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휴 印休 선교사”
노상규 목사
(상내백 교회 담임)
친구이며 내가 총무로 섬기는 오지선교단체 실로암의 대표인 김현진 장로의 딸 결혼식이 있어 여수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 순천에 들러 지난번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와 특강을 했던 데이비드 린튼 선교사를 만났다. 그의 아버지인 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의 묘소를 찾았다. 휴 린튼 선교사의 아내 로이스 베티(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한국명 : 인애자 印愛子)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 은퇴선교사 마을에서 9월 7일 96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유족들이 순천 남편 곁으로 모셔와 장례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1926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선교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린턴(William Linton, 한국명 : 인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한남대학교 설립자)과 어머니 샬럿 벨 린턴(Charlotte W. Bell Linton 한국명 : 인사례)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유아기를 순천에서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후일, 미국에서 교육받으며 자랐다. 1947년 5월 로이스 베티와 결혼하고 1950년 컬럼비아대학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종전 후 1953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와 의료봉사에 나섰다. 등대선교회를 설립하여 전라남도 순천을 중심으로 도서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인휴 선교사는 생활이 매우 검소하여 검정고무신을 즐겨 신고 다녔다. 고무신이 다 닳아서 구멍이 뚫리면 타이어 수리하는 곳에서 땜질을 해 다시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순천의 검정 고무신’이다.
그의 아내 인애자와 함께 30여 년 간 결핵 퇴치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1962년 8월 순천 일대에 크게 홍수가 나서 131명이 숨지고 59명이 실종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염병 환자가 속출하는 중 결핵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순천 기독 치료소를 설립하여 결핵 치료에 나서고, 아내 인애자는 순천 결핵 재활원(현, 순천 기독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여 은퇴할 때까지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하였다. 휴 린튼의 사후에도 결핵재활원 봉사를 꾸준히 한 공로로 1979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1996년 제9회 호암상을 수상하였는데, 상금 5천만 원은 앰뷸런스 비용으로 북한에 기증하였다.
휴 린튼은 1984년 4월, 농촌 교회 건축용 자재를 트레일러에 싣고 순천요양소로 오는 길에서 음주 운전자의 버스와의 충돌 사고로 의식을 잃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앰뷸런스 차량이 없어 광주기독병원까지 택시로 이송하는 도중 58세의 나이로 숨졌다.
비가 내리는 중에 휴 린튼 선교사 가족이 살았던 집 주위와 묘소를 둘러보는 중에 구두와 양복바지는 흠뻑 젖었지만, 내 마음속은 충만한 은혜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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