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오병세 교수의 삶의 여정
이상규 교수
(고신대 신학과)
고 오병세 교수는 홍반식, 이근삼 교수와 더불어 1960년대 이후 고신 신학을 이끌어 온 신학자였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에서 출생하신 오병세 교수(1926-2016)는 유가적(儒家的) 기풍과 군자지도(君子之道)를
배우며 성장했다. 이럼 점들은 그의 일상의 삶 속에 베여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하였고 대구 서문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신학도가 되기로 다짐한 그는 서문교회 담임이셨던 명신홍 목사의 추천으로 1946년 9월 개교한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했는데, 예과 입학생 16명 중 홍반식, 이근삼은 일생의 동료가 되었다.
고려신학교에서 5년간 수학 한 후 1951년 6월 27일
고려신학교를 제5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 경남 창원의 일동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그는 그해 9월 7일, 25세의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고 갓 설립된 서문로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 교회는 대구경북지방 최초의 고신교회였고 후일 경북노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이런
연유로 오병세 교수는 경북노회원으로 일생을 살았다.
1954년 10월 9일에는 해리스(Robert L. Harris) 박사의 배려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훼이스 신학교를 거쳐, 신설된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57년 5월 졸업했다. 이때가
이 학교 첫 졸업식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같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루터교 신학교인 컨콜디아 신학교 옮겨가
박사학위 과정을 공부했다. 이 학교에서 구약을 전공했지만 셈족어와 신약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특히 사해사본 연구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1959년 6월에는 이 학교에서 신학석사(Th.M) 학위를, 1961년 5월에는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커버넌트 신학교 졸업생으로써의 첫 번째 박사학위 수여자였고, 당시 122년의 역사를 지닌 루터교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최초의
장로교 목사였다고 한다.
학위과정을 끝낸 그는 유럽과 팔레스틴을 여행한 후 1961년 8월 31일 귀국하였다. 학위를
가진 학자가 많지 않았던 당시 그는 고려신학교 출신 학자라는 점에서 충심의 환영을 받았다. 귀국한 그는
고려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었고, 승동 측과 합동한 이후인 1962년 3월부터는 서울의 총회신학교 교수로 일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14일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으로 그해 12월 14일 경 다시 부산으로 와
12월 17일 박손혁, 이근삼 교수와 함께 고려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처음에는 환원에 동의하지 못해 머뭇거렸으나 그의 연고지인 대구지방 교회 인사들의 권고를
받고 환원에 동참하기로 하고 부산 고려신학교로 복귀한 것이다. 그 이튿날 서울의 총회신학교에서 내려온 5명(남영희, 이지영, 진학일, 최만술, 최진교)의 졸업식이 있었는데 이들이 고려신학교 제17회 졸업생들이다. 환원을 부당하게 여겼던 홍반식 교수는 고려신학교 복귀를 주저했다. 그러나
송상석 목사의 간곡한 권면을 받아들여 1963년 2월 고려신학교
복귀를 결정했고, 2월 25일에는 오병세, 이근삼, 홍반식 세 교수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고려신학교에서 동역하게
된다.
오병세 박사는 귀국 후부터 1996년 8월, 70세로 은퇴하기까지 35년간
고려신학교 혹은 고신대학교 교수, 혹은 행정책임자로 봉사했다. 그는
구약을 전공했지만 구약을 전공한 홍반식 교수가 있었기 때문에 주로 신약을 가르쳤다. 오병세 교수는 매우
성실한 학자였다. 꼼꼼하고 세밀했던 그는 시간을 엄수하고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그는 고신대학에서의 교수 활동 외에도 대한성서공회의 성경번역 혹은 감수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고신교회를 대표하여
연합 사업에 참여하였고,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오병세 박사는 교수로 일하는 한편 1975년 4월부터 1979년 3월까지
한상동, 홍반식에 이어 3대 학장으로 봉사했고, 그 후 이근삼 교수가 4대 학장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이근삼 학장이 물러나게 되자 오병세 교수는 다시 학장으로 선출되어 1985년 4월까지 봉사했다.
1994년 2월에는 이근삼 총장에 이어 고신대학교 제2대
총장으로 선임되어 1996년 8월말까지 봉사했다. 그가 행정책임자로 일하는 동안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대학의 운영기금 확보를 위해 교회재정의 1%후원 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대학의 설립목적과 이념을 성문화 하는 등 여러 규정을 제정하기도 했다.
성경신학자로서 오병세 교수는 1972년 『소리 지르는 돌들』을
출간한 이후 『사해문서연구』(1989), 『교회 교육 신학』(1989),
설교집, 『그러므로의 생애』(1980) 등을
출간했다. 특히 그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역간하고, 개혁주의
입장의 『신학사전』(개혁주의신행협회, 1978)을 편찬한
일은 교회를 위한 값진 봉사였다.[1]
오병세 박사는 고려신학교 설립과 함께 첫 학생으로 입학하였고, 고신교회
목사가 되어 고신의 역사와 함께 70년을 살아왔고 고신의 산 증인으로 살았다. 또 그는 칼빈주의 학자로 고신대학과 신학대학원, 그리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2016년 6월 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 오병세 교수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은, 화갑기념문집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개혁주의신행협회, 1986), 고신대학교 은퇴기념문집
『기독교대학과 학문에 대한 성경적 조망』(고신대학교, 1996), 그리고
성역50주년기념 문집 『새벽이슬 같은 은총의 날들』(현대출판인쇄사, 200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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