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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9일(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가 있었다. 그날 발표된 글을 차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고재수의 신학과 고신교회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

 

 

   고신 교회는 고려신학교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교회로 출발하였다. 유일한 장로교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 일제에 협력하던 이들이 1940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1946년에 장로교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고백자들은 해방 후 조선신학교 측과 이른바 교계 지도자들로부터 일제의 박해에 버금가는 배척과 박해를 받았다. 이들은 1946년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 정신과 실천은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믿음의 행동이었고, 이 믿음의 고백을 계속 실천하기 위하여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서울이 아닌 부산에 세웠다. 이 또한 시대와 공간에 얽매인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이 고백자들의 후예인지 확인할 책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의 정체성의 배경에는 틀림없이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사역과 영향이 깃들어 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가르쳤으며, 초기부터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소교리문답을 소개하였다. 이런 전통에 이어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에는 정통신학운동에 기초한 교회 재건과 더불어 조국을 주님의 진리대로 받드는 천국의 진리운동을 표방하면서 또 다른 신학적 배경을 암시한다. 특히 성경 진리에 기초한 국가 건립은 보통은혜 원리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1] 부산/경남 지역은 호주 장로교회의 선교지이었지만,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배경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수용하는 미국 장로교 전통과 보통은혜 곧 일반은혜를 강조한 화란 개혁파 신학이 초기부터 깃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성경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설교, 신조, 그리고 일반은혜 원리 및 이와 연관된 일반계시/신지식/신의식의 주제를 채집할 수 있다. 성경관과 설교는 한국교회의 공통적인 관심사이지만, 후자의 두 주제는 고신 교회의 독특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에서 사역한 고재수 교수의 활동과 그의 신학 작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첫 주제 역시 고신 교회의 최근사에서 동일한 독특성을 보여준다. 즉 그는 구속사 설교를 소개하였고, 그 신학적 기초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설교뿐 아니라 신학의 텍스트인 성경 이해와 사용도 포함한다. 나아가 그는 자기의 일터였던 한국교회 안에서 토론의 소재였던 성령세례를 다루면서 성경과 고백 위에서 이를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올바른 성령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 고재수와 한국 사역

 

   고재수는 1948년에 태어났다. 1974년에 네덜란드 캄펀 소재 개혁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9월 레이든 교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고려신학교 교수회의 요청으로 그는 1980년 2월에 한국으로 와서 교의학(서론, 신론)과 헬라어/라틴어를 가르쳤다. 1985년 1월에는 모교에서 『하나님의 영성』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89년 10월에 캐나다 개혁교회(Canadian & American Reformed Churches)의 총회는 해밀턴(Hamilton) 소재 신학교 이사회에게 그를 교의학 교수로 임명하였고, 그는 1990년 1월부터 교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2007년까지 교수로 사역하다가 2023년에 별세하였다.

   고재수는 모국어인 화란어와 한국어와 영어로 여러 저서와 논문들과 다양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저서만을 살피자면, 『하나님의 영성』(1984),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1987),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1991),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1천안: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2001), 『십계명 강해』(서울: 여수룬, 1998), Both in Life and in Death: Biblical Notions in Connection with Today's Tendenry Towards Euthanasia(1994), 『세례와 성찬』(서울: 성약, 2005), The Belgic Confession: Its History and Sources(2007),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서울: 성약, 2008)[3], Teaching and Preaching the Word(2010), 『그리스도를 고백함』(서울: 성약, 2010), 공저로는 Watching Movies: No? Yes? How?(1996)가 있다.[4]

 

 

2. 구속사 설교

 

   한국교회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영감을 고백하며,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사경회의 전통은 한국교회의 자랑거리에 속한다. 말씀 사경회 또는 말씀 부흥회라는 말도 우리 귀에 익숙하다.

   고재수는 “설교자의 임무는 자기의 생각이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천명한다. 이 일을 잘 드러내는 방식이 구속사적 설교이며, 그는 신학생으로서 자신의 모교에서 이를 배웠고, 목사로서 그렇게 설교하였고, 교수로서 고려신학교에서 이 방법대로 설교하였다.[5] 그는 신학생들의 요청을 받아, 주로 고려신학교 경건회에서 행한 설교들을 묶어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출판하였다.[6] 이 책 말미에는 이 설교 방법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도 첨부하였다.[7]

   고재수는 설교에서 ‘하나님 우선’을 강조한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설교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설교자는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묘사되고 그 범위 안에서 인간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구약에 기록된 역사를 연구할 때 설교자가 물어야 하는 첫 번째의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의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 시각으로부터 다음으로 설교자는 인간의 행동을 고려해야 합니다. … 신약에 기록된 역사에 대해서도 이 규칙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사람이 서로 만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때에도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과 말씀이 중심적이 되야 합니다. 설교자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느냐를 중심으로 삼아 그것으로부터 오늘 신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면 되느냐의 문제에 적용시켜서는 안됩니다. … 성경에서 역사가 이야기되어진 방식, 곧 삼위 하나님이 우선적 위치를 가진다는 사실이 설교의 초점을 결정하는 것입니다.”[8] 이런 그의 입장은 다른 신학적 사안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그는 자연계시를 다루면서 계시의 주체인 하나님 우선이기 때문에 신의식의 존재에 대한 칼뱅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둘째, 성경 역사에는 다시 재현되지 않는 역사적 발전이 있다. 발전이라 하여 불순종, 쇠퇴, 배반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구속사의 과거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돌아보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 성육신이 되풀이되지 못하듯,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성경은 구속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연히 중심적 위치를 가진다. 예수님의 중심성은 구약에도 해당하며, 승천 후에도 계속된다. 그분의 인격뿐만 아니라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왕이신 그분의 사역 전부를 말하며, 구원 중심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을 말한다. 설교자는 어떤 본문이든지 그리스도와 구원과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며, 다양하게 구원을 접근할 수 있다.[9] 즉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정부의 임무도 구원과 관련하여 다룰 수 있다.

고재수는 모범적 설교에 대해서도 말한다. 홀버다(B. Holwerda, 1909-1952)는 역사적 성경 본문을 다룰 때 모범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곧 구속사적 설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 그는 모범적 설교보다는 성경의 인물들을 그들의 시대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사역과 분리해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홀버다는 히브리서 11장에 거론된 인물들은 교리적 설명에 대한 예화로 보는 반면, 트림프(C. Trimp, 1926-2012)는 예화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의 증거로 보면서 모범이 굳이 역사를 무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역사는 예화요 권면이며 경고로 본다.[11] 고재수는 성경 본문을 단지 일반적 규칙의 예화로 사용하거나 역사적 배경과 분리시키는 것, 한 요소만을 설교하고 적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성경의 사건은 역사적인 차이와 발전을 고려하면서 오직 성경 본문으로부터만 모범으로 사용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도록 예시적인 모범을 사용한다. 즉 하나님 우선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역사와 언약 백성과의 교제의 역사를 묘사할 때, 그분의 행동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나오며, 인간은 이에 근거하여 응답한다. 인간의 응답은 하나님을 모범으로 삼는다.[12] 또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사역을 설교하면서 그분의 순종을 모범으로 언급할 수 있다.[13] 이 관점에서 인간도 모범일 수 있다. 가령, 라합의 거짓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다음에, 라합이 하나님을 고백하는 믿음이 나온다(수 2:11).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설교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지만, 핵심은 될 수 없다. “핵심은 하나님이 라합의 믿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실에 있습니다.”[14] 그리고 그녀의 믿음을 모범으로 사용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화와는 달리, 성경 밖의 예화는 오히려 성경의 메시지를 제한하거나 본문의 의미와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게다가 성경보다 예화의 흥미로 관심을 끌다가는 청중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다. “오늘 청중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성경 본문이 적용되도록 하는 것은 어떤 훌륭한 예화보다도 유익한 것입니다.”[15] 마지막으로 고재수는 설교의 중심 사상을 주제와 대지로 제시하여 회중이 설교의 흐름을 쉽게 따라가도록 배려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고재수가 제시하고 실행한 구속사 설교의 실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11장을 본문으로 삼은 고려신학교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1901-76)의 설교와 그의 설교를 비교하려고 한다.[16]

   한상동은 히브리서 11:1-6절을 본문으로 삼아 “신앙은 소망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인생은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땅 위의 소망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 소망은 하늘나라입니다’라는 대지를 구성한다.[17]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소망을 보여주며, 소망은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이 있는 기다림의 소망이다. 믿음은 장래 세계, 곧 하늘나라를 보여준다. 동물계에는 소망이 없으며, 인생만이 소망의 동물이다.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발전이 있다. 인간 세상의 모든 학문이 소망을 준다고 하나 그 소망이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 없이는 인생은 허무한 존재이며, 믿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소망은 영원하다. 곧 하늘나라 소망이다. 이 내세에 소망을 둘 때, 현세의 어떤 어려움도 참고 살 수 있다.

   고재수는 히브리서 11:1을 본문으로 삼아 “히브리서 기자는 약해진 신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가르친다”라는 제목으로 ‘1. 믿음의 대상, 2. 믿음의 특징, 3. 믿음의 중요성’을 대지로 제시한다. 히브리서 수신자 중에는 믿음의 일면을 무시하는 자들이 있었다. 삶의 핵심적 요소인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인데, 바라는 것은 책상이나 자동차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바란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12:28). 그 나라에서 우리는 사죄로 영생을 얻으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 실상은 근거나 확신을 주신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이런 성취에 기초하여 장래에도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실 것을 확실히 안다.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또는 확신이다. 믿음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줄을 확신함이다. 그런데 이 약속을 받았음에도 우리는 종종 잊고 무시한다. 수신자들에게 인내가 필요하였다(10:36). 사단의 공격, 사람들의 박해, 또 마음에 남아 있는 죄 때문에 예배 생활에 열심이 식어지고(10:25) 생활 속에서도 다시 옛날 죄로 돌아가며 다른 사람처럼 사는 모습을 갖기 시작하였다(10:39).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믿음을 통해서이다. 믿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핍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줄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실 줄을 확실히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바라는 신자는 핍박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통하여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용이다. 한국 신자들이 박해당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서의 위치나 이익을 우선적인 것으로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믿음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항상 기억하고 바라보는 이런 믿음이 있기를 권면하면서 설교를 마친다.

 

   두 설교자의 설교는 크게 보아 일치한다. 특히 믿음이 바라는 실상을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로 본 것에서 일치한다. 다만 한상동은 하늘나라를 요한복음 14:1에서 제시한 반면, 고재수는 히브리서 11:28을 인용한다. 한상동은 땅과 하늘을 대비하는데, 고재수는 돈이나 세상의 지위를 경계하고 믿음이 바라는 실상을 하나님 나라임을 강조하지만 그런 대비를 말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상동은 설교 제목 “신앙은 소망의 생활”에서 소망을 강조하고, 세 대지도 다 소망을 말한다.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을 가능하게 하며, 믿음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실현한다고 서론에서 언급한 다음, 설교의 본론에서 소망과 바램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는 소망이 인간의 특권이지만, 인생이 바라는 허무하지 않은 소망은 분명코 믿음의 세계에서만 해결된다고 강조한다. 고재수는 인생이 그런 식으로 바라는 소망을 배제하고, 소망은 약속을 바람, 곧 믿음이요, 믿음의 특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줄을 확신함이라고 거듭 반복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하늘나라로 두 사람이 보았지만, 두 설교는 그 전개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굳이 근거를 찾는다면, 한상동은 ‘나의’ 믿음(fides qua creditur)[18]과 이에서 나아오는 바람인 소망을 주로 제시하였고, 고재수는 믿음의 ‘내용’ 또는 대상(fides quae creditur)[19]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게 한다.[20] 한상동은 인간 심리 이해와 분석에 설교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인생이 허무한 것을 소망한다고 책망하는 반면, 고재수는 히브리서 전체 맥락을 고려하면서 시종일관 약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앞세우면서 영구한 소유(10:34)를 바라고 믿음을 통해서 계속 신자로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굳이 대비시키자면 한상동의 설교는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성경관과 설교 형태에 속하며,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하늘나라로 나아간다면, 고재수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여 사람에게로 나아간다. 한상동은 땅과 하늘나라를 대비시켜 하늘나라를 소망하라고 말하지만, 고재수는 이런 박해와 유혹 중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도록 격려한다.

   비록 신약 본문이지만, 고재수는 구속사 설교의 특징인 하나님 우선, 발전과 쇠퇴, 그리고 본문에서 찾는 적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께 우선적 위치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 설교는 아무리 많은 진리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21] 가령 사울이 갈멜에 자기 기념비를 세운 것을 사무엘이 경고한 일을 두고 교만을 경고하는 설교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설교이면, 서당이나 법당에서도 들을 수 있는 설교가 되고 만다. 하나님이 없는 도덕적 교훈은 설교가 아니다. 사울의 죄는 교만이 아니라 아말렉 왕과 가축을 죽이지 않는 불순종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우선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만하게 행하였다(삼상 15:22-23).[22] 우리 신앙의 근본적 태도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계속 듣는 것이다. 사울에 비하여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믿음을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예수님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믿음의 첫 성격이요, 그분 앞에 엎드렸으니 겸손이 두 번째 성격이요, 마지막으로 그분께 다 고했으니, 고백이 믿음의 세 번째 성격인가. 고재수는 사울보다는 이 여인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휠씬 낫지만, 설교에서 그녀의 믿음보다는 혈루증이라는 불결을 용납하신 예수님과 그분의 깨끗하게 하심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적용 역시 구약이나 신약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과 특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의 청중에게로 가야 하는 것이지 그 당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직접 청중에게로 가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고재수는 “하나님의 우선되심이라는 신학 원리를 항상 설교하는 일과 관련시키라”[23]고 조언한다. 곧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이다.[24] 여기에는 성경 전부를 사랑하고 묵상하면서 구체적인 본문을 깨닫고 전하려는 그의 목회적이고 실천적 태도도 서려 있다. 이런 배경에는 성경 이해를 위한 신앙고백에 대한 존중이 있다.

 

 

3.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고재수는 첫 신학의 원리로 제시한 하나님 우선을 고백에서도 찾는다. 그는 “신앙고백과 교회 교육”에서 교회의 교육을 위하여 신앙을 정리한 사도신경과 요리문답 특히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살피면서 두 고백서가 하나님 중심임을 주목한다. 비록 사도신경은 매우 함축된 형식으로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신앙을 더욱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특징과 차이가 있지만, 사도신경은 사실 삼위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중심 자리가 이미 첫 문답에 강조한다.[25] 신학의 원리가 아주 실천적인 교회교육, 그리고 성인이나 신학생이 아닌 어린이에게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재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어디서나 하나님 우선을 말한다고 강조한다. 고백은 신론에 앞서 성경을, 그리고 신론 다음에는 작정, 창조와 섭리와 죄 등을 진술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방식을 설명하며, 작정은 그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셨음을, 창조는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는가를, 섭리는 그분이 어떻게 만물을 다스리시느냐를 말하며,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김이요 하나님이 벌주심을 고백한다. “신앙의 모든 주제에서 하나님은 우선이 되신다.”[26]

   그렇다면 신앙고백이 교회교육에 왜 중요한가? 세례와 연관된다. 새 신자는 수세 전에 교리의 요약인 사도신경을 배워 암기하고 수세 시에 고백하였다. 집례자는 미리 그에게 삼위 하나님 신앙을 사도신경에서 요약하고 설명하고 넓게 가르쳤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이런 설명 없이 암기만을 요청하였고, 신자들의 신앙은 약해졌다. 루터는 심지어 개혁에 가담한 신부들조차 사도신경을 잘 설명하지 못하거나 암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설교로 설명하도록 대요리문답을 썼고, 또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소요리문답을 썼다. 아이들은 사도신경뿐만 아니라 소요리문답의 질문에 대한 답도 외워야 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목사마다 자기 의견대로 교리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그 요리문답의 목적은 교회의 통일이었다.

   고재수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교육할 개인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목사와 교사도 제각기 기호가 다르다. 그 결과로 신앙교육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그룹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신앙고백은 완전한 교리를 제시하므로 교사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교사는 고백을 따라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결과로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 가운데도 신앙의 일치가 형성된다. 이렇게 온전한 고백을 따라 세계 모든 교회의 교사들이 가르치고 교인들이 배운다면 온 세계 교회 안에 바른 신앙의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다.[27]

   고재수는 “신앙고백의 특성과 역할”에서 한국교회가 고백을 대하는 태도를 지적하면서 고백의 울타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교육에서 지닌 역할을 자세하게 다룬다.[28] 1890년 이전에는 번역된 사도신경과는 달리 한국교회 안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의 입지는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907년에 장로교회는 소교리문답만을 인도교회의 12신조와 함께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웨스트민스터 고백들이 한국교회에서 많이 사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시당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실망한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강조했지만 고백은 크게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신조들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고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신조들이 서양교회의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한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고백은 우리의 동의를 요구하는 선언이기 때문에 그는 이런 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출애굽기 3:14, 로마서 8:15, 마태복음 16:16, 로마서 10:9절 등에 기초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도록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를 원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그분을 고백하고, 그분의 놀라운 사역을 말하라고 명령하신다. 둘째, 고백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과 함께, 그분이 누구신지, 곧 그분에 대한 우리 믿음의 내용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믿는 고백에는 그분들이 행하신 사역들, 곧 그분에 대한 교리까지 포함한다. 셋째, 우리는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고백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 고백의 근거를 이룬다. 물론 고백은 느낌을 수반하는 행위이지만, 고백의 기원은 우리의 느낌이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다. 넷째, 고백은 계시에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반복한다. ‘오직 성경’의 기초 위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고백은 성경 내용의 재생이기 때문에 개인의 확신을 선언하지 않고 교회의 신앙이며, 교회를 하나로 묶는다. 우리는 고백은 믿음의 선조로부터 받으며, 우리 자녀들과 하나님을 믿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가르친다.

   이어서 고재수는 고백의 기능과 활용을 논한다. 고백의 일차적 기능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고백은 “아버지여 주님께서 이것을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또 하고 계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영광을 돌린다. 고백의 두 번째 기능은 대외적으로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믿는 바를 알게 하는 일이다. 세 번째 기능은 대내적으로 교육적 기능이다. 가르치는 사람에게 교리교육의 잣대가 필요하고, 배우는 사람에게 요약이 필요하니, 다 고백의 기능이다. 특히 고재수는 한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이 교재로 많이 사용되지 않는 사실로부터 가르치는 자의 한계를 경계한다. 즉, 한국교회에서 목사, 심지어 전도사들조차도 스스로 교재를 만들어 가르치는데, “그 교재는 목사나 전도사의 개인적 이해를 반영하며, 교리의 여러 부분을 무시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29]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과 같은 교재로 교회가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교회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고백의 넷째 기능은 수호적이다. 목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 다만 설교 중에 이단적인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고백이 중요하다. 특히 장로들은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하지 않도록 수호할 의무가 있다. 고백은 성경과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고백이 성경과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한, 고백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위해서, 설교자와 회중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면서 끝을 맺는다.[30]

   고재수는 고백은 완전한 교리를 제시하므로 목사와 교사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백을 따르면 치우치지 않고 성경을 설명할 수 있으며, 신자들도 신앙의 일치를 이룰 수 있다(365). “교회가 목사에게 고백의 테두리 안에 머물도록 권고할 때 청중은 목사가 그들을 하나님 말씀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384) 고재수는 고백의 수호적 기능을 다루면서 자신도 주석상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다고 진솔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적어도 자신이 고백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알고 성경 안에 머물러 있었던 사실로 인하여 받은 큰 위안을 언급한다. 그가 이런 관점에서 한국에서 사역할 때 끈질기게 다룬 주제가 있다면 ‘성령세례’일 것이다.[31]

 

 

4. 성령세례와 신자의 체험

 

   고재수는 한국교회에 파송 받은 선교사로서 당시 한국교회에서 주된 논쟁점이었던 성령세례와 신자의 체험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논문으로 발표한 다음에 이를 묶어 출판하였다. 이 주제를 다룰 때, 그는 해당 성경 본문 주석, 신앙고백 참조, 그리고 칼뱅을 위시한 개혁신학의 선배들을 인용하면서 체험 위주의 성령세례론을 비판한다. 그가 이 주제에 집중한 배경에는 고려신학교 안에서 등장한 성령세례론이 있다.[32]

   성령세례는 오순절파의 특징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성령으로의 세례는 청교도 사상에서 등장하였다. 토마스 굳윈(T. Goodwin, 1660-1680)은 신자가 되는 첫 단계 다음에, 두 번째 단계인 확신의 단계를 말하였다. 이런 배경을 이어받아 웨슬리(Ch. Wesely, 1703-88)도 칭의 단계로서 성화와 완전한 단계인 전적 성화를 말한다. 성결운동에서는 이 두 번째 단계를 성령세례로 지칭한다. 오순절 운동은 이전의 이런 주장들과는 달리, 성령으로의 세례를 방언 등 능력과 연관시킨다. 이 통로가 토레이(R.A. Torrey, 1856-1928)이다. 그는 성령세례를 성령의 중생 사역과 구분하여 첨가적인 성령 사역이라 부르며, 전자에는 생명의 부여가, 후자에는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주장한다. 오순절 신학자 기(D. Gee)는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세례는 열매가 아니라 은사를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중생에서는 성령이 주체요 대속의 피가 수단이며 중생이 그 결과이다. 성령으로의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요 성령이 수단이며 능력의 부여가 그 결과이다.”[33]

   고재수는 오순절의 성령세례 이해와 칼뱅(1509-1564) 및 바빙크(1854-1921)의 입장을 비교한다.[34] 먼저, 칼뱅은 로마 가톨릭의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요한의 세례와 교회의 세례를 다르다고 보는 이들을 공격한다. 그에게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간에게 행하시는 전체 구원 사역, 곧 죄 씻음, 옛사람의 죽임, 중생 등을 의미한다. 이때 중생은 믿음의 시작 순간이 아니라, 신자를 회개로 변화시켜 가는 그리스도의 영의 계속 사역을 의미한다.

   바빙크는 인간의 신분을 무흠 상태, 부패 상태, 은혜 상태, 영광 상태 등 4단계로 구분한다. 특히 은혜 상태에는 칭의와 성화가 서로 다르지만, 분리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웨슬리가 칭의와 성화를 나누고, 이신칭의 후에 받는 온전한 성화를 강조하는 것을 비판한다.[35]

   고재수는 성령으로의 세례가 나오는 사도행전 1:5절을 누가복음 1:33절과 연관하여 집중적으로 주석한다. 그는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준비라고 보는 던(J. Dunn)의 주장을 반박한다. 두 세례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재수는 칼뱅을 인용하면서 오순절 전에 벌써 성령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27).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연관성이 있지만, 다만 상징과 실체의 관계는 아니다. 1:5절에서 오순절에 성령 부어주심은 성령세례와 동일하다. 사도행전 2:38,39절은 오순절 날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제시한다. 즉 성령의 강림이라는 구속적 사건(행 2:1-4)과 그 사건의 결과로 각자의 개별적 구원역사에 대하여 동시에 말한다(행 2:38,39). 성령세례는 신앙과 생활의 제2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세례는 오순절부터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선물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거주시켜 주심을 의미한다. 이 일은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인 것이다(35).

   고재수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동일하게 성령 부어주심에 대해서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주어졌다(40). 우리는 개혁 전통을 따라 성령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기도하고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능력을 주는 성령의 제2 사역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기독교 생활은 성경을 읽는 것과 예배가 생활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생활이다. 이렇게 고재수는 제2의 축복과 능력을 말하는 오순절파의 주장을 거부하고, 신자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수한다. 한국교회가 약화되었다면, 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않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성령세례를 주장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43).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예언은 회개하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어졌다. 그 예언의 뜻은 복음서가 아니라 성취될 때에 분명해질 것이다(65). 사도행전 1:5절은 제자들이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지 않았음을 말한다. 다만 다른 신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것인가의 여부는 2장 주석으로 해결해야 한다. 즉 성령세례는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것(행 2:17,33)과 같은 의미이다. 성령세례가 기독교 세례인가?

   고넬료 가정은 제자들과 같은 선물 곧 성령님을 받았다(행 11장). 1:5절의 성취는 이 사건이 아니라 성령 부어주심(행 2장)이다. 즉 ‘몇 날이 못 되어’는 오순절 사건의 성취를 지시하며, 고넬료 가정의 경우 베드로는 이 성취 사건을 기억하면서 말한다. ‘성령의 세례를 받다’는 오순절 사건을 지적한다(75). 성령세례는 오순절 사건만을 지적하며, 세례요한의 예언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대로 설명되어야 하며, 이방인들도 믿게 될 때 오순절의 성령님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12:13 역시 교인들의 성령님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표현은 믿고 난 이후에 받게 되는 특별한 체험을 가리키지 않는다(82).

   신오순절파는 오순절파처럼 성령 체험과 은사를 앞세우는 점에서는 별도의 그룹을 형성하지 않고 자기 교회 안에 그대로 머물면서 활동하며, 자기들의 교리를 바꾸지 않고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들은 오순절파와 구별하려고 은사운동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88).

   그러면 성령충만이나 성령세례로 불리는 성령의 특별한 체험은 무엇인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하는 것인데, 정작 기쁨이나 따뜻함, 평화와 같은 개인적 느낌은 성령 오심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102). 성령 오심과 성령충만의 역사가 신자 개인의 내면적인 체험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106). 따라서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108). 결론적으로 고재수는 신오순절이 말하는 성령체험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메마른 신앙생활 또는 교리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체험을 덧붙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부요한 내용을 향해 활짝 열리게 해야 한다(111).

   사실 이런 신오순절운동 또는 은사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광범위하지만, 성령세례를 부흥과 연관시키는 주장이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이드-존스 (1899-1981)이다. 고재수는 그가 성령세례를 주로 말하는 Joy Unspeakable은 설교집이라 개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36] 로이드-존스는 성령세례와 부흥이 같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이를 조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20). 성령세례, 성령님을 받음, 성령 충만, 성령으로 인쳐짐에는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로이드-존스는 부흥을 같은 시간에 다수의 사람이나 그룹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 또는 성령이 함께 모인 몇몇 사람 위에 임하심이라고 정의한다. 이로부터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이끌어 낸다. 성령세례가 첫 믿음의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그 순간에 체험하지 못하는 무의식중에 일어나지만, 성령세례는 그 순간을 안다. 이런 부흥의 결과는 직접 체험을 통하여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에 대한 능력 있는 증인이 된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에는 성령세례가 많이 없어졌다. 이렇게 로이드-존스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중생은 불신자들의 회개를 의미하는 반면, 로이드-존스는 신앙생활의 보다 높고 활발한 차원으로 들어가서 받는 체험을 의미한다. 이것이 한국교회 일반에 퍼져 있다(121-125)

   고재수는 로이드-존스가 성경을 경험의 빛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우리 경험을 성경의 빛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확고한 잣대로 로이드-존스의 입장을 평가하고 비판한다. 물론 로이드-존스는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성경에 나오는 것보다 더 믿는 광신자의 오류를 비판하고, 덜 믿는 것은 더 비판한다. 고재수는 로이드-존스를 동의하면서도 그가 여러 인물들(Wesley, Henry Venn, Ch. Simeon)의 많은 체험을 예로 드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원리에 기초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 & 10장을 인용하면서 성경에다 신자의 체험을 첨가하면 안 되며, 경험으로 성경을 제한시켜서도 안 된다고 단언한다(127). 그래서 그는 로이드-존스가 자신이 말하는 첫 번째 위험에 스스로 빠졌다고 본다. 로이드-존스가 성경 본문을 많이 인용하지만, 주로 최근 3세기 교회사에서 일어난 체험에 근거하여 자기 입장을 개진하기 때문이다(130). 동시에 그는 첫 2세기 동안 체험의 예로 몬타누스와 도나투스의 사상을, 중세의 예로 불란서의 왈도파, 화란의 형제단, 신비주의자 타울러와 사보나로라를 든다. 나아가 그는 종교개혁자들을 성령세례를 받은 부흥의 예라고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웨슬리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 다만 웨슬리는 회심을 체험한 1738년 5월 24일 이전에는 믿지 않았으며, 믿음과 확신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자술하는 반면에, 로이드-존스는 웨슬리가 전에도 믿었지만 이제 굉장한 확신을 얻었다는 상반된 평가를 제시한다. 더구나 로이드-존스는 교리에서 계속 잘못된 자의 체험에는 관심이 없다고 발언하지만, 웨슬리가 아르미니안주의자인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다. 경험에 대해서 로이드-존스가 교회사를 살피면서 노출한 이런 내적 충돌을 뒤로 하고 로이드-존스가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려고 한다.

   고재수의 입장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나 성령 언급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으나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며,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즉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 사건을 부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 사건의 특별한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다. 다른 세 사건(행 2:1-4, 4:31, 8:17)도 부흥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고재수는 사도행전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149). 로마서 5:5, 에베소서 1:13, 베드로전서 1:8 등을 살핀 뒤에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최종적으로 고재수는 로이드-존스가 묘사하는 부흥은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각주에서 그는 1907년의 부흥도 성경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첨언한다. 성령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궁극적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믿음을 따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그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을 동시에 부여한다. 설교는 특별한 체험을 강조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생활을 강조해야 한다고 최종 결론을 맺는다(157).

   고재수는 로이드-존스를 다루면서 성령세례와 연관된 성경 본문을 꼼꼼하게 주석하였는데, 웨슬리와 체험을 다루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2항, 곧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신앙(교리)과 생활의 법칙임을 앞세우면서, 웨슬리가 말하는 4대 신학적 권위, 곧 성경과 초대교회의 전통과 이성 그리고 체험을 대비시킨다. 고재수는 웨슬리와 체험의 사안에서 그의 추종자 중에서도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입장(A.C. Piepkorn, H.B. Workan, J.E. Rattenbury)과 성경의 결정적 권위를 강조하는 해석(C.W. Williams)을 대비시킨다. 고재수는 일단 성경과 체험을 다 수용하면서 웨슬리를 살핀다. 웨슬리가 말하는 체험은 중생 받은 자의 체험이다. 물론 그는 체험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교리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옳게 말면서도(167), 동시에 성경과 관련하여 체험도 표준의 기능을 가진다고 본다(168).

   고재수는 신자의 체험은 매우 좁다는 입장에서 체험을 표준으로 삼는 웨슬리를 반박한다. 가령, 창조,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몸의 부활과 영생을 우리는 체험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믿고 고백한다. 아브라함의 거짓말 등에서 보듯 신자의 체험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체험에 대해서 청교도는 믿음의 확신의 체험을, 감리교는 평화의 느낌 후에 일어나는 완전 성화의 체험을, 토레이는 봉사의 힘을 받는 체험을, 오순절파는 방언을, 그리고 신오순절파는 방언이 없이도 성령세례를 체험한다고 각기 다르게 주장한다(171). “그 열매로 그를 알리라”는 마태복음 7:17-20의 말씀은 성경이 체험을 표준으로 삼는다는 증빙 본문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표준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진리가 아니라 삶에 대한 표준일 뿐이며, 교리를 증명하는 표준이 될 수 없다. 물론 신자의 삶에는 체험이 뒤따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을 받은 자는 믿음의 열매를 낼 것이라는 교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173). 그때 믿음의 열매에서 내가 중생 받은 자요, 성령님을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로마서 ‘율법 아래’를 말하는 8:15과 7:14[37] 주석에서 웨슬리와 로이드-존스는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두 본문은 인간의 두 단계와 신분을 말하는데, 웨슬리는 세 단계 또는 신분을 말한다. 즉, 자연인의 상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상태, 그리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상태이다. 두 본문은 중간 단계 즉 율법을 몰랐다가 율법 아래 있되 실패하고 마는 그런 인격의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로이드-존스도 율법의 거룩성과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있지만, 복음의 진리인 그리스도 안의 구원은 모르는 단계라고 말한다(182). 웨슬리의 세 단계 구분은 8:15이나 7장에 나오지 않는다(184). 8:16 해석에서 두 사람은 성령 증거의 방법은 내적 귀에 말씀하는 방식을 말한다. 다만 내용에 대해서 웨슬리는 사죄와 화목을, 로이드-존스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고 달리 말한다(188). 로이드-존스가 웨슬리를 체험의 예로 삼지만, 이 또한 내적 모순이 아닌가. 사실 웨슬리가 말하는 내적 증거는 실상은 진리를 증거한다(193). 즉 성령의 증거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성경이 아니라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체험에서 나왔다. 웨슬리의 신학의 특징은 성경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왔다(193).

   고재수는 오늘날에도 체험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여 설교하는 신학자와 설교자가 있는데, 이것을 신적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성경의 내용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성경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194). 웨슬리나 로이드-존스가 말하는 뜨거움이나 기쁨이라는 특별한 자기 체험이나 즉각적인 중생의 체험을 강조하면, 사람을 외식이나 절망으로 인도할 수 있다.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며, 성도는 다른 이들의 체험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완전하게 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경에 대한 “성령의 증거”에서 고재수는 교회의 증거, 성경 자체의 증거와 성령의 증거를 말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5항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196). 사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성령의 증거만이 생기게 한다. 그래서 6항은 성령의 새 계시나 인간의 전통에 의하여 어느 때인지 그 어떤 것이라도 성경에 첨가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를 더 파악하기 위하여 칼뱅을 참조한다. 칼뱅은 성경의 천상적 기원을 알 때 완전한 권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가 준다면 인간에게 의존하며 오히려 교회가 성경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논증이나 판단을 초월하는 확신의 근거는 성령의 비밀스러운 증거뿐이다(1,7,4).[38] 그는 성경의 신적 원천을 말한다.[39] 즉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흘러왔다는 확신이다(1,7,5). 성령이 우리를 설득하도록 우리 마음에 침입해야 한다. 곧 이 인침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 지성을 조명하사 성경의 내용을 우리가 보게 하시고, 복음이 제시하는 교리를 마음에 인치신다(1,9,1). 성령의 증거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증거의 필요성은 타락 때문이다(3,2,33). 따라서 논증으로는 신앙에 필요한 확신을 줄 수 없다(1,7,4). 지성(mens)에 조명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cor)이 강하게 지탱하여 하기 때문에 논증으로는 부족하며, 성령의 증거가 반드시 필요하다(3,2,33). 성령의 증거를 칼뱅은 요한일서 5:7에서 찾는다.[40] 성령은 믿음을 주시고 또 믿음에 포함되는 성경의 신적 특성에 관한 확신을 주신다. 그리고 오직 택함 받은 자만이 성경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을 확신한다(1,7,5).

   칼뱅과는 달리 웨슬리는 성경과 관련하여 성령의 증거를 언급하지 않는다(209). 그는 지성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신적 기원에 성령의 증거는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성령의 증거를 내적 인상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심과 결국 하나님과 화목 된 자임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바빙크는 18세기 합리주의가 지성이 계시의 진리성을 연구하게 하고, 성경의 권위를 역사적 증거 위에 수립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웨슬리도 성경관에서는 합리주의에 속한다.[41] 또 칼뱅은 성령의 내적 소리나 성령께서 특정 성경 본문을 적용하시는 일에 침묵하나, 웨슬리는 뜨거움을 체험하였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특정 본문을 들었다고 한다. 웨슬리에게 믿음의 확신은 우리가 체험한 성령의 증거에 달려 있다면, 칼뱅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부인함에도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약속들을 보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있다(3,2,16). 즉 성경 자체가 신적임을 충분하게 말하나 죄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의 증거가 필요하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칼뱅은 회개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의를 주신다는 약속에 의지하지만,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특별한 체험에 의존한다(213). 또는 성경도 성령의 증거가 필요한지, 아니면 성령의 증거란 성령께서 직접 사람에게 말씀하시느냐, 이 차이라 하겠다.[42]

   고재수는 루이스 벌코프(L. Berkhof, 1873-1957)의 입장을 살짝 비판한다. 즉 벌코프에게 성령의 증거는 ‘인식의 내적 원리’로서 인식론에서 다룬다. 그는 이를 죄인의 마음속에서 죄로 인한 눈먼 상태를 제거하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죄 없는 낙원에서는 계시를 성령의 증거 없이 바로 신적 말씀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사실 그는 계시 인식의 외적 원리와 내적 원리는 바빙크에게서, 성령의 증거의 의미는 칼뱅에게서 취함으로써 모순을 일으켰다(218).[43] 또 벌코프는 성령의 증거를 ‘믿음의 기반’(ground)라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주시는 증거를 근거로 삼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신적인 것으로 인정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증거는 신앙의 근본적 기반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의 수단인 셈이다. 실상 이 설명이 칼뱅주의적인데, 만약 벌코프의 말처럼 성령의 증거가 믿음의 기반이라면, 계시가 성경과 동시에 성령의 증거로서 두 가지가 등장하고 만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착상이다. 벌코프에 비하여 베르카워르(G.C. Berkouwer, 1903-96)는 성령의 증거를 항상 성경 신앙과 관련짓는다. 그런데 베르카워르도, 성경 신앙의 내용인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제한함으로써 성경의 여러 교리들을 성령의 증거와 연관시켰던 칼뱅과 궤를 달리 한다. 칼뱅은 성령의 증거를 내용인 그리스도보다는 성경의 신적 원천과 관련지었다(220-222).

   고재수는 웨스트민스터 고백 1장 5항이 성령의 증거를 말하면서 인용하는 성경 본문을 주로 ‘증거’에 집중하여 세밀하게 살핀다. 많은 증빙 본문 중에서 유독 고린도전서 2:14-15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성령께서 믿게 하시는 사역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사역이며 특히 성령님의 사역이라 강조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구원, 성화, 교회 등만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 대한 교리도 포함하고 있다. 즉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믿으면, 성경에 대한 성경적 교리도 수용한다는 말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성경의 신적 원천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241). 이 점에서 칼뱅의 성령의 증거가 성경적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재수는 칼뱅의 용어 선택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그는 ‘증거하다’는 동사가 ‘설득’시키는 일까지를 포함한다고 여긴 것 같다. 그가 성령의 증거의 근거로 삼는 요한일서 5:6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영이 신자들을 납득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5장에는 사람들이 그 증거를 부정할 수 있음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성령의 증거라는 말 자체가 납득시킴을 포함하는 것은 아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242). 칼뱅은 종종 성령의 조명도 사용한다. 고재수는, 칼뱅의 의도를 살리려면 성령의 증거 대신에 성령의 내적 납득시킴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성령님은 오직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령님은 말씀과 더불어 또 다른 일, 곧 우리를 내적으로 납득시키시는 일을 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도행전 16:14의 루디아의 경우를 예로 든다.

   고재수는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도 정확하지 않음을 말한다. 오히려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4문답을 선호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수단으로, 또한 성경과 더불어 사람의 마음에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만이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완전히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243)

   고재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어디서나 하나님 우선을 말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체험이 아니라 성경 말씀만이 신앙과 생활의 표준과 규칙임을 말한다. 그는 이 확고한 입장에서 성령 체험과 신자의 삶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령의 증거를 살피면서 이 증거는 성경의 신적 기원을 밝힌다고 말하고, 굳이 신자의 체험을 성령의 증거로 지지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웨슬리가 지성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는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바로 자연계시와 자연적 신지식과 연결된다. 고재수는 이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여러 논문에서 자기의 입장을 개진한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점과 고재수의 학위 논문이 하나님의 한 속성인 영성을 주제로 삼은 것을 직시하면, 그는 하나님 우선 사상을 계시 이해에서도 찾는다고 할 수 있다.

 

 

5. 일반계시와 신의식

 

   교의학자로서 고재수의 신학적 자세와 입장이 뚜렷하게 돋보이는 주제가 있다면 일반계시와 자연적 신지식(신의식)이다. 그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관련된 성경 본문들을 면밀하게 주석하고, 고백서의 내용을 참조하며, 개혁신학의 선배들을 인용하되, 이런 무장으로 그릇된 주장이나 입장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매년 한 교의학 서론 강의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고재수는 교리와 생활의 표준과 규칙인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이 주제를 개진한다. 자연적 신지식이 과연 일반계시의 결과인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이게 가능하다면, 이방인들의 신지식을 교의학에 포함시킬 수가 있을 것이며, 선교사들도 자연적 신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고재수는 멜랑톤(Ph. Melanchthon, 1497-1560)이 쓴 개신교 최초의 교의학을 예로 삼아 교의사적 배경을 살핀다.[44] 멜랑톤은 플라톤의 하나님 정의, 곧 영원한 지성이며 자연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의 원인이라는 정의에다 하나님의 몇 속성들을 첨가하고 마지막으로 삼위일체이심을 또 첨가한다. 멜랑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많이 알고 있었으나, 삼위일체론은 몰랐다고 말한다. 성경은 이방인들도 아는 신의 본질과 속성을 다만 확정한다. 개신교의 첫 교의학을 쓴 멜랑톤을 따라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신의 본질과 속성이라는 일반적 지식과 성경만이 말하는 삼위일체론을 첨가하여 신론을 진술한다(51). 이렇게 철학적인 신론이 신학의 신론에 수용되며, 신론의 순서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다음에 삼위일체론을 배치한다. 이방인들이 신에 대해 가진 사상에 좋은 점도 있다면, 이방인의 사상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45] 이처럼 고재수의 신학은 동시에 실천지향적이다.

   고재수는 종교개혁 직후부터 자연적 신지식을 성경적이라고 여긴 확신이 있었으며, 증빙 본문으로 사도행전 14:15 이하, 17:26 이하, 로마서 1:18 이하, 2:14 등 네 곳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본문들을 여러 차례 주석하면서 성경 외에 하나님을 설명하는 자연적 지식의 존재 여부를 가늠한다.

   일단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이 가졌던 신관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하나님을 설교하였으며, 로마서 2:14 이하에서 바울은 이방인이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에피쿠르스, 스토아 철학자들을 포함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아덴 사람들이 ‘모르는 신’(23절)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선포한다. 그는 그들의 경배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그들이 모르는 참 하나님을 전파하려고 한다(67). 하나님을 찾는 것이 인간의 창조 목적이지만, 아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27절). 바울은 이렇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경에 계시 된 참 하나님을 전파하였다(69절). 바울은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시인 아라투스의 말(28절)을 참 하나님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아라투스가 제우스에 대해서 말하는 범신론적 경향을 알기 때문에 ‘신의 소생이 되었다’는 유사점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런 신을 우상으로 표현하는 이방인의 예배의 불합리성을 증명하였다. 즉 이를 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간과하였지만, 이제는 회개를 명하셨다(30절)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종교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그들을 바울 자신이 전도하는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다(75).

   로마서 1:18 이하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모든 사람에게 계시하신다고 말한다(19절). 그래서 인간은 이로부터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이 신지식을 받지만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만들고 피조물을 경배한다(23,25).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며(21), 따라서 핑계하지 못한다(20).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하니, 인간은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다. 로마서 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인간이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계속 받는 지식은 제한적(능력과 신성)이지만 올바르나 마음 깊숙이 은폐되어 있고, 이조차 막아버린다. 오히려 이 계시의 자극으로 은폐된 바가 외적으로 나타날 때 우상을 섬기는 신관을 표방한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이며 죄의 영향 때문이다. 헬라 철학자들과 이방인들은 후자의 신관을 표현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론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57).

   이런 신론 이해는 삼위일체론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론 전부가 ‘신비’라는 멜랑톤의 초기 입장은 정당하나, 이후 개신교는 ‘삼위일체론’만을 신비라 불렀다. 즉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이지만,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인간이 지성으로 부분적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고 여겼다. 고재수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도 신비에 속하여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본다(58). 나아가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론은 계시로써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연적 신지식이 신론의 순서를 결정할 수 없다. 나아가 고재수는 바빙크가 신지식을 인식론적으로 다루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먼저 다루는 것을 비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 모두 같은 원천인 성경에서 나온다. 이는 인식론이 아니라 방법론적 문제와 연관된다. 즉 우리는 신론에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교리에서 신론을 시작해야 한다(60).

   고재수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 야웨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신관을 따라 부동하고 불변하는 최고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반대한다. 부동하고 불변하는 신에게 사랑이나 시기와 같은 정서가 있겠는가? 고재수는 출애굽기 3:14절에 나오는 야웨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그러한 대로 그러하다’로 번역하고 이해한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분으로 자기를 계시하신다. 즉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은 그러한 대로 그러한 분으로 자기를 계시하신다(61).

   고재수는 하나님의 의의 속성 이해도 교정을 시도한다. 루터가 두려워했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것을 주는 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이해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죄인은 하나님에게 사형 선고를 받아야 마땅하니, 루터는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이방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알 리가 없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에게 심판과 동시에 믿는 자에게 구원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몰랐기 때문에 그의 의의 정의를 하나님의 속성 교리에 사용할 수 없다(62).[46]

   고재수는 박사 논문의 주제인 하나님의 영성도 교정을 필요로 한다는 입장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영성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존재라는 본질에서 도출하는 결과에 속하였다. 즉 물질적 존재와 영적 존재를 나누고, 영은 물질보다 더 높은 종류의 존재로 보면서 하나님은 필시 영적 존재여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 존재의 우월성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성경적이지 않다. 영을 말하는 구약과 신약의 여러 본문을 세밀하게 살피고, 특히 요한복음 4:24를 중점적으로 주석한다. 하나님께서 영이심은 일차적으로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그분이 생명을 베푸시는 분으로서 육체적이지 않다는 뜻이다.[47]

 

   고재수는 이로부터 신론과 동시에 선교에 미치는 결과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선교사는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의 신관을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신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영향 아래 있지만 내용상 타락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 때문에 이방인 선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에서 자기를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이방인들이 자신들 속에 깊이 알고 있는 하나님, 곧 그들이 이미 만났고 그 사역을 보았고 계속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을 전하면서 이로부터 하나님의 능력, 선, 진노 등을 알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도할 수 있다.

   셋째,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믿지 않고 있다고 책망할 수 있다.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는 ‘회개하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부정하고 대신에 거짓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그들의 반대를 제거하고 마음을 설득하시는 방식으로 그들이 일반계시를 통해 받은 것을 수용하게 하실 수 있다(63).

고재수는 일반계시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평가한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지식인 신의식(sense of divinity)과 획득지식을 나눈다.[48] 신의식의 경우 그는 칼뱅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비판적인 평가를 이끌어 낸다. 칼뱅은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이 존재함을 안다는 의미에서 (선험적) 신의식(1,3,3 & 4)을 말한다. 그는 경험의 증거를 근거하여 종교의 씨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심겨져 있다고 말한다(1,4,1 & 1,5,1). 칼뱅은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나, 종교의 씨라는 용어에서 신의식은 사람의 종교, 그의 신앙, 순종과 예배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이 씨는 참 종교를 낳아야 하지만, 죄 때문에 열매를 맺거나 성숙할 수 없다(1,4,1). 그러나 이 씨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왜곡된 세상의 종교들이 존재한다. 칼뱅은 ‘씨’라는 용어로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계시를 뜻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씨는 신의식을 지시하는 전문용어가 되었다(87).

   그런데 칼뱅의 신의식을 더마레스트처럼 하나님의 대한 직관(intuition), 또는 직관적 지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이 지식이 직관적인 것은 그 기원이 관찰과 감각 체험에 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정신의 의식적 활동은 요구된다. 하나님이 이 의식을 인간 의식에 주었다는 칼뱅과는 달리, 그는 자의식을 통해 이 의식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신의식 대신에 직관적 지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더마레스트는 능력, 완전, 인격 등 인간에게 있는 속성을 신에게 돌리는 탁월의 방식이나 시원적, 비발생적, 또는 무한의 자질에서는 인간에게 제거하는 부정의 방식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지식을 말하지만, 실상은 인간적 사유의 결과이다. 고재수는 칼뱅이 신지식을 종교적으로, 더마레스트는 철학적으로 다루었다고 말한다(90). 그는 철학적으로 말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선행 지식이 없이 불가능하며,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일 역시 선행 지식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고재수는 더마레스트의 주장을 거부한다. 더마레스트가 사도행전 17:28을 인용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어 진리를 감지할 때 사실 하나님을 감지한다고 주장하자, 고재수는 그가 스토아 시인들이 범신론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바르게 지적하였다고 한편으로 동의하지만, 곧장 바울이 그들의 의견을 그냥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더마레스트를 반박한다. 고재수는 더마레스트가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지식의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들고 있는 로마서 1:18을 다룬다. “대부분의 로마서 해석자들(Godet, Hodge, Hughes, Litton 등)은 바울이 1:20에서 사람의 정신 위에 찍혀져 있는 선험적 지식과 창조 질서에서 획득된 추론적 지식, 이 둘을 다 포함하는 요약적 진술을 제시하고 있다.”[49] 고재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로부터 정신에 의해 감지되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 1:18-25에서 말하는 신지식은 관찰과 감각 체험을 떠나서 자아 앞에서의 직관이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더마레스트를 비판한다(97).

   고재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뱅의 신의식 문제도 상세하게 분석하고 평가한다. “경험이 증거하는 것처럼 종교의 씨가 모든 사람 속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졌다.”(1,4,1; 신의식은 1,3,3) 칼뱅은 신의식이나 종교의 씨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무신자라도 두려움을 통하여 그들이 부정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거나(1,3,2), 철학자들의 주장을 언급한다(1,3,3). 고재수는 경험에 근거하여 어떻게 신의식이 직접 왔으며, 이것이 피조물을 관찰함으로써 오지 않았다고 구별할 수 있을까 의문을 제기한다. 또 신의식을 언급하지 않고도 종교의 보편성과 무신론자의 두려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로마서 1:20절은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며, 계시의 결과로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인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썩어질 형상으로 바꾸면서 종교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신의식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 지식이라는 가설의 근거도, 또 그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다.”(99)[50] 고재수는 일반계시론을 면밀하게 살펴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하나님에 대한 본유적인 신의식 또는 종교의 씨 혹은 직관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추정을 성경 주석으로 부인한다.

 

   고재수는 일반계시의 또 다른 측면,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계시의 문제를 주해하고 평가한다. 루이스 벌코프는 바르트를 반대하여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자유주의를 반대하여 로마서 2:14-15절을 인용하면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을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를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계시하시며, 인간은 그 계시를 파악할 능력이 있으며, 그중에 많은 이들이 이 계시와 다르게 행하지만 몇몇 사람은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51]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계시와 율법에 대한 일반계시를 동시에 말하는데, 특히 앞 문장의 마지막은 후자를 거론한다. 나아가 벌코프는 로마서 1장과 사도행전 17장을 언급하면서 성경이 이방 종교 안에 참된 요소를 인정했다고 말한다.[52] 벌코프는 두 종류의 일반계시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다고 긍정적 입장을 표방한다.

   고재수는 벌코프의 입장을 평가하려고 스힐더(K. Schilder, 1890-1952)를 인용한다(104 이하). 스힐더는 로마서 2:14-15절로부터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일이 마음에 쓰여져 있어서 이방인이 외적으로 율법대로 행한다고 주석한다. 그는 칼뱅을 포함한 개혁신학자들이 이 본문에 기초하여 일반계시와 일반은혜를 찬양한 것을 반대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순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베르카워르는 순종을 일반계시와 인반은혜와 연관시켜 해명한다. 다만 그는 마음에 쓰여진 율법의 일을 일반계시가 아니라 일반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그도 일반계시를 직접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다만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쓰여진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 언급할 뿐이다(108). 더마레스트는 베르카워르를 반대하면서 율법의 내용과 구체적 명령이 이방인의 마음에 쓰여졌으며, 이 지식이 직관적이라고 한다. 그의 입장은 스힐더와 베르카워르가 반대한 전통적 입장에 가깝다.[53]

   고재수는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기 위하여 로마서 2장의 본문을 주석한다. 본문이 말하는 율법을 17세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자연법을 거론하였다. 10세기에는 바울이 도덕적 행위는 본성에 심어진, 하나님으로부터 온 율법을 듣는 것이라는 스토아 철학의 한 요소를 수용하였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일반적 행위의 표준은 마음에 있는 그 율법이 된다. 고재수는 문맥상 12절부터 율법은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라고 말한다. 이방인들도 더러 율법 곧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율법의 일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즉 본문은 두 가지 하나님의 율법의 구분이나 자연적 율법을 가르치지 않는다(115).

 

   이방인들은 어떻게 이 율법을 받았는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를 위시하여 가톨릭 신학은 ‘본성으로’(2:14)부터 인간이 이성으로 그 율법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은 율법의 일을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한다고 말한다. ‘이방인들이 그 마음에 쓰여진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는 말은 그들이 가령 십계명의 원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쓰여져 있다는 뜻이다(116). 즉 하나님의 율법은 내용적으로 이방을 포함한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으며, 율법의 글씨는 인간의 존재함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이방인이 율법의 내용을 지킬 때, 그들은 본성대로 행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실제로 율법의 행위를 행한다고 말하지만, 이방인의 율법 순종에 대해서 낙관적이지 않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거나 변명하는데, 바울은 그들의 선함이 아니라 그들은 율법 없이도 망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방인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알면서도 대부분 불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한 것이다(118).

이로부터 고재수는 몇 가지 결론을 정리한다(119-122). 이방인은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식의 완전성 여부나 율법의 행위가 십계명을 다 포함하는가 등에 대해서 본문은 답을 주지 않는다. 스힐더나 베르카워르의 주장처럼 율법의 행위가 마음에 쓰여졌다는 표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율법의 행위의 선함이나 좋은 결과를 깨닫게 됨을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율법 행위가 인간의 마음속에 쓰여져 있음을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본문은 일반계시를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다만 하나님이 그 지식을 직접 계시하신다는 더마레스의 견해나,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섭리와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베르카워르의 견해는 증명될 수 없다고 덧붙인다. 또 일반계시의 두 측면, 즉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롬 1장)와 율법에 대한 계시(롬 2장)를 나눈다 하여도 벌코프처럼 두 측면을 평행시킬 수는 없다. 고재수는 인간이 전자를 완전히 거절하고 대신에 우상을 만들지만, 율법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순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전자, 즉 이방 종교는 하나님에 관한 일반계시를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종교에서 이방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아무 유사점이 없지만, 후자, 즉 이방인이 하나님의 율법의 행위를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기독 신자는 그들과 이 세상에서 협력할 수 있다. 이 측면으로부터 고재수는 일반은혜와 문화관을 전개한다.

 

   고재수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비교한다. 내용과 수단에서 특별계시가 더 포괄적인 반면, 받는 자의 측면에서는 일반계시가 더욱 포괄적이다. 세 가지 유사점도 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원천은 활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리시려는 하나님 자신이다.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배우며 설기는 일이다. 결과도 유사한데, 죄인인 인간은 특별계시뿐 아니라 일반계시까지 거부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실 때 특별계시뿐 아니라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지식과 사랑 가운데서 계속 자라나갈 것이다(138).

   고재수는 로마서 2장으로부터 신자와 불신자가 행하는 행위의 유사성을 말한다. 그 유사성의 목표는 하나님께 순종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종종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하기를 원하는 것을 행한다(순종)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은혜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 그는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신 특별한 사역의 결과와 순종을 말한다. 이것은 일반계시의 결과이다.[54]

   고재수가 일반계시를 부각하면서도 일반은총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이를 고재수는 어느 곳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비와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심으로 음식과 기쁨으로 인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것이 곧 자기 증거이다(행 14:17). 그는 하나님의 자기 증거와 자기 계시에 방점을 두면서 인간의 본성이나 내면을 가능하면 신인식이나 율법 행위의 동력으로 삼지 않으려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인다. 칼뱅이 말하는 신의식이나 종교의 씨를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라고 거부하는 그의 관점은 소시니안까지 비판하면서, 본유적 지식 또는 직관적 신지식의 존재를 거부한다. 워필드(B.B. Warfield, 1851-1921)를 인용하면서 고재수는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본유의 기능(an innate faculty)을 가지지만, 하나님에 대한 본유의 지식(an innate knowledge)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55] 선천적인 본유 지식은 계시와 무관하게 모종의 신지식을 지닌다는 특징과 한계를 품고 있다. 고재수는 항상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 행위에 본유 기능이 응답하여 하나님을 알지만 썩어질 피조물의 우상을 만든다는 그릇된 신지식의 형성을 지적하고 경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은혜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립지대로 독립하여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도 회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56] 이 점도 고재수가 추구하는 ‘하나님 우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고재수는 일반계시의 이해에서 맥가브란(D.A. McGavran, 1897-1990)의 교회성장학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57] 비록 맥가브란의 주장에 여러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준비하셨다는 맥가브란의 주장을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고 섭리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성경이 밝혀주지만(시 19편; 행 14:15-17; 17:26; 롬 1:18 등), 하나님의 이 선물과 섭리가 복음 받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428).

 

 

6. 신학의 실천성

 

   고재수는 신학 역사에서 해묵은 논쟁에 속하는 주제, 교의학 또는 신학은 이론적이냐 또는 실천적이냐의 주제를 다룬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적 지식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지식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 사랑에 속한 믿음의 활동이다.[58] 이처럼 고재수는 신학에서 이론과 실천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피한다. 토마스는 거룩한 교리, 곧 신학은 인간적 행함보다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이라는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에 비하여 17세기 초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 교수들의 공저 『순수신학개요』는 지식이 경건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아쉽게도 지식을 헬라 철학적으로 이해한다.

   교의학은 근본적으로 실천적이며, 신앙생활에 실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룬다(19). 가령, 하나님의 전능은 우리의 기도 생활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선택론은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한다. 즉 그분이 육신의 아버지를 통하여 출생하였다면 결국 인간이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였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고재수는 교의학과 신학의 실천성을 의식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에 몰두하였다. 그는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성경 말씀을 먼저 경청하고 히브리어·헬라어 원문을 문법적으로 차분하게 주석하고, 문맥을 고려하고, 무엇보다도 계시 역사의 흐름을 중시하면서 성경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그 말씀의 이해를 기초로 신앙고백을 살피고,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의 입장을 참조하고 비판하거나 도움을 받는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독립적인 신학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로부터 교의학을 강의하거나 설교할 때, 결코 현학적이지 않고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가간다. 그의 설교는 어린아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59]

   고재수의 신학 수행이 지닌 실천성은 교회를 위한 사역이라는 측면이다. 그가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다룬 주제들을 보면 이 측면이 더욱 분명해진다. 구속사 설교와 신앙고백 강조는 그가 모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습득하였다.[60] 그는 모범설교가 아니라 애초부터 오직 구속사 설교를 교회에서 목사로부터, 신학교에서 교수로부터 배워 그대로 실천하였다. 한국에서 이 방식대로 설교할 때, 청중 특히 신학생들로부터 기록 설교의 출판을 요청받아 구속사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저술하였다. 그는 1980년대에 고려신학교를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 개혁주의 신학교에 구속사 설교를 소개하고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주장처럼,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였고, 강의나 설교에서 늘 실천지향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재수의 실천성은 자신이 사역하였던 한국교회의 현안(hot issues)을 다룬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신을 교회의 파송을 받아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사역자로 인식하고 교회를 위한 신학적 작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주제가 성령세례이었다. 구속사 설교와 신앙고백 강조는 그가 모국에서 받은 신학 훈련의 결과로써 첫 목회지에서 실천하였다면, 성령세례의 경우는 그가 파송 받은 새 사역지인 한국교회 안에서 논의되던 주제였다. 사실 고려신학교 교수 한 사람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주장할 때, 그는 신학생과 교회에 개혁신학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주로 영미 계통의 신학자나 설교자의 주장을 광범위하게 독서하고 성경 주석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고 성령세례를 비판하는 실천적 작업을 수행하였다. 오순절주의는 물론 웨슬리나 로이드-존스의 입장까지도 비판적으로 다룬 이 저서는 고려신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 전체에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성령세례를 판단하도록 기여하였다.

 

 

7. 나가면서

 

   ‘하나님 우선’의 고재수의 신학은 소박하다.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면밀하게 주석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성실하게 선포하는 겸손한 말씀의 사역자였다. 특히 한국에서 사역한 채 1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개혁신학자로서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한국어를 배워 강의하고 저술하였다. 자매교회인 모국의 개혁교회의 역사와 신앙과 생활, 특히 가정과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행하는 교육을 자세하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캐나다 해밀톤 신학교에 부임한 직후 그 학교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 한국에서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국인 가운데 살며 함께 일하며 협력하였으며, 8년 동안 한국 학생들을 자기 집에 기거하도록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고려신학대학과 고신 교회의 일원으로서 공교회적 확신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개혁신학을 전수하였고, 그가 남긴 많은 저술은 지금도 우리에게 개혁신학의 좋은 지침이다.

   고재수는 성경과 그 요약인 신앙고백의 의미를 잘 가르치면서 때로는 개혁신앙 밖의 주장들이나 그런 주장을 펼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때로는 우리 신앙고백이나 개혁신학의 선배들의 특정 주장도 교정하였다. 그에게 칼뱅, 바빙크, 벌코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비판과 교정의 저력은 고재수의 차분한 성경 주석,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이런 교정을 통하여 그는 개혁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일반계시를 성경적으로 잘 정리함으로써 개신교 정통주의의 신론, 하나님의 속성, 일반적 신론과 삼위일체론이라는 순서 등을 교정하였다. 이런 교정은 외견상 개신교 정통주의를 원칙적으로 비판하는 현대신학의 어떤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61], 고재수는 오직 성경의 신학 원리에 입각하여 차분하면서도 당당하게 개혁신학의 폭을 넓히는 결실을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신학임을 밝혔다. 개혁신학자로서 신학 강의와 설교에서 ‘하나님 우선’을 실천한 고재수의 사역이 특히 많은 신학생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여전히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에는 그가 가르쳤던 대로 구속사 설교와 신앙고백을 중시함으로써 신학과 설교가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성경관과 설교 방식에서 진일보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착하거나 널리 파급되지 못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과 같은 교재로 교회가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교리의 어떤 부분을 무시하거나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을 벗어나라는 그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62] 일반계시/일반은혜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상존하며, 이 때문에 신학 연구나 전도와 선교 현장에서 바람직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고신 교회는 여전히 성령세례와 같은 개혁신학과는 동화될 수 없는 여러 주제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들은 오늘 여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고재수 교수의 ‘하나님 우선’ 신학에 힘 입어 깊이 반성하고 개선하며 개혁해야 할 과제이다.

 


[1] 이상규, 최수경 편,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부산: 글마당, 2000), 312. ‘보통은혜’라는 용어에서 보듯 이 설립 취지서를 그 당시 화란 신학을 거의 유일하게 접하였던 박윤선 목사(1905-88)가 작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신학교는 이후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본고에서는 편의상 ‘고려신학교’를 계속 사용할 것이다.

[2] N.H. Gootjes, De geestelijkheid van God. Franeker: Wever, 1984.

[3]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성약, 2003)의 개정 증보판이다.

[4] 본고는 고재수 교수가 한국에서 사역한 업적을 그의 저술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그 이후 나온 작품들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전개할 것이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헬라어와 라틴어 강의 외에, 주로 교의학 서론과 신론을 강의하였는데, 그의 강의안을 구하기 어려워 본고에서는 다룰 수 없어 아쉽다.

[5] 고재수가 교수직에서 퇴임할 때, 그가 사역하던 신학교가 그의 논문들을 편집하여 출판하면서 서명에 말씀의 가르침과 설교를 넣은 것은 그의 평생 사역을 잘 드러낸다, Teaching and Preaching the Word: Studies in Dogmatics and Holiletics, C. Van Dam ed. (Wnnipeg: Premier Publishing, 2010).

[6] 고재수의 모국 개혁교회는 하이데베르크요리문답(1563년) 129문답을 52주일로 나누어 주일 오후에 체계적으로 설교하였다. 93-113문답까지 십계명을 다루는데, 그는 요리문답 설교를 기초로 하여 『십계명 강해』를 저술하였다. 요리문답 설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요리문답 설교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함』 (서울: 성약, 2010), 181-227.

[7]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67-169 참조.

[8]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196-7. 아래 괄호 속의 숫자는 이 책의 쪽을 지시함.

[9] “구약의 역사적 본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2010, 210-244, 특히 227.

[10]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249 이하.

[11] C. Trimp, 『구속사와 설교』 (1986), 박태현 역 (서울: 솔로몬, 2018).

[12]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256 이하.

[13]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265.

[14]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206.

[15]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208.

[16]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177-183.

[17] 이상규, 최수경 편,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108-114.

[18] faith by which it is believed

[19] faith that is believed

[2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에서 ‘바라는’은 소망을 명사로 삼는 동사이다. 한상동의 설교에는 ‘바라는’과 함께 ‘바라보는’도 나오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21]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31.

[22] 47-54.

[23] 35.

[24] 고재수는 구약과 구약의 인물을 지나치게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려는 기독론적 해석을 경계한다. 가령 S.G. de Graaf가 여기에 속한다, 220-225. 언약역사를 다룬 그의 책은 영어에서 중역되었다, 박권섭 역, 『약속 그리고 구원』 (서울: 크리스찬서적, 1987). 고재수는 이런 위험을 벗어나면서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순종 등을 성경 말씀을 따라 면밀하고 풍성하게 다루었다, 『그리스도를 고백함』 (서울: 성약, 2010).

[25] 361-2.

[26] 31.

[27] 364.

[28] 366-383.

[29] 381. 고재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함’이라는 확신으로 요리문답 설교를 반대하는 전통, 특히 로이드-존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요리문답 설교는 복음 전체 또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 전부를 설교하는 데 도움을 주며, 고백하는 진리들을 실제 삶에 잘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고백함』, 209, 216-222.

[30] 고재수는 사도신경을 해설하고 한국어로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였다, 385-406. 비한국인이 이런 시도를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31] N.H.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Its History and Sources (Grand Rapids: Baker, 2007)

[32] 안영복, 『성령론의 이해의 문제점에 관한 성경적 고찰』. 부산: 일중사, 1986; 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고재수가 동료 교수의 주장을 비판한 것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까. 적어도 그의 개입은 폴레믹스(논쟁)의 순기능을 주목하면서 개혁교회의 건강에 이롭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폴레믹스(논쟁)을 통해 든든히 세워지는 개혁교회”,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196-204.

[33] E.S. Williams, Systematic Theology, Vol. 3: Pneumatology, Ecclesiology, Eschatology (Gospel Pub. House, 1953), 47.

[34]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12 이하. 아래 괄호 속의 숫자는 이 책의 쪽을 지시함.

[35]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287. 그런데 차영배 교수는 바빙크가 제2의 축복을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구원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구원의 서정의 첫 부분으로 보면서 성령 강림은 연속적이라고 말한다, 18.

[36] D.M. Lloyd-Jones, Joy Unspeakable (1984), 정원태 역, 『성령세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로이드-존스는 책 제목을 베드로전서 1:8절에서 취하였다.

[37] 헬라 교부들은 ‘나’를 중생 받지 않은 자로 보는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 등은 중생 받은 자로 본다.

[38] 칼뱅 인용의 경우 괄호 안은 그의 『기독교강요』 (1559년 판)의 권과 장과 항을 표기한다.

[39] Against Rogers, Scripture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324 &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39. 웨스트민스터 고백은 그리스도를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 신적 원천으로 고백한다.

[40]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41] Cf. D.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89), 50-52.

[42] 고재수는 슐라이에르마허를 예로 들어 그의 출발점은 성경이 아니라 기독교적 경건이라고 한다(214).

[43] 바빙크의 입장은 고재수, “Het getuigenis van de Heilige Geest in verband met dem Schrift”, in Radix 11/4, 1985, 1999를 보라.

[44] Loci Communes (11521; 31543).

[45]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50-51. 아래 괄호 속의 숫자는 이 책의 쪽을 지시함.

[46] 고재수는 바빙크가 성경이 의에 대해서 다르게 말하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고수한다고 지적한다, 2,195.

[47]  De geestelijkheid van God, 192. 이런 입장은 K. Schilder, J.R. Wiskerke의 입장이기도 하다, 79-82. 고재수는 학위 논문에서도 이방인도 신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개신교가 증빙본문으로 삼는 사도행전과 로마서 각각 두 본문씩 모두 4 본문들을 주해하고 비판한다, 84-99.

[48] B.a. Demarest, General Revelation: Historical Views and Contemporary Issues (Grand Rapids: Zondervan, 1982), 228-233.

[49] Demarest, General Revelation, 230-231.

[50] 인간의 마음을 백지상태(tabula rasa)라고 주장한 소시니안의 입장은, 인간이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 상태를 주장하기 때문에 고재수는 이를 거부한다.

[51] L.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129-130.

[52] Berkhof, 131.

[53] Demarest, 231-2.

[54]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73 이하.

[55] 워필드는 사실 L. Riissen을 인용한다, B.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S.G. Craig ed., (Philadelph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80). 35.

[56]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92. 이 발언은 원래 다음 글에서 나왔다: Gootjes, “Schilder on Christ and Culture”, in Always Obedient: Essays on the Teachings of Dr. Klaas Schilder, J. Geertsema ed. (Philllipsburg: P & R Publishing, 1995), 35-64. 그가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에 담긴 일반은혜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57] D.A. McGar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 (Grand Rapids: Eerdmans, 1980).

[58]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7. 아래 괄호 속의 숫자는 이 책의 쪽을 지시함.

[59] 고재수는 레이든에서 목회할 때, 고린도전서 15:35절 이하를 설교하였다. 쉬운 설교가 아니었는데, 두 주 후에 장로 한 분이 별세하였을 때에, 8세의 소녀가 그 설교 내용으로 자기 부모를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와 문화』, 225-6.

[60] 구속사 설교 방법은 1930년대에 K. Schilder, B. Holwerda, M.B. van’t Veer 등이 오순절운동과 바르트주의를 반대하면서 학문적으로 발전시켰다,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 186. 그는 또한 J.R. Wiskerke의 Purim을 읽고 도움을 받았으며, 이 책은 그가 한국어로 번역한 유일한 책이다, 206-209; 『부림』 (1989); 『그래도 하나님은 승리하신다』 (2000)로 재출판.

[61] Cf. E. Schlink, Ökumenische Dogmatik (Göttingen: Vandenhoeck, 1983), 770.

[62] 고재수는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는 성경을 원어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Professor Boer and Theological Education”, Clarion, 51/15, July 2002, 35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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