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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6일 전국 SFC 동문대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좋은 특강이 있었는데, 본보는 특강 강의안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시대 상황과 그리스도인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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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경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가. 정치적 올바름

 

필자가 유학차 미국에 첫발을 디딘 1991년에는 ‘정치적 올바름,’ 영어로는 ‘Politically Correct (또는 Political Correctness, PC)’라는 표현이 미국을 뒤덮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옳다’는 이 표현 하나를 두고 몇 해 전부터 전개되어 오던 논쟁이 바로 그 무렵 정점에 이르렀다. 이 개념은 사회의 특정 그룹, 특히 소수 집단을 배척하거나, 무시하거나, 공격하는 언어 또는 행동을 하지 말자는 포용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성, 인종, 종교 등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인데 사실 이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주장을 가리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냉소적으로 표현하였으므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말에는 ‘다른 면에서는 틀렸다’ 또는 ‘전체적으로 볼 때는 틀렸다’는 뜻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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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ly Correct

반대 배지

 

   용어 자체의 역사는 제법 길다. 초반기에는 주로 좌파 진영에서 우파적 독선주의를 경계하며 비판적인 뜻으로 사용하였다.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는 독일의 나치스나 공산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하였고, 1950년 전후에 미국에서 있었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논쟁 때는 사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적 태도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 비난하였다. 1970년대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이 촉발시킨 미국의 신좌파 운동 (The American New Left)이 자신들이 펼친 민권, 여권주의, 동성애 옹호, 낙태 옹호, 반체제 운동 등을 내부적으로 평가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여 교조화의 가능성을 경계하였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서는 보수진영 사람들이 신좌파 운동의 자유주의 또는 진보 성향을 비판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때부터 이 용어도 진보적 사상을 묘사하는 냉소적인 표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대립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던 가운데 1990년 가을학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이 용어가 미국 대학가에 급속히 퍼지면서 인종, 생태학, 여권주의, 문화, 심지어 대외정책까지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듬해 봄 보수적인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 (George H. W. Bush)이 미시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이 용어 및 사상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이 온 나라에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운동을 일으킨 동기는 인종차별, 성 차별, 혐오 등의 잔재를 말끔히 제거하자는 것으로서 칭찬해 마땅한 열정이지만 사실상 이 운동은 과거의 편견을 새로운 편견들로 바꿀 따름입니다. 이 운동은 특정한 주제, 특정한 표현, 심지어 특정한 몸짓까지 논의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당시 보수그룹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하였고 보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개념이 확산되면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대로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며 반대의 뜻을 담은 배지를 달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Paul Krugman)은 이와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이 정반대의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한다며 비판한다. 힘과 돈을 등에 업고서 조지 오웰이 우려한 것처럼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사상에 관해 말하거나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차별을 금지하자는 진보주의의 정치적 올바름도, 또 그런 주장이 오히려 압력이 된다는 보수주의의 정치적 올바름도, 반대쪽 사람들에게는 압력으로 다가왔다.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때는 즉각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무렵 필자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갔다가 이집트 전시관에서 파라오와 부인의 조각을 본 적이 있다. 파라오는 크게, 부인은 조금 작게 만든 돌 조각이었는데 내 옆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서 “저거 봐라! 남자를 더 크게 만들었네” 하고 불평하는 걸 들은 일도 있다. 남자가 여자보다 체구가 큰 게 일반적이고 그 여학생 둘도 필자보다 훨씬 작았다. 게다가 파라오는 왕이었으니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인데 그걸 만든 조각가는 남녀를 똑같은 크기로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천 년이 지난 뒤에 욕을 먹고 있었다.

   그런 가치관의 차이가 현장에서는 적지 않은 압력으로 다가왔다. 당시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조교를 하고 있던 한 대학원생의 증언에 따르면 성 차별 문제에 모두들 극도로 민감한 시기였기 때문에 힘든 화학실험을 할 때도 여학생은 도와주기 어려웠다고 한다. 남학생이 힘들어 할 경우 도와 달라 하지 않아도 가서 도와줄 수 있지만 여학생의 경우에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가서 도와주었다가는 성차별을 한다고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대학원생: 서울대 성영은 교수)

 

 

나. 올바른 언어 표현

 

성, 인종, 종교를 근거로 한 차별은 주로 언어 및 행동으로 해 온 일이므로 변화운동 역시 이 영역에 초점을 맞추었다. 영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양 언어는 오랜 세월 남성 중심의 표현을 써오고 있었다. 사람을 대명사로 지칭할 때는 그냥 He 하나만 사용하여 여성은 배제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He or she’라고 하고 소유격도 ‘His or her’라고 해야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 되었다. 이런 포용적 언어 (Inclusive language)의 사용은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여성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무척 뜻깊은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영어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없고 남자를 가리키는 맨 (Man)이 바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Man or woman이라 하기는 번거로워 휴먼 비잉 (Human being)을 쓰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Man을 Person으로 대치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경우도 있다. 의장을 가리키던 체어맨 (Chairman)이라는 말은 체어퍼슨 (Chairperson)으로 바뀐 다음 너무 길다 싶었는지 사람은 떨어지고 그냥 체어 (Chair)만 남았다. 시대 분위기의 변화 때문에 무생물이 인격체로 승격된 보기 드문 경우다.

   나와 다른 집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몸짓을 가리켜 혐오표현 (Hate Speech)이라 부른다. 표현의 자유가 낳은 이런 극단이 특히 소수 그룹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이런 표현을 없애려고 애를 많이 썼다. 인종차별의 경우 흑인을 비하하던 니그로 (Negro) 같은 표현 대신 흑인 (Black People) 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African American)을 쓰게 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는 오랜 이름 대신 아메리카 토착민 (Native American)이라 불렀다. 이런 경우 객관적인 자료도 사용했지만 무엇보다 그 말을 듣는 본인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주된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실천은 어렵다. 고민한 끝에 이름을 고쳐 주었는데 정작 원주민들 가운데는 인디언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이런 원칙은 다른 영역에도 반영되었다. ‘불법이민자 (Illegal Immigrants)’라는 표현 대신 ‘서류미비 이민자 (Undocumented Immigrants)’라는 표현을 쓴다. 법을 잘 지킨 합법 이민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줄 수 있는 표현이지만 이미 이민에 성공한 이들은 가진 자의 여유 때문인지 이런 표현을 문제 삼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하려다가 도를 지나친 경우도 많다. 미국 워싱턴 주 감옥에서는 재소자(Inmates)를 학생(Students)이라 부른다. 더 나아가 노숙자 (Homeless)를 옥외도시 거주자 (Outdoor Urban Dweller)라 부르고 살쪘다 (Fat)는 말 대신 충만한 체격 (Fuller figure), 또는 신진대사 과다성취자 (Metabolic Overachiever)라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두 개는 물론 약간의 유머도 섞인 표현이다.

   언어가 우리 생각과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당연히 환영해야 할 좋은 정책이다. 문둥병처럼 부정적 뜻을 담은 말 대신 나병 또는 한센병이라는 표현을 쓴다. 장애인을 비하하던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등을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등으로 바꾸어 부름으로써 무시에서 존중으로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장애를 빗댄 표현 이를테면 ‘돈에 눈이 먼 사람,’ ‘절름발이 교육’ 등의 표현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보기는 무한하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 하면 삼천포 주민에게는 상처가 되기 때문에 지금은 적어도 아는 사람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이라 부르면서 우리 생각과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실업자를 취준생이라 하니까 느낌도 좋지만 본인들에게도 격려가 된다. 또 요즘은 우리나라가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되어 단일민족 같은 표현을 쓰면 이주민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여기도 물론 어려움은 있다. ‘꿀 먹은 벙어리’ 같은 속담이나 벙어리장갑 같은 이름도 바꾸어야 하나?

   성경적으로 볼 때도 참 뜻이 깊은 변화다. 교회가 지금까지 언어와 태도에 담긴 비성경적 차별을 모르고 지내다가 뒤늦게 마나 깨닫고 바꾸었으니 다행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하자는 운동은 이 점에서 교회에 나름의 유익을 준 셈이다. 물론 교회라고 적용이 쉬운 건 아니다. 성경도 남성위주의 표현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는 구절을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하고 바꾸어야 하는가? 그런 식이면 바꿀 게 하나둘이 아니다. ‘아들들’도 다 ‘자녀들’ 아니면 ‘아들딸들’로 바꾸어야 되겠지만 여자도 포함시켜야 되는지 아닌지 애매한 경우도 많다. (보기 행 10:23 등)

   이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극단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하자는 주장을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전통 신학을 공격하는 일도 생겼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경의 표현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한 여성들을 배려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복음의 근간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빛과 어두움의 은유 역시 어두움이 흑인의 피부색과 통하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럴 경우 성경 상당 부분 특히 요한복음은 대수술을 하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책이 될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에 대한 공격이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는 억눌린 여성의 해방도 포함되어야 하는데 남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남성들에게 억압당한 여자의 구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도전이었다.

   사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하는 운동 가운데 반기독교적인 것들도 적지 않았다.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중단한 것이 한 보기다. 국민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공립학교에서도 공적인 기도가 많이 있었는데 반대가 많아 이제는 기도를 다 없앴다. 기도가 없어진 것은 안타깝지만 공립학교에서 불신자들에게 기도를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 무조건 잘못이라 하기는 어렵다. 또 성탄절에 “Merry Christmas!”라고 인사를 하면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Happy Holiday!”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특히 언론이 이른 흐름에 앞장을 섰는데 이건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을 배려해서 한 일이 아니라 제삼자가 주도한 일이어서 거꾸로 그리스도인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ABC, NBC, CNN 같은 중앙 언론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두 해 전부터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이게 꼭 좋은 일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학계에서 많이 쓰는 연호 B.C. (Before Christ) 와 A.D. (Anno Domini)도 생각의 계기가 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중심으로 한 것으로서 기독교가 주도하던 시대에 만든 것이다. 요즘은 이것 대신 B.C.E. (Before Common Era)와 C.E. (Common Era)로 바꿔 쓰는 사람이 많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주전, 주후 대신 기원전과 기원후를 쓰는 차이다. 교회에서는 주전, 주후를 써도 좋겠지만 믿지 않은 사람들과 교류할 때 기독교적인 이런 표현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는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할 영역이다. 통도사역을 울산역으로 고쳐야 된다고 교회협의회가 앞장서 주장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크게 문제될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앞장서서 양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진리를 전하기 위해 진리가 아닌 것은 과감하게 양보하자는 이야기다. 물론 현장에서는 어느 정도까지가 좋은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 포스트모더니즘

 

미국에서 진보와 보수 사이의 힘겨루기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그 시기는 세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탈근대)이라는 사상이 우리 시대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기간과 겹친다. 단순히 시기만 겹치는 게 아니라 이 둘의 사상적 구조 자체가 서로 닮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하자는 진보주의 운동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었고 그 사조는 또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성공과 함께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현상이지만 그 현상은 사실상 동서양을 넘어 모든 세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거대한 변화를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근세 후’라는 뜻이다. 후기근대 또는 탈현대라 부르기도 한다. 서양 역사, 특히 문화사에서 르네상스 이후부터 지난 세기까지를 보통 근세 또는 현대, 영어로 모더니티 (Modernity)라 부르는데 지난 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는 그 이후의 시대라는 뜻이다. 여기서 ‘후’라는 말이 그 이전의 모더니티와의 연속인지 아니면 단절인지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 다음의 사상이므로 그게 무엇인지 알려면 모더니티 곧 근대성이 무얼 가리키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의 이성, 특히 자율성의 발견이다. 중세 천 년을 암흑기로 지내온 유럽이 르네상스를 겪으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학문, 문화, 예술의 부흥을 이백 년 이상 겪으며 머리도 좋아지고 지식도 늘고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무엇보다 인간이 온 우주의 비밀을 캐는 주체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소위 이성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그 자연의 빛이 가장 밝게 빛난 시기를 보통 계몽시대라 부른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바깥에 있는 진리가 사람 안으로 들어와 지식이 형성된다는 전통적인 수동적 견해를 거부하고 사람이 적극적으로 외부의 자료를 수용하고 분석하여 지식을 만든다 함으로써 인간이 객관적 지식을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따라서 근대성을 나타내는 첫째 특징은 주관주의 또는 자아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진리는 바깥 저기에 나와 무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역할을 통해 주관적으로 확립된다는 입장이다. 둘째로는 합리주의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어 있지만 근대의 정신은 대륙의 합리론(이성론) 철학과 영미의 경험론 철학을 통해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든든하게 세워 주었다. 셋째로는 객관성이다. 인간의 이성이 인식의 주체가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너와 나의 이성이 공감하는 보편 가치를 인정하였고 철학, 자연과학 등에서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 근세다. 넷째로는 낙관적 역사관이다. 인간의 이성이 가진 힘을 깨달으면서 이 이성의 힘으로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세기 들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사람들이 부패한 서구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역사가 생각보다 밝게 전개되지 못하다 보니 자유나 번영 등 이상적인 가치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기술 및 과학일변도의 문화가 주는 피로감도 한 몫을 하였는데 지난 세기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이 그런 불만을 대변한다. 또 모더니티의 폭력성을 경험하면서 모더니티 자체가 옳은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대량살상을 경험하였고 그 이후에도 무한 소비를 통한 자원의 낭비,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등이 근대성 자체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지난 세기 초반에 있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 등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권위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었는데 보편적인 도덕, 보편 경제체제, 국가 제도 등 전체를 포괄하는 사고방식 전반을 혐오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적 세계관까지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화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오늘 우리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체를 알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도깨비와 닮았다.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것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성의 우위를 믿지 않는다. 대신 경험이나 관계 등을 중시한다. 확정된 정의, 경계, 절대 진리 등은 없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주장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정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미치는 사상이다. 이름 자체는 문학, 예술, 철학, 소설, 문화비평 등등에서 주로 거론되지만 삽시간에 세계를 뒤덮은 초고속 문화매체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가 우리의 사고방식 및 인간관계까지 좌우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신학과 설교와 교회운영에도 이 사상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어려서부터 이 사상에 노출된 우리 자녀들은 휴대폰이나 SNS 등을 통해 우리보다 훨씬 강하게 이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사상의 핵심은 상대주의다. 절대적인 것은 무엇이든 거부한다. 반대로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물론 상대주의는 이론적 한계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 자체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원리의 하나지만 그런 논리적 모순이 현실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게 모순이다 아니다 따지는 것 자체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좋은 보기가 황희 정승 때의 일화다. 황 정승 집안의 종 두 사람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말싸움을 하다가 결론이 안 나 황희 정승에게 왔다. 황희가 한 종의 말을 다 듣고는 “네 말이 옳구나” 했다. 그러자 다른 종도 서둘러 제 입장을 설명했다. 말을 다 들은 황 정승은 “네 말도 옳구나”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황 정승 부인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이 아이 말도 옳다 하시고 저 아이 말도 옳다 하시면 옳고 그름을 어떻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황희 정승은 “듣고 보니 부인 말씀도 옳구려!” 했다.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종이나 황 정승 부인의 말도 물론 옳지만 이것저것 다 옳다 한 황희의 말이 옳다는 사실이다. 종 두 사람의 말이 다 맞을 수 없고 그걸 부인이 올바르게 지적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개의치 않는다. 남이야 옳든 말든 황희 정승 자신만 옳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게 우리 시대의 원리다. 내가 틀렸다 지적하는 사람까지도 옳다 해 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너그러움은 어떻게 하든 나 자신은 옳아야 한다는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객관적인 진리는 없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해한 그것이 진리다. 무엇이든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에만 진리가 된다. 합리성 자체는 거부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보편적 합리성을 거부하고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근대성과 반대다. 부엌에서는 며느리가 옳지만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가 진리다. 옳음은 옳음인데 절대 기준에 따르는 옳음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에 맞춘 옳음이고 특정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상대적인 옳음을 가리킨다. 이성끼리 충돌을 일으켜도 상관하지 않고 다 옳다고 수용한다. 인간이 자율과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진리라 믿는 것이 남에게도 진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주의의 겸손으로서 불가지론과 통한다. 그런데 그 겸손 뒤에는 가치판단 자체를 싫어하고 절대적인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는 강력한 폭력이 숨어 있다. 누구든 안다고 주장하면 학문과 삶의 현장에서 내쫓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는 보편주의 또는 전체적인 것에 대한 거부, 특히 거대담론(巨大談論)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거대담론 (Meta-narrative, Grand narrative)은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 곧 전체적인 세계관이다. 리오타르 (Jean-Francçis Lyotard)는 거대담론이 우주에 존재하는 무질서와 혼돈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거대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별사건이 많다는 것이다. 또 거대담론은 인간 존재의 이종성 내지 다양성을 짓밟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거대담론 아닌 지역담론 또는 작은 이야기들이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고는 우선은 소외되었던 것들을 받아주는 포용주의의 면을 보이지만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강력하게 거부하며 필연적으로 또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상대주의 및 다원주의로 이어진다.

   주류의 독점적 진리성을 거부하고 주류의 그늘에 묻혔던 것들도 똑같이 진리임을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류에게 눌려왔던 여성, 다른 인종, 외국인, 장애인 등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크게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통한다. 부시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좋은 뜻을 갖고 시작한 좋은 운동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에 들어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부시가 염려한 것처럼 표현의 자유 때문에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하는 일은 언제나 또 다른 표현의 자유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특정한 표현을 가리켜 혐오 표현이라 부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다 하는 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상호 모순적인 것도 모순이라 하지 않고 옳다며 계속 밀고 나가므로 현대 초기에 경험한 절대적인 것들 사이의 충돌 못지않은 또 다른 충돌의 가능성도 제 안에 품고 있다.

 

 

라. 포스트모더니즘과 교회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나 그 배경이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은 일단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보수 그리스도인들에게 호된 꾸지람이 된다. 오랜 세월 시대 분위기에만 편승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남녀를 가르고 여성에게 부당한 억압을 행사할 때 교회는 서로 존중하고 복종하라는 성경 말씀을 순종하거나 가르치지 못했다. 오히려 세상의 풍조를 바탕으로 성경을 적당히 재해석하여 세상 흐름에 동조했다. 오랜 세월 성경을 왜곡해 흑인을 노예로 부렸고 흑인들이 민권운동을 통해 자신의 인권을 되찾으려 할 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운동을 짓밟았다. 그 밖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호하라 명령하신 장애인, 외국인, 가난한 사람 등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밀어내고 경멸해 왔다. 유대인을 비롯하여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노력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보다 관계를 끊고 조롱하면서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기독교가 정치 경제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압력을 행사한 일도 적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진보 또는 보수라는 성향에 따라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둘 다 성경과 통하는 원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가 그 원리를 구현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까닭은 이 운동과 사상이 보호하려는 소수 그룹이 성경이 말하는 소수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동성애 및 낙태의 수용 문제다. 진보적인 교회는 그런 것들도 포용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 그대로 담고자 한다. 그렇지만 보수적인 교회는 성경이 동성애를 명백한 죄로 규정하고 낙태를 살인이라 규정한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 해당되는 사람들을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 교회는 정치적 올바름에도 반대하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원리는 옳지만 적용이 틀렸다 하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그런 흐름 전체가 사실상 기독교 복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수 기독교의 상황 인식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아직 많지는 않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에 호의적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맥그래스 (Alister McGrath)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중립적인 사상으로 보면서 그것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알려지기 시작한 제임스 스미스 (James K. A. Smith)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아예 기독교에 유익하다고 본다. 데리다나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요소가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다고 믿고 그것들을 교회를 위해 활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존 쿠퍼 교수는 다원화 시대의 분위기를 이용하면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거부하던 사람들에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제공: 길성남 교수) 다양성에 대한 강조 역시 성경의 원리와 통하는 점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발맞추어 생겨난 이머징 교회는 근대식 교회보다 자기들이 초대교회에 더 가까워졌다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 개혁교회 내에서 생겨난 예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지성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반기독교적 사조로 보는 이들도 많다. 필자의 지도교수인 루이 뒤프레 (Louis Dupré)가 대표적이다. (관련 책: Passage to Modernity, Yale University Press, 1993) 뒤프레는 모더니티를 초월적인 존재 곧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단절로 규정하고 포스트모더니즘도 그런 단절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모더니티의 연속이라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정한 탈근대가 되려면 중세 때처럼 우주를 다시금 초월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의 존재를 의심함으로써 근세 들어 끊어진 그 관계를 더 소원하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반기독교적일 수밖에 없음은 이 운동을 주도한 데리다, 푸코, 리오타르, 로티 등의 사상가가 전부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드러난다. 물론 무신론 자체도 일종의 절대 진술이므로 이들은 자신의 무신론을 명백하게 표한하지 않는다. 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주류가 아니라 기독교라 불리는 주류이며 이들이 비주류를 옹호함으로써 의도하는 것 역시 결국은 기독교 복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이런 요소가 오래 전부터 교회를 공격하고 흔들어 왔다. 그런데 교회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포스트모던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너’라는 이인칭 대명사를 무조건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성경읽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텍스트 읽기 방식과 통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텍스트의 저자나 텍스트 뒤의 실체라는 건 없고 그저 텍스트 하나만 남기 때문이다. 어떤 구절이든 내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아전인수의 해석학 역시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한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나 또는 너를 언급하는 복음송도 많다.

   조엘 오스틴 (Joel Osteen)의 번영복음이 갖는 인기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오스틴의 번영복음은 예수 이름으로 잘 먹고 잘 살자는 면에서는 여타의 번영복음과 같지만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보는 관점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두 권의 저서 제목이 <Your Best Life Now (2004)>와 <A Better You (2007)>로 둘 다 ‘You’를 담고 있다. 오스틴이 말하는 이 ‘너’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불특정 다수인이다.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다녀야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다. 오스틴의 책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누구나 다 가리킬 수 있다. 그런 사람을 향해 오스틴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너는 하나님의 DNA를 물려받았다’ ‘너는 하나님의 편애를 받을 자격이 있다,’ ‘남들은 다 너를 돕도록 되어 있다’ 하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얻는 힘이 ‘긍정의 힘’이고 그런 힘을 얻으면 ‘잘 되는 나’가 된다. 오스틴의 설교를 매주 칠백만 명이 듣고 있다는 게 조금도 놀랍지 않다.

   목사들 가운데도 포스트모던 설교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거대담론을 거부하는 시대 분위기에 발맞추어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원 등 기독교 세계관을 아우르는 큰 이야기는 배제하고 지역적 담론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로 이용한다. 설교 본문도 율법이나 교리 부분은 외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서나 정겨운 시편 또는 서신서를 선호한다. 설교자는 언제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하므로 그런 태도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분명 있다. 그렇지만 그런 선택이 ‘거대담론은 없다,’ ‘온 우주를 포괄하는 절대 진리는 없다’ 하는 시대적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교리를 거부하는 우리 시대에 교리 아닌 다른 걸 가르쳐야 하나 아니면 그럴수록 교리교육을 강화해야 하나? 쉬운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주일학교가 줄어들고 있다. 주일학교가 아예 없는 교회도 많다고 한다. 청년층도 눈에 띄게 줄었다. 출산율의 저하를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상적인 변화다. 우선 우리 자녀들은 우리보다 훨씬 깊이 포스트모던적인 상대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정서를 가졌다. 게다가 부모인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이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에서 세뇌를 당한 면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기 어렵다. 그 어느 것도 강요하기 어렵고 웬만한 것은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우리가 자녀로서 부모를 향해 가졌던 두려움, 복종 등의 태도를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를 그렇게 만든 요소 가운데 유교가 크게 작용했으므로 과거가 옳고 지금이 틀렸다고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변화의 배경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사조가 자리 잡고 있음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가운데 휴대폰이 우리 시대의 중심에 섰다. 모든 개인이 단말기에 매여 산다. 십여 년 전에는 컴퓨터 문제로 아이들과 전쟁을 치른 부모가 많은데 지금은 휴대폰 문제로 씨름을 벌인다. 휴대폰은 24시간 끼고 사는 것이라 훨씬 더 힘든 전쟁이다. 온 나라 모든 아이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휴대폰만 한다고 아이들을 나무라는 부모도 많지만 사실은 그런 자신도 이미 휴대폰을 내내 끼고 산다. 휴대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꾸중하는 것이면 괜찮지만 자기도 매여 있으면서 아이들을 나무라는 건 옳지 않다. 오늘은 아이나 부모나 휴대폰으로 정보를 공급받고 재미도 맛보고 소통도 하고 또 인간관계도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휴대폰은 온 우주와 통하는 창이요 그 단말기를 손에 쥔 나는 진리의 최종 결정자가 되었으니 우리는 모두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마. 오늘의 복잡한 상황

 

오늘날 온 세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원리는 맞는 것 같은데 적용은 쉽지 않고, 복잡한 적용 이면에 더 큰 사상적 도전이 숨어 있는, 어떤 면에서는 참 어려운 그런 시대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겪는 현실은 우리가 지금 거대한 영적 싸움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이 세상의 풍조 곧 마귀의 세력과 싸우는 삶이다. 성경이 기록될 무렵도 그랬고 아우구스티누스 때도 그랬고 종교개혁 때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싸움은 조금 더 어렵다. 마귀가 힘이 갑자기 더 세진 건 아니다. 사회가 복잡해졌을 뿐이다. 차원도 영역도 다양해지고 우리 삶도 복잡해졌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도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는 사실 쉽다. 황희처럼 무엇이든 옳다 해 주면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야 하기에 어렵다. 우리 시대는 지난날의 사사시대와 닮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절대를 거부하는 우리 시대는 왕이 없던 그 시대와 통한다. 칠십 억 인구 각자가 진리의 최종 결정자가 된 지금 사람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런 시대가 올 거라고 성경도 이미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고통의 시기가 올 것이라 하면서 그 특징을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였다 (딤후 3:1-2). 자기사랑과 돈 사랑은 우리 시대의 자기중심주의를 그대로 대변한다.

   30년 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싸움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요즘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역할이 무척 중요해졌는데 이번에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 역시 이 싸움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정치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업가였는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여자를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공개석상에서 장애인을 조롱했다.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내고 무슬림을 전부 원수로 규정하고 이민자들, 특히 중남미 출신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는데 트럼프를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 그룹이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이들이 누군가? 정치적 올바름을 앞장서 반대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트럼프는 사실 그런 몰상식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당선됐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트럼프가 선거 유세를 하는 동안 거듭 사용한 용어가 정치적 올바름이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이 싫다, 정치적 올바름은 문제가 많다, 나는 그런 거 안 한다 하고 거듭 언급했다. 그런 태도에 공감하는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클린턴과 오바마 집권 기간에 주류로 자리 잡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트럼프는 거의 사라지다 시피 한 용어를 20년 만에 되살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어낸 무서운 정치인이다.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동성애와 낙태 등에 대해 성경적 가치관의 회복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사실 트럼프는 기독교와 무관한 사람이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적 가치관 아닌 보수주의 가치관을 선택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30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 보수가 많이 저급해졌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부시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까 우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조롱하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그런 자유를 원한 것은 아니다.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인종차별에 따르는 혐오범죄도 늘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긴 했지만 그건 보수의 승리도 아니고 성경적 가치관의 승리는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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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2018)>라는 책이 올해 초 출간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일한 진보적인 소장 법학자가 혐오표현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한 책이다. 책 전반에 담긴 정신 자체는 그리스도인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혐오 표현 (Hate Speech)’이 상대를 칼처럼 찔러 다치게 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음을 경고하면서 서로를 포용하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배려하는 대상은 장애인, 여성, 이주민 등인데 문제는 성경을 믿는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대상 곧 성소수자가 거기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을 적으로 규정한다.

   전반적인 사상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아니 우리가 앞장서 실천하고 또 전파해야 할 그런 사상이지만, 그 사상에 포함시킨 포용의 대상이 우리가 포용할 수 없는 것이라 당혹스럽다. 사상 자체는 훌륭하지만 적용 한 두 가지만 다른 것일까?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혐오 표현은 당연히 거부해야 하겠지만 무엇이 혐오인지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대주의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며 단 하나도 수용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압력이 가해진다. 자기들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죄 짓는 다른 사람들까지 옳다 해 주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롬 1:32). 그런데 우리는 절대적 가치관을 가졌다. 성경을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그 성경이 모든 것을 다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특히 우리 시대의 중심 논제가 된 동성애와 낙태를 죄라 규정한다. 이건 원리는 옳은데 적용만 한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라 원리 자체의 문제다. 화두가 된 동성애와 낙태는 이 시대의 원리 자체가 틀렸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보기다. 왕이 없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우리가 같을 수는 없다.

 

 

바. 그리스도인의 사명

 

1.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 특히 어느 정도 지적 훈련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사명 가운데 첫째는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전개되고 있는 영적 싸움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자는 것이다. 정말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영과 마귀의 영은 각자의 추종자를 통해 싸움을 벌이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지금은 그런 싸움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전선은 어디쯤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나는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그걸 정확하게 알자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싸움은 전선이 불투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적과 나를 구분하는 선이 전선인데 그 선이 희미하여 일단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가리기가 어렵다. 어떤 점에서는 잘됐다. 전선이 분명할 경우 우리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으로 전락하기 쉽다. 십자군 전쟁이 좋은 보기다. 이슬람이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기 때문에 전선은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형성되었고 싸움을 전개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기독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라는 외적 요소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싸움은 영적 싸움이 아닌 십자군 전쟁이라는 혈과 육의 싸움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십자가를 앞세워 타종교인들을 죽이고 짓밟는 아주 비성경적인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그런 싸움이 거의 불가능하다. 외적 구분이 없으니 어렵고 또 다행이다. 교인 수나 재정 또는 정치권력 등을 싸움에 이용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대적은 동성애자들도 아니고, 동성애나 낙태 옹호론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마귀의 영, 시대의 영에게 사로잡힌 이들로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사람이나 조직을 대적으로 보면 우리 싸움은 필연 혈과 육의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의 우군 역시 우리 교단이나 관련 단체가 아니다. 외적인 조직이나 단체 또는 운동이 그대로 우리 편이라 생각하는 순간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고 그 지혜로 땅의 것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의 싸움에서는 외형적인 적이 우군이 되고 우리 편이 반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심지어 나 자신이 적진으로 넘어가 우군과 싸움을 벌이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도 모르게 일어날 그런 비참한 사태를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도 지혜다.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마귀의 세력과 하는 싸움이다. 성경은 그 세력을 세상이라 부르는데 곧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가리킨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 한 분을 대적하는데 우리 시대에는 그 대적 행위가 절대적인 것을 부인하고 내가 하는 건 다 옳다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이 말하는 포용의 정신인 듯 가장한다.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모든 것을 양지로 끌어내어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부시가 미시건대학 연설에서 한 말처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성을 박살내는” 그런 일을 오늘의 시대정신이 하고 있다. (crusades that demand correct behavior crush diversity in the name of diversity.)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 그룹을 위해 시작된 운동이지만 오늘날 싸움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전에 소외되었던 자들이 이제는 소외되지도 않고 시대정신의 힘을 입어 결국 다수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다수의 음성을 대변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제 소수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낙태나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나라가 계속 늘어가고 있다. 말이 칼이 될 수 있으므로 소수를 향한 혐오표현을 제거하자 했지만 그 칼을 막고자 휘두르는 방패가 이제 칼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참 좋은 태도지만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될 때 특정 그룹을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공격할 수 있으며 그 경우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영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방법은 온유함과 두려움이다. 우리가 사람 수나 재정 또는 권력의 우세를 이용해 남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런 방법을 써서도 안 된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는 김성운 교수의 표현대로 우리가 갈 길은 십자군의 길 아닌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죽이고 희생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방법이다.

 

2. 세계관 연구의 중요성

혈과 육의 싸움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 오히려 진정한 영적 싸움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목표는 분명하다. 내적으로 진리를 믿고 서로 나누며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다. 외적으로는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다. 오늘의 시대 상황 가운데 우리의 사명을 생각할 때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세계관 운동이다.

   우리의 싸움은 복음의 진리와 그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 사이의 싸움이다. 그런데 전에는 이 싸움이 절대적인 진리들 사이의 싸움처럼 전개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무신론 사이의 싸움 또는 기독교 복음과 다른 종교 사이의 싸움이었다. 전부 세계적인 차원의 세계관 사이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세계관 자체를 거부하는 흐름이 우리의 대적이 되었다. 기독교 복음도 그저 한 영역, 한 무리의 생각을 반영할 뿐 전 세계, 특히 소외된 모든 무리까지 끌어안는 그런 세계관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 우리는 기독교 복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포괄하는 총체적인 세계관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 기독교 복음의 출발점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임을 전하여 기독교가 마치 소외된 자들을 외면하는 종교인 양 선전하는 이들의 공격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였던 씨 에스 루이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탁월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Is Theology Poetry?]

   “나는 해가 뜬 것을 믿듯이 기독교를 믿는다. 단지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를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the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모든 것을 설명하는 능력이 복음에는 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이 시대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는 일인데 이 일은 반드시 자신의 전공과 이어져야 한다. 필자처럼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존재에 관해 제기되는 모든 의문에 대해 성경적인 답변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물리, 화학, 생물 등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각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학문적 발견과 발전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과학자라면 자신의 전공을 복음과 무관한 영역으로 남겨두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는 뒤에 있을 성영은 교수님의 강의가 좋은 모델이 될 줄 믿는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밀어내고 세계를 장악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인간관이 사람은 모두 부패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회과학이나 예술을 할 때도 성경적인 신관, 인간관, 세계관을 갖고 하되 그것이 실재하는 세상을 가장 잘 설명함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가진 복음의 진리성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에 입각해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의 진리성을 현실 가운데서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런 작업을 하자면 먼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에 대한 확신이다.

   갈릴레이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아간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소환을 받고 교황청을 방문할 때 자기가 직접 만든 망원경을 갖고 갔다. 재판을 받기 전에 교황청 과학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가 만든 망원경을 주면서 직접 한 번 관찰해 보라 했더니 교황청 과학자들이 전부 사양했다. 태양이 지구를 돌아간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관찰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이유였다. 언뜻 보면 자신감으로 충만한 것 같지만 사실 불안함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진리라고 믿어온 그게 오류로 판명될까 두려워 감히 관찰을 못 한 것이다.

   오늘날 이 부분에서 엄청난 도전이 밀려오고 있다. 인공지능이 많이 발전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어 온 부분까지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이러다가는 인공지능이 자기 의지를 갖고 심지어 신앙고백을 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시금 물을 수밖에 없다. 두뇌과학의 발전도 무섭다.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의학과 손잡고 인간의 모든 정신현상을 뇌의 물리적 활동으로 설명하려 한다. 나중에는 뇌의 한 부분을 잘 조작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만들고 특정한 약물을 사용하여 희미하던 신앙인을 열성 신자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오면 SFC 수련회 같은 것도 안 해도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절대 진리를 부인하는 우리 시대 풍조와 잘 맞아 들어가고 따라서 이런 연구의 진척은 우리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될 수 있다. 이런 연구 결과를 학교에서 배우는 우리 아이들의 귀에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먼 나라의 전설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3. 연구와 계발을 위한 투자

세계관 연구와 함께 해야 할 일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영역에 대한 연구다. 진화론과 싸울 때도 그렇지만 동성애와 싸울 때도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합법화하려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성 정체성에 대해 연구하고 그 연구 결과를 학술지에 게제하면서 자료를 축적해 왔다. 성에는 남자 여자 외에도 더 있다든지 성적 지향성이라는 게 있다든지 등의 이론도 많이 개발해 놓았다. 그러는 동안 교회를 비롯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에 관련된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투자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성애 반대운동을 벌이는 어떤 사람은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런 선동은 진정한 영적 싸움을 방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선동 대신 투자를 해야 한다. 돈을 쓰고 인력을 활용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할 수 있는 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별로 없다. 성, 심리학, 질병 등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사회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동성애나 낙태와 관련하여 국민 일반의 정서를 살피고 공감을 얻어내는 일도 교회를 지키고 또 사람들을 죄에서 떼놓기 위해 필요하다. 낙태를 허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자유가 걸려 있는 문제이니 그 자체로도 중요한 사안이지만 허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결과는 이후의 제도 및 법적 문제로 이어진다. 낙태가 합법화될 경우 낙태 시술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그 비용을 의료보험에서 지불하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미리 연구해 두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전략적인 차원의 지혜도 필요하다. 동성애 문제를 위해서라면 성경적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칠 필요가 있다. 사회의 분위기를 잘 파악해 활용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다른 일로 다투거나 나누어져 있다면 얼른 화해하고 보다 큰 싸움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천주교와 협력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보수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할 때 내세우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모두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이야기인데 이 주장이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우리의 신학적 입장과 맞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죄성은 타고나는 것인데 그 죄성의 대표적인 보기인 동성애 성향은 왜 절대 타고날 수 없는가? 게다가 동성애는 다 후천적이라는 이 주장 역시 학술적인 연구나 조사로 뒷받침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강단에서 또 길거리에서 외치고 있으니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동성애 찬반 여부를 떠나서 교회는 사실 여부를 확인도 하지 않고 무조건 우기는 집단이라 생각할 것이다. 동성애 성향을 타고나는 것이라 인정할 경우 엄청난 후폭풍을 맞게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성경과 신학에 잘 맞추고 전문 영역의 연구로 확인까지 된 그런 주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 성을 통해 세상에 온다. 따라서 성의 문제는 삶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의 인권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그 인권에 성과 관련된 자유는 어느 정도로 허용할 것인지, 교권은 어느 정도로 활용하게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앞으로 첨예한 대립이 생겨날 것이다. 텔레비전의 공공성 문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성, 폭력, 윤리, 술과 담배 등 공중파 방송에서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지 그것도 큰 이슈가 될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시대의 가치관 곧 절대적인 것은 무조건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힘이다. 지금까지 숨어있던 것을 전부 들추어내고 주류로 만들어 함께 더불어 살자 하는 것은 한편 성경적인 포용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아래에는 절대성을 말하는 성경 자체를 거부하는 거대한 동력이 숨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실은 녹녹치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금 세계를 거의 장악했다.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시아에는 대만이 이미 수용했고 그 수는 점차 늘어갈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애쓰지만 전통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끝까지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리처드 마우가 말한 것처럼 불신 세계에 성경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마우도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 찬반투표에서는 반대표를 던졌다. 수가 적어 합법화를 막지는 못해도 적어도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는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아직 막을 기회가 있으니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만의 하나 그 마지노선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변함없이 말해야 한다.

   온 세계가 동성애를 합법화시키고 있는 지금 우리가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죄라 규정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지구평면설을 믿고 있는 자들과 동급으로 볼 가능성도 있다. 그런 비난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장애인을 조롱하던 트럼프와 같은 차원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에 큰 손상이 될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진지한 연구를 통해 자료를 준비해야 하고 그것들을 진지한 대화를 통해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동성애와 낙태를 죄라 규정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약자와 소외된 자를 배려하고 있음을 함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알곡만이 할 수 있는 싸움

영적 전투를 분별하는 지혜, 세계관을 갖추는 일, 연구해 자료를 쌓는 일 등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보다 앞설 수는 없다. 바로 우리의 헌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가 우리에게 던져준 큰 도전은 이제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는 점과 이제는 그 어떤 주류도 주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가르침이다. 기독교가 주도해 오던 서구의 경우 충격이 더 크겠지만 우리나라도 제법 오랜 기간 교회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실력대결 하나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 있다 한 성경 말씀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때가 된 것이다 (고전 4:20). 그 어떤 요령이나 수단이 필요 없고 오직 마귀와 내가 일대일로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

   열흘 전 아일랜드가 낙태를 합법화시켰다. 아일랜드는 천주교인이 절대다수인 국가로 지금까지 천주교회의 영향 때문에 아주 엄격한 낙태법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투표에서 66퍼센트나 되는 국민이 낙태를 찬성하는 표를 던졌는데 이는 낙태 합법화를 위한 투쟁의 결과라기보다 권위를 상실한 천주교회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번 투표는 성범죄를 비롯한 자신의 치부는 오랜 세월 부지런히 감추어 왔으면서도 낙태를 한 사람에게는 몇 년이나 되는 엄한 벌을 요구한 천주교회에 대한 불신임투표였던 셈이다. (자료제공 이춘성 목사) 교회의 권위 상실은 출석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처음 엄격한 낙태법을 제정할 무렵에는 전체 인구의 8-90퍼센트가 매주 미사에 참석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인구의 2-30퍼센트만 매주 미사에 참석한다고 하니 엄청난 변화다. 아일랜드는 2015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지난해에는 동성애자를 총리로 선출했다.

   껍데기만으로 큰소리칠 수 없는 시대다. 이제는 알곡만 남고 가라지는 소멸될 것이다. 싸움은 사실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바깥 저기에 있는 경우보다 내 안에서 옛 자아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주먹을 밖으로 내미는 싸움이 아닌 나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그게 알곡의 책임이다. 알곡에게는 더 많은 수고와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이전처럼 손쉽게 할 수 있는 싸움은 더 이상 없다. 이제는 나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의 모든 것을 드려야만 할 수 있는 그런 싸움이다. 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관도 그만큼 더 중요해졌다. 나를 드리지 않고 기독교 복음을 지켜내겠다 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을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키는 죄악임을 기억해야 한다.

   시급하게 갖추어야 할 것은 거룩함이다. 복음 아닌 것을 품어온 잘못부터 회개하고 그 모든 우상을 척결해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잘 먹고 잘 살자는 번영복음도 그 가운데 하나고 이제는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버린 목사들의 성범죄도 문제다. 동성애 문제와 관련해 교회가 받는 공격의 하나는 목사들은 온갖 간음죄도 짓고 요즘 미투 운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추행, 성폭행 등 성범죄를 많이 저지르면서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범죄가 아닌 동성애는 왜 그토록 반대하느냐 하는 지적이다. 성경이 금하는 것이기에 반대하는데 세상의 그런 항의를 들으면 우리가 과연 세상을 정죄할 자격이 있는가 의문이 든다. 아일랜드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다고 죄를 죄가 아니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우리가 잘하는 수밖에 없다. (추가: 장희종 목사님의 설교 말씀대로 지금 세상이 교회를 꾸짖고 있다.) 교회가 먼저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 성과 관련된 죄악이든, 돈과 관련된 죄악이든 권력 남용이나 거짓을 일삼는 죄악이든 교회는 어떤 형태의 더러움도 내버리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한다.

   자신을 드리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교회의 당회에 속한 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부탁이 하나 있다. 이제 그만 싸우자는 것이다. 30년 만에 조국에 와 보니 교회마다 크고 작은 갈등이 있다. 목사와 장로가 싸우거나, 장로끼리 싸우거나, 당회와 교인들이 힘겨루기를 한다. 평안한 교회가 드물다. 노회에 가면 또 노회에도 싸움이 있고 총회 차원의 싸움도 있다. 싸울 일이 뭐가 그리 많은가? 그런 싸움 이긴다고 주님이 좋아하시겠나? 이래 갖고서는 우리 시대에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싸움은 시작도 못 한다. 우리가 그렇게 내부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이 마귀는 제 세력을 넓히며 우리 자녀들과 심지어 우리의 마음까지 장악하려 든다. 세상은 지금 자신들의 지혜를 최대한 동원해 진리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거짓에게 진리라는 이름까지 부여하고 있는데 우리는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그 값진 지혜를 사람들에게 전하기는커녕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하고 있다.

   결국 답은 말씀과 기도다. 강의가 설교로 바뀌었다. 말씀과 기도를 답으로 준다고 현실과 멀어지라는 게 아니다. 우리의 경건의 능력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한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또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겪는 일이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한다. 말씀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에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린다. 말씀에서 지혜를 찾고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한다. 너무나 변수도 많고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당황한 가운데 넋을 잃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래서 기도로 주께 매달리고 기도를 통해 주님의 도우심을 얻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포기한 것 가운데 하나가 꿈이다. 희망이다. 어떻게 보면 잘됐다. 근세에는 사람이 잘난 줄 알고 엉뚱한 꿈을 많이 꾸었다. 그게 엉터리로 판명된 지금은 진짜 희망을 보여 줄 절호의 기회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시대를 바로 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활짝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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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병훈 2018.06.21 11:58
    매우 유익한 통찰과 숙고가 담긴 강의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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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헌법개정초안 예배지침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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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강령의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
지역교회의 적정 규모(規模 size)는?