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는 '신자의 결혼'입니다. 결혼식은 인륜지대사라고 하지만 너무나 허례허식이 많고 문제가 많습니다. 로마교회에서는 성례로까지 승격시켰지만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결혼식을 개인이나 가정의 일이 아니라 '교회적인 일'이라는 이해하에 예배형식의 결혼식을 가지면서 온 교회가 축하합니다. 결혼과 관련된 제반 요소들을 성경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기획에 청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편집위원장
이성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오늘날 교회는 이혼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단어를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이혼한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런 침묵 때문에 신자들은 이혼에 대해서 성경적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하시느니라”(말 2:16절)는 분명한 성경적 가르침은 제대로 선포되지 않고 이혼한 자들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대한 상담학적 고민만이 교회 안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비성경적 이유로 이혼한 자들을 징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하나님은 이혼한 자들을 미워하는 분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시는 분으로 전락되었다.
혼인에 대해서는 성경이 많은 교훈을 주지만 이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에 대해서 자기 소견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마도 이혼에 대해서 신자와 불신자의 생각은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 이다. 실제로 신자와 불신자의 이혼율이 거의 차이가 없다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이혼율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신자들의 삶 속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혼에 대해서 완전한 침묵을 지키지는 않는다. 적어도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할 이혼의 본질에 대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또한 이혼은 혼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런 가르침에 근거하여 이혼을 올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이전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혼인을 성례(sacrament)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에베소서 5장 32절에 나오는 혼인의 “비밀”이 라틴어로 “사크라멘툼”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혼인을 성례로 이해한 이상 로마카톨릭 교회에는 재혼이 불가능하다. 로마교회가 시행하는 “혼인무효(annulment)”는 혼인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즉, 혼인무효를 교회로부터 허락받으면 혼인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인무효를 받은 이들은 다시 혼인할 수 있다. 물론 그 혼인은 재혼이 아니라 처음 혼인이다.
지나치게 엄격한 로마교회의 혼인 이해와는 정 반대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혼인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일종의 계약(contract)로 이해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이혼은 혼인이라는 계약의 종식일 뿐이다. 누구라도 얼마든지 자신이 판단한 이유에 따라 혼인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 몇 번, 아니 수십 번 혼인하고 이혼하더라도 비난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계약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결혼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배우자가 성실한 결혼 생활을 이행하지 않으면 혼인관계를 종식시키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혼이 부부관계의 최종적 단절을 의미하는가이다. 쉽게 말해서 이혼하면 남인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여자는 남자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전 7: 10) 이혼은 부부관계의 단절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혼은 단지 법적으로 부부관계의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혼인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혼 후에도 신자는 독신으로 지내면서 기회가 되면 전 배우자와 연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혼이 재혼의 허가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혼한 사람들은 당연히 재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눅 16:18) 버린 여자, 즉 이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이 왜 간음인가? 여기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이혼한 여자도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전 남편이 아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음행의 연고로 이혼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음행은 이혼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일단 이혼만 허락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혼을 했으니까 재혼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혼인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유교사상에 따르면 부자(父子) 관계는 천륜이고 부부 관계는 인륜이라고 하는데,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부부관계야 말로 천륜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 관계는 나뉠 수 있어도 부부관계는 나뉠 수 없다는 말이다.
보통 불신 남편이 신앙의 이유 때문에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석적 작업이 필요하다. 고전 7장 15절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에 나오는 “갈리다”의 기본적인 뜻은 떠나다는 뜻이다. 즉 불신 남편이 무책임하게 아내를 버리고 떠난 경우에 신자의 아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어디로 간지도 모르는 남편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비약하여 그 아내가 이제 재혼을 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한 지점까지만 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혼은 두 사람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은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 두 사람은 나누신다. 혼인식을 할 때 신자들은 “죽음이 나눌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서로 지킬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다. 건성으로 이 서약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서약하였다면 이혼을 하더라도 자신의 서약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약 내용을 “나의 배우자가 신의를 지키는 동안”이라고 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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