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에 대하여
정영균 목사
(부산장애인전도협회)
한 장애인을 만나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하다 그가 뜬금없이 헌금 얘기를 합니다. 목사가 헌금 얘기를 너무 자주 한다고 합니다. 목사가 한두 번 얘기한 것 가지고 자주 얘기한다고 느끼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랍니다. 설교 때마다 한답니다. 밖에서 만날 때에도 그런 얘기를 종종 한답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떠났는데도 목사는 그 얘기를 멈추지 않는답니다. 그는 그렇게 그 목사에 대해 제게 고자질(?)했습니다.
장애인들을 만나다 보면 헌금에 대한 얘기를 가끔 듣습니다. 장애인이 얘기하기도 하고, 그들을 돕는 활동지원사가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 경우, 활동지원사는 대부분 불신자입니다. 그들이 돕는 장애인을 따라 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들은 얘기를 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얘기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것이 더 많습니다.
제가 그에게 했던 얘기는 여기에서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언젠가 노진준 목사의 설교집 <요한복음>에서 보았던 미국의 세이비어교회의 고든 코스비 목사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 교회에 아이 여섯을 둔 홀로 된 여자가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에 40달러를 가지고 힘들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이야기이니 40달러의 가치가 지금보다는 높았겠지만 일곱 식구가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한 달에 4달러씩 꼬박꼬박 헌금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코스비 목사는 그 여자를 찾아가 헌금을 꼭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의무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대신 그 돈을 생계유지를 위해 쓸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면서 코스비 목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헌금하려고 하는 그 여자의 믿음이 참 귀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찾아가 헌금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했던 코스비 목사의 용기도 대단합니다.
제가 만나는 장애인들은 거의 모두 생계급여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에 어떤 이는 생계급여를 받으면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먼저 뗍니다. 꼬박꼬박 그렇게 합니다. 생계급여는 사람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입니다. 그것에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떼면 얼마나 남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해나갑니다. 그런 그에게 저는 코스비 목사처럼 헌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감당할 수 있기에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모든 목사들이 코스비 목사처럼 할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코스비 목사의 생각이 꼭 옳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헌금이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소 장애인 친구들에게 종종 강조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돌아보면 모두 받은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고마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받은 것 기쁨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헌금을 교회에서 강제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헌금은 투자이고 축복의 비결이라고 가르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헌금이 중요하지만, 힘에 부치는데도 눈치 보여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형편에 맞게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으로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도 “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고 하지 않았습니까? 즐겁고 행복해야 할 신앙생활이 헌금 때문에 부담이 되어 그만 내려놓고 싶은 마음 든다면 헌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장애인 친구들이 교회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생활해나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밤에 젊은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부인이 새로운 일터로 옮겨 첫 월급을 탔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다고 합니다. 새벽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흔히 말하는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우리를 먼저 떠올렸답니다. 이사가는데 보태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가 내민 봉투를 앞에 두고 기도하다가 울컥했습니다. 제대로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싶습니다. 과분한 사랑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했는데, 우리는 받기만 합니다. 그렇게 자꾸 빚이 쌓여만 갑니다. 돌이켜 생각합니다. 그가 주는 것,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위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위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위임받은 것, 잘 감당하며 살겠습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들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빚진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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