질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선출되고 파송된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프랑스 위그노인 콜리니(Coligny)의 총독 가스빠르 드 샤띨롱(Gaspard de Chatillon)은 프랑스에서 박해 받고 있던 위그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신대륙에서 찾고자 했는데, 당시 브르따녀(Bretagne)의 부총독이었던 빌러가뇽이 콜리니의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콜리니라 이름 붙이 섬을 발견한 빌러가뇽의 요청으로 300명의 새로운 위그노들이 15573월에 도착했는데, 이 때 칼빈은 두 명의 목사 선교사와 12명의 학생들을 이들과 함께 파송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빌러가뇽의 정치적 신앙적 변절과 위그노 신자들에 대한 핍박, 그리고 프랑스가 포르투칼과의 식민지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식민지 선교를 로마교에만 허락하고 개신교도들을 핍박하는 프랑스의 선교 정책 때문에 제네바의 브라질 선교는 싹을 틔워보지도 못한 채 질식되고 말았다. 비록 제네바의 선교 사역이 큰 열매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할지라도 결코 선교 실천 자체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마무리

 

     종교개혁과 선교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은 분명한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에 대한 관심과 선교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선교의 개념과 역사가 로마교 학자 벨라르미누스의 주장처럼 천주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생명력을 잃은 거짓 교회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던 종교개혁 자체가 개신교 선교의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논문, “깔뱅의 교회론과 선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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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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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페이스북을 떠날 때인가?
기고
2022년 총회에 대한 우려...
힘들 때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가...
고신 교회 제7차 헌법 개정안 초안...
제7차 헌법개정에 나타난 교리와 예...
기독교보(1499호, 2022년 8월 6일) ...
고신 교회 정체성을 부인하는 ‘명예...
교회학교인가? 주일학교인가? -헌법...
SFC, 여전히 필요한 고신의 학생운동
헌법개정안 중 권징조례 초안 비평 ... 1
우리는 지금 어떤 교회를 꿈꾸고 성...
논문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
한국 교회의 위기: 노회의 기능과 역할
한국 장로교회 헌법, 어디로 가야 ...
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 노회의 ...
한국장로교회헌법, 어디로 가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