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필자
성희찬 목사 마산제일교회 담임목사 고신총회 헌법해설위원(서기)
1. 서론:
왜 이
사람을 기억하는가?
흐룽은
1801년에 태어나
1876년에 죽은
네덜란드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서
기독교 정치가,
학교 교육
투쟁가, 반(反)혁명당의
기초를 놓은
원조, 법조인,
언론인, 역사가,
고전학자, 철학자,
신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은
대부분 이
인물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네덜란드 어느
도시에 가도
이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를 볼
수 있다.
올해 8월
21일은 흐룽
탄생 2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각계에서 탄생을
기념하는 글이
나오고 심포지움이
열렸다. 이에
맞추어 본인은
한국에 아직
덜 알려진
흐룽 판
프린스터러의 생애와
사상을 대략
소개하고 오늘
우리 기독인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겉에서
보면 흐룽은
결코 성공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치른
투쟁마다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흐룽의 전기전이
다시 꾸준히
쓰여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지금까지 네덜란드에
출간된 굵직한
전기전만 하더라도
넷이나 된다.[1]
최근 개혁
교회 정당
<크리스턴 유니:
Christen Unie> 의 학문
연구소 소장이면서
에라스무스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이자
역사가인 룰
콰이퍼 (Roel Kuiper) 가
‘당신은
모범으로 남을
것입니다’ (Tot een voorbeeld
zult gij blijven) 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전기를 폈다.[2]
네덜란드와
세계의 개혁
교회 기독인들이
왜 다시
흐룽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포스터 모더니즘
시대, 특별히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 시대에
흐룽 같이
복음의 고백자로서
믿음에 바탕한
원리와 이념을
위해 살고
투쟁하는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흐룽은
19세기 계몽사조와
혁명이 휘몰아치는
시대에 살아있는
(신앙)고백으로써
교회를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흐룽이 오늘도
기억되는 것은
그가 기독교인
정치가, 혹은
명성을 날린
역사가라서가 아니라
복음의 공적
고백자(public belijder) 로서
당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흐룽은
기독교 신앙의
공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열정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당대에 유럽을
풍미한 혁명의
불신앙적 사상에
대해 복음을
높이 세운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기독교
역사관은 그가
주도하는 교회와
국가와 학교를
위한 투쟁의
출발점이었다. 흐룽의
신앙의 불은
신앙(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확신에서 나왔다.
흐룽
같은 인물이
특별히 오늘
화란에서 다시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은 현
화란의 정치
현실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다. 현
화란 정부를
구성하는 연립
내각은 보라색
내각으로 불리는데
(제2기)
이념과 원리를
떠난 정책
입안 및
시행으로 기독교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일으켜 왔다.
예를 들어
안락사, 동성간
결혼 같은
법안 통과가
보라색 연립
내각의 대표적
사례다. 흐룽이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 상황에서
흐룽같이 복음을
고백하며 복음으로
이 시대
정신과 투쟁하는
인물이 더욱
요청되고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2. 생애
1) 유년
시절
흐룽은
2) 레이든
대학교 시절
레이든
대학교 학생으로
있을 동안
흐룽이 받은
정신적 영향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3]
첫째,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영향이다. 플라톤을
읽으면서 흐룽은
시간과 장소와
초월하여 존재하는
규범과 이데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지상의
모든 실재는
이데아의 투영에
한갖 불과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흐룽은 후에
늘 사회
사조와 역사
현상 배후에
있는 이념과
원리를 통찰하려고
했다.
둘째,
역사적인 법학파의
영향이다. 당시
독일에서 발생하여
레이든까지 미친
학파로서 프랑스
혁명의 법
구조나 교리적
위치에 대한
건전한 반향으로서
나타났다. 여기서
흐룽은 법과
국가 형태,
사회 구조가
그 민족의
성격의 소산으로서
역사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어떤 민족도
스스로 새로운
모델의 국가
방향과 사회
형태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흐룽은
플라톤과 역사적
학파를 하나로
묶어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공헌을 하였다.
세
번째 영향은
당시 네덜란드
대각성 운동(het
Nedelandse Réveil) 의 선구자라
불리는 빌더데이크(Bilderdijk)
라는 인물을
통해서였다. 당시
빌더데이크는 레이든
대학교 교수직을
사양하고 집에서
사설로 돈을
받으며 약
40여명의 레이든
학생들에게 네덜란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후 흐룽도
그 강좌에
참여하게 되었다.
빌더데이크는 강의를
통해 특히
혁명과 인간
자율, 그리고
당시 신학과
철학, 예술과
문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시작한
혁명을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은
것으로 보았다.
빌더데이크의 유일한
적은 혁명
정신이었다.[4]
흐룽이 비록
빌더데이크의 사상을
시대 반향적으로
여기며 그의
지나친 교조적
태도에 거리를
두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저술이나 강연에
특히 종교적
영역에 끼친
빌더데이크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5]
3) 왕의
레퍼런다리스로 임명(1827년).
29-33년까지 왕의
비서로 활동
흐룽의
장래는 밝았다.
세 번이나
교수가 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흐룽은 변호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1827년
아버지의 강권으로
왕 윌리엄
1세의 레퍼런다리스가
된다. 그가
하는 일은
신문에 난
기사를 왕에게
상기시키고 주요
기사는 왕
앞에서 낭독하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일은
왕의 지시로
주 (州)
총독 회의에
참여하여 오고
간 중요한
대화를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흐룽은
왕의 신임을
얻어 레퍼런다리스에서
개인 비서로
격상되는데 특별히
이 기간
동안 흐룽은
왕실 문서
보관소를 출입하는
계기가 되어
나중에 왕실
역사에 중요한
서신들을 정리하고
당시 유럽의
국제 언어였던
불어로 각주를
달아 출간하는
일을 하게
된다.[6]
이것은 지금도
네덜란드 역사를
아는데 중요한
주요 자료에
속한다. 또
나중에 <네덜란드
역사: het Handboek der
Geschiedenis van het Vaderland> 를
집필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1841년 초판
출간, 1846년
완성). 흐룽은
이 책에서
네덜란드 역사를
-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에서 드러나듯이
- 복음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관점에서 보았다.
흐룽은 진실로
역사가였다.[7]
한편
1828년 3월
28일에 흐룽은
자기 누이의
친구이자 흐로닝언
시장의 딸인
엘리사벳 판
더 호우프
(Elisabeth van der Hoop) 과 결혼하게
된다. 1827년
여름에 자기
집에 3주
유숙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흐룽의
생애에 중요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왕의
내각에서 재직하면서
1830년 전후에
일어난 정치
소용돌이를 가까이서
목도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
남쪽의 벨기에가
프랑스 혁명
영향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1815년에
윌리엄 1세가
억지로 홀란드와
벨기에를 통합시킨
지 15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과거
80년 전쟁
때에도 홀란드와
벨기에는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었다. 그
한 원인은
종교였다. 즉
홀란드는 개신교를,
벨기에는 천주교를
신봉한 것이었다.
그러나 흐룽은
그 봉기
배후에 있는
혁명 이론과
반기독교적 요소를
보았다.
4) 회심
이
격동 가운데
흐룽의 종교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특별히 왕을
따라 브뤼셀에
잠시 머물
동안 궁정
목사 멀
도비녀 (Merle d’ Aubigne) 의
설교를 들으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즉 멀
도비녀 목사를
통해 나폴레옹
시대의 반작용으로
당시 일어난
유럽의 대각성
운동 (het Eupropese Réveil)
특히 제네바의
대각성 운동과
접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더
클레크 (De Clerq) 와
거의 매일
서신을 교환하면서
이 운동에
실질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된다.[8]
이 운동은
복음에 대한
개인적 신앙과
모든 삶에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흐룽은
진정한 의미에서
회심을 체험하였고[9]
이후 복음의
중심을 가지고
살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약
3, 4천명의 사람들이
당시 19세기에
일어난 이
대각성 운동에
가담하였다.
5)
잡지
<네덜란드 사상:
Nederlandsche Gedachten> 출간
위
배경에서 흐룽이
발행한 잡지
<네덜란드 사상>
(Nederlandsche Gedachten) 을 읽어야
한다. 이
잡지는 문화
및 정치
평론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대각성 운동과
혁명의 분위기에서
출간되었다.[10]
그러나 1829년에
시작한 이
잡지는 1932년
중엽에 중단하게
된다. 갈수록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후에
흐룽은 이
때를 추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이상 듣는
이가 없다.
둔함과 무관심.
라오디게아주의 곧
미지근함의 귀환은
결국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지나치다’
고 말한다.
이 한마디
말로 사람들은
원리의 투쟁을
회피하고 무관심의
잠으로 빠져
들며 에너지를
잃어버렸다. 여기에
네덜란드 역사의
열쇠가 놓여
있다. 1813년
이후 지금까지.”[11]
그러나 이
잡지는 나중에
재출간하게 된다
(1869-1876).
6) 서재에서
헤이그에
돌아오자마자 흐룽은
왕의 비서
자리를 사임하게
된다. 왕이
무기를 수단으로
벨기에와 평화를
이루려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또
왕의 내각이라는
테두리에 매이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12]
흐룽은 이제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역사를
연구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나
필요한 때에
교회와 정치의
일선에 나서
제 몫을
하기도 하였다.
그 중
하나는 당시
국가교회에서 분리한
신자들을 국가가
처벌하려고 할
때 그들을
옹호하는 글을
쓴 일이었다.
그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당시 교회와
대부분의 목사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도덕
스승으로 보고
죄와 은혜에
대해 더
이상 설교하지
않게 되었다.
교리문답도 신자의
의무가 아니었다.
이런 찰나에
왕은 독일을
본받아 1816년에
자기가 직접
교회를 치리할
법을 (het Algemene
Reglement van 1816) 포고하게
되는데 별
저항없이 채택된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회가 교회의
최고 치리회가
되며, 목사는
임직시 더
이상 신조에
서명할 필요가
없으며, 총회의
업무는 교회를
치리하는 것이지
교리적인 차이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법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저항하면서
국가교회에서 자신을
분리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이를 금지하고
처벌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흐룽의 논지는
분리된 자들
(de Afgescheidenen) 은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나온
개혁교회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1816년에 세워진
국가교회에서 분리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가교회
신자나 분리된
신자들이나 양자가
모두 개혁교회의
회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흐룽
자신은 죽을
때까지 국가교회에
남아 있으면서도
분리된 자들을
형제로 알고
계속 교제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흐룽은 1845년
8월 26일에
암스텔담에서 국가교회
및 분리된
목사 신자들
27명이 함께
한 ‘기독교
친구들’ (Christelijke
Vrienden)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1854년까지
계속됨). 이
모임은 사교적인
것이라기 보다
당시 교회와
사회의 개탄스런
상황을 가슴으로
공감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며 집단
탄원하는 일을
하였다. 예를
들어 빈민
구제나 노예
제도의 폐지
등을 다루었다.
또
흐룽은 1842년에
헤이그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헤이그에서 열린
교회 총회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1816년 이전
교회 조직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13]
이것은 19세기에
지속된 교회
회복을 위한
사법 투쟁의
시작이 된다
(예컨대 나중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도한 돌레앙시
운동의 사법적
근거가 된다).
흐룽은 구체적으로
신조의 권위
회복과 교육과
교회 간의
새로운 관계와
교회 행정
구조의 변경을
촉구하였다. 이와
같이 흐룽은
참 교회
회복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었다.
흐룽은
이 기간
동안 정치적
일에도 간여하였다.
벨기에의 독립으로
새 헌법이
필요하게 되자
국회는 1840년에
헌법을 개정하게
되는데 흐룽은
남부 홀란드
주 (州)
대표로 이
일에 참여하였다.
흐룽은 여기에서
카톨릭 신앙과
친 벨기에
정서를 이유로
브라반트 주와
림부르그 주를
네덜란드에 통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이
두 주를
연방제식으로 두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어떻게 서로
협력하며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은 흐룽의
평생 관심사가
되었다. 이사상은
나중에 흐룽이
주도하는 공립학교의
구조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흐룽이
서재에서 연구하며
지내는 시절은
이제 막을
내리게 된다.
유럽에서는 당시
혁명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19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흐룽은
이를 내다보았다.
이런 배경에서
그 유명한
<불신앙과 혁명>
강연이 후에는
책으로 1847년에
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정확하게 1848년
3월에 네덜란드에도
혁명의 폭풍이
찾아들었다. 왕
윌리엄 2세는
토르베케 (Thorbecke) 가
이끄는 헌법위원회에
나라의 장래를
맡겼고 마침내
네덜란드는 국가
형태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바로
이때 흐룽이
즉 1849년에
선거를 통해
국회 의원으로서
정치 일선에
등장하게 된다.
7) 역사가에서
정치인이 되다
당시
국회는 지역에서
선출된 68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848년에 도입된
선거법으로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국민의 2%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같은 정당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1848년 개정
헌법으로 이제는
왕이 아니라
정부가 정책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흐룽이
국회에서 투쟁한
중요 법안
중 하나는
학교법이었다. 흐룽
자신은 평생
자녀 없이
살았지만 교육이
한 세대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녀
교육을 언약
신앙의 핵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각은
1848년에 도입된
헌법 가운데,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자유다”
는 194조항을
새 교육법에
맟추어 개정하려고
했다. 그
골자는 학교에서
종교 교리
교육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흐룽은
각 종교가
(기독교, 카톨릭,
유대교) 자기
종교에 기초한
공립 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국회에서
치열한 토론과
공방 끝에
결국 1857년에
37대 13으로
통과된 교육법은
사립학교 설립의
길을 열어
놓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정부의
재정 보조는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또 공립학교에
기독교 교리
교육이 허용되기는
하였지만 흐룽이
바라는대로 각
종교가 각기
공립학교를 구별하여
세울 수
있다는 주장은
묵살되었다. 이
날은 흐룽에게
가장 힘든
날이었다. 그
결과 흐룽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집의 서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물론
흐룽은 이후
이 학교
교육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이
투쟁이 열매를
맺어 1917년에
화란의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처럼 동등하게
정부로부터 재정보조를
받도록 헌법이
개정된다.
8) 다시
서재로 돌아오다
흐룽은
역사가로서 정치인이
되어 투쟁한
인물이었다. 즉
역사가로서 흐룽은
네덜란드 국가의
핵심을 기독교
개혁주의 신앙고백으로
보고 이것을
학교라는 수단을
통해 자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치가로서
그 열망이
좌절되자 흐룽은
서재로 다시
돌아와 1835년에
시작한 고문서
정리 및
각주 (Archieves) 출간을
재개하게 된다.
당시 흐룽의
심경을 아브라함
카이퍼는 1876년
흐룽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마음이 깊이
상하였다”고
표현하였다. 이
점은 흐룽이
1860년에 이
사건을 추억하며
외국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네덜란드의 반혁명당에
대해 책을
쓴 것에서도
나타난다. 또
자기가 죽기
얼마전 <1857년의
교육법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하는 독특한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860년에
개정법에 의해
사립학교 설립이
가능하자--비록
정부 재정
보조는 없다
할지라도--기독교
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래서
1867년에는 전국에
62 개의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흐룽은 비록
마음은 상하였다
할지라도 부서지지는
않았다.[14]
9) 국회로
다시 돌아오다
60년대는
나이가 들어가는
흐룽에게 힘든
기간이었다. 1861년에
자유주의자 토르베크가
두번째로 권력에
오르자 자유주의자들이
힘을 얻은
것을 보고
국회로 다시
돌아온 흐룽은
특별히 1857년에
개정된 법에
따라 가능해진
사립학교 설립에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국가적인 투쟁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흐룽은
헌법이 이러한
교육 기회의
자유를 이미
보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흐룽은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어
공립학교가 사립학교보다
위에 있다는
점을 가지고
정부를 집요하게
공격하게 된다.
대신 교육법
23조 곧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및 사회
덕목” 을
교육할 수
있다는 조항에서
“기독교”
라는 단어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국가와 교회를
엄격하게 분리하므로써
교회의 독립성의
회복을 원하였다.
흐룽의 전략이
전과 달리
바뀌게 된
것이다.
10)
마지막
흐룽은
자기가 직접
투쟁에 나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반혁명적
노선을 취하는
사람을 선거에서
지원하는 전략을
짜기도 하였다.
퀘체니우스 (Keuchenius) 는
의로운 식민지
정책을 위해,
카이퍼 (Kuyper) 는
교회 회복의
투쟁을 위해,
판 오털로
(Van Otterloo) 는
1857년 교육법
반대 투쟁을
위한 정치
프로그램를 위해
각각 지원하며
조언을 주기도
하였다. 특별히
아브라함 카이퍼가
정치에 입문하는데
재정 및
도덕적으로 지원해주었다.
1876년 3월
8일에 카이퍼에
마지막 편지를
쓴 이후
흐룽은 병석에
누워 5월
19일 아침
6시 30분에
소천하였다.
흐룽의
사상 전체를
서술하는 것은
넓은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의 저서
<불신앙과 혁명>
를 소개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불신앙과
혁명> 은
흐룽의 사상을
이해하는 입문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이
책의 사상이
다른 모든
저서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책에서 흐룽의
핵심 메시지를
여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16]
이 책은
한 단계
한 단계
혁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혁명이
불신앙에서 나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본래
이 책은
흐룽이 1845년
11월 8일에서
1846년 4월
4일까지 토요일
저녁마다 자기
집에 초청한
20여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15회에
걸쳐 한
강연을 출간한
것이다. 이
강연은 흐룽
자신이 말한대로
“불신앙과
혁명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적 고찰을
통해 증명하는
것” 이었다.
이를 위해
흐룽은 10년
이상 이
주제를 연구하고
자료를 모았다.
1) 본서의
배경
앞서
살핀대로 흐룽은
왕의 레퍼런다리스로서
후에는 비서로서
재직하면서 혁명
곧 벨기에의
봉기를 직접
목도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
어떻게 벨기에의
봉기를 통해
무르익어 발생하는지를
본 것이다.
동시에 그
배후에 반기독교적인
성격이 은닉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흐룽은
이 혁명
사조가 네덜란드에도
밀려들어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1844년 네덜란드에도
정치적 쇄신의
징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토르베크가 다른
의원들과 함께
자유주의적 의미의
(특별히 직접
선거, 책임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의미에서)
헌법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당시 이
안이 비록
부결되기는 했지는
이를 둘러싼
토론은 그치지
않았고, 그래서
머지않아 국가
정체와 형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중요
사안에 대해
흐룽은 뒤로
물러서기를 원치
아니하고 반혁명적
주장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흐룽은
<불신앙과 혁명>
강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이후 약
50년 동안
나타난 불신앙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상세하게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본 강연의
목적이었다.
2) 내용
개관
주된
사상은 다음과
같다. 즉
복음이 국가와
사회에서 떠남으로써
세속적인 자유
이념을 통해
무정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정부
상태에서 독재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속주의는 전체주의로
간다는 것이다.
이
책의 의도는
분명하다. 제1,
2 강연은 주제를
소개한다. 즉
우리 혁명
시대의 근본
원리가 무엇인가?
세계사에서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제 3, 4, 5 강연은
흔히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는, 그러나
실제로는 틀린
원인들을 다룬다.
6, 7 강연은 혁명의
발생을 설명하는
두 원인,
즉 근대
국가법과 종교
개혁을 다룬다.
흐룽은 여기서
근대 국가법이
혁명의 정신을
초래하였지만, 종교
개혁은 혁명
정신을 바르게
저지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8-10 강연은
혁명의 논리,
이론을 서술하며,
11-14 강연은 혁명의
실제, 결과를
말한다. 마지막
15 강연은 현재와
미래에 네덜란드에서
복음의 고백자의
소명을 다룬다.
요약하자면
강연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2 강연은 서론,
3-7은 논박하는
부분이며, 7-10은
철학적 고찰을,
11-14는 역사적
고찰을 15장은
기독교인의 소명을
다룬다.[17]
다음에서 좀
더 상세하게
내용을 다루기로
한다.
강연1:
이 시대를
격동케 하는
작금의 홍역에
심층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사회
생활의 해체는
무한 경쟁과
불가항력적인 대자본의
영향, 사교권과
기업에 나타나는
인간 관계의
악화, 사주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무기력, 빈민의
증가 등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
정책 실행에
불안이 지배하였다.
즉 사람들은
정책보다 순간적인
요구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유의 불안은
종교와 도덕과
법에도 보인다.
사람들은 오직
주관적인 견해만을
피력하는 것이다.
흐룽은 교회
내부에 증가하는
의심과 회의,
신조(신앙고백)의
와해도 지적하였다.
이 모든
현상은 동일한
한 원인을
가리킨다. 즉
그 배후에는
지난 세기
이후 유럽에
풍미하였고, 논리적인
이론으로 발전한
혁명 개념
예컨대 평등,
자유, 국민주권,
사회계약 등의
개념이 놓여
있다.
강연2:
그러나 반(反)혁명의
고립은 겉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이 혁명
이데올로기가 어느
시대나, 어느
문명에서도 존중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역사를
통해 인간은
지상의 권위가
인간의 발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며
이 세상의
법은 다수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최고 법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혁명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은 모든
시대의 지혜가
지지하는 것이며
오늘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그 지지자를
찾아볼 수
있다.
강연3:
반혁명의 국가관에
따르면 정부는
직분의
옷을 입는다.
정부의 권위는
소수가 오만을
부리거나 혹은
자기 관심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최종 책임을
진다. 이는
정부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법이
아니라 제한된
권력이라는 것을
말한다.
강연4:
혁명 이전의
국가법에 결점이
있었으나 그래도
필요한 수정을
거쳐 새
시대에도 유용한
것이었다. 즉
강한 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사회 조직과
난공불락의 법이
생겼다. 또
양측의 직분
개념으로 권위와
자유 사이에
건전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강연5:
혁명 이후의
지금처럼 혁명
이전에도 사회에
악습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고와 인내로
사회를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취하여 맹목적인
분노로 단번에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싹쓸이하려고 한다.
영국의 위대한
국회의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프랑스 혁명
첫 시간부터
이 혁명이
단지 이론에 기초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강연6:
국가와 사회
이론에 나타난
근본적인 변화는
본래 국가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이
개념은 중세
시대의 학문
연구의 재생(르네상스)처럼
오래된 것이다.
즉 고대
시대의 한
측면--공화정에
사람들이 열광하였던--만을
연구하므로써 모든
국가가 본래
공화정이며, 또
국가가 보편적인 복지라는
필요를 위해
생긴 단체라는
오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계약이론 때문에
국가의 임무를
제한하는 것과
관련하여 극단적인
견해가 생기게
되었다. 즉
무관심이든지 아니면
정부의 권위는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강연7:
한편 이러한
혁명의 발전이
16세기에 종교개혁을
통해 저지된다.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출발되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정부의
신적 권위뿐
아니라 정부의
한계도 가르친다고
보여주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권위
붕괴에 기여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지적한다. 종교개혁은
균형적인 국가
생활을 추구하였다.
복음의 순수한
소금은 혁명이라는
누룩에 대항하는
능력 있는
해독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랑이 식어지고
내부 논증이
지배하였다. 교의신학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증명을 위한
창고로 격하되어,
사회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생각하고 형성할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철학에 맞서
저항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
갇혀 그런
오류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혁명 정신이
유럽의 종교와
사고 방식의
방향을 뒤집게
된 것이다.
강연8:
혁명은 하나님의
계시를 신뢰하지
않는 것에서
본래 시작되었다.
인간 이성으로
시작으로 끝마치는
것이다. 17세기에
계몽주의 시대에
이 합리주의가
큰 도약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시험되었다.
하나님의 말씀,
전통, 도덕
등.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인
종교로 바뀌게
되고 무신론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성이 숭배되었다.
그러나 참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무신론이
관용될 수
없다. 권위를
믿는 참
신자는 인간
해방을 저지한다.
그래서 계시를
통해 나타난
규범에 순종하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을
규범으로 여기는
인간성과 맺는
연대를 깨는
것을 말한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반립(反立,
antithese)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거짓과 진리는
공존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흐룽은 탈기독교
운동이 계속되면
교회의 핍박과
박해는 시간
문제라고 역설한다.
강연9:
계몽주의의 특징은
실천--즉
자율, 무역에서처럼
사상에서 나타난
자기 입법--으로
선회하는 합리주의다.
사람과 사회를
자율적이 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악은
합리적이고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에 있지
않고 신이
세운 제도에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세속화된
계약 이론이[18]
부활하게 되었다.
모든 법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축출되고 국가와
사회는 사회
계약에 의존하게
된다. 이
계약 안에서
사람은 보호를
대가로 자기
개인을 집단적
단체인 국가에
묶고자 했다.
그래서 가정,
교육, 소유,
종교 등
모든 것이
이러한 다수결
정권의 권력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의
대중적인 국가
이론은 원리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루소의 절대
민주주의론과 비교해볼
때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자연 국가로
돌아가기 위해
국가 자체를
폐지하려고 한
프리메이슨의 비밀
결사단의 무정부주의도
이와 동일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1796년의 공산주의에도
해당된다.
강연10:
혁명 국가는
이제 모든
권력을 손에
가졌다. 그래서
자기 뜻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이같은 태도가
전 국민에게
확산된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신다.
혁명의 역사는
대담무쌍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질
뿐 아니라
그기에 두
가지 요인이
활약한다. 즉
적용되는 이론과 그
이론과 상충하는
현실이다.
본성은 이론보다
더 강하여,
삶에서 그러한
본성의 필요가
계속 제기된다.
예를 들면
사람은 종교의
욕구를 늘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이
만족을 주지
못하고 신령주의,
신비주의, 범신주의,
기독교적 공산주의적
구원론 등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그리고
정치에서도 혁명적
열광주의자들은 계속하여
벽에 부딪힌다.
안정과 질서가
필연적이나, 증오하는
질서를 폐지하는
것이나 상스러운
법과 질서를
폐지하는 것은
무정부적 상태를
일으킬 뿐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보존의
본능을 일깨워
제동장치를 당겨
이데올로기의 온건한
실현을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정책이
계속하여 재조정되거나
혹은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영구적인 혁명의 상태
곧 급속한
수행보다는 완만한
수행을 둘러싼
투쟁이 온건주의자와
급진주의자 사이에서
항상 동일한
혁명 프로그램으로
전개된다. 이
투쟁은 흐룽이
‘시대’
로 부른
다섯 단계를
거친다: (1) 우리가
본대로 사회
해체가 먼저
이루어진다. 이데올로기의
준비 단계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2) 실천으로
발전된다 (3) 그러나
그 반응으로
엄격한 질서가
세워진다 (4) 중용의
길을 따라
재실험이 나타나고
(5) 마침내 현상유지에
별 수
없이 안주하게
된다. 이같은
변화 가운데에서도
국민주권에 기초한
절대 국가는
유지된다.
강연11:
실천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예측된
결과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특별히
프랑스 혁명의
발생이다. 준비 단계에서
국민들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대부분의 그릇된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선한 의도를
가진 개혁
프로그램조차도 혁명의
노선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될
때까지 그
이데올로기는 프랑스에서도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강연12:
두번째 단계에서
혁명의 실천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때
(1789-1794) 왕은 혁명
이데올로기에 죽음으로써
스스로 값을
지불하게 된다.
이제 국가라는
새로운 배는
예기치 않은
온갖 상황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항로를 벗어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선거권을
갖게 되고
국민 대표가
다스리며 지위와
권리의 차이가
폐지되었다. 시민들은
동등하게 다루어지나
달리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시민정치가
팽창되면서 사람들은
혁명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
경찰국가를 바라게
되었다. 국가의
관심이 보편적인
관심을 만족시키는가?
매번 교조적인
사람들이 자기
교리에 대해
주저하거나 의심하는
사람들을 이기곤
하였다.
강연13:
두번째 양상은
1794년의 공포 정치로
막을 내렸다.
흐룽은 악명
높은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한
불란서 역사가가
한 비판을
인용한다: “고립
속에 힘이
높여 있다.”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는
원리의 견고성에
매혹되었다. 그의
권리가 매번
인정되어야만 했다.
결국 보편적인
복지를 위해
생명이 더
이상 안전하게
되지 못하게
되었다. 혁명이
차례차례 자기
자손을 삼키게
되었다. 조직적인
무정부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쿠데타다. 그래서
철인이 나와
제 임의대로
자기 정권을
세우게 된다.
강연14:
나폴레옹 시대에
이러한 반응은
이후 보다
더 큰
자유를 갈망하게
하였다. 1815년에
재실험의
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보수주의적
실행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 헌법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가
1830년에 다시
혁명을 경험하게
된다. 근본주의의
새로운 위협은
계속해서 강력한
정권을 강요하는
것이다. 별
수 없는
안주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안정과 평화에
가치를 두었다.
필요하면 법을
희생시켜서라도. 흐룽은
이 단계에
우리가 지금
있다고 동시대인들에게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이
이데올로기와 끊지
아니하면 새로운
혁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강연15:
흐룽은 1846년
여름 강연에서
혁명이라는 악순환과
영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우리에게 계시된 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결론 내렸다.
영원한 혁명에
대해 유일한
결론적 해답이
있다. 복음의
빛으로 끊임없이
개혁을 하는
것이다.
4. 결론
이제
결론적으로 흐룽의
생애와 사상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을 다음
두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인의 사명은
시대 정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흐룽은
<불신앙과 혁명>
강연에서 사회
사조나 역사
현상 배후에
있는 원리와
이념을 파헤쳤다.
흐룽은 그것을
불신앙과 혁명으로
보았다. 흐룽이
말하는 혁명을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예로
제시하고 있기는
하나 흐룽은
불신앙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당시
사회와 정치에
나타난 혁명
개념, 예컨대
평등, 자유,
국민주권, 사회계약
등의 개념을
비판하였다. 흐룽은
이것을 역사를
인간 스스로
쟁취하고자 하는
인간관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같이 흐룽은
특정 시대의
‘시대
정신’을
추적하고 그
정체를 벗기려고
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기독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이
시대 문화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역할을 위한
것이다. 흐룽의
차세대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상
문화를 신앙과
불신앙의 대조라는
틀에서 보며
학문과 정치,
사회, 문화의
기독교를 주장했다.
이런 확신
위에서 카이퍼는
자유 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즉 카이퍼에게
문화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기독교적 문화
건설을 위한
전 단계로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에
헨드릭스 벌코프의
후계자로서 레이든
대학교 교의학
교수로 있다가
최근 자유대학교의
신조학 교수로
옮긴 판
더 베이크는
문화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을
부정적인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세상 문화의
본질을 거짓으로
본다.[19]
모든 이데올로기는
거짓이며, 이데올로기
비판도 거짓이며,
모든 일반화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과 학문
사이에 반립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카이퍼로
대변되는 신칼빈주의의
문화관과 정반대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카이퍼가 인간을
낙관적으로 봤다면
판 더
베이크는 비관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판
더 베이크에게
기독인의 사명은
문화에 적응하거나
기독교 문화
건설이 아니라
이 시대
문화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둘째
기독인의 사명은
복음의 고백자로
사는 삶이다
흐룽은
<불신앙과 혁명>
강연의 마지막
결론에서 기독인이
복음의 고백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호소하였다.
자신이 직접
역사가나 정치인
이전에 복음의
고백자로서 살았다.
흐룽은 당시
날로 확대되는
탈기독교 시대에
복음으로 국민들에게
도전한 정치인이었다.
이것은 오늘
포스터 모더니즘
시대를 사는
우리 기독인에게
큰 도전이
된다. 기독인의
사명은 이
시대 문화와
정치 혹은
전 생활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고백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흐룽은 혁명이
불신앙의 열매인
것처럼 바람직한
발전은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에
대한 투쟁은
복음에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혁명에 반대하여 복음을!
이것은 차후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세운
정당 반혁명당의
중요 강령이
된다.
흐룽은
다음과 같이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고 한
고백을 기억하자.
다음 두
기도를 결코
잊지 말자.
“주여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먼지로 옷
입었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으로
나를 살게
하소서”[20]
참고
(1) : 연도별 생애
개관
1801
8월
21일에 포르부르그
(Voorburg) 에서 의사
Petrus Jacobus Groen van Prinsterer 와
Adriana Hendrika Caan 사이에서
태어나다
1817 레이든
대학교의 법학과
고전어학부의 학생
1823 12월
17일 법학과
고전어학부의 박사
방어식
1827 왕
내각의 레퍼런다리스
Elisabeth Maria Magdalena van de
Hoop 와 결혼
1829 왕
윌리엄 1세의
비서
정치
평론 잡지
“네덜란드사상”
(Nederlands Gedachten) 출간
(1832년까지)
Merle
d’ Aubigné 목사와 친구
Willem de Clercq 를 통해
대각성 운동을
접하다
1832 왕실
고문서 보관소
감독
1840 국회의원
1845 대각성
운동의 ‘기독교
친구들’ (Christelijke
Vrienden) 모임에 참여
1849 국회의원
(몇 년의
공백을 제외하고
1857년까지)
1850 “네덜란드인”
(de Nederlander) 신문의 편집장
(1855년까지)
1857 교육법
문제로 Van der Brugghen 과
투쟁
1860 10월
30일 기독교
학교 연합회
설립 발기인
1862 국회의원
(1865년까지)
1866
교육법
문제로 Van Zuylen van
Nijevelt 와 투쟁
1869 “네덜란드사상”
(Nederlands Gedachten) 재출간
(1876년 4월까지)
1871 Keuchenius, Kuyper, Van Otterloo 를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
1876 5월
19일 죽음
5월
23일 장례
Schenveningen 의 “Ter
Navolging” 묘지에 안장
참고
(2): 주요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