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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 손규태 교수가 2015년 6월 15일 서울포럼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손규태교수
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


    1. 교회사적 회상

    “한국에서의 목사양성,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에서 신학하기- ”, 이 주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주제를 좀 더 부연해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섬기기 위한 신학연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리라. 동시에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날 한국과 한국국민이 처한 역사적 현실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나타난 가치내용 즉 평화롭고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까를 묻고 연구하고 실천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신학하기“란 말은 어원학적으로 신 혹은 신적인 것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θεο-λογὶα), 신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학하는 것은 서양의 고대 세계, 많은 신들을 가졌던 그리스나 로마 세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는 신들의 탄생이나 계보들 그리고 그들의 역할들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오늘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기독교 신학함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신학함의 의미를 정확히 발견하기 위해서 과거 기독교역사에서 신학함의 의미들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땅에서 신학하는 것은 역사적 회상이나 현실의 분석 없이 바르게 이해될 수 없고 또 기독교적 미래의 전망이나 희망 없이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회상과 반성 그리고 미래의 전망과 예견 가운데서만 우리는 “오늘”을 바르게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신학하기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세계교회사를 네 단계의 발전과정으로 나누고 각 단계에서 신학하기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자. 
    첫 단계는 동방교회(Orthodox)시대로서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전도되고 그의 그리스도해석에 바탕을 둔 교회, 즉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시작되고 성장한 초대교회 시대의 신학하기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의 신학은 주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건을 그리스 철학에 물든 소아시아 사람들에게 선교를 목표로 한 “변증신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인들의 박해와 철학(사상)적으로는 그리스인들의 공세에 직면하여 기독교는  반로마적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함께 참된 진리란 그리스의 사변적 형이상학적 철학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 대표적 예로서 유스티누스(Justinus)같은 변증신학자는 그리스 철학에서 예시된 진리가 그리스도의 교훈과 사건에서 참되게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도적 신학자들인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도 구약의 모세나 예언자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예증했던 사람들로서 그들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당시 서방지역의 신학자들 예를 들면 리용의 이레네우스, 로마의 히폴리투스, 카르타고의 터틀리아누스 등도 그리스철학, 동방의 신비주의 등과 결합된 이원론적 기독교 영지주의와 대결하면서 자기들 나름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도 변증론을 통한 선교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교 교리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 철학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이었다. 325년의 첫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적으로 승인된 교리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교리체계는 잘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원리인 형상과 질료의 도식이라는 존재론적 원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둘째 단계는 서방교회 시대로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시대 즉 중세기 교회시대를 들 수 있다. 5세기 이후 등장한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의 동방교회 지역들을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함으로써 초대교회의 5대 대교구들, 콘스탄티노플 대교구, 알렉산드리아 대교구, 예루살렘 대교구 그리고 에베소 대교구는 기독교 역사에서 사라지고 로마의 교구만 남는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의 중심축이 동방에서 서방 즉 로마 대교구로 옮겨지게 된다. 이 때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서방교회는 민족적으로 로마 민족과 게르만 민족의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는 이전의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사상과의 대결에서 등장한 변증신학이나 선교신학 그리고 공의회 제도들보다는 교회의 새로운 제도와 체제, 즉 교황제도를 정점으로 한 성직계급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발전한다. 이러한 제도적 발전에는 로마와 게르만의 법제도들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교회법이 발전되었다. 
    특히 13세기 이후에 등장한 스콜라주의 신학은 11세기 십자군 운동 이후에 동방에서 유입된 그리스의 철학 서적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기초를 둔 “자연과 은총의 종합”이라는 도식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뿐만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더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스콜라주의적 구원론을 도출함으로써 이전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절대 은총론을 밀쳐내고 펠라기우스의 신인협동설적 사상에 접근해 갔다. 이러한 자연과 은총의 보완도식은 가톨릭교회의 제반 제도들 특히 국가와 교회의 계층적 상호관계를 규정하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중세기의 로마의 정치적 보편주의(Political Universlism)와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보편주의(Religious Universalism)의 도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셋째 단계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통해서 로마의 정치적 보편주의와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보편주의의 종합모델을 해체시키고 등장한 북방교회 즉 개신교가 등장한 시기의 신학하기이다. 루터는 1517년의 95개의 개혁논제와 1520년 세 개의 종교개혁문서들(독일 개신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빌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교황제도 즉 교황의 교회 수장권, 교황의 성서해석 독점권, 교황의 공의회 독점권을 문제 삼는다. 즉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며, 교황만이 올바른 성서해석권자라는 주장은 잘못이고, 교회의 공의회는 니케야 공의회처럼 황제나 영주들 그리고 평신도들도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성서가 제시하는 두 개의 성사 즉 세례와 성만찬만이 참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면죄부와 같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은총론”이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종교개혁신학의 중심주제는 믿음을 통한 “의인론”이었다.
    넷째 단계는 16세기 유럽, 특히 이베리아 반도국가들(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와 19세기 영미와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 물결을 타고 선교된 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교회들, 남방교회들의 신학함의 의미를 살펴보자. 우선 이 두 세 개 대륙의 역사적 배경들을 살펴보면, 1) 이들 나라들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서 식민지화되었었고 지금도 직접 간접으로 신 식민지적 지배를 받고 있다. 2) 이들은 산업화에서 후진국이며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3) 이들 후진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계급차별과 성차별이 지배하고 있다. 4) 이들 나라들은 종교적으로 다양한 고등종교들을 가지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대륙에서는 식민지적 경험과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신학하기, 해방신학, 민중신학, 인종차별과 그리고 성차별에 맞선 흑인신학과 여성신학, 그리고 다양한 고등종교와의 만남에서 종교와의 대화나 종교신학 혹은 문화신학 등이 등장했다. 특히 1970년대 전 세계적 관심을 얻었던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경험 즉 우리의 시간과 땅에서 출현했던 기독교의 독특한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신학하기란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동시대의 사상과 역사적 현실과의 대결을 통한 선교 신학적 활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곧 설교학이고 필연적으로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칼 바르트의 말처럼 신학은 곧 설교학이요 따라서 선교학이라 할 수 있다. 한 시대의 사상적 조류들과 역사적 현실과 맥락들을 무시한 신학 아니 설교는 결국 울리는 꽹과리 같이 공허한 것이 된다.


    2. 오늘날 새 세계질서의 출현과 새로운 신학운동

    1990년대에 와서 소련연방의 해체와 동구라파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그 동안의 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미국을 정점으로 새로운 세계질서가 등장했다. 그 결과 그간의 이데올로기적 동서냉전(冷戰)은 오늘날 부유한 선진공업국들과 가난한 후진국가들 사이의 남북열전(熱戰)으로 대치된다. 그 결과 부한 국가는 점점 더 부해지고 가난한 국가는 점점 더 가난해져 이들 사이의 격차와 괴리가 더 벌어졌다. 부한 국가 안에서도 가난한 국가 안에서도 부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깊어간다. 이것을 가리켜 학자들은 20대 80의 세계 혹은 최근에는 1%대 99%의 세계로 악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형편은 더욱 악화되어 세계전체 인구의 0.1%가 세계 전체 부의 40%를 소유하게 되었다. 미국 같은 부한 나라에서도 인구의 11%가 끼니 걱정을 하고 약 3500만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건강보험 없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며 살아간다. 부유한 유럽국가들이었던 그리스나 이탈리아 그리고 포르투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한달에 약 400-500유로(약 50만원)를 받으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 유엔 통계에 의하면 세계인구중 약 2억 명이 하루에 1달러(1100원)이하로 살아간다. 
    한국의 실정은 어떤가? 경제인구 1200만 명 중 약 600만 명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다. 600만 명 이상이 빚을 지고 있고 그 중 350만 명이 신용불량자다. 이들의 가계부채는 1200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들은 1년에 약 70조원 이상을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자로 바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1%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이나 현대같은 대기업이 총상장기업의 이익금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이다. 한국의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현금고갈로 심각한 도산 위기에 처해있는데  10대 재벌들은 2015년 현재 136조에 달하는 현금재산을 쌓아 놓고 있다. 그 결과 초등학교 학생 10%가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1년에 수천 가구가 빈곤으로 해체되고 매년 5000명 이상이 부채와 빈곤 실직 등으로 자살한다. 
    500년 전 경건한 가톨릭신자 이탈리아인 콜럼버스와 그 후예들이 남미대륙을 점령함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세계질서”는 500년 뒤인 1990년 조지 부시(아버지)에 의해서 선포된 “자본주의적 새로운 세계질서”로 완결된다. “앞으로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실 것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외우며 스페인 바르셀로나 항구를 출발한 콜럼버스의 세계화의 꿈은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 그리스도가 아니라 달러가 지배하는 세계화가 된 것이다. 맘몬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세계질서만이 선하며 여기에서 이탈된 것은 모두 악한 것이 된다. 이 자본주의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악의 축이나 테러국가로 지목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의 국가적 테러에 직면해야 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과 이라크 침공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새로운 세계질서에 통합 아니 굴종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세계질서, 맘몬이 지배하는 세계화의 추세에 대결하여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로서 신학하기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바알의 물신숭배가 전 인류를 노예화하고 몰록신이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생명 특히 어린 생명들을 제물로 노리는 오늘날의 세계질서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이러한 맘몬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를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갈 것인가?
 

    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으로 복귀

    성서적 회상규율 즉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난한 민중들의 고통의 장소와 시간이 신학하기의 출발점이고 귀결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민중이 고통당하는 때와 장소에서 그들을 만나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고 한다.”(출 3:7-8). 율법 가운데 사회법은 제사법이나 성결법과는 달리 하나같이 민중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다. 이스라엘의 주전 8세기 사회적 예언자들 역시 율법의 사회법 전통을 계승하여 고통당하는 민중들을 돌보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고 있다. “나는 절기행사들이 싫다. 종교행사로 모이는 것도 기쁘지 않다. 번제와 곡식제사, 화목제도 귀찮다. 내 앞에서 벌리는 성가잔치도 집어치워라.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암 5:21-24).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한 온갖 종류의 종교행사들, 정치행사들, 스포츠 행사들 다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떤가? 그도 율법의 사회법 전통과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전통을 계승한다.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금과옥조로 강조했던 제사법 전통을 거의 무시하고 오히려 사회법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태 5:23-24). 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달리 성결법도 거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셨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관습을 지키고 있다."(막 7:4-8). 이렇게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 이른바 제도권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도 귀중하게 여기는 제사법과 성결법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 예수께서는 율법 가운데 사회법에 나타난 정신을 철저화(Radicalization)한다.(R. Bultmann) 즉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책임성에서 예수께서는 매우 엄격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에서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은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옳다고도 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 찬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했다”(빌 2:7-8) 예수께서는 이 세상 지배자인 헤롯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고 로마제국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의 시간과 장소는 고통당하는 사람들 즉 민중의 시간과 장소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장소인 교회의 시간과 장소도 사람들의 고통의 시간과 장소가 되어야 한다. 신학함의 시간과 장소도 고통 받는 사람들의 장소와 시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 신학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본회퍼는 예수님을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고 갈파한다.
    이 점에서 위대한 신들의 출생이나 이들의 계보들을 다루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기초한 신학이나 위대한 왕들이나 황제들의 수호자로서의 신들을 다루는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의 궁중신학들과 기독교 신학은 구별된다. 오늘날 신학은 기독교의 헬라화를 시도했던 초대교회의 신학이나, 중세기 봉건사회체제의 정치적 지배계급을 위한 로마 가톨릭 신학이나,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서구의 부르주아적 자본가 계급들의 경제적 사회적 토대를 위한 자유주의적 신학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맘몬의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신학하기는 수많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인간들의 고통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의 현현과 성육신한 고통의 때와 장소, 베들레헴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1) 정의의 실현으로서 신학하기
    그러면 오늘날 한국신학의 장(locus)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날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있던 이집트의 광야는 어디며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듣던 목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 곳은 노숙자들이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서울 지하철역이고 안산과 성남 그리고 시흥 등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며 항구도시 부산에서 몸을 팔고 살아가는 러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온 외국인 여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이들은 앞서 말한 세계화를 통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금융자본 즉 맘몬에 의해서 희생된 인간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은 어떤가? 지난달 맘몬을 그리스도보다 더 숭배하던 한 교회 장로가 그가 믿던 맘몬의 약효가 떨어지자 집권세력인 친박 집단의 정치가들의 이름들과 그들에게 뇌물로 준 명세서를 남기고 서울근교야산에서 자살했다. 그 사건이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다. 새누리당은 이회창 선거 때는 차떼기 당(170억원)이었고 이제 박근혜정부에 들어와서는 돈 먹는 하마당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 뿐인가? 날마다 뉴스는 권력을 가진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의 부패와 타락상을 쏟아낸다.
    경제계는 어떤가? 이미 언급했지만 정경유착을 통해서 정치가들은 타락한 돈을 받고 경제인들은 부정한 이권을 탐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다. 이명박정부는 토건업자들과 결탁하여 막대한 국비를 들여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또 가신 집단들을 통해 자원외교를 하면서 엄청난 돈을 낭비하여 국가와 국민에게 손해를 끼쳤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이명박정부는 대기업의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병분으로 공공연히 법인세를 3%나 감해주어 그의 집권 5년 동안 약 90조원의 세금을 재벌들에게서 깎아 주었고 지금도 깎아 주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부자들의 세금은 줄어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은 늘어났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한국개신교회는 장로 이명박을 대통령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그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그를 신처럼 찬양하고 고무함으로써 그가 정치가로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민중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을 외면하게 하고 그 가신과 집권세력의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우리는 부패의 온상이 되는 정경유착과 정교유착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현실을 바로 보고 하나님의 정의의 말씀을 외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신학하기의 중심과제로 떠올랐다.
 
    2) 평화실천으로서 신학하기
    한국은 분단현실에서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막강한 군사력으로 대결하고 있다. 남북한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고 신무기를 사들이고 았다. 북한은 자신들의 생존과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보유하려고까지 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은 30조원 이상의 전투기와 미사일을 미국의 무기상들로부터 사와야만 북한의 핵무장에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남한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얻은 것은 불안한 로마적 안보(securitas)며 성서가 말하는 참된 평화(eirene)는 아니다. 이제는 군사적 안보에서 성서적 평화로 나아갈 때이다. 왜냐하면 군사적 안보는 “세상이 주는” 로마의 안보이지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4:27) 따라서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이 땅에서 신학함의 다음 과제이다. 
    핵이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에서 평화는 삶의 계명이다(봐이체커). 핵은 자기분열을 통해서 인간을 분열시키고, 핵폭탄은 인간의 몸을 산산이 조각내 버린다. 로마식 안보는 인간을 갈라놓고 불신하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평화만이 인간을 신뢰하게 하고 통일시킨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동안 분단되어 서로 원수시하고 대결하고 있는 남북한을 통일시키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에서 신학함의 중심과제이다. 

    3) 교회갱신으로서 신학하기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다”라고 갈파한바 있다. 교회봉사의 학문으로서 신학은 교회의 선포를 감시하고 교회를 바른 길로 성장하게 한다. 교회에 대한 역동적 봉사로서의 신학, 즉 비판적 신학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고 성례전을 바로 집행하는가를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을 말한다(루터). 이 때 신학은 교회라는 구원의 방주의 선장과 같아서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바로 제시하고 이끌어간다. 오늘날 한국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이탈되어 맘몬숭배에 빠진 사회를 향해 짓지 않는 개와 같아서(이사야 56:10) 꿈이나 꾸고 배만 채우고 있는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식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기초한 “교회성장론”과 다단계 판매전략에 기초한 구역조직 및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채색된 일부 대형 한국교회들을 “성공주의”로 고무히고 찬양하는 현실에 대해서 한국의 신학자들은 “꿈꾸며 분별력을 잃고 잘 얻어먹고 지내는 벙어리 개“가 된 것은 아닌가? 교회를 집어삼킨 거대한 종교적 레비아단(권력집단) 집단들과 경제적 맘몬주의의 파도에 묻혀 신학자들은 침묵함으로써 배불리 얻어먹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안에서는 검은 망또를 휘날리는 파쇼적 성직주의가 지배하여 바른 말하는 예언자, 신학자들을 교단에서 추방하고 교권에 아첨하는 소인배 신학자들만을 양산하고 있다.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려는 위험에 직면하여 어용종교지도자들이 “성전이다. 성전이다. 성전이다”라고 성전이 나라와 국민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외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말에 속지 말라. 그들에게 의지하지 말라. 너희는 행실을 바르게 하고 이웃에게 정직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무죄한 사람들을 박해하지 않는 것”(렘 7:4-7)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예레미야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오늘날도 어용종교의 궁정신학이 아니라 순교하는 신학(유스틴, 본회퍼), 박해받는 신학(칼 바르트, 골비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신학이 아닐까.


    4. 결론

    앞으로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위한 보다 구체적 안을 필자의 경험을 통해서 몇 가지 간단히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신학교 정규과목에서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을 보다 철저히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 새로 신학교에 입학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서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성서개론이나 성서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우선 신구약성서의 기본내용을 보다 철저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성서 자제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는 성서개론이나 성서신학을 공부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성서를 여러 번 읽고 그 내용들을 익혀 둘 필요가 있다. 보다 철저한 성서학 공부를 위해서는 성서가 기록된 히브리어나 헬라어 공부도 철저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교회사를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 교회사는 교리사와 교회의 제도나 정치사 그리고 선교의 역사 등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2,000년에 걸친 이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목회자가 될 수 없다.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세속사와 그 시대를 지배한 철학사나 사상사를 같이 공부해 두는 것이 유익하리라. 
    둘째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영성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영성훈련을 위해서는 성서나 교회사 연구에 더해서 목회자로서 심지있는 지도력과 인품을 갖추기 위한 자기 단련을 필요로 한다. 우선 일정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와 묵상의 시간(朝禱와 晩禱 등)을 갖고 자신을 관조(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 인간의 본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의 요소들, 교만과 태만 그리고 기만의 악습들을 제거하는 순결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위대한 성인들이나 성직자들의 개인적 전기나 경험들을 기록한 서적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나아가서 위대한 작가들의 명작들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성서연구나 인간이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셋째 목회자로서 교회라는 현장에서 목회하는데 필요한 제반 실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의행위에서 나타나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연극공연이나 영화 등을 자주 감상하고 동시에 찬양을 위한 음악의 기본지식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목회자들을 인간들의 영혼문제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의 문제들과도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학에 대한 기본지식, 특히 심리학이나 상담학 등을 연구해야 하고 나아가서 일상생활에서 얻는 제반 고민이나 고통해결을 위한 기본적 지식들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신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는 여기서 나치의 어두운 역사 한가운데서 자기 몸을 바쳐서 하나님을 증언한(신학한) 목회자 본회퍼의 “행위”라는 시를 소개함으로써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단호히 행하고,
    가능성에서 흔들리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망치지 말라, 오직 행동하는데서만 자유가 존재한다.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인생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이 너를 따르며,
    자유는 그대의 영혼을 환호하며 맞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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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목사양성,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에서 신학하기”에 대한 논찬

하재성교수(고려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

한국교회의 개혁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지자적 외침으로 일관된 신학교육을 해 오신 손규태 교수님은 이 논문에서 시대와 역사의 맥락 이해를 통해 통합적인 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외치고 있습니다. 손 교수님은 신학의 장을 고통과 아픔의 자리로 정의함으로써, 여기에서 벗어난 현 한국교회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원래 정신을 회복하는 정의와 평화와 교회 갱신을 위한 신학하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특히 맘모니즘이 장악한 정치계와 경제계의 힘에 기대어, 한국 교회가 얼마나 분별력 없이 정의에서 떠나버렸는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분단 현실의 아픔과, 그것을 둘러싼 주위 강대국들에 의한 군사력 대결구조가, 진정한 평화가 아닌 ‘로마적 안보’의 일환이라는 지적은, 한국 교회가 자리한 한반도의 운명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평화로부터 멀어져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과 삶의 현장이 한국교회에서의 신학함의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실천신학 및 목회신학이 강조하는 중요한 신학 방법론입니다. 신학교육이 우리들이 처한 고민의 현장을 치열하게 신학적 논의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 현실에서 이론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흑인 여성학자 bell hooks를 연상시킵니다. 

특히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는 신학이 아닌 권력에의 아첨과 교권에의 일방적 의존성을 보이는 신학자들이야말로 순교와 박해의 신학을 잃어버린 거짓 예언자라는 지적은 우리의 현실을 안타깝게 돌아보게 합니다. 특히 오늘날 신학교가 이같은 소인배 신학자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말에서,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깊은 도전을 받습니다. 오직 번영과 성공을 지향할 뿐, 좀처럼 짖지 않는 개처럼 사회정의에 무관심한 교회는 말 그대로 갱신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결론에서, 성서신학과 역사신학, 교회사에 대한 철저한 공부, 기도와 묵상을 통한 영성훈련, 목회 실천을 위한 일반소양과 지식의 습득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 신학생들이 반드시 훈련받으며 터득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특히 목회상담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성도들의 삶의 제반에서 생기는 고민이나 고통 해결을 위해 심리학과 상담학의 기본지식들을 갖추어야 한다는 제안은 모든 목회자 후보생들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며 동의합니다. 

이와 더불어 손교수님의 논문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본론과 결론의 문제 제기와 대안이 각각 분리되어 있습니다. 본론에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매우 날카로운 비평이 들어있는 반면, 결론에서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이루어져 온 신학교육의 틀을 큰 이의 없이 그대로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본론에서 언급한 시대적 신학함을 전통적 신학교육에서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요? 그런 통합적 교육이 가르치는 자들의 몫이라면, 가르치는 자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소인배 신학자의 불명예를 벗을 수 있습니까? 

물론 전통적인 신학 교육을 신학자들이 각자가 처한 신학교에서 잘 감당해야 하겠지만, 예를 들자면, 신학 역사의 교육에서 바른 교회 개혁적 역사관을 견지하며 역사를 읽고 해석해야 한다거나, 초학제간 연구와 교육을 통해 자기 비평적인 신학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앞서 말씀하신 본문의 맥락에 더 맞는 결론이 아닐런지요?  Edward Farley의 지적처럼 목회자나 후보생들이 자기인식적(self-conscious), 자기비평적(self-critical), 자기 규율적(self-disciplined)인 상황해석의 관점을 유지하는 실천신학적 교육 또한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본론에서 제기하신 맘모니즘과 빈부격차,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의한 소득불균형의 심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도 다 다루기 어려운 크고 문제들을,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이 얼마만큼의 문제의식과 현실적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이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지요? 건전하고 바른 신학자 혹은 목회자 후보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막상 자신이 가르쳐야 할 분야의 연구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교회 사역의 현장에서 목회자들은 얼마나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어떤 실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다양한 문제 제기와 방향성은 잘 지적을 해 주셨는데,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조금 더 기술해주시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손교수님께서 가지신 민중신학적 이해는, 이미 지적하셨듯이, 1970년대의 한국 역사와 사회에 대한 독특한 실천적 해석학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중신학은 성경이나 예수 해석에 있어서 매우 제한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 복음의 전체적인 균형을 담아내지 못함으로 보수적인 한국교회들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당시 유대인들의 제사법 전통을 무시한 것은 사회법과 정의에 대한 강조에만 치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완성되는 완전한 제사, 완전한 대속의 구속사적 계획을 성취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사회정의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한 것이며, 상호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민중 신학은 보수적인 한국교회를 위한 지속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사회적 불안 요소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설득하여, 고난의 현장으로 삶과 섬김을 이끌어올 만한 또 다른 대안이 없음으로 한국교회는 그 중요한 사회정의의 모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Mark Knoll이 복음주의자들의 현실적 순진성을 비판하였듯이, 다른 한편으로 민중신학 역시 적어도 한국의 신학적 토양 이해에 대한 치열한 자기 비평이 없는 순진성 때문에 종말을 고한 면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서 칼 바르트를 언급하셨지만, 사회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바르트의 환원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초월적 메시지가 치밀한 이성적, 윤리적 고민을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개인의 윤리적 가치가 집단 사회적 가치로 곧바로 치환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나 신학생들의 개인적 윤리의식과 초월적 영성이 얼마만큼 사회 윤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그들이 증거하는 복음과 설교에서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해야할지 고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손교수님이 언급하신 신학자들의 침묵의 문제는 참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Michael Sandel 의 경고와 같이 빈부의 격차, 소득의 불균형은 인간의 공동체성과 상호 연대감을 파괴합니다. 만일 그것이 형제에게 가한 상처라면, Wolterstorff의 지적처럼 그것은 곧 하나님께 직접 가한 상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신학자이나 목회자들은 00 교회의 거액의 건축 문제나 XX교회의 목회자 성희롱 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큰 물의와 목회자의 죄에 대하여 면죄부를 발부해 주었습니다. 이전에는 크고 작은 어느 교회든 00교회의 훈련 모델을 따라서 하면,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잘 훈련될 수 있고, 평신도를 탁월한 동역자로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수천억의 소요된 거대한 교회당이 건축됨으로써, ‘이제 더 이상 00 교회는 우리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거대한 교회’라는 절망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한국교회가 경험한 이 큰 상실감이야말로 신학자들의 침묵이 만들어 낸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 논문에서 나타나는 통계와 숫자로 제시된 한국 경제의 현황과 콜럼버스의 이야기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 강력하다 못해 비관적입니다. 이와 같은 제반 현상에 대해 손 교수님은 특히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선택함으로써, 문제 제기에 있어서 강력한 일관성을 가진 반면, 독자들에게 매우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아합 왕의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시대의 7천명은 남아 있지 않은지, 그리고 어떤 시대적 변화를 통해 이 깊은 상실감과 절망을 새로운 희망으로 바꾸어줄 수 있을지, 현실과 신학자들에 대한 고발 그 이상의 회복의 자원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부패와 부정에 무뎌져버린 우리의 양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또한 신학이 어떻게 이 시대의 살아있는 생명체일 수 있는가를 고민하시는 노 신학자의 평생의 일관된 신학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감사하였습니다. 풍부한 은유로 날카롭게 현 한국 사회와 교회의 문제를 비평하고, 신학함과 현실 문제 사이의 시적 연결성을 의미 있게 탐색해 주셨는데, 앞으로도 이 시대의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한 예언자의 목소리가 되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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