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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예배론.직분론의 비틀림 - 교회 몰락의 가속 페달

강승철 장로/대청교회


한국교회가 동네 개로 전락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교회의 지성과 양심을 일깨우는 어른으로 존경을 받는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는 최근 새벽이슬교회에서 ‘한국교회의 반성과 새로운 도전’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의에서 “지금은 기독교가 동네 개처럼 되었습니다. 주인 없는 개가 동네를 돌아다니면 아무나 걷어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기독교를 욕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통렬한 질책을 쏟아내었다. 손교수는 이렇게 한국교회가 추락하게 된 이유를 놓고 “한 마디로 윤리적 실패 때문”이라면서 “윤리적 실패란?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 성경은 믿는데, 성경대로 행하지를 않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주님의 영광스런 몸인 교회가 어쩌다가 이런 꼴로 전락했을까. 손교수는 “윤리적으로 살아내지를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지만 나는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것이 설득력을 가지는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어쩌다가 동네북이 되고 경건의 능력은 커녕 비루먹은 강아지 마냥 빌빌 대고 신천지 등의 이단의 발호에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소릴 듣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아닌 한마디로 교회의 급성장과 이에 대한 대처의 실패 때문이다. 한때 한국교회는 세계교회로부터 성장에 대한 아이콘으로 추앙을 받던 때가 있었다. 교회는 십자가 깃발만 꽂으면 교인들이 몰려오고 대형 교회만 해도 전 세계 각 교단의 가장 큰 교회들이 다 한국에 있다고 좋아했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수만 명 수천 명 모이는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그런 교회들에는 예배가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 7부 마구 마구 쪼개지면서 성도들은 몰려갔다. 지나고 보니 이런 교회의 성장을 좋아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는데 멋도 모르고 우리는 이런 식의 성장을 좋다고 자랑했었다.


이런 식의 성장으로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곳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교회가 성장을 하는데 타격을 입다니? 사실 그렇다. 교회의 성장이라는 달콤한 과실에 취해있는 사이에 교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만에 걸리기 시작했고 수천 년 이어오던 정교한 시스템은 시나브로 공교회성의 몰락과 함께 성도의 거룩한 교통을 잃어버린 대사 이상, 전문 교역자 중심의 교회 운영에 모든 것이 치우친 복부비만, 넘치는 에너지가 줄줄 새는 당뇨, 양분을 빨아만 먹고 내부 조직만 키우고 자체 증식하는 암 세포 같은 조직의 전이 등 소리 없는 암살자에 의해서 병들고 말았다.


교회 공교육의 약화는 그런 면들 가운데 두드러진 표징이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역자들은 이상하게도 수백 년을 이어오던 신앙고백을 중심한 공교회교육을 하찮게 여기고 본질에 대한 교육보다는 이름도 잘 알 수 없는 이러저러한 훈련들, 무슨 무슨 코스 등 공교육이 아닌 과외 공부에 열을 올렸다. 꿩 잡는 게 매라는 허황된 사상에 몰입된 지도자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몰려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골다공증에 걸린 교회는 제대로 힘도 못쓰고 이단과 세속의 세력들이 내지른 한 방에 골절상을 입고 핑핑 자빠지는 저질 체력들이 되고 말았다.


원래 공교회 교육은 교리공부로 대표되는 교회가 수백 년 동안 이어오던 유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교회에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각종 교회 밖 선교단체의 훈련방법들을 응용한 정체도 불분명한 교재들과 훈련과정들이 교회교육의 현장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공교육교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소교리문답의 교육은 강단과 교육의 현장에서 외면 받고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청소년 세대나 청년들은 아예 “그런 교재들이 있었나? 그게 뭔데요?”에 이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교리교육은 한참 옛날에 듣던 소리로 전락했다. 목회자들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어느 목회자는 교리 설교를 부탁하는 성도에게 대뜸 하는 말이 “그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싫어하는데요”라는 기가 막히는 대답을 했다고 하니 참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다.


최근 들어 이단들이 잘못된 종말론이나 성령론 등으로 교회를 흔들어대자 “교인들이 교리를 몰라서 현재의 교회가 이리저리 표류한다”고 인식한 일부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나마 원리는 그런 것 같지만 선뜻 이해하기 힘들고 잘 수긍이 되지 않음에도 교회마다 신론이나 기독론 성령론이나 종말론 등의 강조에 열을 올리는 실정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도 먹히지도 않아서 교회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국교회가 신론 기독론 성령론 종말론으로 대표되는 교리공부들을 한동안 멀리하고 말하기도, 듣기도 싫어한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이 약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약해졌기에, 가르치지 않았기에, 허술해졌기에 한국 교회가 이토록 저질 체력이 되었을까.


한국교회가 아니 장로교회가 저질체력이 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론과 교회론 직분론의 약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면 교회론 예배론 직분론을 안 가르쳐서 그랬나? 아니다. 배운 대로 안 살아서,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전제로 이 글을 풀어가려고 한다. 



예배론 약화에서 시작

예배론과 교회론 직분론은 신론 기독론 성령론 종말론과는 달리 조금 비틀거나 왜곡을 해도 이단으로 정죄를 받거나 의심을 사지 않는 장점(?)이 있어서인지 크게 경계의 대상이 되질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한국교회는 이 부분들을 비틀고 왜곡하고 난도질 한 채 달려가도 한참을 달려가서 이제는 되돌리기엔 너무나 늦어버린 위치에 와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배론과 교회론 직분론이 비틀린 한국교회 사실상 ‘끝이 달라진’ 시점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점잖은 표현이다. 이해하시라


먼저 예배론의 혼잡이다. 한국장로교회는 정치제도는 장로정치를, 신앙고백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르고 있다. 예전의 한국교회는 바로 이 신앙고백서에 근거하여 성경적 예배의 순서를 제도화했고 오랫동안 지켜왔다. 그러나 급성장 시대에 들어온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멋도 모르고 ‘예배의 갱신’이다 뭐다 하면서 급속하게 개혁교회 전통의 예배를 무슨 구닥다리에 타파해야할 것으로 여기고 무수히 난도질하고 다른 교회의 것으로 물 타기를 시작했다. 신앙고백도 빼고, 교독문도 빼고, 헌상의 순서도 교인들이 귀찮아하고 예배 시간에 압박을 준다고 가위질해버리고, 괴이하게도 워십댄스니 하는 춤판이 공 예배 시간에 첨가되었다. 주일 공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와 삼일 기도회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사라지기도 하고 마음대로 예배 개수를 늘리고 줄이기도 했다. 누구도 여기에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예배 갱신이라는데. 더욱이 교인들이 원한다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예전에 고신대에서도 신앙고백이 다른 교단의 예배학자라나 자칭 국내 최초의 설교학 박사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무슨 ‘기쁜 소리’처럼 감동 속에 예배 갱신 강의를 침을 흘리면서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주장을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 기억할 수 없지만 “가톨릭은 예전만으로도 은혜를 받는데 이에 비해 개신교는 너무 예전이 무시되고 있으니 이제부터 예전을 강화해야한다”고 떠들던 게 생각난다. 구닥다리 순서는 빼고 예전을 강조하던 그는 가톨릭교회 예배의 예전에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을 해서 듣던 신학생들을 감화시켰다. 이렇게 배운 신학생들이 교회로 흩어지면서 한때 교회의 예배 갱신을 주도하고 예배를 연다고 주보 순서를 멋대로 바꾸면서 한동안 교회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갔다. 이세대가 바로 지금 2천 년대의 한국 교회를 이끄는 주역들이다.


갱신 갱신하는데 예배는 갱신해야할 대상도 회복해야할 대상도 아니다. 거룩한 예배에 갱신을 자꾸 갖다 붙이고 회복을 외쳐대니 마치 예배가 잘못된 것처럼 들리게 되고 예배는 손을 볼 대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손 볼 대상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갱신해야할 대상과 회복해야할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그가 침을 튀기면서 주장하던 예전이란게 우리의 개혁교회 선배들이 피를 강같이 흘리면서 몰아내고 타파했던 부분들인데 어째서 80년대 성장의 시대에 다시금 한국교회, 그것도 장로교회에 유행병처럼 번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가졌던 예배의 순서란 게 갱신을 필요로 할 정도로 타락을 했는지도 그래서 닫힌 예배였는지도 생각해보면 참 무식해도 정말 무식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예배순서가 개교회 직분자들에 의해 수시로 변경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예배기획자들에 의해 예배요소와 순서가 마음대로 주물러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제 ‘예배는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공식적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희석되고 종교적인 열정만이 넘쳐나고 있으며 예배 요소와 순서 및 예배 분위기에 대한 기획은 넘쳐나지만 정작 예배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늘 뒤로 밀리고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교회들은 여전히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런 영향으로 한국의 장로교회에는 소위 ‘열린 예배’라고 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축하는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사람들의 흥분과 열광, 정체도 모를 이상한 방식의 공연이나 집회 수준의 예배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너도 나도 교회마다 앞 다투어 이런 방식을 도입한다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한술 더 떠서 교회개혁자들이 그토록 철폐하려고 했던 제단이나 성상이 슬그머니 교회의 벽면을 장식하고 십자가는 아예 정식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어느 신실하게 목회를 하는 신학교 동기는 자기는 교회에 장식으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교인들이 하도 왜 교회 안에 십자가를 안 세우냐고 물어대고 당회원들도 십자가를 교회당 안에 세울 것을 요청해서 할 수 없이 십자가를 교회 벽면에 세웠다고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대신에 그 교회에는 십자가를 교회 벽면 중앙이 아닌 뒤쪽 한 편에 세워놓아 그래도 의식이 있는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성상이 들어오는 묘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보이는 말씀’을 상징하던 성찬상이 한 구석이나 아예 교회 뒷마당으로 밀려나고 거기엔 북이 떡하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성찬상이 밀려나는데 교회에서 논쟁이 있고 분란이 있었다는 소리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성찬상을 그냥 보면대 쯤으로 여긴 까닭이다. 교회의 표지인 성례의 상징을 지워버리는데도 아무런 논란이 없다니. 세속의 그림자가 침묵을 한 채 소리 없이 드리워지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골빈 교회가 된 것 같아 속이 상한다. 


한편 성장하는 여세를 못 이겨서 그런지 교회마다 2부, 3부, 4부 심지어 6부, 7부까지 예배를 늘려서 시간 타임별로 치밀하게 예배를 공연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당연히 설교시간은 30분 이내로 축소되었고 그 사이에 공연에 버금가는 CCM 공연에 아예 화려한 안무까지 곁들인 쇼가 그것도 공예배 시간에 벌어진다.

예전에 낮 예배 설교를 4시간 하는 교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님이었다. 그 목사님이 신학교 개강 부흥회에 강사로 와서 저녁 집회를 하는데 설교를 그 다음날 새벽 6시까지 하는 데 함께한 적이 있다. 그런 목사님이니 교회에서도 설교는 당연히 4시간이 기본. 그러다가 언제 부터인가 설교 시간이 3시간으로 줄어든 시점에 그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 있었다. 그 교인인 “웬 설교 시간이 그렇게 기냐”고 기존 교인들에게 묻자 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래도 지금은 3시간 밖에 설교를 안하니 너무 설교 시간이 짧아졌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말씀에 충실하려고 애를 쓰는 교회들 가운데에는 120분, 90분 설교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사람들의 시간이 ‘존중’을 받기에 설교시간이 줄어드는 예배는 더 이상 말씀이 존중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예배에 대한 기본 개념의 상실로 마구 늘린 예배들 열린 예배 3,4,5부 예배들 심지어 ‘젊은이 예배’라는 해괴망칙한 집회인지 예배인지도 구분 못하는 예배의 비틀림도 문제다. 예배론의 추락은 곧바로 교회론의 망실로 이어지고 있다. 한 교회 안에는 공예배가 하나여야 한다. 그래야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원리가 지켜지게 된다. 개코도 모르고 늘려놓은 예배 시간들, 한 교회 안에 3개, 4개 심지어는 7개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한심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렇게 예배가 비틀어지면서 한국교회는 본질의 힘들, 복음의 능력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교회의 공예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축’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회중들을 불러 모으셔서 예배하게 하시며, 성자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통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회중의 소명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은 회중들이 기쁨으로 경축하는 예배 가운데 은총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의 행위로 은혜를 베푸신다. 이에 회중은 그가 베푸신 은총에 찬양과 헌상의 행위로 응답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인 회중은 불가시적인 말씀의 선포와 가시적인 말씀인 성례에 감사와 기도 및 찬양, 헌상으로 응답하는 것이 개혁교회 예배의 원리다.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은 이러한 예배 원리를 바탕으로 은혜언약의 틀 안에서 목사와 회중이 함께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설교시간에는 온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다보니 시간상으로도 보통 1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이다. 설교 시간 20분을 못 참아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체력으로는 바른 교회 꿈도 뭇 꾼다. 칼빈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입이라고 했다. 거룩한 하나님이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나오시는 시간인데 어떻게 예배를 허투루 사람의 시간 중심으로 드린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선포되는 말씀으로 나오시고 이를 환영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 예배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하는 주일 공예배도 그렇다. 주일예배 시간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서 주일예배가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되게 하고 여기서 주일예배의 정신들은 가정예배로 연결되도록 한다. 바른 예배와 가정예배가 무너진 것은 다음 세대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예배 전이나 후에 세대별 연령별로 성경공부나 교제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다. 예전에 대부분 교회에서는 공부예배라고 해서 장년들을 위한 공과공부시간이 주일 낮 예배 30분전에 반드시 있었다.



교회론이 머꼬?

예배의 추락에 이어서 교회론도 ‘아차’ 하는 사이에 병들고 멍들어서 이젠 쉰 냄새가 날 지경이다. 요즘 장로교회의 경우 대부분 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가 장로교회인지, 감리교회인지, 회중교회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장로교회하면 장로 정치제도를 도입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장로교회에서는 교회의 신령한 일을 총찰하는 일을 장로들에게 위임한 ‘대의 정치’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당회이다. 대의 정치제도를 도입한 교회가 바로 장로교회이다.


장로교회에서는 정치 즉 치리 행위는 장로로 선출된 자들로 구성된 당회에게만 허락된 행위이다. 교회에서 '정치'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정치와는 다른 의미다. 일반 국가에서 정치는 '다스림'을 의미하지만 교회에서 정치란 성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권력자로서 성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단지 교회의 세워짐을 위해 장로직을 맡은 ‘직분자’로서의 소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장로’가 아닌 교회의 일반 성도들이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교회마다 “나도 교회의 치리 행위에 참여하겠다”는 목소리들이 심상치 않다. 이런 식의 주장들은 회중교회의 입장에 서 있는 자세다. 회중교회에서는 영적인 문제를 포함한 모든 것을 회중이 결정한다. 그러나 장로교에서는 영적인 문제는 장로회의 전권에 속하는 것이다. 


교회의 표지하면 말씀선포, 성례, 권징인데 이 역시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러니 교회의 표지가 뭔지도 모르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실정이다. 한때 장로교회마다 도입하고 시행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던 가정교회가 교회의 표지를 상실한 대표적인 예다. 교회라고 명칭을 달면 거긴 말씀 선포와 성례가 시행되고 권징이 있어야 하는데 성례는 목회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며 권징 역시 당회가 행하는 것인데도 상당수 장로교회 목회자들은 그냥 지르고 보는 식으로 ‘가정교회’라고 이름을 달고 파송이니 임명이니 하면서 가정교회지도자들에게 장로 집사 임직 때에만 하는 ‘안수’를 하고 난리를 쳤다. 그러면서 그런 가정교회에 교회라는 이름을 다는데 아무런 생각들이 없었다. 교회론을 반납하고 휴지조각처럼 여긴 탓이다.


하나님은 숫자로 일하지 않으시는데 언제 부터인가 대형 교회가 답인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소위 설교 잘한다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가고 그 교회는 숫자가 많아지니 늘어난 교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예배를 쪼개서라도 한 사람도 다른 교회에 보내지 않으려고 가두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초대형 교회를 목회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교인 한 사람도 남의 교회에 보내는 것이 아깝다. 절대 보낼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한 영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야 얼마나 기특한 것이랴. 그렇지만 그렇게 한 사람도 보내지 않고 고작 한 것이라고는 예배를 다섯 개 여섯 개 만들고 그렇게 해서 교회당을 크게 짓고 예산을 키워서 힘쓰는 재미에 깊이깊이 빠져드는 사이에 교회는 대중은 몰려왔으나 ‘성도’를 잃어버리고 돈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거룩해야 할 교회의 추락은 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냥 좋은 줄 알고 쪼개었던 시간대별 예배도 교회의 하나 됨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대다수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심각성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예배를 나누지 못해서 안달이 났으면 났지 예배의 시간대별 분리가 어떤 해악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공예배가 서너 개가 되면 한 지붕 아래 서너 개의 교회가 서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 같은 교회가 어떻게 건강성을 유지 하겠으며 경쟁력을 가지겠는가?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이 교회를 괴롭히게 될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우리의 선배들은 교회가 성장을 해서 예배당이 꽉 차면 예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분가하는 쪽을 택했다. 예전에 영도에 세워진 2,3,4,5,6,7,....영도 교회들이 그 좋은 예다. 그리고 지금도 곳곳에 서 있는 ‘제2**교회’ 명칭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슬며시 교회가 교회의 분가를 중단하고 예배를 나누기 시작하더니 너도 나도 소위 대형 교회들이 이 대열에 깃발을 들고 나섰다. 부산의 대표적인 교회들이라고 하는 모모한 교회들이 앞장을 섰고 이제는 제2성전 어쩌고 하면서 교회가 분리는 않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교회에 제 2성전 이름을 붙여서 텔레비전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물론 교회의 건강성마저 크게 해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처사다.


더 심각한 것은 큰 교회들이 교회를 나누지 않고 예배를 쪼개면서 작은 개척교회들이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사실이다. 실컷 교인들을 전도해서 성장을 시켜놓으면 제 편한 시간 찾아서 큰 교회의 쪼개어진 예배 시간대에 스며들어가니 개척교회마다 ‘죽을 지경’이라는 아우성이다. 교회의 욕심에 한 몸을 이루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할 작은 교회들이 속병이 들고 시름시름 앓게 된 지 오래인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도 못하고 대형교회는 ‘비만’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 꼴을 한 교회의 모습에 우리 주님이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고 계실지 모를 일이다.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려면 매머드처치의 우스꽝스런 옷을 벗고 공예배를 하나로 다이어트하고 군살들은 지방흡입술로 빼서 개체교회들을 개척해서 나누어야 한다. 우리 주님이 교회를 세우라고 했지 예배를 쪼개라고 했나 살펴볼 일이다. 예배를 쪼개면 교회의 통일성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 부분에 정신을 차리지 않는 한국교회에 황혼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고 있다. 
  

직분의 황폐화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직분의 추락이다. 직분이 날개없는 추락을 시작한 것은 교인들의 윤리의식 퇴화 등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할 수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의 급성장과 그 해결책으로 예배를 쪼개고 나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전에 한 예배를 드리던 시절에는 전체 교인들이 직분 대상자를 온전히 파악할 수가 있었다. 교인들끼리 세세하게 알고 지내는 덕에 인물에 대한 검증이 상대적으로 엄격하였으나 급속한 교회의 성장으로 교인들이 늘고 교회를 세우기보다 예배를 쪼개기 시작하면서 부터 이 부분이 약화되었고 직분 대상자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제직들끼리도 1부, 2부, 3부 예배 참석이 달라 서로 간에 얼굴을 모르게 된 형편이다.


이렇게 되니 예배를 여러 개로 나눈 대형교회의 경우 드러나는 현상이 직분자 피택에서 노회로부터 허락받은 정수를 번번이 채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당황한 교회마다 직분자들을 세우는 방식을 놓고 고민 끝에 다양한 방식들을 도입하였다. 어떤 교회는 집사 피택을 앞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사람이 신청하라”고 한 뒤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에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자에게 엑스 표시하라”고 해서 3분의 2 득표를 하게 했다는 코미디와 같은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하고 싶다고 나를 찍어달라고 나서는 것도 우습고 그런 사람들을 놓고 투표를 하는 교회도 그렇다. “이렇게 선출된 중직자를 누가 존경하겠는가” 하는 한탄을 들은 적이 있다. 직분이 희화화되기에 이르렀고 직분자들을 조롱하는 것이 다름 아닌 교회내에서 시작된 것이다. 

대부분 교회가 이를 해소할 요량으로 교회마다 당회의 추천제를 도입하기에 이르렀지만 이 역시 대형교회의 특성상 직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선택을 하고 그 세워진 사람들에 의한 대의 정치의 뜻을 따라야 하니 자연스레 무관심해지고 세워진 직분자들에 대한 존경은 물론 그 권위조차도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교회가 급성장한 것과 직분의 추락과 연결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예배의 나눔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교회의 분리와 개척에 힘을 썼더라면 직분의 권위도 이토록 추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 도입된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그들에게 안수를 해댄 것도 장로와 집사 임직에만 안수하던 전통교회의 직분의 질서에 혼란을 부채질한 것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제 가정교회를 도입한지 한 10년 쯤 되자 상당수 교회가 직분의 혼란 때문에 덩달아서 교회 질서도 보이지 않게 손상을 입고 있다. 그래서 뭔지도 모르지만 교회가 예전 같지 않는 등 이유를 모른 채 골머릴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교회에서 엄격한 투표가 아닌 아무나 안수해서 세우면서 장로나 집사나 가정교회 인도자나 동급이 된 것, 이런 저런 이유로 직분의 권위가 투표에서도 추락한 것 등의 원인으로 직분론의 혼잡과 추락은 지금도 가속되고 있다. 

 
대안은 ?

간단하다. 사실 위에서 지적한 것은 교리라고 말하기에도 뭣한 것이다. 상식에 불과한 것이다. 먼저 교회는 예배를 나누기 보다는 교회를 분가해서 1교회 1공예배의 원리를 지켜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사이즈도 3백~4백 명 내외가 될 것이고 그런 교회에서 직분자 피택도 당연히 예전의 엄격함이 회복될 것이다. 한 교회 한 공예배가 되면 11시 공예배의 수용에 한계가 드러날 것이고, 그 풍선효과는 개척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한국교회가 경건의 힘을 상실한 것은 매머드 교회 시대 이후부터란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그리고 신앙고백 순서에 의한 예배로 돌아갈 것이다. 갱신이니 열린 예배니 하는 정신 나간 놀음을 집어치우고 예전 할아버지 할머니가 드리던 신앙고백순서에 의한 예배로 다시 개혁해야한다. 여기서 11시 공예배만 드리게 되면 2부 3부 예배에 밀려서 예배 때 설교시간을 줄이는 폐단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나이스한 성도들의 시간이 존중을 받으면서 줄어든 설교시간이 회복된다는 말이다.


이 부분들이 회복되면 예배는 예배다워지고 그런 예배를 드린 그 다음은 기본 교리에 충실한 교인들이 될 것이며 교회는 자연스레 경건의 능력도 회복되고 윤리적인 삶도 회복될 것이다. 사회적인 영향력? 그거 빛 좋은 개살구다. 현혹되지 마시라. 교회는 그냥 교회다우면 그 다음엔 사회가 알아서 무서워한다. 그게 우리 기독교 2천 년의 역사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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