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2017년 6월 19일부터 22일까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열린 하계목회대학원의 강의안입니다. - 편집자 주 |
종교개혁과 교리개혁: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 우리는 얼마나 아는가? 사도신경의 기원은 세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성례인 세례, 우리가 세례를 제대로 이해하고 집례하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도신경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와 공유하는 신앙고백이다. 마치 500년 전에 살고 있는 루터인양, 우리가 현재의 가톨릭교회를 비판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로 비난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안에는 개혁해야 할 폐단과 문제는 없는가?
사도신경은 단어의 수에서는 간결하고 문장의 무게에서는 장중한 믿음의 규칙이다.1) ‘간결하고 진정한 믿음의 요약’(루터)이며2), ‘믿음의 개론과 요약’(칼빈)이다.3) 신경은 성경의 요약이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지향하는 믿음의 내용, 곧 창조와 구원과 완성,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사역 전부를 말한다. 고백은 삼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서약이요 그 서약대로 살겠다는 선서이다. 설교는 삼위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며, 성찬은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가장 친밀한 교제요, 마지막의 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이다. 이렇게 성도는 매주일 ‘천지를 만드신’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설교와 성례를 맡은 목사는 세상 속 성도의 삶으로 목회 사역의 평가를 받는다. 교회의 성장은 반드시 교회의 개혁, 세상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 하나님의 집과 목사의 사역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도신경 강해는 성경 전체의 구조와 가르침을 삼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리하면서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기치를 따라 한국교회 안에 들어온 가톨릭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들, 루터라면 서슴없이 지적하고 집어내고 신랄하게 비판할 그릇된 관행들을 교리, 예배, 교회정치에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개혁하는 대토론을 시작하여 보자.
I. 사도신경과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요 이런 성경 사랑 때문에 성장하였다고들 말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복 받은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교리를 사랑하는가? 단번에 답하기 쉽지 않다. 한편으로 한국교회 안의 교단마다 어떤 도그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예정, 성결, 자유의지, 방언, 천년왕국 등이다. 그렇지만 많은 지역 교회가 갈등 상황에 빠지고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세속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일이 빈번해졌으며, 한국교회의 성장에 비례하여 교회와 교인들의 범죄 행위도 증가하고 있다. 교회의 확장에 걸맞게 한국사회가 더 깨끗해졌다고 단언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경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자문해야 할 상황이다.
한국기독교의 정체성을 되물어야 할 시점이다. 이른바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자기 성찰과 점검을 해야 한다.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지만, 늘 경험하듯 전시성인 행사에 그칠 뿐, 개신교 역사 140년을 반성하고 그간의 은혜와 복을 헤아리면서 삼위 하나님께 감사함과 동시에 잘못들까지 진정으로 회개하는 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종교개혁일을 기념할 때에도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개혁은 부르짖었지만, 실제적인 교회 개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실 500년은 개혁의 선물로 이루어졌지만, 그간 개신교회는 잃어버린 바도 많다. 무엇보다도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교리와 예배와 정치에서 버리고 거부한 바가 많다.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회복과 복귀를 뜻한다. 복귀하면서 성경에서 명하는 바를 다시 회복함이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최일선에서 싸우면서 모든 면에서 온전한 개혁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경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개혁이 사명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개혁된 교회의 채널이 좁아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채널이 협소화하여 좋은 전통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거나 상실할 위험도 상존한다.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불필요한 교리, 예배와 정치를 생산하면서도 그것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폐단을 재현하거나 답습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지를 노출시키게 된다.
종교개혁은 일차적으로 예배개혁이었다. 루터(1483-1546)의 95개조는 가톨릭교회가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7성례의 하나인 고해성사의 폐단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고해성사와 연관된 연옥이나 면벌부 판매 등이 그릇되었다는 것은 교리에 기초하여 나왔다. 즉 종교개혁의 예배개혁은 교리개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런 교리와 예배개혁이 교회개혁을 견인하였다. 이것은 다시 교회정치 개혁으로 나아갔다. 교황이라는 인간적 제도가 교리와 예배를 부패시켰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교회정치도 개혁해야 한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가 표방하는 개혁교회의 교리와 예배 그리고 장로정치가 발생하였다.
사도신경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들의 거짓 교리들을 세우면서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도신경이 ‘공’교회를 고백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고백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버리는 것인가?(회중교회) 이런 비판은 최근에 나왔지만 사실은 그 역사적 뿌리는 깊다. 종교개혁 진영에서 사도들이 사도신경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먼저 나온다. 칼빈(1509-1564)도 이 대열에 참여한다. 그때부터 사도신경에는 ‘원죄, 대속과 속상, 이신칭의, 회개, 성화’ 등과 같은 주요 고백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페기하거나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특히 동정녀 탄생 고백은 단골 공격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도 나올 필요가 없고 음부하강도 마찬가지이다.4) 웨스트민스터 문서 작성자들은 사람이 만든 작품이라는 이유로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르지 않았고, 사도신경을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보았다. 이에 비하여 종교개혁으로 서방교회의 분열이 고착되기 시작하자, 사도신경을 기초로 하여 교회를 합동해야 한다는 주장도 개신교, 특히 루터파 신학자 중에서 나왔다. 그 이후 사도신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해설은 많이 나왔으며, 단순하게 반대하거나 칭송하는 분위기는 꺾이었다. 그러나 신조에 대한 비판이나 불신, 그리고 성경 비평이 고조되면서 사도신경은 쉽게 다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사실 사도신경의 배경(setting)은 세례이다. 수세 직전에 수세자는 집례자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집례자는 수세자에게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믿는지 질문하면, 수세자는 ‘나는 믿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수세자는 세례 교리교육에서 이미 삼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웠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기에 합당한 삶을 수년간 훈련받고 특히 고아나 과부를 돌보는 자비의 사역으로 좋은 평판을 얻어 수세를 신청하였다. 그리고 세례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 수세자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고 삼위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이처럼 세례신경인 사도신경은 수세자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가르치며 부여한다. 곧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을 고백함으로 그 정체성을 외적으로 표시하는 증표(symbol)이다.
사도신경은 고백과 증표로서 삼위 하나님의 소유로 그분의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는 선서와 고백이다. 이 고백은 동시에 이 세상과 이웃을 향한 증표로서 이 세상과 이방인의 행실(ἀναστροφή)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구속과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받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선서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조하신 새사람(엡 2:15-16, 4:24)은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우리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면서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승리를 미리 맛본다. 이렇게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고 이룬다(롬 12:2). 이처럼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 모두를 다 담고 있으며, 세례로 수세자는 삼위 하나님을 모신 형상으로 거듭나서 형상으로서 육신의 남은 때를 살아간다(벧전 4:2).
사도신경의 배경인 세례는 예배의 한 요소이다. 예배에는 세례와 함께 성찬도 있다. 사실 세례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세례를 출생이나 혼인과 비교한다면, 성찬은 성장과 평생의 삶 그리고 사랑의 확인인 합방에 해당한다. 이것은 예배가 우리 전 생애에 걸쳐 지니고 있는 의미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준다. 성찬으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이전과 밖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성찬 전에 주기도문을 함께 암송하였으며, 성찬도 세례와 마찬가지로 삼위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다 담고 있다. 삼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하는 말씀은 세례와 성찬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말씀과 성례는 예배의 근간이다. 예배는 인간의 모임이기 전에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삼위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회중의 순종이다. 예배에서 회중은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그분으로부터 받는다. 곧 말씀과 세례와 성찬이다. 이 근간이 예배를 구성한다. 그 외의 다른 요소들이 때로는 더 부각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예배를 구성하는 근간은 아니다. 다 이 근간으로부터 다른 요소들은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세례신경인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서약이며, 이전의 세례를 상기하며, 세례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지금도 행하시는 모든 사역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언약 갱신이다. 이렇게 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서약함으로써 고백공동체로 거듭난다. 사도신경의 이런 배경과 의미와 중요성을 인지하여 역동적 예배를 매주일 회복하면, 성도들이 새롭게 되며 세상으로 파송 받아 변화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사도신경의 위치는 어떤가? 점차 사도신경을 오전 공예배에서 생략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물론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반드시 고백하라는 근거를 성경에서 제시하라는 질문은 어불성설이리라! 그렇게 질문한다면 현재 예배 순서 자체 가운데 존속될 수 있는 순서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고백해야 하는지는 꼭 물어보아야 할 사안이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하기에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예배학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설픈 상황을 어찌하랴! 예배는 언약의 갱신이며, 언약의 당사자로 청함을 받은 예배 공동체와 일원은 언약 갱신을 위하여 십계명으로 자신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으로 다시 ‘서약’한다. 고백인 사도신경이 지닌 서약의 성격을 한국교회는 잘 전수받지 못하였다.
한국교회 안에는 사도신경을 로마 가톨릭의 음모로 보는 아주 요상한 주장이 교묘하게 침투하고 있다. 특히 사도신경이 교회를 고백하는 부분에 나오는 ‘공’이라는 표현을 단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음모와 전유물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파급되는 것은 아예 가관이다. 사실 ‘공’(가톨릭)은 사도신경 전체에서 성경으로부터 인용하지 않은 유일한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도신경에 들어올 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양보하여 이후의 로마교회가 스스로를 ‘가톨릭’교회로 규정하고 이 용어를 독점하려고 억지를 부렸고, 그 여파로 개신교회를 박해하고 세계교회 형성과 세계지배를 꿈꾸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거짓 주장이며 망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톨릭이라는 자부심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당당함과 이에서 나오는 ‘조롱’은 사도성을 사도후계자의 계승이 아니라 사도적 교리의 계승으로 확신하는 자부심에 기초한다.
여기가 자문해야 하는 순간이다. 로마교회가 아니라 스스로 ‘가톨릭’이라는 우리가 정말 사도적 교리를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가? 사도적 교리에 기초한 예배를 제대로 체험하고 있는가? 사도적 교리에 기초한 교회정치를 구현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사도적 교리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는가?5) 지난 연말연시 촛불집회와 최근의 정치 상황을 사도적 교리의 요약인 사도신경의 고백과 그 실천인 삶이 총체로부터 성찰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는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행하는 모든 삶의 면면들, 곧 예배적 삶에는 상거래, 직장생활, 여가 생활, 자녀 교육, 혼인과 출생, 청문회의 단골 메뉴인 5대 기준(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 전입, 논문 표절) 등도 포함된다.
한국사회의 인구 절벽으로 인하여 교회도 급속도로 노령화되고 있다. 각종 주일학교가 소멸하고 있으며, 청년들의 교회 출석률은 전체의 2%에도 미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청년들도 불신 청년들과 다를 바가 없이 혼인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혼인하여도 출산을 포기하거나 미룬다. 단지 통계적으로만 본다면, 한국교회의 소멸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교회교육과 청년들의 신앙 양태에까지 ‘이 세상을 본받는’(롬 12:2 참조) 모습이 도드라진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세상 속에서 ‘나그네’(히 11:3; 벧전 1:1)로 살아가야 하는 신자의 본분은 고난 중에서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예배에서 교리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의 예배, 무시당하는 사도적 교리, 그 결과로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재이방인화’는 교리를 위임 받은 목사들의 사명이다.
종교개혁이 예배와 교리개혁과 결과적인 교회정치 개혁이었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 삼대 개혁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선봉에 서야 하는 적임자는 목사이다. 구호와 전시 행사가 아니라 이번 목회대학원은 기도와 말씀의 교제 중에서 이 일을 깊이 고민하고 교리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종교개혁의 혁신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채널의 협소화, 곧 교리는 교회 안의 사안임과 동시에 교회 밖의 사안임도 확인하고 교인들을 교리로 무장시켜 세상에서 그래도 살게 하는 목회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도 수반되어야 한다. 사도적 교리를 요약한 사도신경에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나오지 않지만, 천지 창조의 고백은 영생의 고백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까지 담고 있다. 믿음은 영적이지만 소위 ‘영적’이지 않고 보이는 모든 세계를 다 포함하며, 교리의 주인께서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은 세계(니케아신경)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올 때’(계 21:3)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과 땅의 치리자가 삼위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임을 고백하고 실천하며 고난 중에 견디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해야 한다. 우리는 달란트를 수건에 싸고 땅에 묻고서도 주인에게 항변하는 한 달란트의 소지자와 같이 나태하게 ‘예수천국’만을 외치는 피안적 삶을 청산하고서 이 땅에서도 신실한 시민으로 살면서, 신천신지의 영원한 시민이 될 날을 학수고대하며 준비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
이런 목표를 두고서 다음을 차례로 다루려고 한다.
-사도신경의 자리인 예배: 기원과 세례
-교리에 대한 오해와 무관심
-사도신경 해설: 가톨릭 교리와 비교
-사도신경과 목회
-사도신경과 성도의 일상적 삶
II. 사도신경의 자리인 예배: 기원과 세례
1. 사도신경의 자리: 세례
사도신경은 세례 교육서요 세례 문답서였다. 세례의 문맥에서 사도신경이 발생하였지만, 현재 형태는 빨라야 5세기 말엽에 프랑크 왕국에 속한 남부 프랑스 지역에서 형성되어, 샤를마뉴의 아헨 궁정으로 도입되어 결국은 로마로까지 진입하였고 서방교회의 으뜸 신경으로 자리를 잡았다.6) 놀랍게도 사도신경의 원래 형태는 고대 로마신경이며 대체로 150년 경부터 로마에서 처음 등장하여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파급되었다. 그런데 니케아신경(381년판)이 이 신경을 대체하면서 잠시 로마에서는 잊혀지다가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위에서 말한 경로를 따라 로마로 귀환한 셈이다. 마치 시집 간 딸이 세월의 연륜을 쌓아 친정살이로 돌아와 적자(嫡子)로 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7)
로마신경
1. 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2. 나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그분의 독생자, 우리 주님이심을 믿으오니,
3. 그분은 성령님으로 동정녀 마리아게게서 나시고
4.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당하여 장사되시고
5.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6.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7. 그리로부터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8. 나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9. 나는 거룩한 교회와
10. 사죄와
11. 육의 부활을 믿습니다.
2. 교리교육8)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의 세례신경이었고 로마신경이 그 모체이다. 마태복음 28장 말미에는 세례와 가르침이 함께 나온다. 이를 따라 동서방교회에서는 세례교육서가 여럿 있었다. 200년경에 저작된 히폴리투스(170-236)의 「사도전승」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16년경)와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등도 이런 작품을 남겼다. 히폴리투스는 세례교육의 기간으로 3년을 말한다. 특히 기독교 공인 이전에는 세례교육에서 로마제국의 정치나 관습으로부터 확실한 구별을 요구하고 훈련시켰다. 초기에는 혼인을 억제하기도 하였다. 교육은 장로나 아니면 그냥 교사가 담당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185-254)는 이런 교사로서 오랫동안 일하였다. 세례를 받기 전에 학습자는 예배의 전반부에만 참석하였다.
그런데 313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음과 동시에 점점 기독신자의 신분이 제국의 지배계층과 동일시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게르만족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과정에서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지만 속은 여전히 이방인의 구습을 벗지 못하는 일이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교적 풍습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온다. 게르만이 연미사와 연옥, 혼백, 악마 신앙을 가져왔다.9) 이런 것들이 이후 중세의 부패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교들은 교리교육을 강화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총 23장으로 구성된 예루살렘의 킬릴루스(313-387)의 교리교육서이다. 첫 5장까지는 세례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6-9장까지는 성부 하나님, 10-15장까지는 성자 그리스도, 16-18장까지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가르친다. 그리고 19-23장까지는 수세자들이 더 알아야 하는 세례와 성찬에 관한 진보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사실 키릴루스의 교리교육서는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즉 성령님의 주요 사역으로 옛적에 선지자들로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거론하기 때문이다(16장).
애초부터 교리교육 자체는 삼위 하나님 신앙을 담은 사도신경 또는 니케아신경, 십계명과 주기도문 강해가 주 내용이었다. 여기에 사도신경에 기초한 찬송 “오 하나님, 주님을 우리가 찬양하나이다”(Te Deum laudamus)가 곁들어졌다. 부모와 주교 그리고 교회학교에서 교리교육을 의무적으로 행하여야 하였지만, 중세에는 백성, 교인들이 무지하고 미신에 빠져 있었다. 오히려 교황을 거부하고 교황의 탄압을 받았던 알비파, 왈도파와 보헤미아 형제단은 교리교육에 더 힘을 기울였다.10) 재미있는 사실은 알비파는 달마티아에서 발흥하여 11세기 초엽부터 2세기 동안 프랑스 남부에서 기세를 떨쳤던 이원론적 이단이지만, 심지어 이 지역까지 포함하여 1170년경 프랑스 리용에서 발흥한 왈도(1140-1205)의 추종자들과 후스(J. Hus, 136-1415)의 영향으로 현재의 체코 지역에 일어났던 보헤미아 형제단 등은 직간접으로 칼빈의 영향권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11)
루터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요리문답서를 완성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요리문답서가 아니라 교리해설서가 되고 말았다. 이를 정리하여 문답형식의 교리교육서를 1529년에 소교리문답서로 출판한다. 여기에는 1727-29년 사이에 그가 심방하였던 독일 여러 지역에서 편만한 무지와 도덕적 타락에 대한 염려도 배경이 된다. 곧 십계명,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주로 다루면서 보헤미아 형제단의 모범을 따라 세례와 성찬 부분을 첨가하였다. 이후에 사적 회개와 권징 부분을 첨가하였지만, 개혁파는 이를 중세의 잔재로 여기면서 거부한다. 루터는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박사요 설교자로서 능력을 자랑하는 어떤 자들보다 학식이나 경험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 그럼에도 나는 교리교육서를 배우는 아이와 같아서 아침마다 소리 내어 읽었고, 여유가 있으면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시편도 그렇게 읽었다. 이처럼 나는 요리문답의 아이와 학생이어야 하며 기쁘게 실로 그러하다.”12) 다만 십계명은 간단한 본문만을 인용하되 로마교의 방식을 따라 제 2계명을 합쳐버리고 제 10 계명을 두 계명으로 분리하였다. 사도신경은 겨우 3 문답밖에 없다. 루터파는 로마교를 비판하면서 ‘사죄’ 부분에서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기초한 칭의를 거부하고, ‘거룩한 공교회’ 부분에서 교회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관여나 부패를 거부하고 가시적인 성도의 교제라는 영적인 속성을 강조하였다.13)
칼빈은 제네바 1기 사역(1536)을 시작하면서 프랑스어로 교리교육서와 치리서를 작성하였다. 교육서는 「기독교강요」 초판을 요약하였다. 문답형태가 아니며 58항에서 인간의 종교성, 참 종교와 거짓 종교, 신지식, 자유의지, 죄와 죽음, 구원의 길, 하나님의 법, 십계명, 율법의 목적, 믿음, 선택과 예정, 믿음의 본질, 칭의와 성화, 회개와 중생, 믿음과 선행을 다루고 나서 사도신경 해설, 주기도문 해설, 세례와 성찬, 교회, 인간의 전통, 출교와 공권력 등을 다양하게 다루었다. 이처럼 그의 교육서는 교리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이후 교리교육서의 시초가 된다.
제네바 2기 사역(1541)을 시작하면서 문답 형식으로 교리교육서를 더 확장한다. 이후에 개정할 셈 치고 급히 작성하였는데, 결국 개정하지 못하였다. 이 교육서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 교회와 학교의 교재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중세 로마교회가 무관심하였던 고대교회 방식의 교리교육을 겨냥한 이 교육서는 신생 개혁교회의 믿음과 교리의 일치를 이루는 데에 기여하였다. 크게 다섯 부에서 사도신경의 강해로, 믿음을 십계명으로 하나님의 법, 주기도문,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를 차례로 취급한다. 다시 55부분으로 나누어 52주일과 삼대 절기에서 각각 다루도록 분류하였는데, 이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이 이 예를 따랐다.14)
웨스트민스터회의는 두 교리문답서를 작성하였다. 대교리문답서는 196문답, 소교리문답서는 107문답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유해무, 「헌법해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서」를 참고하라.
교리교육서는 세례교육서이며 문답이었던 사도신경에서 시작하여 이후에는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강해까지 더하여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문답서들의 틀이 되었다. 사도신경은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교육을 위하여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문답 형식을 취하였고 학생들이나 세례예비자가 암기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교리교육의 목적은 성경 전체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여 설교 말씀을 잘 이해하고 그대로 살도록 함에 있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등이 이런 교리교육을 대신하고 있는데, 믿음의 본질을 깨닫고 신천지와 같은 이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교리교육의 강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특히 공교육과 사교육이 입시 위주로 시행되면서 교회학교가 극도로 심각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교리교육의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자녀들이 주일에라도 교회에 머물면서 교리교육을 시간에나 질의 면에서 늘려야 할 때이다.
3. 예배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교회이지만 자기반성을 하면서 성숙해야 할 시점이다. 신학적 반성에 앞서 예배가 바로 서야 한다. 예배는 신학이나 교회정치에 앞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언약적 교제이다.15) 예배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제한 자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꿀 사명자로 파송 받는다.
성도에게 예배는 필수적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린다. 그런데 예배를 ‘드린다’가 얼마나 합당한가? 하나님께서 예배를 제정하시고 우리를 예배자로 초청하고 불러주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리라.”(신 4:10)고 말씀하셨다. ‘모으다’의 명사형인 ‘총회’는 신약에서 ‘교회’로 번역된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모인 자기 백성에게 먼저 자기 말씀을 들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면 예배자는 받아 돌려드린다. 예배는 우리가 주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도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순종하는 응답이다.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 이 하나님은 죄인을 살려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된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우리를 계속 만나 사귀시려고 예배를 제정하고, 우리와 예배에서 특별한 교제를 원하신다.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면서 베푸시는 부분과 우리가 응답으로 드리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찬송과 기도와 헌금으로 응답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시고 말씀과 성례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예배지침, 2조 1항).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의 특징이다. 사람의 지극정성이 신을 감복시키면, 응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상은 사람이 스스로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우리 하나님은 받으시기 전에 먼저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양에게서 예표 되었고, 십자가에서 실현되고 부활로 완성되었다. 예배는 이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헬라어 ‘감사’(εὐχαριστία)에는 ‘은혜’(χάρις)가 들어있다. 은혜 받은 자가 주신 이에게 돌려드리는 감사가 예배이다. 예배는 우리가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자리이며, 말씀과 성례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예수님을 듣는다(말씀).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또 예수님을 입고(세례) 먹고 마시면서(성찬) 말씀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화한다. 이처럼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신 예수님을 받아 그분의 형상으로 화하는 일이 선행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공동체이다.”(예배지침 1조 1항) 사도신경은 교회를 ‘성도의 교제’라고 고백한다. 아주 뛰어난 교회 정의이지만,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만 제한할 소지도 있다.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비로소 성도가 되어 서로 교제할 수 있다. 은혜를 받고 감사를 드림으로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예배가 없는 성도의 삶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은혜의 방편을 맡은 예배 집례자의 임무는 막중하다. 목사는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를 집례해야 하며, 장로는 교회에서 예배가 중심에 서도록 목사와 함께 교우들을 살펴 예배가 진정한 은혜의 장이 되게 해야 한다. 목사는 말씀연구와 설교에 전력해야 하며, 장로들은 목사의 설교가 성경적이며 교인들이 잘 이해하는지, 교인들이 그 말씀을 따라 그리스의 향기로 사는지를 살피고 권면해야 한다.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학습자는 삼위 하나님을 잘 배워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함께 죽고 사는 예식(롬 6장; 골 2:12)이기 때문에, 학습자가 옛사람을 확실하게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혼인식과 같다. 성찬은 신부인 교회와 성도가 신랑인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교제하는 예식이다. 성찬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재림의 주님이시다. 말씀과 마찬가지로 세례와 성찬도 예수님을 완전하게 소유하게 한다. 우리는 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와 교제한다. 그러므로 성찬은 자주 시행하는 것이 좋다.
예배에서 삼위 하나님은 자기를 언약 백성인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면 우리도 언약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친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찬송은 진정으로 삼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흥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송이어야 한다. 찬송이라는 대부분의 찬송이 찬송답지 못한 현실은 참 아쉽다. 공기도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사역을 열거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 소원만을 아뢰는 기도는 편향적이다. 기도에서 우리는 이미 주신 응답을 열거하여 언약의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헌금은 구원 받은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롬 12:1)로 드리는 응답이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예배 중에 은혜로 살려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를 살리신 주님을 세상에서 일(직업)함으로써 증거하고 전파해야 한다.
교인들은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가 되도록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대사로서 세상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삼위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일터를 주시고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 고대교회에서는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우유와 꿀을 주어 먹게 하고 소금을 뿌렸다. 죄의 종되었던 집에서 은혜로 구원받아 가나안(세상)에 입성하였으니, 소금과 빛으로서 그곳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라는 파송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배자는 세상으로 파송 받아 날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확정해야 한다.
10월마다 개혁을 부르짖는다. 교회와 세상의 개혁을 말하기에 앞서 예배를 개혁해야 한다. 공예배의 집례자로 부름 받은 목사와 장로는 최일선에 선 ‘개혁 교인’이어야 한다. 예배로 ‘개혁 교인’을 만들면, 교회와 교인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며, 세상을 개혁할 것이다.
4. 사도신경과 예배
예배는 일차적으로 은혜의 방편으로 하나님을 선포한다. 은혜의 방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여 그분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영광 돌림이다. 하나님의 자기 선포와 우리의 경배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예배애서 신앙고백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 봉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선포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성령께서 이 그리스도를 선포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교회력은 이처럼 기독론적 이야기를 전개한다. 종말론적 회중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나를 기억하라’(고전 11:24,25)는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 이처럼 예배는 구원 예언과 그 성취인 구원역사, 그리고 이에 기초한 종말론적 대망을 송두리째 체험하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세례 고백인 신앙고백이 예전에 도입된 것은 상당히 후기의 일이며, 사도신경이 아니라 니케아신경이 약 700년 간 예전에서 자리를 잡았다. 칼케돈회의(451)의 양성론의 결정을 따르지 아니하는 단성론자들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473년부터 니케아신경을 도입하여 공적으로 고백하는 전통을 세운다. 이런 전통을 알고 있던 서고트족의 교회는 자기들이 추종하였던 아리우스의 사상을 버렸다는 증표로 제 3차 톨레도회의(589)에서 큰 소리로 회중이 다 신앙고백을 암송하기로 결정하고 성찬 직전에 고백하였다.16) 샤를마뉴는 신앙고백을 찬양으로 부르게 하였는데, 이 전통은 한 세기나 지나서 자리를 잡는다. 로마에서는 교황 베네딕도 8세가 1054년에 첨으로 예전에 도입한다.
신앙고백의 공동 낭송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행하신 구원 사역을 복창한다. 공예배에서 신앙고백은 루터의 말처럼 ‘찬송의 제사’(히 13:15)이다. 이점에서 고백은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분께 선포하고 돌려드리는 ‘송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부를 수 있다. 루터는 사도신경의 해설로 소요리문답서(1529)를 작성했고, 루터파 협화신조(Concordia; 1580)에는 사도신경이 니케아신경과 아타나시우스신경과 더불어 삼대 공교회적 신경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루터파는 사도신경을 교리교육에서만 사용하였지만, 개혁파는 신학과 예전에서도 사도신경을 중시한다. 공예배에 사도신경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츠빙글리이다. 그리고 성찬에 사도신경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칼빈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부터 최종본(1559)까지 사도신경을 기본 틀로 삼았다. 이렇게 신앙고백이 신학과 손을 잡는다.17) 이후 바흐, 모차르트나 하이든 등이 사도신경을 부를 수 있도록 작곡하였다.18) 동시에 사람을 향한 고백과 서약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단지 ‘기도’가 아니며, 찬송을 부르듯 굳이 눈을 감지 않고 고백해도 상관이 없다.19) 19세기 예전회복운동이 신앙고백을 예전에서 확고히 자리 잡게 하였다.20)
그렇다면 세례는 말씀 선포 다음 성찬 시행 전에 행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전통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며, 세례를 연중 몇 차례 별도로 시행한다. 성찬의 복을 여전히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백은 항상 서약의 성격을 지닌다. 세례 고백인 사도신경을 매주일 함께 암송함으로 우리는 한 믿음을 소유한 공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땅의 예배에서 미리 이 나라를 맛본다.
III. 교리와 믿음: 교리에 대한 오해와 무관심
1. 들어가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의 기쁨을 뒤로 하고 정체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와 직분자 그리고 교인들이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교회에 실망한 이들은 출석을 중단하거나 가톨릭교회로 옮기기도 한다. 교회의 성장 후폭풍으로 ‘재이방인화’가 휘몰아치고 있다. 게다가 출산율의 저하로 인한 인구구조의 역삼각형 현상에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며, 심지어 성도의 자녀들도 주일에 교회 대신에 학원으로 향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잘 지은 예배당은 점점 비어가고, 선교비의 감축으로 선교가 위축되는 등 유럽과 미국교회를 답습하고 있으니,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그 동안 특히 사도행전을 교회성장의 표본으로 삼아 교회성장에 매진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고(행 6:7),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졌으며(행 9:31),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여지고(행 12:24),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행 19:20). 이 가운데 세 곳(6:7, 12:24, 19:20)에 ‘성장’에 해당하는 왕성, 흥왕이 나오고, 세 곳(6:7, 9:21, 12:24)에 ‘증가’를 뜻하는 많아지다, 더하여지다는 말이 나온다. ‘든든히 서다’(9:31)는 교회를 세운다는 뜻이고, ‘세력을 얻다’는 힘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성장의 주어가 하나님의 말씀(6:7, 12:24)과 주님의 말씀(19:20)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하니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고(6:7, 12:24), 맹위를 떨쳤다(19:20). 말씀이 지배하니 교회도 평안 중에 주님 경외와 성령님의 위로로 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9:31).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성장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한다. 그러면 교회가 든든히 서고 제자의 수도 증가한다. 그렇지만 교회사에서 교회의 성장과 교인의 증가가 말씀의 성장과 위력을 늘 대변하지는 않았다. 한국교회가 이런 덫에 빠지지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말씀은 성장하며, 성도도 이 성장하는 말씀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난다(벧전 1:23-2:2). 그리고 믿음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확장과 연합(엡 4:16; 골 2:2,19)이기도 하며 성도의 일상적 삶에서 나타난다. 이 말씀만 있으면 충분하다. 한국교회의 문제들 앞에서 말씀의 성장을 앞세워 ‘교리를 알면 믿음이 자란다’는 바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교리와 믿음의 성장은 교회사에서 사도신경으로 발전하게 된 것을 볼 것이다.
2. 믿음의 성장과 교리의 지식
‘교리를 알면’이 조건절이라면, 주절(主節)은 ‘믿음이 자란다’이다. ‘자라다’는 식물계에서 가져온 비유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더욱 자람”(살후 1:3)을 하나님께 감사할 거리로 언급한다. 자라면 결실이 있다. 말씀이 옥토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한다(막 4:8).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한다(막 4:20).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빼앗기고 넘어지고 막아 결실하지 못한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말씀의 성장과 교회의 증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믿음도 자란다. 골로새 교인들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듣고 열매를 맺어 자라갔다(골 1:6). 여기서 복음은 식물처럼 자라가는 씨앗에 비유된다. 믿음(고후 10:15)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성장한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를”(골 1:10) 기도한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믿음이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또 권면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니, 우리는 믿음을 자라게 하시도록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 안에서 자라 가야 한다고 권면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은 말씀의 성장과 더불어 믿음과 지식의 성장을 말한다.
이제 조건절(條件節)인 ‘교리를 알면’을 살펴보자. 믿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라갈 수 있다. 이미 위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란다는 말씀이 나왔다. 교리와 지식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자, 예수님은 자기의 교훈이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7:17). 교훈은 교리이다.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3:14-17에서 교훈과 지식, 또는 교훈과 배움에 대해서 잘 언급하고 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1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16). 이에 앞서 사도는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명한다(14). 배움과 앎, 교훈과 교육의 밀접한 관계가 잘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17).
하나님의 사람이 교리를 알면, 믿음도 자란다(살후 1:3). 우리는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구원에까지 자라야 한다(벧전 2:2).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이다(벧전 2:3).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이 자라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엡 4:16; 골 2:19).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엡 2:21-22). 교회론의 문맥이며, 온전한 사람과 연결된다(4:11 이하).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 우리는 교회에서 교리를 배우며 믿음이 자라가면서 함께 교회를 이루어간다. 나아가 교리를 알면,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란다(골 1:10; 딤후 3:17). 교회에서 예수님을 본 받아(롬 15:5-6) 교리를 알고 믿음이 자라는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눅 18:43; 벧전 2:12).
이처럼 (교리를) 알고 믿는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와서 예수님께 자기 아들의 병을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셨고,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요 4:50) 신하는 귀가하여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었다.”(요 4:53)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알았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줄도 믿었다.”(요 17:7) 이처럼 교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와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과 교훈이다.
3. 교리와 믿음에 대한 오해
미국교회가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에 유행한 모토는 ‘신조가 아니라 성경만(No Creed but Bible)’이다. 이 경우 신조를 교리로 이해하여도 무방하다. 이 구호 덕분에 한국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예상치 못한 폐단도 나왔다.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이단이 날뛰는 그런 교회가 되었다. 나아가 교인들이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폐단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한국교회의 신앙 양태는 전반적으로 보아 주관주의적이다. 회심을 강조하고 내면을 살피는 심리적인 설교가 주류를 이루며, 믿음 생활 역시 주관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형식이나 정형을 싫어한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배에서 잘 나타난다. 내면에 변화와 감동을 준다면 형식을 파괴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중시하지만, 신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거부한다. 종교개혁을 잘못 이해한 소치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를 비판했지만,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를 전수받았고 교회와 예배에 대한 신조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사랑하지만 신조와 교리는 무시함으로 교리와 신조를 새롭게 정비한 종교개혁의 당당한 자세는 전수받지 못하였다. 그렇다보니 내세에 대한 소망만을 앞세우고, 현세를 쉽게 정죄하거나 부정한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점에서 개혁주의는 내면을 무시하지 않지만 현장과 현세의 삶 자체를 중시한다. 즉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적 구분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조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신조를 채택함으로 공교회적인 자세를 갖춘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역사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다 주께 속하였으니, 주께서 다스리는 나라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믿음을 제한적으로 이해한다. 즉 내면의 신심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내면의 신심의 차원으로만 보지 않는다. 아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신심’만은 아니다. 왜 그런가? 믿음은 신자의 믿음이 틀림없지만, 믿음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어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다. 이를 우리는 흔히 ‘이신칭의’라 부른다. 그렇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믿음에는 내용이 없다.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은 ‘빈손’이다. 믿음은 교리를 받을 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다(롬 10:9). 즉 말씀을 받아 말씀으로 채워진 믿음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4. 교리와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믿음, 교리, 전통과 부탁, 고백과 시인, 말씀, 복음, 전파 등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내면적이지 않고 아주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구원 사역을 그 내용을 담고 있다. 편의상 교리보다 먼저 믿음으로 다루면서 교리와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시도하여 보기로 한다.
4-1) 믿음
성경은 믿음을 신심, 곧 내면적 믿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 믿음은 자체적로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믿음은 믿음의 내용을 지향할 때에 역사한다. 성경은 이 믿음의 내용도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유다서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3)라는 말씀이 나온다. ‘도’는 첨가된 번역이다. ‘주신 믿음’은 ‘전수한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 믿음은 내면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지향하도록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수한 믿음의 내용을 말한다. 20절에도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역시 내면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지향하는 믿음의 내용을 말하여 그 내용 위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한다는 권면이다. 단번에 전하여진 믿음 곧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믿음을 지향하는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며 자라나야 한다.
바울은 전에 멸하려 했던 그 “믿음을 전하였다.”(갈 1:23).21)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믿음을 들어 성령님을 받았다(갈 3:2,5).22) 골로새 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전수받았으니, 그분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 곧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입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골 1:23, 2:6-7). 여기에서 믿음은 내면의 믿음이 아니라 전수받은 예수님에 관한 믿음의 내용, 곧 복음이다. 즉 예수님이 믿음의 역사적 내용이다. 따라서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다!(엡 4:5). 사도신경은 믿음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다.
4-2) 교리(교훈)23)
위의 믿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표현이 교리이다. 그런데 한글 성경은 교리에 해당하는 말을 모조리 교훈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교리라는 번역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교훈 또는 교리는 역사적이다.
‘바른 교훈’(딤전 1:10; 딤후 4:3; 딛 1:9, 2:1; ‘좋은 교훈’=딤전 4:6)도 역사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24) 이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바르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건강한 교리는 신화나 허탄한 족보 얘기 등과 같은 왜곡된 교리(딤전 1:4)와는 대별되는 참되고 옳은 교리이다. 같은 믿음이다(딛 1:4). 신화나 족보 얘기에는 역사가 없다.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적인 교리이고 디모데와 디도가 직분적으로 보존해야 할 교리이다. 즉 목회 서신에서 말하는 교리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사변적인 구원론이 아니다. 오히려 질서를 지닌 창조계와 세상 속에서 참되고 합리적이며 타당한 삶에 대한 관심을 교리는 담고 있다(가령 딤전 1:3,4; 딤후 3장; 딛 1:13,14 등).25) 여기에서 ‘전파’나26) 다른 용어가 아니라 ‘교리’가 쓰인 것은, 역사적 선포가 지닌 강제적 성격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이 말로 교회의 가르침과 이교의 이설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딤전 4:13). 즉 디모데는 성경에 계시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가르쳐야 한다. 종들이 상전에게 순종하고 훔치지 않고 모든 신실성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한다(딛 2:10).
4-3) 전통과 부탁(위탁)
이 믿음을 지켜야 한다. 바울 선생은 믿음을 지켰다(딤후 4:7). 이 말씀은 내면의 믿음이 아니라 사역자로서 전해야 하는 바른 교리인 믿음을 잘 지켰다는 말이다. 지키는 것은 ‘전수하고 전수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을 전통 또는 부탁(위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전통은 전수받은 것이고 바울 사도는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으며, 그것을 다시 전수하였다(고전 11:23, 15:3). 특히 고린도전서 11:23은 성찬 제정 전부가 주님께서 하셨으며, 바울은 직접 계시라기보다는 이런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15장은 부활에 관한 전통이다. 이처럼 전통이라는 말은 성찬이나 부활 등 그리스도의 사역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나 심지어 자신이 주도한 사람의 전통은 정당성이 없다(골 2:8). 인간은 믿음과 교리의 내용인 그리스도를 만들 수 없다.
전통의 전수는 ‘부탁’(위탁)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을 위탁하였고(딤전 1:18, 6:20), 디모데는 위탁 맡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다시 위탁해야 한다(딤후 2:2). 디모데는 부탁 맡은 바를 부탁하기에 앞서 먼저 파수해야 한다(딤후 1:14). 받은 바 위탁물을 잘 파수하고 그것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위탁하신 분이 오실 때까지 지켜주시고(딤후 1:12), 그분 안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디모데도 지켜야 한다(딤후 1:14). 권위적인 명령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딤전 1:18, 6:14).
4-4) 고백(시인; 증언)
믿음과 교리 그리고 전통과 위탁은 고백이라는 말에도 담겨있다. 성도의 삶은 세상이라는 법정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여야 하는 증인의 삶이다(눅 12:8; 마 16:16). 고백은 이런 식의 법률적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고 시인하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요 9:22; 12:42). 이처럼 고백은 기본적으로 기독론적이다. 이런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요 12:43, 5:44).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행 24:14).
바울 사도는 믿음의 말씀을 전했다(롬 10:8). 그 믿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믿고 고백해야 한다(롬 12:9). 믿음과 고백은 동행한다(고후 4:13). 구원을 얻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고백(시인)이 지닌 종말론적 차원과 같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히 13:15; 증언으로 번역).
고백(시인)은 기독론적 증언이며, 부인은 이런 교회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요일 4:2).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요일 4:15).
예수님도 빌라도 앞에서 고백하셨다(딤전 6:13; 내용은 막 14:62, 15:2). 거짓 증인들이나 제자들의 부인과는 대조적인 자기 시인이다. ‘선한 증언’은 자신을 그리스도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후 고백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막 14:62; 마 10:32; 눅 12:8). 딤전 6:12에는 증언과 고백이 함께 나온다.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딤전 6:12). 따라서 구속력을 지닌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때때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다(마 16:16; 요 1:19-34; 행 8:37!). 이 개인적인 고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다! 그리고 고백은 굉장한 힘을 지니며, 핍박을 이기게 한다(고전 12:3). 이런 고백의 내용은 가령 고전 8:5-6에 잘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부활과 승귀이다(롬 10:9; 빌 2:11). 이처럼 고백은 기독론적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고백의 배후에는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전파나 교리 또한 고백과 증거 행위는 동일하다. 바로 기독론적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지시한다. 따라서 신화나 허탄한 얘기로 떨어질 수 없다. 고백은 교제와 참여이며,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뜻한다.
4-5) 말씀, 복음, 전파, 진리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단언한다(고전 15:2).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었다(살전 1:6; cf. 살후 3: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난 것이냐 또는 그들에게만 임하였느냐고 단호하게 묻는다(고전 14:36). 말씀을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여야 한다(갈 6:6). 빌립보에는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게 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빌 1:14). 사도들은 모두 말씀 사역에 전무하기를 원했다(행 6:4).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너희에게 전한 복음 곧 이 말씀”(벧전 1:25)은 세례교육용 교리일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 6:1-2는 초대교회의 교리교육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회개, 믿음, 세례, 안수, 부활, 심판 등 6가지가 중점적으로 등장한다.
복음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롬 16:25, 2:16). 복음을 이방인 중에 전파했다(갈 2:2; 고전 15:1). 복음은 구원을 이루는 구속 역사를 말하지 않는가?
전파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전도로 구원을 약속하신 말씀이 나타난다(딛 1:3). 바울 사도는 이 전도를 맡았다고 했는데, 곧 설교자 직분을 말한다(딤후 4:17; 4:5). 부활하신 주님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막 16:15).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16:16). 전파의 내용은 부활이다(고전 15:14). 이 부활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내용이다(마 16:21; 눅 9:22; 마 17:9,23; 막 14:28 등). 따라서 사도들의 전파의 핵심이었다(행 3:15, 4:10, 5:30, 10:40, 13:30,37; 롬 4:24-25, 6:4,9, 7:4, 8:11,34, 10:9; 고전 6:14, 15:4,12; 고후 4:14, 5:15; 갈 1:1; 엡 1:20; 골 2:12; 딤전 1:10; 딤후 2:8; 벧전 1:21 등).27)
진리 또는 진리의 말씀도 우리가 믿는 내용을 지시한다(엡 1:13, 4:21). 이는 복음 진리의 말씀이다(골 1:5). 결국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주로 요한복음).
4-6) 믿음과 교리의 내용
그러면 유다서 3절과 20절의 믿음은 무엇인가? 유다서 독자들이 첫 회개 시에 받고 들었던 복음이다. 바울도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 그는 복음을 멸하려고 했던 자이다(갈 1:23). 그런데 유다서에서는 이런 어법을 넘어 전수받은 신앙의 내용을 좀 정리한 문구일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전제하고 있다.28) 그리고 유다서의 믿음은 단번에 전수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 고정된 양식은 아니다.
한 편으로는 구원 사건을 나열하는 정통 신앙이 있다면, 다른 편으로 이것을 거부하는 이단이 있다. 먼저, 건강한 믿음은 기독론적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예수는 저주받을 자이다”(고전 12:3)라고 선언해야 하는 핍박의 상황에서 나온 고백이다. “만일 ‘예수님이 주님이시다’고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29) 구원은 바로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함으로 받는다. 이것은 아마 세례와 연관된 고백일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는데(행 8:16, 19:5; 고전 6:11), 이와 연관하여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는 고백이나 찬송이 자주 등장하였을 것이다. 모든 입이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를 고백한다는 것은 세례는 아니라 하더라도 예전적 문맥에서 나왔을 것이다(빌 2:11).
이런 표현은 새 개종자에게 전수된 믿음의 내용이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요일 2:22)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행 8:37; 서방본문)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과 논쟁하면서(요일 4:2-3),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있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4:15)고 단언한다. 이 고백은 귀신을 쫓아내는 데에서도 사용되었다(막 3:11, 5:5).
믿음의 내용은 구원사건이요 그 사건을 이루신 예수님이 믿음의 내용이시다. 예수님이 행하신 구원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초대교회 안에는 세례, 설교, 논쟁, 성찬, 축사 등 여러 상황에서 사용한 믿음의 내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교리이다.
이 믿음의 내용은 좀 더 복합적으로도 나온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 교인들은 전수받았고, 그 복음 안에 서있다(고전 15:1).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사도는 받은 것을 전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다(15:3-4). 이런 전통은 교리교육이나 설교를 위한 복음의 요약이다. 물론 부활을 부인하려는 자들을 향한 변증적인 요소도 들어있다. 로마서 1:3-4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동시에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선포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신 사역으로 그분을 증언(인정)하셨다(행 2:22). 이 본문 이후의 내용은 부활이며, 이것은 사도행전이 말하는 ‘증거’의 핵심 내용이다(1:21-22, 2:32, 3:15, 4:32, 10:38-43 등). 나아가 승천과 하나님의 우편 좌정도 나온다(벧전 3:18 이하; 롬 8:34; 엡 1:20). 베드로전서 3:20절을 보면 이런 요약은 세례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론적 선언의 특징은 예수님께 이런 구속 사역들을 돌려드린다. 대표적인 것이 빌립보서 2:6-11에 나온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우심과 창조의 주님으로서 승귀하심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바울 사도가 받았을 때에는 정형화된 찬송이었던 것 같다(딤전 3:16 참조). 축사에서도 나타난다(행 3:6, 4:10).
다음으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님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요약이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님이 계시니... 또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고전 8:6). 아주 잘 정돈된 문구이며, 성부와 성자의 우주적 역할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딤전 2:5). 이미 언급한 디모데전서 6:13 이하의 내용도 세례 준비를 위한 요약으로 보인다. 즉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령을 환기시키되, 세례 준비시에 사용하는 문구를 사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증거자 예수님 앞에서 명령한다. 이런 내용에는 예수님의 재림도 포함되어 있다(딤후 4:1).
이런 문구는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도 표현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 서신 서두에 나오는 인사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등)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1; cf. 살후 2:16)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1:1).
결국 이 문구는 삼위론으로 나아간다. 삼위론적 문구가 직접적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축도’이다(고후 13:13). 그리고 마태복음 말미에 나오는 세례명령이다(마 28:19-20). 그렇지만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한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이 종말론적 약속은 복음이요 전파의 내용이고 교리이며 예전에서도 사용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전 6:11)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말하는 곳에서도 삼위의 이름이 나온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님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님을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전 12:4-6)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님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즉 세례와 성령 받음이 동시적임을 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님을 소멸치 말며.”(살전 5:18-19)
이런 곳에서 정형화된 고백이나 신조는 나타나지 않지만, 삼위론은 일관되게 등장한다(벧전 1:2; 히 10:29; 갈 3:11-14 등). 이처럼 삼위론은 기독교교리의 저변에 깔려있는 기조이다(사도신경!). 즉 이후 신조 형성의 뼈대는 삼위론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믿음, 교리, 전통, 위탁, 고백, 전파, 복음 등과 같은 용어는 직접적이든 암묵적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나타났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
5. 교리를 알면 믿음이 자란다
교리는 딱딱하지 않다. 교리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교리를 아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 안에 계시어(고후 5:19) 행하신 일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고(요 14:9) 성령님으로 아니 하고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고후 5:17). 곧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자들이다(엡 2:10).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말씀한다.
이처럼 우리의 출발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였다(요일 4:4-6; 요 8:4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요일 5:1,4, 2:29, 3:9; 요 1:13).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요일 4:7). 그리스도와 우리는 다 한 근원에서 났다(히 2:11; 요일 5:18). 나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의 능력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전수받은 내용이 곧 교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감을 말한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였다. 이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시며 예수님의 것은 무릇 다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다(요 16:14-15).
교리를 알면 믿음이 자란다. 첫째, 믿음은 위에서 살핀 대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아버님을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의 빛으로 아는 믿음의 내용이 자란다는 뜻이다. 이를 위하여 매일 성경을 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교제하여야 한다. 그러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믿음이 자란다.
이 믿음이 자라면, 둘째, 우리가 항시 말하는 믿음도 자란다. 믿음은 스스로 자랄 수 없다. 항상 믿음의 내용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먹고 마셔야 자랄 수 있다. 이 점에서 믿음은 ‘신심’과는 다르다. 신심은 종교현상으로서 인간의 내면의 희망을 표출하거나 내면을 절제하고 단련하여 인간 자기를 고양시키되 하나님께서 들어설 자리를 그만큼 제한할 위험이 있다. 우리 믿음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하라! 그러면 우리의 믿음도 자란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처럼 행할 것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교리를 일관되게 알아야 한다. QT가 내면성에만 치우치며 교리를 일관되게 깨달을 수 없다. 성경의 교리를 구원역사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면 믿음이 자란다. 그러면 받은 은혜를 더 알고 믿음은 결실을 얻을 것이다. 교리를 알고 믿음이 자라는 자는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롬 14:18; 私譯)
6. 교리는 딱딱하지 않다!
교리는 딱딱하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받다’(전통)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전수받음을 말하고, 그분 안에 우리의 뿌리가 있고, 그분에게서 공급 받아 우리(교회)와 각자는 보이는 건물로 세워진다. 이 두 동사에 숨겨진 주어는 하나님이시다(동사 ‘굳게 서다’도!).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뿌리 내리게 하시고 세우신 하나님 능력으로 우리는 행할 수 있다. ‘교훈’은 교리이니 이 교리의 배움을 받은 대로 믿음 교리에 굳건하게 서서 오직 감사로만 충만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동사는 ‘행하다’이다. 전통과 교리는 맹목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고 보이는 방식으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는 능동적으로 감사가 풍성함으로 나타난다. 교리와 행위는 동행한다! 우리는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면서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고 그분의 영광의 힘을 따라 인내하면서 빛 가운데 걸어야 한다(골 1:10).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전하고 기술하고 정리한 것이다. 교리는 사도신경이 잘 요약한 대로 곧 삼위 하나님이시며, 교리를 알면 믿음이 자란다. 이 하나님만이 만유의 만유이시며, 시작이고 마지막이시며 우리의 전부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목자이시기에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담고 계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야(알아야) 한다(골 2:2-3). 따라서 우리가 다른 곳이나 다른 이에게 가서 뭔가를 구걸하거나 보충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이 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세례와 성찬, 예배에서 삼위 하나님을 항상 받아서 먹고 마시며 입어야 한다. 그러면 일상적 삶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될 것이며(갈 4:19), 이것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칭찬을 얻게 한다.
한국교회가 처한 수적, 질적 위기를 타개하려면, 교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엡 4:15).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교회의 그분의 몸이다. 이렇게 몸이 머리로부터 공급받아 건강하게 지체들이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 때문에 한국교회를 보호하시고 이 땅에서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IV. 사도신경 해설: 가톨릭 교리와 비교
1. 칼 5세가 1555년에 루터파의 신앙을 인정하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분열된 기독교계의 합동을 위한 많은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때에 유행하던 구호가 있었다. “필수적 요소에는 일체를, 의심스러운 사안에는 자유를, 모든 사안에서 사랑을!”30) 이런 구호를 최초로 발한 이 중에 루터파 신학자인 G. Calixtus(1586-1656) 있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였던 그는 세례신경인 사도신경을 기초로 하여 교회 연합을 제안하였으나, 비텐베르크의 신학자 A. Calovus(1612-86)는 그를 타협주의자로 정죄하였다. 즉 사도신경에는 구체적인 삼위일체론이나 속상론이 없으며, 원죄론과 칭의론도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게다가 기독론의 속성의 교류, 중생, 회개와 성화는 없고, 게다가 구원에 꼭 필요하지도 않는 동정녀 탄생이나 음부하강 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암묵적 신앙’(fides implicita)을 따를 수밖에 없으며, 사도신경은 초보자의 믿음을 담을 정도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비판의 배경에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라는 강한 불신도 깔려있다.31) 이런 경향과는 달리 계몽시대의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에 대한 불신보다는 그 내용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렘 3세는 1816년에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여 루터파와 개혁파의 합동의 근거로 사도신경을 제시한다. 합동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던 슐라이허마허(1768-1834)는 사도신경에는 종교적 기본 맹아(씨)가 들어있다고 보았고, 단순한 신앙을 추구한 덴마크의 그룬트비히(N.F.S. Grundtvig; 1783-1872)기록된 성경말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19세기 독일에서는 사도신경을 거부하거나 자유롭게 해석하여 고백하는 양 극단의 주장자들이 목사직에서 면직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니쯔(K.I. Nitzsch; 1787-1868)는 동정녀 탄생과 성령에 의한 잉태, 음부하강과 육의 부활을 거부하였다.
독일교회 안에서 사도신경 때문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은 하르낙(A. von Harnack; 1851-1930)이 촉발하였다. 독일 남부의 목사 슈렘프(Ch. Schrempf; 60-44)는 세례 집례 시에 사도신경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하르낙은 독일교회는 사도신경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경을 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다만 아직 시기상조이며, 그 어간에는 사도신경의 문자적 해석과 사용을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문자적 수용이 결코 신앙의 정통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동정녀 탄생을 예로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를 지지하는 신학자들(Kattenbusch, Herrmann)과 반대하는 보수적인 신학자(Cremer)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오갔다. 이로써 사도신경은 목사 임직과 세례 집례에서 교회법적 사안이 되었다.32) 홀(K. Holl; 1866-1926)은 어떤 신자라도 사도신경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논쟁은 일단 기독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확증된다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남긴 풍성한 신경 해석과 해설을 고려하면 이는 19-20세기 독일신학의 빈곤을 보여준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신자와 신학자에게 ‘본래적인 바’가 되었다(슐라이어마허). 그러나 독일 교회는 여전히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노래하고 있다.33)
사도신경은 세례고백과 신경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본 교리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폐기하거나 확장할 필요는 없다. 또는 사도신경을 교회의 합동의 기초로 삼는 것도 아주 순진한 이상주의의 발산이다. 종교개혁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 예배와 정치의 오류를 바로 지적하고 성경으로 돌아와 교정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무시할 수는 없으며, 그 이후에 일어났던 루터파와 개혁파의 발전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신경의 12 항목 위에 성경의 교리를 확장하면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교리교육서가 좋은 예이다. 우리는 교회의 분열과 연합 또는 합동에 결코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여 고백과 고백의 해석을 성경적으로 고수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다. 여기에 사도신경은 여전히 좋은 안내자이다.
2.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
사도신경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아온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예를 들어 살펴보자. 사실 고백의 원형은 베드로의 고백이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고 고백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 가르치기와 전도하시를 그치지 아니하였다(행 5:42, 8:5,12, 9:22, 17:3, 18:5,28; 롬 10:9). 이를 근거로 삼아 사도신경 제 2부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님이심을 믿습니다”로 번역함이 옳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고유한 이름으로 정착되기 전에, ‘예수님이 성경을 따라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이 선행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그 예언의 성취를 증거한다. 내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노라’(행 8:37)고 고백할 때,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8). 사도신경이 세례신경이라면 그 시초는 예수님을 고백하는 고백이다.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의 근거는 마태복음 1:18절과 누가복음 1:35절이다.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눅 1:35). 마리아는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마 1:18,20). 이것은 요셉에게 천사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하면서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는 전갈과 맥을 같이 한다(마 1:23).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따라 아버지가 없을 뿐 아니라, 성령과 마리아의 결혼을 통하여 출생된 분도 아니다. 성경과 고백은 이것을 생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동정녀 탄생과 성령에 의한 잉태는 상호 연관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이적을 표현한다. “성령께서 이 출생에 활동함은 천상적, 신적 본체를 마리아에게 쏟아 붓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태를 여는 능력 시위와 구름같이 임함에 있다.”34) 또 그의 수태에서 남자의 배제는 행위 언약의 결과인 죄 속에 그리스도가 포섭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친다.35) 그는 인간이 생각하여 만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신 분이다(고전 2:9; 사 64:4, 65:17의 인용).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신다(요 1:14).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바로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연약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는 뜻이다.
성령은 로고스가 채용한 인성을 사로잡아, 그것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한 비고 빈 형태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당신을 계시하셨는데, 이는 육신으로 나타난 계시이다(고후 5:19).36) 큰 경건의 비밀의 처음은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심이다(딤전 3:16). 성부는 성자와 성령 없이, 성자도 성부와 성령 없이, 성령 역시 성부와 성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좋은 본보기가 성령에 의한 잉태이다.37) 성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이처럼 성육신의 길을 여셨다. 우리는 이 신비를 더 이상 풀 수 없다.
사도신경은 이를 정리하여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간명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이런 간명한 고백이 이후 교회 역사에서 마리아론으로 발전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고, 비판 받아야 마땅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런 그릇된 주장을 논박하려는 정당한 입장이 개신교회 일각에서는 과격하게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조차 부인하는 움직임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비록 성경에 기초한 고백이라도 지속적으로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 말씀대로 이 고백을 견지해야 한다.
우리가 거부하는 마리아론은 교회사 초기부터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교회역사 초기부터 하와와 비교되었으며, 기독론의 논쟁 가운데서 에베소회의(431)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렀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335/40-394)는 모세의 가시덤불이 타지 않은 것처럼 마리아도 아기를 낳았지만, 동정성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시리아의 에프렘(Ephrem; 306-373)은 진주 조개가 돌을 받아들이고 돌이 진주가 되어 내어 놓을 때에도 손상을 받지 않듯, 마리아도 이와 비슷한 이치로 예수를 잉태할 때와 낳을 때에 아무런 고통도 손상도 입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히에로니무스(347-420)는 예수가 동정남으로 살았듯이 마리아 또한 동정녀로 평생을 살았다고 말하였다. 결국 제 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회의(553)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의 신분을 지켰다고 결정하였다. 둔스 스코투스(1266-1308)는 마리아가 아담의 후손이므로 응당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면제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성모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하는 사실은 성모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교황 비오 9세는 마리아의 무흠수태(1854)의 교의와 동시에 12월 8일을 동정녀 마리아의 무흠수태대축일로 선포한다. 그리고 1858년 프랑스 쪽 피레네 산맥 루르드(Lourdes)에 성모 발현이 일어나면서 이 교의는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되었다(루르드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마리아는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모두 18회 발현하였는데, 마지막 발현 때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만약 마리아가 죄를 정복한 새 아담의 승리를 공유하는 새 하와라면, 죽음과 육신의 부패를 정복한 새 아담의 승리 또한 공유해야 마땅하다. 다마스쿠스의 요한(655-750)은 마리아의 승천을 그녀의 동정성의 신비와 연결시켰다. 서방 교회에서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처음으로 성모 승천에 관해 언급했는데, 마리아의 임종으로 모든 사도들이 모였고 마리아의 육체는 무덤에 안장된 다음 영혼과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급기야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 교의와 더불어 8월 15일을 대축일로 선포하였다(1950). 흔히 말하기를, 삼위일체론의 논쟁으로 예수님의 인성은 약화되고 신성만이 강화되었기에 신자들에게서 점차 멀어졌으므로, 훨씬 더 가까이에 있으면서 친근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성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 중에서도 동정녀 마리아가 가장 친근하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교회사 초기부터 신앙의 모범이요 모든 성도의 어머니로 불렸고 여자 구세주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이것은 성인과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정도는 넘어서서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손하는 엄청난 오류이다. 이 배경에는 게르만족 신화나 민담이 있다. 곧 그들의 수호신이 그들의 집단 개종과 함께 교회 안에서는 성인으로 탈바꿈하였다. 마리아론은 민중신앙에 기초한 어용신학의 대표적인 예이다.38)
그렇지만 개신교회 안에도 마리아에 대한 재평가가 요청된다. 성인숭배에 대한 지나친 경계로 인하여 마리아에 대한 설교는 희귀하다. 성탄극에서 마리아는 자주 등장하지만, 구주 메시야를 대망하고 성육하신 구주를 처음으로 뵌 성경적 인물인 마리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초기 행적뿐만 아니라 이후 사역의 많은 부분을 기억으로 남겼고, 이것들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마리아보다는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막달라 마리아가 더 자주 설교되는 현실은 반성할 소지가 있다. 설교에 수많이 등장하는 예화의 주인공들보다 마리아는 설교에서 훨씬 덜 언급된다. 사실 이들은 개신교 안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의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마리아는 성경적 인물이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룬 도구였기 때문에, 마리아의 믿음은 어떤 교회사적인 인물보다 더 칭송받아야 한다. 노인 사가랴와는 달리 마리아는 어떤 징벌을 받지 않았다. 메시아의 오심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능력을 믿었던 마리아는 그 말씀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질 것을 고백하였다(눅 1:38).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 1:45)고 마리아를 환영하였다. 마리아의 믿음이 막달라 마리아의 행위에 앞선다.
V. 사도신경과 목회
목회는 어용신학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마리아론처럼 민중신앙을 정당화하는 목회에서 어용신학이 생겨났고 여전히 생겨나고 있다. 대중을 붙잡아두기 위하여 대중의 욕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빛으로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욕구를 맞추는 목회는 항상 있어 왔다. 어용목회가 대중의 욕구를 피상적으로 책망하려는 것 중에 연옥사상이 있다. 그것은 대중의 상상력에 의지하여 그런 상상력만을 옥죄일 뿐, 욕구 자체는 예수님의 마음(빌 2:5)을 품게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민중신앙은 끊이지 않고 민중신학만을 만들 것이다. 목회는 근본적인 이식 수술과 같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만드신 하나님을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의 영이신 성령(벧전 4:14)을 의지하여 새 피조물(고후 5:17)을 만드는 새 창조 작업이 목회이다. “하나님께로의 회개가 사람들을 영적 생명에로 회복시킬 때, 이 회개는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일 뿐 아니라, 사실 인간의 창조 그 자체보다도 더 위대하다. 이렇게 볼 때 말씀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과 동등하다 하겠고, 하나님이 창조주인 한 그들은 하나님보다 위에 있다 하겠다. 즉 하늘 생명에로의 중생은, 죽을 존재로 땅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39) 이 엄청난 사역을 어찌 게으르게 수행하랴!
목회는 불신자와 이방인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 선포로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간곡한 외침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누구라도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얻는다(행 2:38). 성찬의 떡은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몸이며, 잔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우리를 위하여 흘리시는 언약의 피이다(마 26:28; 눅 22:19). 사도신경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사죄를 고백한다. 이처럼 설교와 성례로 행하는 예배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벧전 1:12). 예배 집례를 중심으로 삼는 목회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사역을 계승하며, 목회의 모본은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감독하면서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벧전 5:2-3). 그러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벧전 2:21). 목사는 그분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특히 그분이 죽기까지 자기 아버지께 행하셨던 복종을 배워야 한다(빌 2:8). 그분은 아드님이시면서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히 4:8-9). 목사는 고난 중에 순종하여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목회는 고난이다. 고난은 고통이나 슬픔과는 다르다. 고통이나 슬픔 그리고 근심이 고난에도 나타나지만, 목회의 고난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움이다(골 1:24). 사도신경은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사” 이 고백에는 예수님의 삶 전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시다(사 53장).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사람과 같이 되신 성육신부터 십자가와 매장과 음부 하강까지 육신으로 계셨던 생애 전부가 고난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셨다(눅 24:26). 부활이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요 그의 영광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세례는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건이다(롬 6장).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만을 기념하는 추도식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늘 누릴 영원한 생명, 곧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성례이다. 목사는 부활을 설교하며 회개하는 자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면서 그분의 고난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하며, 성찬으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게 한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인가!(고후 3:8)
그런데 우리도 사도신경의 고백을 따라 예수님처럼 먼저 고난에서 이후의 영광에 이르는가? 바울 사도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롬 8:18). 그러나 이 말씀은 이후 30절과 연관하여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리 정함을 받아 소명과 칭의를 받았고 게다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 여기서 영화는 미래를 지칭하지 않고 이미 받은 영광을 말한다. 곧 부활의 영광이요 세례에서 인 쳐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말한다. 세례로 우리는 이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 자들이다!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는 “이 때”(롬 3:26)의 고난을 족히 감당할 수 있으며,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래의 영광 곧 영광의 완성인 몸의 속량을 고대한다(롬 8:23). 쉽게 말하자면 죽은 자는 고난을 짊어질 수 없다!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며(고후 3:18), 생명에서 생명에 이른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울 수 없다.
고난에서 부활의 영광에 이른 그리스도와는 달리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받아 고난을 통하여 장차 나타날 영광에 이를 것이다. 세례로 참여하는 부활의 영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를 수 없다. 만약 이런 주장을 의도적으로 고수한다면, 필시 아리우스의 오류나 펠라기우스의 거짓 교리에 빠지면서 중세 로마교회가 오류에 빠져 만들었던 면벌부를 발행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막연하게 고진감래(苦盡甘來)를 가르치지 않으며, 막연한 기복사상도 역시 가르치지 않는다. 상급은 산 자에게 속한 것이지 죽은 자는 생명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사망의 징표를 남길 뿐이다. 부활의 복음은 죽은 사람을 살려 무덤에서 나와 자기의 부활체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다(마 27:52-53). 산 자만이 영원토록 구원의 삼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이 찬양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배우기 시작한다. 성도들은 이 찬양을 설교로 배우고 세례로 체험하며 성찬에서 완성을 고대하며, 세상으로 나가 삶으로 찬양한다.40) 고난의 상급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고난을 짊어지고 완성될 영광을 사모한다.
그리스도처럼 세례에서 육체의 고난을 받아 죽은 자(롬 6:4 이하)는 부활의 영광을 입었기 때문에 죄를 그친다. 그 후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한다(벧전 4:1-2). 곧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는 지나간 때로 족하다. 교리에서 윤리가 나온다. 목회 특히 설교는 엄중한 사역이며,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부터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벧전 4:17). 복음 설교는 사람을 살리지만, 동시에 사망을 선언하기도 한다. 설교는 요약된 말씀인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의 선언이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 선포되는 심판도 최후 심판에서 완성된다.
참고로 사도신경의 음부하강은 예수님께서 음부에 복음을 전하러 가신 것이라기보다는 죽어 장사된 뒤에 음부에서 죽음을 온전하게 당하셨다는 고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음부에서 부자는 머물 뿐이지 나사로가 가서 전하여도 형제들은 부활을 믿지 않을 것이다(눅 16장; 시 30:9, 88:11 참조).
부활과 영광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폐단이 한국교회 안에 많이 나타난다. 가장 큰 폐단은 어떤 형태이든 천년설적인 이원론이다. 한국교회 안에 깊이 침투한 공로와 상급 사상도 큰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삯을 받은 자로서 주님의 포도원에 투입되었다. 그런데도 고난 후의 영광이라면, 여전히 우리는 주님을 우리에게 빚진 자로 착각하는 큰 잘못에 빠져있는 셈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직분 이해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 이처럼 교리에서 예배와 직분과 삶이 나온다. 교리에 기초하지 않은 예배와 직분과 정치로부터 성경적 기초를 찾거나 묵인하면 어용목회와 어용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목회의 고난도 늘 심판 아래에서 수행해야 한다.
우리의 건강도 부활로 산 자답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주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한국인처럼 건강에 관심이 많은 민족도 드물다. 좋은 음식은 찾아 먹고, 운동이라는 운동은 다 하고, 그러다 체중을 조절하기 위하여 비만 클리닉을 찾기도 한다. 이 배경에는 무명장수를 추구하는 신선사상의 영향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입으시고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시고 그대로 승천하신 같은 ‘몸’을 부활체로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몸을 잘 간수하고 건강을 지켜야 한다. 건강 자체가 목표가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도교사상의 영향과 동시에 기복사상도 한국교회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또한 교파를 막론하고 예정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불교의 인과사상이 작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여 세례로 완전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이전의 한국인의 종교심이나 모든 관습(ἀναστροφή)에는 죽었다. 이 때문에 건강이나 복, 삶의 방식(ἀναστροφή)이 이방인과 때로는 외형에서 같아도 부활에 기초하여 완전하게 다른 ‘나그네’임을 명심해야 한다.
VI. 사도신경과 성도의 일상적 삶
사도신경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고백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천지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고 선언한다(마 28:18).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제 2부와 성령님의 사역을 고백하는 제 3부도 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내면뿐만 아니라 육체성까지 다 구속하셨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서 한 치도 없다.”41) 성령께서는 설교와 성례를 사용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천지의 통치자로 삼으신다.
목회는 일차적으로 교인을 만드는 목적을 지향한다. 그렇지만 목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시민을 양성함에 있다. 아니, 삼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백성을 불러내어 몸소 하나님의 다스림을 천지에서 실행하게 함에 있다. 따라서 목사는 온갖 직업을 다 경험할 수 없지만, 이 땅의 모든 직업을 가진 자들을 훈련하고 파송하는 크고 큰 직분을 맡았다. 목사는 예배공동체인 교회를 먼저 섬기지만 교회의 권계를 넘지 못하는 목회는 교회주의에 빠지며, 교인들은 교회주의의 담장을 넘지 못하는 속박된 죄수 꼴이 되고 만다.
땅에서 성육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지금은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왜 천지 위의 권세를 받으신 분이 땅에 거하지 않고 하늘로 가셨는가? 이것은 창조 당시의 인간의 사명과 연관된다. 타락으로 인하여 첫 아담이 거부하고 결국 그 능력까지도 상실하고 만 세계 통치이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를 장악하시고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으로 권세를 보이셨고, 부활로 천지위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자기가 가르치셨던 청지기 비유처럼 이제는 청지기인 우리를 불러 땅을 다스리게 하신다. 세례로 부활의 영광을 입은 우리는 모범적인 청지기이다.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는 왕의 부재시에도 왕의 분부를 받들어 섬기고 수행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왕은 자기의 성령으로 청지기와 늘 동행하시면서 자기를 본으로 삼아 따르게 하신다.
곧 섬김으로서의 통치이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권력자들은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그분은 섬기려고 오셨다.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말로 하자면 섬김이다. 고난의 종은 섬김의 종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통치와 지배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셨다. 주관이나 지배가 아니라 섬기고 고난을 지는 방식으로 세상의 원리를 전복시키셨다. 이것을 목사와 장로가 말과 삶으로 교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교인들은 이런 섬김으로 훈련을 받고 세상에 나아가 세상의 원리를 조롱하면서 섬김으로서의 통치를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정말 섬김의 공동체인가? 교회에는 교권이 자리 잡고 있지 아니한가? 장로교정치는 교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감독정치처럼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중정치처럼 회중에게 참여권은 인정하지만 회중 모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장로정치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하는 당회와 노회와 총회의 형식으로 치리를 시행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치리가 미치는 치리회는 항상 교리와 예배에서 일체성을 표방하면서 이를 보호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치리한다. 교리와 예배에 기초한 교회의 일체성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치리는 그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나아가 교회의 치리는 영적이며 따라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치리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권이 결집하거나 특정인이 교권 형성을 시도해서도 안 된다.
현금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런 장로교 고유의 정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이것은 장로교정치에 대한 인식 부족에도 원인이 있고, 동양적인 한국인의 권력의식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치리회에서 목사의 위치가 주도적인 것도 직분론의 문제이다. 또 노회와 총회의 회장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한 것도 목회 사역과 이런 치리회의 일을 겸하는 것이 버겁기도 하거니와 교권의 형성을 원초적으로 막으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런 의도와는 달리 장로교회 안에 특정 정치세력이 존재하면서 교권을 지속적으로 점유하거나 반대 파벌이 등장하여 교권을 두고서 세상적 정욕을 따라 사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섬김으로 치리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치를 모욕하는 일이다. 게다가 돈으로 표를 팔거나 사는 행위조차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욕되게 할 뿐이다. 또한 총회 사무실을 중심으로 교권이 이합집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장로교회다운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을 계승하는 일일 것이다.
신앙고백 공동체인 교회는 새로운 백성이다.42) 이를 매주일 확인하고 세상을 파송받아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을 때를 살아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성도는 이처럼 이 땅에서 아버지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고대교회가 갓 세례를 받은 자에게 소금을 받아먹게 한 것은 그 상징성이 크다. 세상에서 살되 옛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새사람으로서 변화시키고 개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한다. 우리를 만드신 삼위 하나님을 사역을 들어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 이름으로 서약하며, 그 이름에 걸맞게 살고 세상을 그분의 다스림으로 지배받도록 하겠다는 서약이다. 부활의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로잡혔던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 시 68:18절 인용).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그것들의 포로였던 우리를 부활로 사로잡아 풀어주시고 자기의 포로가 되게 하셨다. 풀어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값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다! 자기를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리고 자기의 이름과 권세를 펼치는 사명을 주셨다. 이것이 교인의 사명이다.
이 때문에 교리교육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중요하다. 성경을 잘 요약한 사도신경은 세례신경으로서 교인의 영적 출생을 지시하며, 교인들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할 때마다 사도신경과 세례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점에서 특히 교회와 성도들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혼인을 거룩하게 하며, 언약의 자손을 출산하는 일에 신실하며, 자녀들에게 세례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미 400년 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은 제 7계명이 금지하는 죄 가운데 “결혼을 지나치게 미루는 것”을 언급한다(제 139답).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은 취직과 주택 그리고 자녀양육비에 짓눌려 혼인을 포기하거나 늦게 하거나 혼인하여 출산하지 않는 풍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자리 공유, 주거비 인하와 교육비 경감 등은 현재 아주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언약 백성은 혼인과 출산을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고난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혼인하고 출산하는 일을 보고 이들을 세상의 젊은이들이 이상하게 여겨 비방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벧전 4:4 참조).43)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 전입 등이 당연시되는 세상 가운데서 이를 믿음으로 피하고 정의롭게 살면서 사회적 약자와 젊은이들이 정상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출산하도록 도우는 것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큰 사명이다.44)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그네인 신자의 사명이다. 나그네는 천상을 향하는 순례자가 아니다. 이 땅에서 이상하다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이다. 그러나 나그네의 삶은 변화 받은 삶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정상적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이것이 이신칭의였고, 비정상의 정상화, 이것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성도가 세상에서 정의롭게 살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 아무런 괴리가 없는 곳, 믿음과 사랑 실천이 입맞춤하는 그곳을 향하여 나그네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을 매주일 예배에서 선물로 받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복된 나그네, 이것이 사도신경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약속과 서약이다.
VII. 맺으면서
우리는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공교회의 신자이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교회가 공교회이다. 공교회성은 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이 온전하게 미치는 교회를 뜻하며, 교인들이 삼위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역을 세상 곳곳에서 보여주는 데에서 나타난다.
교회는 늘 개혁해야 한다. 우리에게 개혁의 기준은 성경이며 잣대는 우리를 개혁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를 우리는 매주일 세례신경인 사도신경으로 고백하고 서약한다. 사도신경은 성경 말씀을 가장 짧게 잘 요약한 신경이니, 이 신경은 세례로 교인이 된 자의 자기 고백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가? 삼위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늘 이 삼위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야 한다. 그게 교리이다. 교리는 주로 설교와 성례로 선포된다. 그곳이 예배이다. 교리와 예배를 담당하고 순결하게 지키고 일체성을 나타내도록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교리와 예배와 설교는 교회사에서 항상 부패하는 경향을 지녔다. 이를 맡은 인간이 본래 죄인이요 여전히 죄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과 그리스도를 잣대로 삼는 교리교육과 설교가 매주일 요청되며 공동체적 훈련을 통하여 지속적인 개혁을 실천해야 한다. 개혁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며, 동시에 우리의 사명이기도 하다. 중세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을 유발한 반면교사이다. 현재의 가톨릭교회도 여전히 우리에게 반면교사이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자들에게 유산으로 전한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 등으로 교사의 사명도 하였다. 즉 중세를 매도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개혁은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그 채널을 협소하게 만드는 경향을 지니면서 파당적이고 분열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종교개혁은 교리개혁, 예배개혁과 교회정치개혁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교리와 예배와 치리에서 개혁해야 할 일들이 없는가? 이것은 특히 예배집례자인 목사의 과업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이를 위하여 목사는 무엇보다도 교사로서 잘 가르쳐야 한다. 성경 말씀을 날마다 기도로써 깨달음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회중의 설교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게 하여야 한다. 회중은 먼저 예배에서 배우고 집에서 자녀들을 가르쳐야 한다(신 4:10). 언약의 자녀들은 성경과 교리로 무장하여 학교와 사회에서 공부하고, 교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45)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존재 이유는 없으며 예배의 의의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유수’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날마다 ‘개혁되는’ 은혜를 받아 사도신경을 따라 교회를 고백공동체로 세우는 목회할 때에, 주께서 우리의 사역에 복을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을 매주일 파송하여 이들이 세상을 개혁하는 놀라운 일을 주실 것이다.
1) Augustinus, Sermo 59,1, PL 38,400.
4) 종교개혁 2세대 루터파들, Y. Feenstra, Het Apostolicum in the twintigste eeuw, Franeker 1951, 27
7) 이에 대해서는 유해무, 「개혁교의학」, 87-96; 「삼위일체론」, 23-28을 참고하라.
8) Cf. 정두성, 「교리교육의 역사」 (서울: 세움북스, 2016).
10) Ph.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1, 1931, 246.
14) Cf. 유해무, 김헌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서울: 성약, 2006).
17) J. Koopmans, Het oud-kerkelijk dogma in de reformatie, Amsterdam 21983, 39.
21) ‘(믿음을) 멸하다’는 표현은 “교회를 멸하다”와 같은 맥락이다(갈 1:13).
22) 개역이나 그 개정판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즉 ‘듣고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들음’이다.
23) 신약에서 21번 중 15번이 목회서신에 나온다.
24) ‘바른 말씀’(딤전 6:3; 딤후 1:13; 단수로는 딛 2:8=lo,goj u`gih/j).
26) 고린도전서에서는 전도로도 번역한다, 1:21, 2:4.
29)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5)
30) “In necessary things unity, in doubtful thing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32) 최근 고신교회 안에는 공예배에서 사도신경의 고백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합당하지 않다.
33) H.-M. Barth, “Apostolisches Glaubensbekenntnis III”, RGG 3, 1978, 558-563.
37) B. Forte, Trinität als Geschichte, Mainz 1989, 149.
38) 이에 버금가는 그릇된 교의가 교황수장권이나 교황무오설이다.
40) 재세례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성례는 누구에게든지 단 한 번만 베풀어야 한다”, 신앙고백서, 28,3. 성찬은 자주, 그것도 매주 시행해야 한다.
43) 신자인 션-정혜영 부부는 4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기 집이 없지만, 지금까지 약 45억원을 여러 선한 일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45) 교회마다 또는 교회 연합으로 교리학교와 기독교학교를 세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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