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세월호, 그 이후'로 꾸며 보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생중계한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한국 현대사는 세월호 참사를 비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요? - 편집위원장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 담임목사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지대하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어 왔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것들과 비교할 바 없이 중대한 사건이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겠지만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나라 단위의 개조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자체가 우리 사회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 어떤 변화나 개조에 대한 계획도 말잔치에 그쳐버리고 몇몇 이익집단들의 이전투구로 변질될 것이다.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할 때 대한민국도 침몰했다고 울분을 토하는 이들이 많다. 지나친 억지해석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공공성(公共性)의 침몰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몸 구석구석에까지 파고들어 있던, 심지어 우리의 무의식마저 지배하고 있던 사사화(私事化)를 보게 된 것이다. 대충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업의 사사화, 공직의 사사화, 종교의 사사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교회조차도 어떤 정당이나 정책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교회의 생존 자체가 존재 이유가 되어 있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 사회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한 곳도 예외 없이 사적인 이익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였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고 천명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아름다운 조화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통해 민주국을 이루었다.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했을 따름이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政體)가 공화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해 왔다. 공화국이란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공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우선인 정체를 말한다. 우리는 사적인 이익이 중심이 아니라 공공의 유익을 우선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 공화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겠다고 하는 정신이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사람의 생명과 인권과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작은 희생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말이다. 독재정권이 부르짖었던 법치도 사실은 몇몇 이들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마음에 얼마나 많은 헛바람을 불어 넣어 주었는지 모른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도 실은 우리의 탐욕에 근거해서 나온 발상이다. 대기업과 대기업의 로비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민들조차도 자기가 저지른 무슨 문제든지 돈으로 떼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야만인가! 우리는 예외 없이 탐욕의 신, 즉 맘몬을 섬기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공공성 회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겠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 관료이기주의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공복(公僕)이라고 하는 이들조차 사적인 이익에 복무할 때 그 사회는 치유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상급식 문제가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이것을 이념 문제로 보려고 하는 것도 우리의 천박성을 보여줄 따름이다. 교육과 의료, 교통 등이 사기업의 이익의 터전이 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절실하다.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중대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는 모름지기 정치인들이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들과 이익단체들을 조정하고 타협안을 마련하고 협력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가나 학자가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겠는가! 이익이 절대선이라고, 이론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말이다.
정부는 사기업들의 이익 도모를 억눌러서는 안되고 그들의 기업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노동자들이나 소외당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충돌하는 것이기에 양립이 불가능한 것일까? 양극화가 심해질 때에 나중에 치루어야 하는 비용은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는가? 유럽연합(EU)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가 의도적으로 EU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다. EU가 확대될 때마다 조금씩 가난해지는 것이다. 조금씩 가난해지므로 수치로는 측정할 수 없는 안정성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각자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만인이 만인을 상대하여 투쟁하는 사회는 동물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사적인 이익이 절대선이 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는 철조망과 담벼락이 높아만 갈 것이다. 남북의 분단도 통탄할 일인데 우리 내부의 분열도 높아만 가니 공공성 회복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엄격하게 구분하기 쉽지 않겠지만 공적인 기관들이 공공선을 도모하는 확고한 원칙을 세워야 할 것이다. 사적인 영역도 공공성을 도모하는 일에서 예외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의 사적인 활동은 말 그대로 사적인 활동으로만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원과 보호에 의해서 사적인 활동도 보장되고 이익도 창출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노동력이 없이 자본만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가? 땅값만 해도 그렇다. 소위 말하는 금싸라기 땅은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면 금쌀이 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 땅이 가치있는 것이다. 사적인 이익의 대부분은 공동체가 창출한 것이라고 하면 사회주의적인 발상일까?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공공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머리의 역할처럼 국민들이 자유와 평등,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원칙과 법칙을 세워 온 몸을 어거해야 할 것이다. 기업들은 심장의 역할처럼 자신들의 경제활동이 사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도록 하되, 자신들의 이익 추구가 사회의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말초신경처럼 사회의 낮은 곳들을 찾아가서 상호부조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기여 중에 하나는 집사직을 회복하여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적극적으로 돌아보았던 것이다. 교회가 구제기관은 아니지만 지역사회의 아픔을 끌어안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도 하나의 공적인 기관이라면 공공성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