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을 했다.
이발을 하고 염색약을 바르고 소파로 나오니 한 장애인이 앉아있다.
왼쪽 편마비 장애를 가졌다.
나는 오른쪽 편마비 장애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언제 어떻게 장애를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7년 전 교통사고를 만나 장애를 입게 되었단다. 오른쪽 머리를 다쳐 왼쪽 수족을 못 쓰게 되었단다. 지팡이를 짚고 걷게 된 것도 얼마 안 되었단다.
그러고는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 정도는 내가 볼 때에 장애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는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어려움의 정도는 장애 정도와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자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수긍한다는 표정이다.
그때 빗자루를 가지고 바닥을 쓸던 이발사 부인이 말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되네요. 그래도 이나마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그러자 그가 말한다.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더 나을 뻔했어요.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 같아요.”
무엇이 그렇게 힘드냐고 물었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한단다. 그 때문에 죽고 싶은 심정이 들 때 한두 번이 아니란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저는 이 땅에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만으로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어떤 이는 산다는 게 황홀하다고 했어요. 그도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사는 게 허무해 자살하려고 기찻길에 뛰어들었다가 수족을 잃었지요. 그런데 그는 장애를 입고 난 뒤에 오히려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붙들고 살고 있지요. 보기 나름입니다. 삶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은 해석이라고 흔히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에 이발사가 머리를 감자고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