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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필자 C. J. Haak 교수의 「선교지평」 2005년 11월호에 실린 글을 「선교지평」의 허락을 받아 편집 후 게재한 것입니다.

C. J. Haak
전 캄펀 신학교 선교학 교수

사도들은 어떻게 증거 했을까?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역사적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겠지만, 그들의 증거는 청자의 종교적 신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이 증거는 예수님에 관한 궁극적인 관점으로 그들과 맞서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에 청자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에 관한 증거는 칼날과 같은 메시지로 청자들의 마음으로 다가갔다.

유대적 상황에서: “주(Lord)와 그리스도(Christ)이신 예수님”(행2:36)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에 대한 사도들의 첫 증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베드로의 설교(행 2:14-36), 청중들의 반응(행 2:37), 그리고 베드로의 회개의 권면이다(행 2:38-40). 청중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구약성경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모든 적들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과 관련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열거함으로써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명확히 증거했다. 베드로의 설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는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라는 단어는 구약성경 헬라어역에서 ‘주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일컫는 ‘큐리오스’를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역이다.

베드로는 이 두 단어(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약성경 전체의 내용과 약속을 전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부하고 경멸하고 최고의 형벌로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예수가, 실상은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의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 율법교사, 산헤드린에 반기를 든 이단자도 아니며 신을 모독한 자도 아닌, 바로 구약에서 약속한 바로 그 거룩한 자였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고대하며 기도했던 바로 그분이셨던 것이다. “그가 바로 여기 계셨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았으며 그의 부활에 대한 증인입니다(행2:32).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를 믿지 않았고 여러분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에만 귀를 귀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으며 여러분이 경배하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리지 않으셨는데 말입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메세지였는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정면으로 대적하는 권위 있는 그 말씀은 예수님을 반역자로, 사도들을 거짓말쟁이로, 그리고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간 것으로 주장했던 자들의 송사를 뒤짚음으로써 예수님을 거절했던 바로 그 청중들이 지금 심판대 위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약속의 메시아를 죽였다는 가장 무거운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청중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대항한 죄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을까?

베드로는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 2:38),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 그 때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은 이가 약 삼천 명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했다.

베드로의 설교의 구조를 정리해보자. 유대인 청중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다른 경우에도 이와 동일한 구조가 반복된다(행 13:16-41, 17:11, 28:23).

․ 사도들에 대한 군중들의 잘못된 소송을 논박한다.
․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된 시대의 동이 텄음을 선언한다.
․ 구약 성서의 구절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 나사렛 예수’가 참 메시아임을 증거한다.
․ 약속의 메시아를 죽인 군중을 고소한다.
․ (청중들의 반응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기다리면서)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기위해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며 예수를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믿게 된 자들을 받아들여 세례 받게 한다. 

사도들의 증거로 회개한 사람이 있는 반면, 정반대의 반응도 있었다. 실제로 유대인 청중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 메시지는 유대인 최고 종교법정인 산헤드린에 의해서 금지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도록 위협했다(행 4:1-22).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산헤드린에 의해 정죄 받아야 했으며 회당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했다(요 16:2, 9:34-41). 후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다(행 7:57-5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이 박해받고 흩어졌다(행 8:1-4). 사도 야고보는 유대인의 기쁨을 위해 칼로 죽임을 당했다(행 12:3),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 유대인들에 의해 박해받기를 계속했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았으며,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는 유대인들의 귀에 힘 있고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했으나 그들의 반응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과 거절하는 자들이 있었다. 날카로운 사도들의 증거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가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회개하고 죄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자유케 하는 진리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관한 실제의 사실을 거부하며 사도들의 증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구속하는 진리였다. 그들의 죄가 그들에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로마 상황에서: “예수는 주(Lord)이시다(행16:21, 빌2:11)”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Kurios, the Lord)’로 부른다(빌 1:2, 2:11). 지금 ‘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번역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나라들과 민족들의 통치자이신 왕으로서의 ‘주’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진술하는 복음서의 증언을 상기시킨다. 마태복음 28:18에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다윗의 아들이며 다윗보다 더 크신 존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로 불린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까?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할 때의 상황을 언급한다. 그 곳에서 바울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과 적대적인 상황에 처했다(행 16:16). 바울은 그 여종이 하나님을 헬라의 최고 신(神) 제우스(주피터)와 비교하는 것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귀신에게 그 여종에게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그 여종의 점으로 많은 재물을 얻고 있던 여종의 주인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바울을 범죄자로 송사하여 감옥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바울을 저자의 관원에게로 끌고 가서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함으로 도시를 소란케 하는’ 유대인으로 송사했다(행 16:21).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이곳의 상황에서 ‘메시아 그리스도’보다 오히려 ‘주’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많은 군인들이 체류하는 로마 식민지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황제의 덕을 입어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모든 로마시민들, 특히 군인들은 황제를 지상의 최고 권력을 가진 ‘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어떠한 것도 로마 황제 앞에서는 굴복해야 했다. 그러므로 시민들이 또 다른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들은 부정적이고도 증오에 가득 찬 모양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빌립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로마시민들의 감정을 그렇게 헤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불렀을 때 권력자와 관원들은 그 설교자들을 체포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불안과 소동, 혁명을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메시지이었다.

실제로 로마의 황제는 신이자 ‘주’로 찬양받고 경배 받도록 되어있었다. 백성들이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허용할 수 있으나 황제를 경배하지 않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유대인들에게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들은 황제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박해 후에 유대인은 황제가 아닌 하나님 한분을 섬기도록 허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종교가 ‘허용된 종교’라 불리기도 했다. 당연히 많은 시민들은 유대인의 이러한 특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도시에서 유대인들을 멸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빌립보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침 받은 여종의 주인은 교묘하게도 이러한 긴장관계를 이용하여 바울과 실라를 송사했던 것이다.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보듯이, 그 후로 계속 기독교인을 협박하는 이러한 일들이 다른 도시들에서도 일어났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항상 청중들의 종교적 정치적 배경과 연관되어있다. ‘주’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극한 긴장감을 주어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결정하게 했다. ‘주 예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의 증거는 예수가 이 땅의 가장 높은 통치자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기록하기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말은 빌립보의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왕, 황제, 나라, 혹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숭배하고 있을 때, 예수에 대한 증거는 현실적 갈등을 일으킨다. 예수는 ‘주’시니 라는 말은 결코 쉬운 고백이 아니며, 듣기 좋은 복음송의 가사가 아니다.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것은 갈등, 대립, 불화, 순교를 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주’로 증거하는 것은 증인에 대해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청중에게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어 예수를 섬기든지 황제를 섬기든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여러 이름들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을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나 주라는 호칭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호칭들도 증인들이 다른 신이나 통치자를 대면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특수한 의미를 증거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나 주 이외의 몇몇 예를 신약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자.

1) 구원자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로마황제의 권위에 대적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황제는 방대한 영토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구원자’로 칭송받고 있었다. 로마의 새로운 시대가 문을 여는 환희의 시기였다. 이때 황제의 궁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복음’(good news)이라 선포되었다. 누가복음 2:11에서 예수를 증거하는 “오늘날 다윗 땅에 구주(구원자)가 나셨으니”라는 천사의 메시지는 당시 로마의 상황에 대적하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즉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평화의 메신저는 로마에 있는 시저 아우구스투스나 그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아기 예수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읽는 로마인 독자 데오빌로는 이 강력한 증거의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로마에 있는 황제의 아들에게서 평화의 희망을 가져야 할지, 아니면 말구유의 어린 아기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2) 다윗의 자손

마태복음은 예수님에 관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교 신자에게 특별히 증거하기 위해 쓰였다. 이 복음서에서 저자는 항상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셨는가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언어는 이치에 맞고 설득적이면서도 대립적인 성격을 띤다. 이 예수님은 진실로 다윗의 자손이며 세상을 통치하실 왕이시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도(마 28:18-20)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음을 선포하고 계신다. 이것은 유대인의 귀에는 숨막히게 하는 선포였다. “예수님은 권능의 왕이시오 위대한 왕이시오, 기다리던 다윗의 자손이라.”

3) 전능

요한계시록 11:15-17에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는 강력한 언어로 경배되고 있다.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계 11:5). 그리고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계 11:17)는 모든 땅, 모든 족속과 방언을 다스리신다. 이러한 말은 바로 로마 황제를 경배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였다. 황제는 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 야만족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대평화’라는 하나의 거대한 통치체제 안에서 다스리려 했다. ‘전능’이라는 말은 로마에서는 오직 황제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이었다. 그렇지만 계시록에서 요한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온 거대한 무리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계 5:9-10). 그러므로 진정으로 ‘전능’하신 통치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닌 밧모섬에 있는 요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이는 황제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인 셈이다. 황제가 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니, 전능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다르다. 밧모섬에서 요한을 돌보시어 계시록에서 세계 역사의 ‘올바른 세계관’을 쓰도록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분이시요, 황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사용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4)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관... 죄의 용서(행 10:42-43)

믿음 있는 로마인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는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죄 용서와 관련하여 ‘재판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증거하고 있다. 물론 재판관이라는 단어는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특히 로마의 백부장은 재판관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부장은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군인들을 엄격하게 그리고 정의롭게 훈련시켰다. 그러므로 군사들과 지휘관(장교, 백부장)은 그들의 상관에게 이 정의의 통치체제를 따를 것을 맹세했다. 그들은 모두 정의롭지 못함으로 송사를 당해 로마 황제 앞에 송환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죽음의 형벌이 내려질 것이며 로마의 신들조차도 그것을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집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대재판장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정의로 심판하실 것이며 로마의 재판관과는 달리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주실 것이다. 이것은 실로 고무적이며 용기를 주는 생각이다. 동시에 당시의 사고에 맞서는 것이며 그들을 자극시키는 도전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다.
     
5) 예수 안에서 부활(a), ‘생명’의 말씀(행 4:2, 5:20)

우선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은 예수를 다시 사신 그리스도, 메시아로 증거하고 있다. 이제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자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행 4:2). 이것은 큰 혼란을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특별할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의 증거는 예수의 본성에 국한되지 않고,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소망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과 그의 능력이 진실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증거는 예수님의 속성을 다루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미 이겨내셨으며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믿고 있던 바 핵심이 바로 예수를 통해서 현실화된 것이다. 유대인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는 그들을 대적하는 메시지였다. 그들은 결정을 해야 했다. 이 증거를 믿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입지와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를 거절했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의 증인들을 체포했으며 그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6) 예수 안에서 부활(b)

재차 예수님의 증인들은 예수의 부활과 믿는 자의 부활을 선포했다(고전 15:1-11). 이것은 예수님의 증인들의 핵심 되는 메시지였다. 여기 또 다른 양상이 있다. 사도행전 17:16 이하는 바울이 아덴에서 사람들과 변론하고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쟁론 중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들은 바울을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고소하려 했다(행 17:18). 그것은 바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지워진 가장 엄한 고소로, 그는 당시 정부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독주를 마셔야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아테네에 잘 알려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리스 종교의 진위를 논함으로써 그리스사회에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바울을 이방신을 전하는 자로 고소했을까? 그 이유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행 17:18). 바울이 하나님, 창조, 경배, 우상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 들었을 때 갑자기 바울의 말을 가로막았다(행 17:32, cf. 행 17:31). 왜일까? 그리스 종교와 철학이 믿는 바로는 죽음 후에 사람의 영혼은 몸으로부터 벗어난다. 그것은 마치 새가 새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영혼은 영원한 신적 삶에 동참하게 되고 육체는 먼지가 되어 의미가 사라진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몸의 부활과 심판이 있을 것임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뒤엎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그들의 지상에서의 삶에 엄청난 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생겼으며, 죽은 후 재판하실 하나님이 삶의 표준이 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덴의 철학자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이켜야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일부가 바울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일부는 바울을 비웃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바울을 따라가서 더 깊은 대화를 했으며, 그의 말을 믿은 자들이 있었다(행 17:34). 바울의 연설은 설득력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맞서고 도전적이었으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행 17:30).

사도들이 증거한 내용과 예수님이 다양한 이름으로 선포되는 경우를 보았다. 헬라의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신약성경을 본다면 또 다른 표현방식으로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메시지를 전할 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타당하면서도 타협하지 않고 대면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할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C. J. Haak / C. J. Haak은 1975년부터 1989년까지 파푸아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파푸아개혁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9년 이래로 현재까지 네덜란드 캄펀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다 최근에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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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명예집사와 명예권사, 허용...
[사설] 총회가 계파정치에 함몰되지...
[사설] 최근에 일어난 고려신학대학...
세계로교회 예배당 폐쇄 조치를 접하며 3
[사설] 총회(노회)가 모일 때 온라...
총회가 졸속으로 진행되지 않으려면
[사설] 누가 고신교회의 질서와 성...
공적 금식과 공적 기도를 선포하자
칼럼
왕처럼 살고 싶습니까? 왕처럼 나누...
푸틴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3부)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2부); 교회...
백신 의무 접종과 교회 (1부)
우리 악수할까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Peter Holt...
관심을 가지고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두 교단의 서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잘못을 통해서...
기고
직분자 임직식에서 성도의 역할
죽음을 어떻게 맞을까를 잠시 생각하며
제73회 총회가 남긴 몇 가지 과제
전임목사는 시찰위원으로 선정될 수...
고신교회와 고재수 교수; 우리가 왜...
왜 고재수는 네덜란드에서 고려신학...
제73회 총회를 스케치하다
신학생 보내기 운동에 대한 진지한 ...
명예 직분 허용이 가져다 줄 위험한...
[고신 70주년에 즈음하여 9] 고신교...
논문
송상석 목사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 ...
송상석 목사와 고신 교단 (나삼진 ...
송상석 목사의 목회와 설교 (신재철...
네덜란드 개혁교회 예식서에 있어서...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제7차 헌법개정초안(2022년 6월) 분...
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