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부부세계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태위태한 것이 바로 부부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전혀 다를까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도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고통, 그리고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치유하는 길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 편집장 주
사모, 그 아름다운 이름
김창선
(울산교회 정근두 원로목사 아내)
어느 날 서울에 계시는 분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사모님, 우리 아이들 데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놀러가도 될까요? 사위될 사람도 함께요’ ‘네 오세요. 몇 시쯤 도착하지요?’ 또 답이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때 우리 딸에게 사모상에 대해서 특강을 좀 부탁합니다.^^’ ‘사모상’이라? 그게 뭘까? 과연 사모상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가 말입니다. 딸이 강도사님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사모의 길’은 쉽지 않다고들 말하니까요.
우선 저는 이 ‘사모’라는 말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들기도 합니다. ‘사모님’이라는 말은 ‘선생님이나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목사님의 아내를 부를 때 쓰는 말로는 적합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단어가 그렇게 부를 때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집사’나 ‘장로’처럼 타이틀 혹은 직분으로 쓰이고 있지요. 그래서 어디 세미나에라도 등록하게 되면 직분을 쓰는 난이 있는데 저는 참 난감하더라고요. ‘사모’라고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래서 그냥 비워두든지 ‘평신도’라고 씁니다. 결코 직분은 아니거든요. 그렇긴 한데, 현실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다들 그렇게 사용하고 있으니 이제는 ‘사모’라는 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아예 타이틀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어 사용만큼이나 ‘사모’에 대한 생각도 역시 남다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목사의 아내’일 뿐 아니라 중직자 이상으로 기대와 요구가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모’는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는 말이지요. 언젠가 저희 교회 사모님들 모임에서 ‘사모’다워야 된다는 말이 나와서 ‘아니, 잠깐, 사모다워야 된다는 말보다는 그리스도인다워야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제가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목사의 부르심이 특별하고 교회 안에서의 역할이 지도적 위치에 있다 보니 그의 아내인 ‘사모’ 역시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각자 교회 안에서 감당해야 할 부분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얼마 있지 않아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담임으로는 첫 목회를 시작한 셈이지요. 매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때문에 예배가 좋았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주간에도 자주 모였습니다. 수요일, 금요일에도 모였고 매주 화요일에는 주부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잘 나오시던 분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교회 분인데 친구 따라 오셨지요. 어찌 된 건지 알아보았더니 ‘사모님이 너무 자기가 알아서 일을 다 하는 바람에 시험 들어서 못 오겠다.’는 것입니다. ‘아차, 이런 일이’ 뿐만 아니라 그 친구 분, 우리 집사님까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교회 부엌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제가 점심준비를 한다거나 마실 차를 혼자서 준비하곤 했던 것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입니다. 햇병아리 사모가 실수를 한 것이지요. 물론 그분은 나오지 않는 이유를 말할 빌미가 있어야 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로는 ‘아, 내가 뭔가 잘못한 게로구나.’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지만 마음으로는, 감정적으로는 억울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또 이런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아다니기도 하지요. 그 일과 관련해서 어떤 집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마도 나를 도와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들으면서 나는 나대로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어, 내 딴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집사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라며 내 입장을 열심히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려오는 이야기는 ‘사모님이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를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또 다른 잘못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변명하거나 중간에 자르지 말고 잘 들어야 했고 내 생각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그렇게 생각했으면 ‘아 그랬군요, 그렇게 생각하실 만 했네요.’라고 했어야 좋았을 텐데, ‘반영적 경청’을 못한 것입니다. 아직 들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초보 사모였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집사님들이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여성도들이 ‘사모님’이라고 찾아와서 개인적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어떻게 도와드려야 될지 몰라서 그냥 그 사정이 딱해서 우는 것밖에는 할 줄 몰랐습니다. 그분을 보내놓고도 혼자서 마음이 아파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히 5:12)라는 말씀만 마음에 맴돌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배우고 깊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워낙에 울보인 내가 또 울 일이 생겼습니다. 토요일인데 남편의 설교준비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집사님 한 분이 오셔서 함께 운동을 하러 가셨습니다.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 어떡해요. 열심히 설교준비를 해야 되는데 시간도 없는데 왜 남편은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 사역자로 부르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하잖아요.’ 그러고 한참 떼를 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러시는 겁니다. ‘너는 네 할 일을 다 했니? 남편이나 나한테 따질 것이 아니라 네 할 일을 다 해 놓고 그러냐 말이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네 하나님,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목사님이 되도록 저는 기도만 하겠습니다.’
날마다 하는 말씀 묵상은 제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 앉기만 하면 그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루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3절 말씀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씀을 읽는데 주님께서 저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한 이삼일 동안 남편이 마음에 안 들어 시큰둥하게 지내던 중이었거든요.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이지요.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존경하고 순종하라고 머리로 주신 남편을 무시하고 마음에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저녁에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다시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그 날 예비사모를 맞이하면서 내가 예비신부일 때를 떠올렸습니다. 간접적으로 프러포즈를 받고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저희를 잘 아는 전도사님께서 저를 호출하셨습니다. ‘김 선생, 왜 대답을 안 하고 있어? 김 선생이 처음 예수님 믿을 때 주님께 인생을 다 드리기로 헌신하지 않았나? 그러면 된 거야. 더이상 무슨 각오가 필요한 건 아니라고. 주님께 인생을 드리기로 했으면 남편에게도 순종할 것이고 무엇보다 주님께 순종할거니까. 뭐 망설일 것 없지 그냥 대답을 하지 그래.’라고 약간은 나무라시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으로 ‘아멘’이라고 답했지요. 그전에 누군가가 저더러 사모가 되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기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지만 저는 아직도 그 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모상’이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헌신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그래야 되겠지만 말입니다. 매주 모이는 우리 교회 사모 모임에도 열대여섯 명 정도가 서로 다 다르거든요. 성격도 다 각각이고 재능이나 은사도 사람마다 다 다르며 아이들 키우는 방법도 다르며 생각도 다 제 각각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다 예쁘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열심히 배우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다양하고 풍성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지요. ‘지금부터 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들국화는 들국화처럼, 장미는 장미처럼,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처럼 그렇게 각자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다면, 아니 주님께서 아름답게 빚어 가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상일 것 같습니다. 다 다른 모습으로 은사를 따라 이 축복받은 사모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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