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교황방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8월 14-18일)합니다. 교황의 방문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의 방문이 새로운 복음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황방문을 계기로 천주교의 교리와 생활에 대해 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 편집위원장
※ 본 내용은 필자 황대우 목사가 「한국선교KMQ」 2013년 봄호에 기고한 글의 원고를 「한국선교KMQ」의 허락을 받아 편집 후 게재한 것입니다.
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교수
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
2차 바티칸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 Vaticanum Secundum)는 1962년 10월 11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개회되었고 1965년 12월 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폐회된 로마가톨릭교회의 최근 공의회를 일컫는 말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결정이 로마가톨릭교회 내외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 이후 400년간 변함없이 지켜온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교회적 전통에 대한 중요한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1960년대를 새 시대가 시작된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계의 변화는 1962-1965년 사이에 로마에서 열렸던 2차 바티칸 공회가 주도했다. 새롭게 변화된 가톨릭 교회는 라틴어 대신 지역 언어로 미사를 드리고,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을 인정하지 않는 ‘나뉘어진 형제들’이라고 불렸던 기독교인도 그리스도인으로 불릴 수 있다고 인정했다.”1)
이런 내용을 근거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역사를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과 이후로 양분하여 그 이전과 이후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평가할 만큼 이 공의회의 몇몇 결정들은 확실히 역사상 아주 급진적이고 획기적이다. 이와 같은 로마가톨릭교회 내의 격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겠지만 2차 세계 대전 후 다원화 및 세계화라는 20세기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긍정적 평가
2차 바티칸공의회를 복음주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크게 3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는 로마가톨릭교회가 16세기 종교개혁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면서 자신들에게도 분열의 책임이 있음을 시인했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공동체들 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 죄로 비난받을 수는 없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끌어안는다.”2)
여기서 “어떤 때”가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문구는 획기적인 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문서는 분열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하나는 “동방에서 생긴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뒤 4세기가 더 지난 다음,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들에서 일어난 것”이다.3) 즉 동방정교와 개신교를 지칭한 것이다.
분열에 관한한 로마가톨릭교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그 책임을 동방정교와 개신교에 떠넘겼지 자신들의 책임을 공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갈라져 나간 자들을 분열주의자로, 교회 밖에 있는 이단자들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분열의 책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지금까지 이단자로 취급했던 동방정교와 개신교회를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품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 “때로는 중대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지만, 일치 운동은 바로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세례 때에 믿음으로 의화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을 당연히 주님 안에서 형제로 인정한다.”4) 이처럼 로마가톨릭교회가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주님 안의 형제로 인정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해온 그들의 자세를 감안하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거룩한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자녀들의 활동이 갈라진 형제들의 활동과 결합되어, 하느님 섭리의 길에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고 또 성령의 미래 인도를 가로막지 않고 발전하여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그리스도의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의 일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화해시키려는 이 거룩한 목표는 인간의 힘과 재능을 초월한다는 것을 공의회가 잘 알고 있음을 밝힌다.”5)
로마가톨릭교회는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굳게 닫아두었던 교회의 문을 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동방정교뿐만 아니라, 개신교를 향해서도 활짝 열어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열어놓은 그 문으로 들어올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과연 저 로마가톨릭교회의 요청에 개신교가 어떤 답변과 행동을 취하는 것이 정당할까? 이 문제를 풀기 전에 개신교는 로마가톨릭교회를 그들처럼 “형제” 교회로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먼저 풀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긍정적인 평가는 평신도의 사도직에 관한 것이다. 이 공의회는 평신도를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정의하면서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 전체의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설명한다.6)
로마가톨릭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수직적 구조이다. 그래서 성직자들만이 제사장, 즉 사제로 지칭되어 왔다. 그리고 예언자직과 왕직의 최고 수행자는 물론 당연히 로마교황이다. 수사나 수녀도 성직자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이런 구조 속에서 항상 수동적인 자리만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계급적 구조 속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평신도에게도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을 적용한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종교개혁자 루터가 성경에 근거하여 천명한 만인제사장이라는 원리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만하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선언하기를 이런 평신도들과 관련하여 “목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구원 사명 전체를 자기들이 독점하도록 세우신 것이 아니며 오로지 모든 이가 나름대로 공동 활동에 한마음으로 협력하도록 신자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 직무와 은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빛나는 임무임을 안다.”7) 그동안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는 수직구조였으므로 상명하복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 둘 사이의 관계가 협력이나 협동의 관계로 설정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능동적인 협력자로서의 평신도 사도직이란 무엇인가? 평신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의 몸을 구성하는 살아 있는 지체로서 “교회의 발전과 그 끊임없는 성화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부름 받았으므로 “평신도 사도직은 바로 교회의 구원 사명에 대한 참여이며, 모든 이는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바로 주님께 그 사도직에 임명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성사로, 특히 성체성사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저 사랑이 전해지고 자라난다. 그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도직의 혼이다.”8) “따라서 평신도들도 각자의 능력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교회의 구원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서나 열려 있어야 한다.”9)
이처럼 로마교회가 평신도의 사도직을 인정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로마교회의 평신도 사도직이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그 평신도 사도직이 로마교회의 계급구조 속에서만 유효하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평신도직이 교계와 함께(cum hierarchia) 존재하고 활동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참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표지가 되지도 못한다.”10)
세 번째 긍정적인 평가는 전통적인 라틴어 미사를 자국어로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한 것과 관련된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전례 언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라틴어의 사용이, 특수법은 유지되지만, 라틴 예법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2) 그러나 미사 또는 성사 집전 또는 전례의 다른 부분에서 드물지 않게 모국어의 사용이 백성에게 크게 유익할 수 있으므로, 더 많은 여지가 거기에 부여될 수 있다.”11) 이것은 모든 기독교 예식과 관련하여 라틴어 사용을 원칙으로 하지만 특수한 상황과 지역 및 국가에 따라 얼마든지 그 지역 언어 혹은 그 나라 언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모국어를 사용하는 일은 사전에 반드시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인접 지역 주교들과 협의” 해야 하고, “사도좌의 승인 또는 추인을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례에서 사용할 라틴어 본문의 모국어 번역은 위 규정에 따라 관할 지역 교회 권위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12) 이런 복잡해 보이는 과정을 규정해 놓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공식적인 자국어 허용은 그동안 모든 공식적인 전례를 반드시 라틴어로만 집례하도록 고집했던 로마교회의 자세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교회가 이전에도 특수한 상황에 따라 예외적으로 모국어 사용을 간혹 허락한 일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공적으로 선언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로마교회가 평신도 사도직을 천명한 사실과 더불어 전례에서 라틴어 외에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것은 로마가톨릭교회 내의 종교개혁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중세시대는 물론이고 16세기 트렌트공의회를 통해 종교개혁 이후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로마교회는 사도직 계승을 성직자에게만 적용해왔고 또한 전례를 위해서는 라틴어만 사용하도록 천명해왔다. 로마교회가 이 두 가지를 포기하는 것은 구조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평신도 사도직 인정과 모국어 사용 선언은 더더욱 놀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고 시작된 만인제사장과 자국어 예배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로마교의 평신도 사도직과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직은 일단 죄 용서를 받는 구조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로마교는 성례의 하나로 고해성사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용서의 과정에서 성직자의 중재 역할이 살아 있는 반면에 개신교는 하나님께 직접 용서를 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로마교의 평신도 사도직은 그 자체로 영구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이기 보다는 성직자가 없는 곳에서 발휘되는 한시적인 것이요, 또한 성직자의 사도직에 종속적이다. 특히 로마교의 평신도 사도직은 베드로의 교황좌 사도직에 절대 종속적인 구조를 결코 이탈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전례 언어로서의 모국어 사용과 개신교의 자국어 예배도 성질상 동일하지는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그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설교 역시 자국어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국어 성경번역과 자국어 설교, 즉 자국어 예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시행했다. 반면에 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국어 사용의 유익을 고려하여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조심스럽고 약간을 까다로운듯한 과정을 통해 허용하면서도 그 때까지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오던 사어(死語)인 라틴어 사용을 포기하지 않고 라틴어가 원칙적으로는 유일한 전례 언어라는 점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하지만 현재 로마가톨릭교회들이 자신이 속한 국가의 언어, 즉 모국어로 미사와 예전을 집전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자국어 예배와 별반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과 영향의 중요한 요소들, 즉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만인제사장 교리, 그리고 복음 선포와 전도의 효과를 고려하여 번역된 자국어 성경에 근거한 자국어 설교와 예배 집례, 이 두 요소가 옳았다는 점을 2차 바티칸공의회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이 지난 지 400년 후에야 비로소 종교개혁의 정신과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한 것이다.
부정적 평가
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로마가톨릭교회 중심의 교회연합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방정교나 개신교에 비해 로마교회만이 어머니 교회이며 참 교회라고 보는 기존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차 바티칸공의회가 이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배타적인 자세를 버리고 개신교를 형제로 부르면서 교회연합을 위해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교회연합이란 외형적으로는 수평적이지만 교리적으로는 수직적이다. 왜냐하면 서로를 동등한 것처럼 형제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어머니교회인 로마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1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완전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거나 베드로의 후계자 아래에서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저 사람들과도 교회는 자신이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14)
"그러나 우리에게서 갈라진 형제들은 개인이든 그들의 공동체이든 교회이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루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함께 살아가도록 그들에게 베푸시고자 하신 저 일치,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천명한 저 일치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수단인, 그리스도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수단이 완전히 충만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15)
"온전히 또 순수하게 가톨릭적이 아닌 일치 활동은 있을 수 없다. 곧 우리가 사도들과 교부들에게서 이어받은 진리에 충실하고, 가톨릭 교회가 언제나 고백하는 신앙에 합치하며, 주님께서 당신 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그 충만함을 지향하는 활동이어야 한다."16)
이런 주장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교회가 여전히 자신의 우위성, 교황만의 사도직 계승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망설임 없이 그들은 지상의 로마가톨릭교회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진리와 은총의 온갖 수단을 다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17) 로마교회의 이런 교리적 입장을 고려하여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입장과 자세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떨어져 나간 모든 형제 교회들이 다시 어머니 교회인 로마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권유이자, 지금까지 들어올 수 없도록 닫아놓은 문을 활짝 열어 놓았으니 마음껏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에 불과하다.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이러한 로마교회의 자세는 결코 수평적이지도, 겸손하지도, 순수하게 호의적이지도 않다.
두 번째 부정적인 평가는 로마교회의 변함없는 성모 마리아론과 관련된 것이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18) 마리아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성자의 모친”으로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개신교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로마교가 너무 지나치게 마리아를 공경하도록 강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 때문에 순결한 신앙의 선진들 가운데 한 분이신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로마천주교가 동정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라는 이유로 “인류의 어머니”와 “신자들의 어머니”라 부르면서 “거룩한 교회 안에서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 다음으로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분”19)으로 숭배하는 것 역시 개신교 입장에서는 사실상 우상숭배라 볼 수 있는 불행이다.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마리아를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로 주장하면서 죽음 이후에는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이르러 “천지의 모후”(universorum Regina)가 되었다는 교리이다.20) 천주교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부터 구원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협력자가 되었는데, 이런 협력 사역이 마리아의 죽음을 통해 중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리아는 죽음 이후 그녀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하늘 영광을 입어 우주적인 여왕이 됨으로써 그 구원의 협력 사역을 계속해 나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라는 칭호로 불리신다.”21)
이런 주장들을 통해 2차 바티칸공의회 역시 이전처럼 여전히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숭배하는 일을 정당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가 아무리 마리아 공경을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해도 이와 같은 마리아론은 결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이므로 개신교도들은 이러한 교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나아가 때로는 동정녀 마리아를 교회와 동일시하고, 때로는 교회보다 더 큰 완전자로 간주하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구태는 결코 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고 강조하는 그들의 주장과 함께 가지 어려운 부분이다.
"실제로 교회 자체도 당연히 어머니라 또 동정녀라 불리는 그 교회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앞장서 가시며 탁월하고도 독특하게 어머니로서 또 동정녀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다."22)
"교회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이미 완덕에 이르러 어떠한 티나 주름도 없이 서 있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자라나도록 노력하고 있다."23)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느 모로든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어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이 지상에서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빛나고 계신다."24)
천주교에서 마리아는 완전한 교회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그 교회를 이끄는 원동력이요 지상교회가 본받아야할 전형이다. 성경 어디에 이런 사상을 발견할 수 있는가? 성경은 교회와 관련된 이 모든 사상을 오직 그리스도께 돌리지만 천주교는 그것을 마리아에게 돌린다. 이런 마리아론은 교황직의 사도적 계승과 더불어 천주교의 두 기둥과 같은 교리이므로 성경적 가르침으로 돌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세 번째 부정적인 평가는 종교다원주의와 관련된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발언들을 통해 천주교의 종교다원주의적인 자세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마침내 생명을 얻도록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25)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만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26)
"교회는 또한 무슬림도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유일신을 흠숭하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감추어진 뜻에 충심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에게서 이슬람 신앙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여 때로는 그분의 도움을 정성되이 간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어 공정하게 갚아 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27)
개신교도들, 특히 복음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일반은총을 종교다원주의로 확대하는 것은 반대한다. 온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 안에서 한 형제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원에 관한 한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구원을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2차 바티칸공의회는 천주교의 신학적 대부 아퀴나스의 사상을 넘어서 익명의 그리스도를 주장한 칼 라너(Karl Rahner)의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했다. 천주교가 이러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교회연합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이념적, 종교적 평화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확실히 비복음적일 뿐만 아니라, 반복음적이다.
결론
복음주의 입장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2차 바티칸공의회를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각각 세 가지를 설명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이단으로 취급해왔던 관행을 수정하여 형제로 수용했다는 측면이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나 이러한 수용적 자세가 단순히 다양한 기독교 형태의 포용을 넘어서 타종교까지도 포용하려는 종교다원주의적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전면적 수용은 획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교리는 이미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교 신학자들 사이의 종교회의(1539-1541년)를 통해 합의점에 도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새로울 것은 없다. 16세기에도 교회론과 성찬론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 결렬되었던 것처럼 2차 바티칸공의회 역시 이 두 교리에서 거의 어떤 수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 즉 복음주의와 로마가톨릭 사이의 교리적 거리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전도와 선교의 영역에서 불신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일 동일하게 베풀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반은총이 구원의 예비적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종교다원주의를 허용하게 된다는 점 또한 동시에 주의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2차 바티칸공의회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아직 독성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설익은 열매와 같다.
참고도서목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정진석 외 다수 번역 및 감수.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이안 머리. 『분열된 복음주의』. 김석원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마크 A. 놀 & 캐롤린 나이스트롬. 『종교개혁은 끝났는가?: 현대 로마 가톨릭 신앙에 대한 복음주의의 평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2.
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김선일 역. 서울: IVP, 2002.
각주
1) 이안 머리, 『분열된 복음주의』, 118.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681-683.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701.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683.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719.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29.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27.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33.
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35.
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021-1023.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63.
1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63.
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75.
1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77.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685.
1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717-719.
1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689.
1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93.
1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295.
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303.
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307.
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309.
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311.
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317.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79-181.
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207.
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